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천기생 김부용의 시와 사 랑
나는 오래 전에 즐겨하던 유적답사의 일환으로 성천기생 김부용(金芙蓉; 1813~1848? ) 의 무덤을 찾은 일이 있었다. 송도기생 황진이, 부안기생 이매창과 더불어 우리나라 삼대시기(三大詩妓)로 일컬어지던 시인이요 당시의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문집 ‘운초집’을 남긴 조선후기 순조 때의 여류문인이다. 이름이 부용이요 호가 운초(雲楚)였다.
그의 무덤은 천안에서 공주 쪽으로 30km쯤 내려가면 광덕산 자락(천안시 광덕면 광덕리)에 신라 흥덕왕 때(832) 창건되었다는 유서 깊은 절 광덕사(廣德寺)가 있는데 그 절 오른 편 높은 언덕 위에 있다. 평안도 성천기생 김부용이 여기에 묻힌 데는 방년 19세에 이 고장출신인 77세의 노대감 김이양(金履陽; 1755~1845)과 만난 기이한 인연 때문이었다.
그는 성천(成川)에서 청빈한 선비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며 시재(詩才)를 떨쳤으나 불행하게도 10세 전후에 부모를 모두 여의고 천애고아가 되어 어쩔 수 없이 퇴기의 수양딸이 되면서 기적에 올랐고, 타고난 미모와 천부적인 재능은 열여섯 살에 벌서 가무음률은 물론, 시문에까지 능한 성천의 명기(名妓)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기보다 싫은 것은 한 해가 멀다하고 갈려 오는 신임사또의 수청을 들어야 하는 일이었다. 부임하는 사또마다 그 많은 기생들을 다 젖혀두고 오직 부용만을 찾는데다가 양모는 맞장구를 쳐서 재물을 한 목 챙기려고만 하고 있으니 속이 타고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한숨이 절로 나와 바람이나 쏘이려고 밖으로 나왔다. 근처에는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는 신성강(新成江)이 있고 강가에는 높이 솟은 산봉우리 위에 강선대(降仙臺)가 있으며 그 밑으로는 산과 물, 달과 바람이 좋다하여 사절정(四絶亭)이라고 이름 했다는 정자가 있어서 이 일대는 관서의 명소였다. 사절정에서 부용은 풍류를 즐긴다며 호걸로 자처하는 속된 선비 하나를 만난다. 그는 부용의 시재를 시험하려는 듯 사절정을 두고 시를 지어보라고 보챈다. 부용은 하도 같잖아서 못 이기는 척 일필휘지했다.
四絶亭
亭名四絶却然疑 정자 이름 어이하여 사절이던고
四絶非宜五絶宜 사절보다 오절이 마땅할 것을
山風水月相隨處 산과 바람 물과 달 어울린데다
更有佳人絶世奇 절세가인 더했으니 오절이라네
황진이가 松都三絶이라 했는데 낸들 成川五絶이 못될쏘냐? 하고 풋내기 한량 앞에 한번 뽐내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선비는 기가 죽었는지 시를 화답할 생각은 아니하고 허튼 수작을 늘어놓으면서 노골적으로 야욕을 드러내어 다음과 같은 글을 쓰는 것이 아닌가.
平生一片心 평생 나의 일편단심은
欲渡銀河水 은하수를 건너고 싶을 뿐이네
지가 무슨 견우(牽牛)라고 감히 직녀(織女)를 만나려고 은하수를 건너고 싶어? 화가 난 부용은 붓을 뺏어 한 줄 휘갈겨 놓고 사절정을 내려왔다.
銀河天上水 은하수는 하늘에 있는 물인데
世人豈能渡 속세의 인간이 어찌 건널 수 있으랴.
이렇게 속된 선비들을 골려주는 것으로 화풀이를 대신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신관사또가 부임한다고 온 읍내가 어수선하였다. 또 다시 그 지겨운 수청 들라는 기별이 오겠구나 하고 속을 태우고 있는데 열흘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더니 마침내 부용당으로 나오라는 기별이 왔다. 부용당은 관아의 연못가에 있는 아름다운 정자였다.
수청을 들라면 어쩌나하고 가슴조이는 부용에게 신관사또 유관준(劉寬埈)은 뜻 밖에도 김이양대감을 아느냐고 묻는다. (대감이란 원래 정2품 이상의 관직에 오른 이를 일컫는 호칭이었으나 종2품 평양감사직에 있는 김이양을 대감으로 호칭하는 것은 정2품 판서를 이미 역임한 후이기 때문이다.) 명성은 익히 들었지만 뵈온 적은 없고 대감님의 시는 많이 읽었노라고 대답하니 대감께서도 네 시를 좋아하시는가 보다면서 두루마리 편지 한 장을 내민다.
편지는 평양감사로 있는 김이양대감이 그의 제자이면서 자기 관하로 부임해 온 성천부사 유관준을 반기고 축하하는 편지였는데 말미에 그곳에 시재가 뛰어난 동기가 있다고 들었다면서 잘 돌보아주라는 당부와 함께 그 동기가 지은 시라는 오언시(五言詩) 한 수가 적혀 있었다.
芙蓉堂聽雨 (부용당에서 비 소리를 듣다)
明珠一千斛 옥구슬 일천 말을
遞量琉璃盤 유리 쟁반에 쏟는구나.
箇箇團圓樣 알알이 동골 동골
水仙九轉丹 신선의 환약이런가.
언제 지었는지 잘 기억도 안 나지만 자기가 지은 것이 분명한 오언시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작년 여름 구관사또가 서울에서 오신 손님을 이곳에서 접대했었는데 마침 소낙비가 내려 못에 가득한 연잎을 때리는 소리가 한결 운치를 더하자 좌중의 시제(詩題)가 ‘부용당청우’가 되었고 그 때 자리를 같이 했던 자기도 마지못해 한 수 읊었던 바로 그 시이다.
이것을 김이양대감께서 어떻게 아셨으며, 생면부지의 천하기 짝이 없는 어린 기생을 신관사또께 잘 돌보아 주라고 당부까지 하셨단 말인가. 생전처음 사람대접을 받아보는 감격에 부용은 그만 자기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솟았다.
그때 왔던 서울손님도 김이양대감의 제자였는데 어린 부용의 시재에 놀라고 기특히 여기어 스승에게 고했고 스승은 이를 잊지 않고 있었는데 또 다른 제자가 그곳 성천으로 부임해 오자 문학소녀의 처지를 애석히 여겨서 기억을 더듬어 이런 편지를 썼던가 보다. 이후 부용은 수청 들 걱정은 말끔히 사라지고 신관사또의 시우(詩友)가 되어 가끔 부용당으로, 강선대로 불려나갔다.
이날도 사또의 부름을 받고 부용당에 나아가 시를 짓게 되었다. 좀 전에 부용정 둑길을 걸어오는데 선비들이 연꽃이 고우냐. 부용이 고우냐하다가 연꽃이 곱다고 하면서도 연꽃은 보지 않고 자기만 쳐다보던 것을 상기하면서 은근히 자기를 과시를 해보고 싶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勝妾容 (첩의 얼굴보다 고음)
芙蓉花發滿池紅 연꽃이 곱게 피어 못 가득히 붉고나
人道芙蓉勝妾容 사람들이 연꽃 보고 나보다 곱다하네
今日遇從堤上過 오늘 우연이 둑 위를 거니는데
如何人不看芙蓉 어찌하여 사람들은 꽃을 안보고 나만 보는가.
좌중이 모두 박장대소를 한다. 얼굴도 시도 아름답지만 그 발상이 더욱 귀엽지 아니한가. 유관준사또가 흔연히 일어나 오늘의 잔치이름은 ‘승첩용연’으로 한다고 선포하고 연회장소를 풍치 좋은 강선대로 옮겼다. 술잔이 돌아가며 춤과 노래가 무르익자 사또가 자작시 한 수를 읊는다. 과연 선비의 놀음이다. 무희를 칭찬해도 격이 다르지 아니한가. 요즘 얼짱이니 몸짱이니 하는 천박한 칭찬을 듣고 좋아하는 여인들은 다음 시를 한번 쯤 음미해 볼 일이다.
勝妾容宴 성천부사 劉寬埈
成都美妓玉羅裳 성천의 예쁜 기생 아리따운 비단치마
幅幅春風步步香 폭폭이 춘풍이요 거름마다 향기로다
黃鶴金獅迎相舞 황학무 금사무 어울려 돌아가니
降仙樓上降仙娘 강선루 위에는 선녀가 하강한 듯
이렇게 얼마가 지난 어느 날 부용에게는 성천부사가 직속상관인 평양감사 김이양대감에게 인사를 가려는데 같이 가자는 기별이 날아들었다. 부용으로서는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었다. 평소부터 존경해 마지않던 당대의 이름 높은 시인이요 지체 높으신 대감이고, 온 세상이 모두 한갓 노류장화로는 여기는 일면식도 없는 자기를, 철부지가 지은 시까지 기억하면서 사또에게 신상을 부탁해 주신 어른이 아니시던가.
평양에 도착한 성천부사와 김부용은 평양감사 김이양대감의 환대를 받았다. 77세에 홍안백발의 노익장을 과시하는 노대감은 학 같이 고고한 선비요 신선 같이 인자한 할아버지였다. 부용을 기생으로 대하지 않고 손녀처럼 귀여워하면서 한 사람의 시인으로 대해 주는 평양감사와 성천부사를 따라 대동강과 능라도, 부벽루, 연광정, 모란봉, 을밀대을 두루 돌면서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즐기던 꿈같은 며칠이 지났다.
성천으로 돌아가야 할 날이 박두하자 부용에게는 다시 태산 같은 걱정이 몰려온다. 유관준사또 같은 어진 어른이 언제까지나 성천에만 머물러 계실 리 만무하고, 그러면 그놈의 수청을 또다시 어떻게 들어야한단 말인가. 그래서 부용은 성천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서 김이양대감을 모시게 해달라고 유관준사또에게 간청을 했다.
유사또 역시 그럴 요량으로 부용을 데리고 왔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던 차에 그 말을 듣고 기꺼운 마음으로 스승에게 그 뜻을 아뢰었고 김대감도 흔쾌히 받아들여 곁에서 먹이나 갈고 잔심부름을 하면서 시중을 들도록 하였다. 따로 방을 마련하여주고 밤이 들면 ‘이제 그만 네 방으로 가 자거라.’ 하고 명하는 것이었다. 처음 몇 달은 대감의 그러한 배려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러 달이 지나면서 할아버지의 이부자리를 펴놓고 물러날 제마다 외로이 혼자 남는 그의 모습이 애처롭고, 자기 또한 그 곁을 떠나 칠흑 같은 빈방을 홀로 찾아드는 것이 그렇게 쓸쓸하고 외로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달빛 교교한 어느 날 조촐한 술상을 올리고 늦도록 거문고를 타면서 오늘은 돌아가지 않고 대감을 모시겠다고 앙탈을 부렸다.
술기운이 거나한 노대감은 너는 노랑유부라는 시를 아느냐고 묻는다. 부용은 “성수패설에 나오는 노랑유부라는 시라면 일직이 접해 본바 있습니다.”라고 아뢰고 낭랑한 목소리로 서슴없이 읊조린다.
老郞幼婦 醒睡稗說
二八佳人八九郞 열여섯 아리따운 신부에 일흔둘 신랑
蕭蕭白髮對紅粧 호호백발과 붉은 단장 마주했네.
忽然一夜春風起 홀연히 한 밤에 봄바람 일어나니
吹送梨花壓海棠 하얀 배꽃 날아와 붉은 해당화를 누르네
노대감은 허공을 보고 허탈하게 웃으며 “나는 팔구랑보다도 다섯 살이나 더 많으니라.” 한다. 이에 부용은 “소첩도 이팔가인보다 세 살이 많사옵니다.” 하면서 다시 “붉은 꽃이나 흰 꽃이나 봄을 맞아 새롭게 피는 꽃은 다 같은 꽃이옵니다.”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해서 77세의 노랑과 19세의 유부는 드디어 원앙금침에 들었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어색한 분위기라도 깨려는 듯, 대감은 도연명의 사시(四時)라는 시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너는 이미 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 봄물이 못에 가득하다)이로구나.”하고 조용히 속삭인다. 이에 부용은 그 대구를 인용하여 “대감께서도 하운다기봉(夏雲多奇峰; 여름구름의 봉우리가 기묘하다)이옵니다.”하고 응수한다. 그래서 노랑유부는 싱그러운 봄을 새롭게 맞았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달콤한 신혼이 몇 달 지나지도 않아서 과만(瓜滿; 만기)이 되지도 않은 대감은 호조판서(戶曹判書)가 되어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대감에게는 영전이지만 부용에게는 앞이 캄캄한 날벼락이었다. 성천기생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평양기생으로 남자니 다음 감사의 수청을 들어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사려 깊은 노대감은 “늙은 사람이 남우세스럽게 작첩하여 올라갈 수는 없으니 좀 기다리고 있으면 사람을 보내어 데려가겠다.”면서 예방(禮房)관속을 불러 “부용은 나의 부실이 되었으니 기적에서 떨어버리도록 하라.”고 분부를 내린다. 이렇게 하여 김부용은 언감생심 꿈도 꾸어보지 못했던 기생의 신세를 면하고 판서대감의 소실이 되었다.
그런데 서울로 올라간 대감에게서는 두 달이 지나고 석 달이 되어도 사람을 보내기는커녕 소식조자 전하지 않는다. 애가 타는 부용은 대감을 그리는 애절한 시들을 쏟아낸다.
垂楊深處倚窓開 실버들 휘늘어진 창에 기대서니
小院無人長綠苔 임 없는 집에는 푸른 이끼만 짙구나.
簾外時聞風自起 주렴밖엔 봄바람이 절로 불어서
幾回錯誤故人來 임 오시나 속은 것이 몇 번이런고.
春風忽?蕩 봄바람은 화창하게 불어오는데
山日又黃昏 서산에는 또 하루해가 저무는구나.
亦如終不至 오늘도 임 소식은 끝내 없건만
猶自惜關門 그래도 아쉬워 문을 닫지 못하네.
애타게 그리움과 기다림에 지친 부용은 지루함을 달래면서 ‘탑시’ 형식의 시를 짓는다. 한 글자로부터 시작해서 각 구마다 한 자씩 더하여 마지막에는 16자까지 되어 탑 형태를 이루는 저 유명한 회문체의 ‘부용상사곡’이라는 시를 써 내려간다.
“이별하니 그립습니다. 길은 멀고 서신은 더딥니다. 생각은 거기에 있고 몸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시는 “연약한 아녀자가 슬픔을 머금고 황천객이 되어 외로운 혼이 달 아래에서 길이 울며 따르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하고 간절히 호소한다.
芙蓉相思曲 김부용 (塔詩) 別
思
路遠
信遲
念在彼
身留玆
羅巾有淚
紈扇無期
香閣鍾鳴夜
鍊亭月上時
倚孤枕驚殘夢
望歸雲?遠離
日待佳期愁屈指
晨開情札泣支?
容貌憔悴對鏡下淚
歌聲烏咽對人含悲
提銀刀斷弱腸非難事
?珠履送遠眸更多疑
昨不來今不來郎何無信
朝遠望夕遠望妾獨見欺
浿江成平陸後鞭馬騎來否
長林變大海初乘船欲渡之
別時多見時少世情無人可測
惡緣長好緣端天意有誰能知
雲雨巫山行人絶仙女之夢在某
月下鳳臺簫聲斷弄玉之情屬誰
欲忘難忘强登浮碧樓可惜紅顔老
不思自思頻倚牡丹峰每傷緣?衰
獨守空房淚縱如雨三生佳約焉有變
孤處深閨頭雖欲雪百年定心自不移
罷晝眠開紗窓迎花柳少年總是無情客
推玉枕挽香衣送歌舞同春莫非可憎兒
千里待人難待人難甚矣君子薄情如是耶
三時出門望出門望哀哉賤妾苦心果如何
惟願寬仁大丈夫決意渡江舊緣燭下欣相對
勿使軟弱兒女子含淚歸泉孤魂月中泣長隨
이별하니
그립습니다.
길은 멀고
편지는 더딥니다.
생각은 거기 있고
몸은 여기 있습니다.
비단수건은 눈물에 젖었건만
가까이 모실 날은 기약이 아득합니다.
향각(香閣)에서 종소리 들려오는 이 밤
연광정에 달이 솟아오르는 이 때
고침(孤枕)에 의지하여 잔몽(殘夢)에 놀라 깬 몸
고운(歸雲)을 바라보니 원이(遠離)가 슬프옵니다.
만나 뵈올 날을 날마다 수심으로 손꼽아 기다리며
새벽이면 정다운 글월 펴들고 턱을 괴어 우옵니다.
초췌해진 얼굴 거울을 대하니 눈물뿐이요
목소리도 흐느껴지니 사람을 기다리기 이다지도 어렵습니다.
은장도 들어 약한 창자 끊어버리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오나
비단신 끌며 먼 하늘 바라보니 마음에는 의심도 많이 떠오릅니다.
어제도 안 오시고 오늘도 안 오시니 낭군은 어찌 그리도 신용이 없으십니까
아침에도 멀리 바라보고 저녁에도 멀리 바라볼 뿐이니 소첩만 홀로 속고 있나 봅니다.
대동강이 평지가 된 뒤에 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타고 오시렵니까?
큰 숲이 바다로 변하거든 노를 저어 배를 타고 오시렵니까?
이별할 때는 많고 만날 때는 적으니 세상 인정을 누가 가히 추측할 수 있으며
악연(惡緣)은 길고 호연(好緣)은 짧으니 하늘의 뜻을 누가 능히 알 수 있겠습니까.
운우무산(雲雨巫山)에 행적이 끊겠으니 선녀의 꿈을 어느 여자와 더불어 즐기시며
월하봉대(月下鳳臺)에 퉁소 소리 끊겠으니 농옥(弄玉)의 정을 어느 계집과 나누고 계시나이까?
잊고자 해도 잊을 수 없어 억지로 부벽루에 오르니 아깝게도 홍안(紅顔)은 늙어만 가고,
생각지 말자해도 생각이 절로 나 몸을 모란봉에 의지하니 슬프게도 검은머리만 쇱니다.
홀로 공방(空房)에 누우니 눈물이 비 오듯 하나 삼생(三生)의 가약(佳約)이야 어찌 변할 수 있으며,
혼자 잠자리에 누었으나 검은 머리 파뿌리 된들 백년정심(百年定心)이야 어찌 바꿀 수 있으오리까.
낮잠을 깨어 사창(紗窓)을 열고 화류소년(花柳少年)을 맞아 보아도 모두가 정 없는 나그네일 뿐이요,
옥침(玉枕)을 밀치고 향의(香衣)를 이끌며 춤도 추어 보았으나 모두가 가증스러운 사내들뿐이옵니다.
천리에 사람 기다리기 어렵고, 사람 기다리기 이토록 어려우니 군자(君子)의 박정함이 어찌 이다지도 심하시나이까.
삼시(三時)에 문을 나가 멀리 바라보니 문을 나가 바라보는 애처로움, 천첩의 고심이 과연 어떠하겠나이까.
오직 바라옵건대 관인(寬仁)하신 대장부께서는 결심을 하고 강을 건너 구연(舊緣)의 초불 아래 혼연히 대해주셔서
연약한 아녀자가 슬픔을 머금고 황천객이 되어 외로운 혼이 달 아래에서 길이 울며 따르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를 서울로 보낸 것이 주효 하였음인가. 서울에서 사람과 함께 타고 갈 노새를 보내어 왔다. 막상 떠나려는데 그동안 부용을 흠모하면서도 전임감사가 소실이라고까지 언명했다는 바람에 감히 범접을 못하고 속을 태우던 신임감사가 대문까지 배웅하면서 아쉬움을 표하는 시구를 전한다.
魂逐行人去 나의 혼은 그대를 쫓아가고
身空獨依門 빈 몸만 문간에 기대섰네.
혼은 그리는 임을 쫓아가고 빈 육신만 남아 있노라는 시를 접한 부용은 웃음이 절로 나와 다음과 같이 가볍게 응수하고 채찍을 휘둘러 서울로 달렸다.
驢遲疑我重 나귀걸음 더디기에 내 몸이 무거워서인가 했더니
添載一人魂 남의 혼 하나를 더 싣고 있어서 그런가 보외다.
더딘 걸음 재촉하여 여러 날 만에 서울에 다다르니 말고삐를 잡은 하인은 대감의 본가가 있을 북촌을 그대로 지나쳐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남산 기슭의 한 초당으로 안내한다. 새롭게 단장한 아담한 별장에는 ‘녹천정(綠川亭)’이라는 현판까지 걸려 있어서 부용을 맞으려는 김이양대감의 따뜻한 배려가 짙게 배어나고 있었다.
그제서야 자기를 데려오는데 여러 달이 걸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때부터 노대감과 단란한 신접살림을 다시 시작한 소녀 김부용은 어엿한 김판서대감의 소실이 되어 주위 사람들로부터 ‘초당마마’로 불리고 있었다. 달콤한 세월이 덧없이 흘러 판서대감이 80을 넘었고,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려하자 임금 순조는 그에게 봉조하(奉朝賀)를 제수했다.
봉조하란 2품이상의 관직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고령으로 퇴임하는 노대신에게 특별이 내리는 벼슬로서 실무는 담당하지 않으나 종신토록 녹봉을 지급할 뿐 아니라 국가에 의식이 있을 때에는 조복을 입고 참여하는 영예로운 지위였다. 뿐만 아니라 대감의 맏손자 김현근이 순조의 딸 명온공주를 맞아 부마가 됨으로서 국가원로가 된 봉조하대감은 시우들을 녹천정으로 불러 부용과 더불어 시를 읊고 거문고를 들으며 한운야학으로 유유자적하는 한일월을 즐겼다.
그러나 노익장을 자랑하던 봉조하대감도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쇠잔해 가는 늙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느덧 7~8년이 흘러 대감의 춘추 85세가 되었건만 부용은 아직도 27세의 방년, 풍요로운 물질과 한가로운 풍류만으로 만족하기에는 너무도 젊은 아까운 청춘이었다. 그래서 부용은 어느 날 자기도 모르게 지필을 당기어 다음과 같은 낙서를 남겼다.
客子靑靑日遲遲 나그네의 청춘은 아직도 멀고멀었는데
主人白髮亂如絲 주인의 백발은 파뿌리처럼 어지럽구나.
그래도 대감이 살아 있을 때는 그를 찾아 녹천정으로 모여드는 시인묵객들을 접대하면서 시름을 달랬지만 세월은 그것마저 용납지 않는 듯, 91세를 일기로 노대감이 세상을 떠나자 땅이 꺼지는 듯,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던 부용은 다음과 같은 시로서 떠난 임을 위로하고 자기의 삶을 돌아본다.
風流氣槪湖山主 풍류와 기개는 호산의 주인이요
經術文章宰相材 경술과 문장은 재상의 재목이었네
十五年來今日淚 15년 정든 임 오늘의 눈물
峨洋一斷復誰裁 끊어진 우리 인연 누가 다시 이어 줄고.
都是非緣是夙緣 인연 아닌 인연을 맺어온 인연
旣緣何不?衰前 피치 못할 인연이면 젊어서나 만나지
夢猶說夢眞安在 꿈속에서 꿈을 꾸니 진실은 어디 있나
生亦無生死固然 살아도 산 게 아니요 진실로 죽은 것을
水樹月明舟泛泛 달 밝은 수정에 배는 둥둥 떠 있고
山房酒宿鳥綿綿 술 익은 산방에 새는 지저귀는데
誰知燕子樓中淚 누각에서 홀로 우는 남모르는 이 슬픔
?遍庭花作杜鵑 방울방울 뿌리는 눈물 두견화로 피어나리.
이로서 봉조하대감은 자기 고향인 충청도 천안의 광덕산 기슭에 장사지냈고, 김부용은 홀로 녹천정을 지키다가 몇 해 후에 세상을 뜨자 그가 생전에 소망했던 대로 대감 곁으로 가기는 했으나 당시의 법도 상 갈은 묘역에 묻히지는 못하고 같은 산자락이긴 하지만 좀 떨어진 언덕에 잠들었다.
그러나 150 여년이 지난 오늘날, 그토록 명예롭고 지체 높았던 봉조하대감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도 천기출신의 운초 김부용을 기리는 사람들은 많아서 그의 시비가 서 있는 자그마한 무덤을 찾는 사람들이 줄을 잊는다고 하니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문학의 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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