入京辭(입경사)
황현(黃玹)
十年重到漢陽城(십년중도한양성) 십 년 만에 서울에 다시 와 보니
唯有南山認舊靑(유유남산인구청) 남산만 예전처럼 푸를 뿐이네.
夾道琉璃洋燭上(협도유리양촉상) 길가의 유리창 전등불 위에
橫空鐵索電車鳴(횡공철삭전차명) 전깃줄 가로질러 전차 소리 요란하네.
梯船萬里皆新禮(제선만리개신례) 어딜 가나 모두가 새로운 제도요
屋纛千秋始大名(옥독천추시대명) 천추에 처음으로 황제라 일컬었네.
却笑杞人痴滿腹(각소기인치만복) 가소롭다, 기우(杞憂)로 가득 찬 이 몸
彼天安有驀然傾(피천안유맥연경) 이런 나라가 갑자기 어찌 망하랴.
요점 정리
지은이 : 황현
갈래 : 칠언율시
구성 : 선경 후정
주제 : 기울어져 가는 나라에 대한 걱정, 우국심
내용 연구
십 년 만에 서울에 다시 와 보니
남산만 예전처럼 푸를 뿐이네 :
[십 년 만에 서울에 올라 온 소감으로 변치 않은 것은 남산 뿐임.]
상전벽해(桑田碧海) :
뽕나무 밭이 변하여 푸른 바다가 된다는 뜻으로,
세상일이 덧없이 변천함이 심함을 비유하는 말
길가의 유리창 전등불 위에
전깃줄 가로질러 전차 소리 요란하네 :
[서울의 구체적 변화를 말하지만 화자의 거부감이 담겨 있음]
어딜 가나 모두가 새로운 제도요
천추[썩 오랜 세월. 먼 미래]에 처음으로 황제라 일컬었네 :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칭호를 사용함,
그러나 이는 일본의 외압이 작용한 것으로 일본에 휘둘리는 현실임을 말함].
가소롭다,
기우(杞憂 : 쓸데없는 군걱정을 함. 또는 그 걱정)로 가득 찬 이 몸
이런 나라 갑자기 어찌 망하랴.
[결국은 망할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겉으로는 설의적 표현이지만
내용상 반어적 표현을 사용해서 나라의 앞날에 대한 비관적 심정]
이해와 감상
작가가 낙향한 지 십 년 만에 다시 서울을 찾아
그 변화된 모습을 보고 느낀 감회를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전 8행으로
앞부분에서는
자연 경관이나 사물의 모습을 그리고
뒷부분에서는
화자의 정서를 나타내는 선경 후정의
시상 전개 방식을 취하고 있다.
선경 부분에서는
신식 문물로 가득 찬 서울의
낯선 모습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후정 부분에서는
변해버린 현실에 대한 거부감과
임금의 황제 즉위,
국호와 연호의 변화 등을 목도하고서
"이런 나라 갑자기 어찌 망하랴"라며
냉소적 어조로 나라의 앞날에 대한
비관적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심화 자료
黃玹(황현) : 1855(철종 6) 전남 광양~1910.
한말의 문장가· 역사가· 순국지사.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
아버지는 시묵(時默)이다.
황현 영정,<한국역대명인초상대감>에서
유교적 지식인으로 조선 말기와 한말의
사회상에 대한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시와 문장에도 뛰어났다.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자 자결로써 항거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학문에 대한 열성이 있었으며,
특히 시와 문장에 능통하여 17세 때
순천영(順天營)의 백일장에 응시하여 문명을 떨쳤다.
1875년(고종 12) 서울에 와서
이건창(李建昌)에게 시를 추천받아
당시의 문장가이며 명사인
강위(姜瑋)·김택영(金澤榮)·정만조(鄭萬朝) 등과
교유하게 되었다.
특히 이건창·김택영과는 그후
스승과 친구 사이로 평생 동안 교유하며 지냈다.
1883년 특설보거과(特設保擧科)에 응시하여
초시(初試)에서 장원으로 뽑혔으나
시관(試官) 한장석(韓章錫)이
그가 시골사람이라 하여 2등으로 내려놓자
회시(會試)·전시(殿試)를 보지 않고 귀향했다.
그뒤 구례군 만수동(萬壽洞)으로 옮겨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아버지의 뜻에 따라 1888년에 성균관 회시에 응시,
장원으로 뽑혀 성균관 생원이 되었다.
그러나 갑신정변 이후
민씨정권의 무능과 부패에 환멸을 느껴
관계진출을 완전히 단념하고 1890년에 다시 귀향했다.
이후 만수산에 구안실(苟安室)을 짓고,
3,000여 권의 서적에 파묻혀
두문불출하며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만 전념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사실상 국가의 주권이 상실되었다고 보고,
중국 화이난[淮南] 지방에 있던 김택영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 체결 소식을 듣자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가
9월 10일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자결했다.
황현의 학문과 사상은
기본적으로 유학에서 출발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전통적인 유학·주자학을 공부했지만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주자학에 만족하지 못하고
20세 이후 양명학과 실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사우(師友)로 교유한 이건창·김택영은
한말 양명학의 주류인
강화학파(江華學派)의 핵심인물들로서
지식이나 지략보다는 충성과 행동을 중시했으며
형식보다는 기절(氣節)을 강조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현실인식은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었는데,
특히 정약용(丁若鏞)의 학문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하면서
그의 재주와 실용(實用)을 중시하는 태도를 높이 평가했다.
황현의 이러한 사상적 변화는 1880년대 이후
조선사회의 변화에 따른 위기의식의 심화 속에서
개혁방향에 대한 고민과 모색을 보여준다.
특히 1894년의 갑오농민전쟁과
갑오개혁, 청일전쟁 등을 경험하면서
유교적인 입장에서 비판의식을 가지고
<매천야록 梅泉野錄>
<오하기문 梧下記聞> 등을 지어
조선왕조 쇠망의 원인을 확인하고
갑오농민전쟁의 원인·배경과 실상을 기록했다.
또한 <갑오평비책(甲午平匪策)>·
<언사소(言事疏)〉를 통하여
절의(節義)를 장려함으로써
유교적 인륜과 기강을 바로잡고
언로(言路)를 개방하여
유교적인 지성으로 국론을 이끌어가려고 했다.
그는 유자적(儒者的) 지배층적인 입장에서
갑오농민전쟁을 수습하고 정치를 개혁하려 했으며,
서양의 기술문명은 수용하되
유교적인 사상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했다.
저서로는
〈매천집〉·〈매천시집〉·〈매천야록〉·
〈오하기문〉·〈동비기략 東匪記略〉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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