현대시 옛시방

김삿갓 / 14. 探花狂蝶半夜行(심야광접반야행)

모링가연구가 2008. 10. 12. 07:09

김삿갓 / 14. 探花狂蝶半夜行(심야광접반야행)

 




    14. 探花狂蝶半夜行(심야광접반야행) 김삿갓 누각에서 홀로 달을 보고 있는 처녀는 다름 아닌 서당 집 후원초당에 숨어서 글만 읽고 있다는 紅蓮(홍련)이라던 바로 그 규수였다. 김삿갓은 설레는 가슴을 억누르고 말을 걸어 보았지만 대답 없이 달만 바라보고 있는데 달빛 어린 그 눈이 유난히도 아름다워 보였다. 樓上相逢視目明(루상상봉시목명) 다락 위에서 만나 보니 눈이 아름다운데 有情無語似無情(유정무어사무정) 정이 있어도 말이 없으니 정이 없는 것만 같도다. 김삿갓은 느낌을 그대로 즉흥시로 읊으면서 규수가 초당에서 글을 읽는다지만 漢詩(한시)를 알아들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규수는 대번에 알아듣고 즉석에서 화답을 하지 않는가. 花無一語多情蜜(화무일어다정밀) 꽃은 말이 없어도 꿀을 많이 가지고 있는 법 月不踰墻問深房(월불유장문심방) 달은 담장을 넘지 않고도 깊은 방에 찾아 든다오. 즉흥시로 화답을 한 규수는 말없이 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깜짝 놀란 김삿갓은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저 장난삼아 읊은 시였는데 바로 화답하는 것도 놀랍지만 그의 시는 韻響(운향)조차도 정확하지 않은가. 그런데 글재주는 그렇다 치고 “달은 담장을 넘지 않고도 깊은 방에 찾아 든다.” 는 말은 또 무엇인가. 생면부지 외방남자에게 노골적으로 유혹해 오는 처녀라면 이미 처녀는 아닐 것이고, 그렇게까지 손을 내미는데 모른 체 한다면 이는 장부의 처사가 아닐 것이다. 探花狂蝶半夜行(탐화광접반야행) 꽃을 탐하는 미친 나비 한밤에 찾아드니 百花深處摠無情(백화심처총무정) 깊은 방에 숨은 꽃은 대답이 없네. 欲探紅蓮南浦去(욕탐홍련남포거) 붉은 연꽃 따러 남포에 갔더니 洞庭秋波小舟驚(동정추파소주경) 동정호 가을 물결에 조각배 나부끼네. 체면 불고하고 후원으로 스며든 김삿갓은 무작정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홍련은 잠시 당황한 빛을 보이다가 이내 진정하고 “선생님은 시인 김삿갓이시지요” 하고 묻는다. 또 한 번 놀란 김삿갓이 어떻게 나를 알아보느냐고 하자 요즘 삿갓 쓴 방랑시인이 다닌다는 말과 그 시를 접하고 흠모하여 마지않았는데 오늘 선생의 시를 듣고 바로 알았노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오랜만에 여체를 가까이 하게 된 김삿갓은 飢鷹抱雉(기응포치)라는 말처럼 굶주린 매가 꿩을 덮치듯
    폭풍우를 몰아친 후에 제정신으로 돌아와 생각해 보니 그 濃艶(농염)한 무르익음으로 보아 아무래도 홍련은 숫처녀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짓궂게도 이렇게 한마디 비아냥거려 보았다. 毛深內闊(모심내활) 털이 깊고 속이 넓은 걸 보니 必過他人(필과타인) 필시 다른 사람이 지나갔나 보구나. 당치 않은 수작이요 주책없는 타박이었다. 공짜로 외도하는 주제에 처녀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단 말인가. 홍련은 勃然(발연)히 노여워하면서 즉석에서 시로써 김삿갓을 호되게 나물하였다. 溪邊楊柳不雨長(계변양유불우장) 시냇가 버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절로 자라고 後園黃栗無蜂坼(후원황율무봉탁) 뒷동산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절로 터진다오. 기막힌 반격에 김삿갓은 손을 바짝 들었다. 정중히 사과하고 다음날 아침 떠나면서 다시 용서를 비는 마음에서 다음과 같은 시 한수를 남겼다. 昨夜狂蝶花裡宿(작야광접화리숙) 어젯밤에 미친 나비 꽃밭에서 잤건만 今朝忽飛向誰怨(금조홀비향수원) 오늘 아침 훌쩍 떠남을 누구에게 원망하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