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회암사지(檜岩寺址)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에 있는 회암사지는 고려 충숙왕 15년(1328)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인도의 승려 지공이 처음 지었다는 회암사가 있던 자리이다. 조선 전기 이색이 지은『천보산회암사수조기』에 의하면, 고려 우왕 2년(1376) 지공의 제자 나옹이 “이곳에 절을 지으면 불법이 크게 번성한다”는 말을 믿고 절을 크게 짓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는 나옹의 제자이면서 자신의 스승인 무학대사를 이 절에 머무르게 하였고,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하기도 했다. 성종 때는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의 명에 따라 절을 크게 넓히는데 13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 후 명종 때 문정왕후의 도움으로 전국 제일의 사찰이 되었다가, 문정왕후가 죽은 뒤에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절이 불태워졌다. |
회암사지 가상 복원도
2007년 8월 27일에 찾았을 때는 발굴 공사가 한창이었다.
공사가 마무리 된 현재의 모습
발굴 공사 중이던 2007년 8월 27일 모습
공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된 현재의 모습
당간지주-4주였을 것이나 3주만 발견되었다. 간을 끼우는 간구나 간공은 시공되어 있지 않아 두 지주에 다른 고정장치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 짝만 남아있는 괘불지주
관솔 등을 태워 불을 밝히던 정료대(庭燎臺)
중앙이 주불전인 보광전(普光殿) 자리이다.
회암사지부도탑-상·중·하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윗받침돌과 둥근 탑신의 몸돌사이에는 별도의 돌로 3단의 받침을 두었다. 지붕돌은 경사가 급하고, 처마는 느린 U자형을 이룬다.
기단의 윗받침돌은 8부신장(八部神將)과 덩굴무늬로 장식하였다.
기단의 아래받침돌에는 구름에 휩싸인 말을 생동감 있게 조각하였다.
기단의 받침돌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둘렀다.
회암사지에서 500여 m 올라가면 천보산 자락에 새로 지은 회암사가 있다.
회암사지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 - 비문의 글은 이색이 짓고, 글씨는 권중화가 쓴 것으로, 나옹화상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1997년 보호각이 불에 타 비의 몸돌이 파손되어 원형을 본따 만든 비가 세워져 있다. 뒤에 불타지 않고 남아있는 비 받침돌인 귀부가 있다. |
무학대사비 - 높직한 4각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간결한 모습이다. 비문에는 대사의 일생이 적혀 있는데 특히 원나라에 들어가 지공선사와 나옹선사를 만나 그들의 제자가 된 일, 한양천도에 큰 역할을 한 일, 회암사에 두 스승의 묘탑을 세운 일 등이 잘 나타나 있다. 태종 10년(1410)에 왕명을 받들어, 변계량이 비문을 짓고 공부의 글씨로 하여 비문을 새겨두었다 하나, 순조 21년1821)에 파괴되었고, 순조 28년(1828)에 다시 비를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
회암사무학대사홍융탑(보물 제 388호)과 쌍사자석등(보물 제 389호) - 부도의 형태는 구름무늬를 조각한 8각의 바닥돌 위에 받침부분인 기단(基壇)이 놓이고 탑신(塔身)과 머리장식부분이 포개져 있는 모습이다. 쌍사자석등은 기본형이 4각인 형태로 삼국시대이래 고유의 8각 석등형태에서 벗어났다는 점이 주목된다. |
지공선사비문 - 지공선사는 인도 마갈제국에서 태어나 원나라 순제 때 고승으로 이름을 높였고, 충령왕 때 우리나라에 들어와 회암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지공선사 부도와 석등
나옹선사 부도 - 나옹선사는 고려말의 승려로 본명은 혜근이고 오대산 상두암에 머물렀으며, 공민왕에게 설법을 하였다고 한다. 회암사의 주지가 되어 절을 중창하는 작업을 하던 중 완공을 보지 못하고 고려 우왕 2년(1376)에 입적하였다고 한다. |
<출처;blog.chosun.com/mjkco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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