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도자기[高麗陶磁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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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제작된 도기(陶器)와 자기(磁器:또는 瓷器). | |||||||||||||||||||||
도기질은 연질도기와 경질도기로 구분된다. 연질도기는 약 800℃에서 불완전 번조(燔造)하여 기명(器皿)에 탄소를 침투시킨 침탄도기(侵炭陶器)로서 회색이나 회흑색을 띠며, 탄소의 작용으로 흡수성이 거의 없게 된 것이다. 연질의 침탄도기는 청동기시대 후기의 흑도(黑陶)를 시작으로 널리 제작되었으며 삼국시대부터는 시루[甑]를 포함한 조리용기(調理容器), 자배기 등의 허드레그릇, 흡수성이 없는 성질을 이용해 기와[蓋瓦] 등이 제작되었으며 고려시대를 거쳐 현대까지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경질도기는 약 1,100℃에서 환원(還元) 번조한 것으로 흡수성이 없으며 회청색이나 회흑색을 띠며 종래에는 회청색경질토기로 불렀다. 삼국시대에 완성된 경질도기는 항아리[缸]·병(甁)·발(鉢)·접시[皿] 등 다양한 생활용기들이 있으며 고려시대에도 일반백성의 생활용기로 널리 사용되었다. 삼국시대 후기에는 경질도기에 회유(灰釉)를 씌운 회유도기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고려시대에 회유도기의 기술이 발전되었다. 이러한 고화도(高火度) 회유경질도기 제작기술로의 발전은 자기질 요업의 첫 단계인 청자제작의 기술적 기반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고려시대의 자기질 요업은 청자·백자·흑자 등 다양하지만 고려의 도자공예를 대표하는 것은 청자이다. 청자는 제작기술, 장식의장과 조형성에 있어서 다른 종류의 도자기보다 뛰어날 뿐만 아니라 도자기 조형의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조선 전기까지 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후기부터 중국 월주요(越州窯) 청자를 받아들이면서 청자의 가치와 실용성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었다. 남북국시대 신라지역의 안압지, 황룡사지, 미륵사지, 부여 부소산 등에서 월주 요 청자와 형주요(邢州窯)·정요(定窯) 백자가 발견되고 있어서 청자·백자에 대한 인식의 폭이 확대되어 갔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에 전래된 중국자기의 기종(器種)들은 삼국시대의 것이 호(壺)·병이었던 것과는 달리 해무리[日暈文]굽(그릇의 굽을 깎아낸 모양이 마치 해무리 같은 굽. 중국에서는 玉璧底, 일본에서는 蛇目高臺라고 부름)을 한 완()과 대접이 주종을 이루었다. 중국에서 해무리굽이 성행한 시기는 8~9세기이며 10세기로 오면 일반적인 윤형(輪形)굽으로 바뀌며, 일본 회유도기에서도 10세기 이후 것에서는 해무리굽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나라 초기청자 요지(窯址)에서 출토되는 기종들 중 해무리굽 완의 존재는 한국 청자의 발생시기를 9세기로 추정하는 근거 자료가 될 수 있으며, 이러한 기술적 여건은 중국의 선진 자기질기술의 도입 결과로 보는 것이다. 특히 청자를 제작하는 기술 중 가마[窯]와 내화갑(耐火匣) 등의 기술은 기존의 통일신라시대 경질도기 제작기술과 관련지을 수 없는 새로운 것으로서 중국 월주요의 기술도입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청자 발생은 중국 도자문화의 적극적인 영향에 의한 것이었지만 통일신라 사회가 이룩했던 청자 자체생산의 욕구, 회유도기의 기술적 기반, 원료가 풍부한 자연적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일본이나 유럽의 경우 고급기술을 받아들일 여건, 즉 기술·원료 등이 마련되지 않아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8세기 늦은 17세기에, 유럽은 18세기에 비로소 자기질 요업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청자의 조형적 요소들이 모두 중국적인 것만은 아니다. 해무리굽 완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종(전접시·발·광구병·매병·항아리 등)들은 통일신라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던 금속그릇, 칠기, 경질도기나 회유도기의 형식을 계승한 것이었다. 우리 청자가 중국 도자문화의 강한 영향을 받으면서도 한국적 조형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전 시대의 공예전통을 계승하면서 뒤떨어진 기술적 요소들을 극복하며 발전적인 방향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발생기의 청자는 문양이 없는 소문청자(素紋靑磁)였으나 점차 장식의장 기법이 다양해졌다. 청자는 장식기법에 의해 분류되는데, 몸체를 깎아내 문양을 나타내는 음각청자(陰刻靑磁)·반양각청자(半陽刻靑磁), 도범청자(陶范靑磁)에서 찍어내는 형압양각청자(型押陽刻靑磁)·상형청자(象形靑磁)·투각청자(透刻靑磁), 산화철과 산화동(酸化銅) 안료로 문양을 그리거나 채색한 철화청자(鐵畵靑磁)·철채청자(鐵彩靑磁)와 동화·동채청자가 있다. 또 백토니(白土泥)와 자토니(土泥)로 문양을 그린 퇴화문청자(堆花紋靑磁)와 철채를 한 후 문양 부분을 긁어내고 백토니로 채워넣는 일종의 상감과 유사한 철채백퇴화문청자도 소량 제작되었다. 그러나 청자의 장식기법으로 대표적인 것은 상감으로서 음각기법과 퇴화문기법이 함께 사용된 응용기법이다. 청자의 장식기법은 음·양각의 각법(刻法)과 철화·퇴화의 화법(畵法)이 각각 발전하다가 12세기에 2가지 기법이 함께 조화를 이루는 상감기법으로 전환되어 조선 전기까지 계승되었다. 금속과 나전칠기에서 이미 보편화된 상감기법이 청자에 응용된 것은 고려가 이룩한 독창적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청자 발생 이후 9세기 후반경에는 백자의 생산도 시작되었다. 당시 백자는 기술과 장식의장, 조형적인 요소까지 청자와 유사했고 제작도 청자와 같은 요장(窯場)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태토(胎土)만 백색이지 유약은 같은 회청색을 띠는 청자 유약을 사용했다. 흑자(黑磁)는 다갈색이나 흑색으로 나타나는 철유(鐵釉)를 씌운 것으로 청자의 발생과 함께 적은 양이 생산되었다. 발생기의 흑자는 회유도기의 기술과 조형을 충실히 계승했지만 청자의 기술이 고급화되면서 청자의 태토 위에 흑유를 씌우는 방법으로 발전되어 조선시대까지 제작되었다. 그외에 현존하는 수는 적지만 백토·청자토·자토(土)를 적당히 배합해 태토의 색에 따라 무늬가 생기는 연리문자기(練理文磁器)와 통일신라의 녹유(綠釉:鉛釉)도기를 계승한 예도 남아 있다.
이상과 같이 고려시대에 제작된 도자기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기능적인 공예의 관점에서는 크게 3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경질도기로 대표되는 저장용(貯藏用) 기명으로 대옹(大甕)·항아리·조리용기 등이다. 실제 사용자는 하층계급이었으며, 기능면에서 효과적이었지만 자기질로의 질적 상승요인이 없는 종류이다. 둘째는 보편화되고 대량생산된 조질청자(粗質靑磁)로서 완·대접·접시·병 등 음식기명(飮食器皿)인데 대부분 장식이 없거나 철화·퇴화문 등으로 단순한 문양이 시문된 종류를 말한다. 셋째는 고급청자로 주로 의례용구(儀禮用具)나 문방구, 다기(茶器) 등 고려의 불교문화와 귀족생활문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조형이 뛰어남은 물론 정교한 장식의장과 고급기술에 의한 것을 말한다. 특히 이러한 고급청자 대해 1123년(인종 1) 송(宋)의 사신 서긍(徐兢)은 〈선화봉사고려도경 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 "고려인은 청자의 색을 비색(翡色)이라고 하며 상형청자의 조형은 중국과 달리 독창적이며 이러한 청자를 고려인들은 귀하게 여긴다"고 기술했다. 또 〈수중금 袖中錦〉에는 북송말 중국의 상류사회에서는 고려청자의 뛰어남을 동경하여 '천하제일'(天下第一)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최근 중국의 유적에서 고려청자가 출토되고 있는 경위를 추측하게 해준다.
崔健 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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