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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의 서예가들

모링가연구가 2009. 4. 9. 05:07

(1) 중국의 서예가들
 
글씨를 예술로 승화시킨 중국의 서예가들
앞에서 중국 문자와 서체의 발전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발달된 중국의 문자와 서체는 다시 위대한 서예가들에 의하여 다시금 그 예술적 깊이와 향기를 더하게 되었다.
중국의 역사를 통하여 글씨의 발전에 발맞추어 글씨에 새로운 예술혼을 불어넣고 서체의 예술적 완성을 꾀하고자 노력한 위대한 서예가들은 수없이 많다. 이들은 모두 앞선 사람들이 남긴 글씨를 꾸준히 연구하고 연마한 다음 그 위에 자신들의 독창적인 서풍書風-스타일 만들어 썼다. 또한 서예의 새로운 표현 기법을 개발하고 글씨의 예술성을 풍부하게 하였다. 이들 위대한 서예가들에 의하여 서예가 어떻게 그 예술적 표현의 영역과 기법을 확장하고 심화하였는지를 살펴보자.
여기서는 무수히 많은 서예가들 중에서 각 시대를 대표적인 서예가로서 우리나라 서예계에 비교적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되는 서예가만을 몇 명 골라 다루었다. 즉 중국의 역사상 유명한 서예가들이 어떻게 우리나라의 서예계와 서예가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에 치중하여 살펴 보았다. 특히 내가 이 책에서 다룬 우리나라 현대의 서예가들에 미친 영향도 함께 살펴 보았다.
 
진晋나라의 왕희지王羲之 (321~379 혹은 303~361)
서성書聖(글씨의 성인)이라 불리울 정도로 역사상 가장 윤택한 기운과 고상하며 품위가 있고 짜임세 있는 글씨 아름답게 쓴 사람이다. 대표작으로 난정서蘭亭敍가 있다. 난정서는 천하제일의 행서로 여겨져 이후 모든 행서체의 전범典範(고전과 모범)이 되었다. 왕희지는 한대에 싹이 튼 해서··초의 실용서체에 운치韻致(고아高雅한 품격을 갖춘 멋)을 불어넣어 예술적인 서체로 승화시켰다. 즉 쓰고 읽히는 실용적인 글씨에 신운神韻(신비롭고 기품이 있는 운치)을 불어 넣은 서예가이다. 따라서 서예역사에 있어서 서체의 발전은 그에 이르러 완성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의 글씨는 중국인들이 숭상하는 온유돈후溫柔敦厚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후덕한 품격)한 중화미中和美와 중화미中華美의 표준으로 여겨져, 역대 중국의 황실이 그의 글씨를 애호하고 널리 수집하였다. 따라서 중국의 역사를 통하여 그의 스타일이 크게 성행했다.


동진東晉의 왕희지 이후의 서예가들 중에서 그의 영향을 안 받은 사람은 없다 하겠다. 전통필법을 잘 계승 발전시킨 그의 해서와 행서는 평정하면서도 안온하고 자형은 웅건하면서도 표일飄逸한 가운데 자유롭다. 왕희지는 순수한 전통필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스러운 가운데 변화무쌍한 필법을 조화스럽게 잘 구사하였다. 그는 아름다우면서도 굳센 필획을 잘 구사하여 운필의 극진한 묘를 살리고, 자획의 완전한 구성과 절묘한 공간의 배치를 이룬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후대에 있어 서예상의 새로운 모색과 변화가 추구될 때에는 늘 왕희지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재해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즉 중국의 역대 서예가들은 모두 왕희지가 도달하였던 글씨의 경지를 뛰어넘고자 노력하였다. 그의 글씨는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 이래 해서와 행서의 전범이 되어 널리 쓰였다.


<난정서蘭亭敍>
<도판-15: 필유천균 P124~125 >
 
당나라의 구양순歐陽詢 (557~641)
해서의 완성기인 당나라 초기를 대표하는 그의 글씨는 역사상 가장 자획字劃과 결구結構가 방정方正한 필체이다. 반듯하고 근엄謹嚴한 그의 글씨는 한자 한자를 쓰는 데 있어 잠시라도 정신적 해이와 이완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율법적律法的인 특색을 지녔다. 그도 왕희지의 글씨를 본받았으나 옛 비석의 방필方筆의 글씨를 연구하여 험하면서도 굳세며 빼어난 맛이 나는 정밀하고 견실한 글씨체를 완성하였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은 해서의 바르고 곧은 필력의 표준이 되는 독창적인 글씨로서, 자획의 구성과 짜임새가 완벽에 가까운 해서체이다. 그는 법法으로 글씨 썼으며, 해서의 필법을 완성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그의 해서체는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널리 유행하여 비문과 공문서 등의 서체로 많이 쓰였다. 추사 김정희도 그의 글씨의 정통성을 이어받고자 열심히 배워 쓰고 연구하여 발전시켰다.
나는 원곡 김기승 선생으로부터 처음 글씨를 배울 때, <구성궁예천명>의 법첩과 체본을 받아 썼다. 입문을 구양순의 해서로 한 까닭에 비교적 결구가 좋은 글씨를 평생 쓸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 당나라의 안진경顔眞卿(709~784)
 
그의 글씨는 당시까지 중국 황실을 중심으로 사랑을 받고 유행한 왕희지의 전아典雅귀족취향의 서체에 대한 일종의 반동이며 혁신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왕희지, 저수량 등 명가의 글씨를 배운 다음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의 장점에다 당시 민간에서 유행하고 있었던 서법을 더하여 융해시켰다. 그는 자신의 개성이 마음껏 드러나는 생기발랄하고 힘에 넘치는 새롭고 독자적인 서풍의 글씨를 썼다. 그의 필체와 서풍은 웅건하고 장중하며, 짜임새가 단정한 가운데 근엄, 소박하면서 졸박拙朴하다. 즉 왕희지 이래의 전아한 아름다움에 침착하면서도 웅건한 필력과 풍만하고 도량이 넓고 깊은 서체를 더하고 융합시켰다고 하겠다. 그의 남성적인 글씨는 웅건하면서도 장중하고 강하면서도 심후한 중국 민족의 강인한 정신과 기백을 가장 잘 반영한 것으로 평가된다.
 


<안진경화상>
 




<도판-17: 필유천균 P73>
 
그는 해서, 행서, 초서에 두루 뛰어났다. 해서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안근례비顔勤禮碑>와 <안씨가묘비顔氏家廟碑>에서 보인 그의 글씨는 충성스럽고 후덕厚德한 자신의 개성을 원숙하고 굳세며 힘있게 잘 표현하고 있다. 행초의 대표작인 <쟁좌위고爭座位稿> 아첨하는 신하를 문책하기 위하여 쓴 글로서, 작품 전체에 기세가 충만하고 활달하며, 힘이 넘쳐, 강직하면서도 질박하고 돈실한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천하제일天下第一의 행서로 여겨지는 왕희지의 <난정서>에 이어 천하제이天下第二의 행서로 일컬어지는 그의 <제질문고祭姪文稿>는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 때 장렬하게 전사한 그의 조카의 죽음을 위로하면서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일필휘지一筆揮之하여 쓴 제문이다. 그는 23행의 글을 단숨에 쓰면서 가슴에서 울어나오는 격앙된 감정을 그대로 붓끝에 옮겨 질풍노도疾風怒濤의 필획으로 단숨에 써내려갔다. 때문에 글씨는 지극히 기운생동氣韻生動하고 자연스러운 가운데 충절의 기품으로 넘친다.
안진경은 유명한 정치가로서 일생을 통하여 불의와 사악함에 투쟁으로 일관하다 끝내 난중에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후대의 사람들은 안진경의 강직하며 충의로 가득찬 마음에서 울어난 글씨를 숭상하였다.
송나라 시대의 명필 소동파蘇東坡는 안진경의 서예와 두보杜甫의 시, 그리고 오도현吳道玄의 그림을 최고의 모범이 된다고 평하였다. 그의 글씨는 후대의 명필 유공권柳公權·소동파· 황정견黃庭堅·미불·동기창董其昌· 하소기何紹基 등의 서예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부터 많이 보급되어 쓰였다. 석봉石峯 한호韓濩·조광진曺匡振· 김돈희金敦熙 등이 특히 안진경체에 능하였다. 그의 가문에서 만든 <안씨자양顔氏字樣>은 당나라 때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약 1000년 동안 중국의 과거장에서 정체正體의 글씨로 쓰였으며, 명나라의 만력연간 萬曆年間(1573∼1620)에 간행된 서책의 대부분이 안로공顔魯公으로 불린 그의 서체 노송체자魯宋體字로 쓰였을 정도로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나는 우리나라의 현대 서예가로 안진경체를 가장 잘 쓴 소지도인 강창원에게서 대학시절 <근례비>와 <가묘비>의 체본을 받아 공부하였는데, 아직도 이 체본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안진경 유중사첩劉中使帖>
<도판-18: 중국서법 P39>
 
당唐나라의 회소懷素(725~785)
 
중국 서예의 역사상 가장 초서를 활달하게 잘 썼던 승려 서예가이다. 불교적 수양의 경지를 잘 보여주는 그의 초서는 광초狂草(미친 사람의 초서)라 불릴 정도로 필획의 운필이 자유분방하고 걸림이 없다. 스피디한 운필로 글씨를 빨리쓰기 위하여 나온 초서는 회소의 분방하고 거침없는 글씨로 말미암아 독특한 예술적 경지와 향기를 더하게 되었다. 평소에 술을 좋아하여 광승狂僧(미친 중)으로까지 불리웠던 그는 명가들의 글씨와 간찰簡札(편지체의 글씨)들을 연구하고 쓴 끝에 호방하며서도 자연스럽고 유창한 자기만의 색채가 풍부한 글씨체를 이루었다. 그의 글씨는 자유분방한 필획의 형태를 보여 비록 붓은 멈추었으나 필의는 서로 연결되어 기운이 연이어 흐르며 낭만적인 정신으로 가득하였다. 그의 초서의 필획은 비교적 가늘지만 운필은 흐르는 듯하며, 결구는 특이하면서도 다양한 자태를 보인다. 자체는 크고 작은 필획이 서로 율동적으로 어울려 교차하는 가운데 법도가 고루 구비되어 있으며, 공간의 배치와 포국이 자연스럽다. 강물이 넘실거리고 물결치는 듯, 폭포가 쏟아지는 듯, 그의 감정과 기량을 잘 표현하여 보여주고 있다. 그의 글씨는 속세를 벗어난 탈속脫俗과 격식을 벗어난 탈격脫格의 무애無碍한 경지를 보이는 가운데서도 정통의 필법을 잘 유지하고 소화하여 보여주고 있다. 그는 빠른 붓놀림으로 기운생동하는 글씨를 일필휘지하여 개성을 마음껏 표현히야 쓴 대표적인 서예가이다. 그의 초서는 후대의 서예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나는 그의 글씨에는 현대의 추상예술의 기법과 액션페이팅의 경지와도 일맥상통하는 요소들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자서첩自敍帖>
<도판-19: 중국서법 P41>
 
 
당나라의 유공권柳公權 (778~865)
 
 안진경의 글씨가 후덕하게 살이 많은 반면, 유공권의 글씨는 강골强骨의 뼈가 많다 하여 후대의 사람들이 안근유골顔筋柳骨이라고 일?는다. 두 서예의 서체의 차이와 개성을 읽을 수 있는 좋은 대비라 하겠다. 유공권은 안진경의 쌀찌고 웅장한 세로획의 특징에서 벗어나 가로획과 세로획을 모두 고르게 처리하면서 약간 살이 마른듯하나 힘찬 획을 즐겨 썼다. 또한 필획의 모서리부분에서 분명하게 전절轉折을 함으로써 절도節度있고 예리하며 상쾌한 감각이 드러나도록 운필하였다. 즉 유공권의 글씨는 북비와 구양순 서체의 장점인 방필方筆(모난 붓놀림)의 기법을 충실하게 흡수한 위에, 안진경체 글씨의 장점인 원필圓筆(둥근 붓놀림)의 기법을 고루 취하고 안배하여 자기나름의 서체를 이룬 결과이다. 힘차고 아름다우며 법에 따른 해서로 일가를 이룬 서예가이다. 대표작으로는 <현비탑비玄秘塔碑>와 <금강경金剛經> 등이 있다. 그의 글씨는 안진경보다도 단정한 독특한 서체인 까닭에 지금도 중국에서는 붓글씨를 처음 배우는 학동들의 교본으로 자주 이용된다. 목종穆宗으로부터 필법에 대한 질문을 받고, “용필用筆은 마음에 달려 있고 마음이 바르면 붓도 바르다”고 답한 필간지언筆諫之言이 널리 알려져 있다.
유공권 이후에도 해서에 능한 사람은 많이 있었지만 독자적으로 유파를 형성할 만한 서예가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해서는 당나라의 대가들인 구양순, 저수량, 우세남, 안진경과 유공권에 의해서 완성되어 그 발전이 끝났다고도 말할 수 있다.


  
<현비탑비玄秘塔碑>
<도판-20: The Emboded Image P10>
 
송宋나라의 소동파蘇東坡 (1036~1101)
동파 소식蘇軾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빼어난 문인으로서 시문과 서예, 그리고 그림에 모두에 능하여 삼절三絶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다. 왕희지王羲之의 정통적인 서법과 안진경顔眞卿의 혁신적 서법의 전통을 두루 이어 나름의 해서와 행서 속에 융합하여 개성이 넘치는 글씨를 썼다. 그의 글씨에는 정치가이자 문학가로서의 그의 개성이 그대로 나타나 침착하고 호방하며 맑고 곧다. 그는 서예에 있어서 글씨를 쓰는 사람의 정신과 기백의 표현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겼고, 글씨는 바로 쓰는 사람 전인격적인 됨됨이의 표현이라 주장하였다. 그의 글씨는 안진경과 같이 생동감이 있으며 문학적 운치가 뛰어나고, 법도를 벋어나지 않는 가운데 새로운 예술적 이상과 감각을 담았다. 호방함 속에 묘한 이치를 깃들인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옛사람의 것을 배웠으나 이에 억매이지 않고 이를 변화시켜 자기의 예술의 풍격을 새로 만들어 낸 개성주의 서예가이다. 그는 옛것을 충실히 배우는 가운데 새로운 창조성을 강조하는 법고창신 法古創新의 예술정신에 입각하여 글씨를 썼다. 이런 의미에서 필획에 쓰는 사람의 의意를 집어 넣어 쓴 최초의 서예가라고 하겠. 자신의 글씨 속에 의취意趣을 집어 넣어 획이 자유롭고 거친 듯하면서도, 굳세고 활달하다. 대표작으로 <한식시권寒食詩卷> 등이 있다.


<한식첩寒食帖>
<도판-21: 중국서법 P47>
소동파는 또한 그림을 그리는 데있어서도 기교를 쓰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림 속에서 한 점의 세속성도 보이지 않는 탈속脫俗한 높은 경지를 보였다. 그는 "시 속에 그림 있고 그림 속에 시 있가 있다-시중유화화중유시 詩中有畵畵中有詩"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의 이러한 예술사상과 기교에 대한 무관심 내지 대범함은 문인화를 크게 부흥시키는 힘이 되었다. 그의 예술론은 이후 중국 화론사에 면면이 이어져 하나의 커다란 흐름이 되었다.
 


<조맹부가 그린 소동파의 초상>
<도판-22: 필유천균 P78>
그의 법고창신의 정신과 예술사상은 시서화 삼절의 한 전형으로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이룬 삼절의 경지는 후대에 많은 서예가와 문인화가들이 다다르고자한 한 전형이자 모델이 되었다. 따라서 송대의 대표적인 문인이자 예술가인 소동파를 흠모하고 그가 좋아하던 취미를 따르며 그 인품마저 닮으려 하는 이른바 “동파벽東坡癖”이 크게 번졌다.
우리나라의 추사 김정희와 검여 유희강도 그의 글씨와 그림에 심취深醉되어 깊이 연구하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추사의 동파벽은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청나라의 옹방강翁方綱으로부터 이어졌다 하겠다. 젊은 시절의 추사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재사才士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소동파의 시서화 등 다방면에 걸친 학문과 취미에 매료되어 열심히 소동파를 따라 배우려 하였다. 소동파는 정치가로 성공을 못하고 좌절하였으나 시문과 서화, 평론과 수장收藏 및 감식鑑識 등에 두루 밝고 뛰어났다. 또한 불교의 선학禪學에도 높은 경지를 보였으며 차茶와 금琴, 음식에까지 두루 밝고 심취하였던 인물이다. 추사의 폭넓은 지식과 광범위한 취미도 동파벽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고 하겠다.
소동파가 정치적인 이유로 오랜 기간을 궁벽한 시골에 유배되어 보냈 듯이 추사 또한 척박한 제주도에서 고독한9년의 유배생활을 보냈다. 소동파가 불인선사佛印禪師를 벗으로 하여 불교에 깊이 기울었듯이, 추사도 초의선사草衣禪師와 교유하는 가운데 다도와 불교에 심취하였다. 추사의 동파벽은 그의 개성있는 시서화의 형성과 발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하겠다. 이런 까닭에 추사 김정희의 초상화 중에는 소동파를 닮게 그린 그림들이 적지 않다. 주학년朱鶴年이 그린 삿갓을 쓴 소동파의 모습과 안중식安中植이 그린 추사 김정희의 모습은 너무 흡사하여 구분이 어려울 정도이다.


  
<바른쪽 추사와 왼쪽 소동파의 닮은 모습을 한 초상화>
<도판-23: 간송문화 24 P10 > <도판-24: 간송문화 24 P11>
 
나는 10여전 송천 정하건 선생과 함께 대만의 타이페이시에 있는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으로 <사고전서특별전四庫全書特別展>과 <소동파미불 특별전>을 보러 간 일이 있다. 이때 소동파의 <한식첩寒食帖>과 미불의 <촉소첩 蜀素帖>을 비롯한 진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이때 나의 낮은 안목으로 느낀 솔직한 감상은 다음과 같다.
(1)         명필의 글씨는 작품의 크기와 글자의 크기에 있지 않고, 운필의 힘과 자유로움, 그리고 작품 전체를 통하여 흐르는 기세의 변화와 조화에 있다. 우리나라 서예계가 대자서와 대작 위주로 흐르는 것은 전시회 등을 통하여 역량을 과시하려는 경쟁적 서풍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2)         스스로 지어쓴 글을 스스로의 글씨로 쓸 때에만 내용에 담긴 흥취를 자연스러운 글씨로 나타낼 수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한문만으로 쓰여진 작품보다는 국한문 혼용을 통하여 현대의 감상자에게 다가가고, 서예가의 마음속의 뜻을 더 잘 나타내는 표현기법을 발전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3)         <사고전서>의 필사본에 쓰인 글씨보다는 우리나라의 금속활자본과 이조실록체의 글씨가 보다 아름답고 정교하며, 고서로서의 품격과 향기가 더 높다. 우리의 典籍文化에 대한 보다 많은 연구와 보급에 힘쓸 일이다.
 
원元나라의 조맹부趙孟? (1254~1322)
<도판-25: 필유천균 P84>
 조맹부는 원나라 시대의 대표적인 문학가이며 서화가이다. 그는 시서화 인印에 모두에 뛰어났다. 그는 왕희지를 글씨를 연구한 끝에 송설체松雪體라 불리는 아름다운 자태의 독창적인 글씨를 만들어 썼다. 그의 글씨는 법도가 근엄하고 고르고 우아한 운치가 있으며, 필법은 둥글고 윤택하면서 굳세며 흐름이 유창하다. 글씨에 태態 즉 아름다운 형태를 불어 넣은 서예가로서 왕희지의 전통적 중화미中和美를 충실이 계승하여 부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그림에도 뛰어나 서화동원書畵同源(글씨와 그림이 그 근원을 같이 한다)는 서화론을 펼치며 시서화 삼절의 경지를 이루었다. 그의 글씨는 고려말에 우리나라에 소개된 이래로 이조초 200년간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쓰인 서체가 되었다. 한석봉은 왕희지체와 송설체의 장점을 잘 살리어 석봉체石峯體를 완성한 뛰어난 서예가이다.
 

<적벽부赤壁賦>
<도판-26: 중국서법 P58>
 
명明나라의 동기창董其昌 (1555 ~1636)
명나라의 대표적 서예가인 동기창도 소통파와 같이 서예와 그림, 문예두루 뛰어나 시서화 삼절의 경지에 올랐다. 그는 안진경과 우세남에 이어 왕희지로 거슬러 올라가 옛 것을 집대성하여 익힌 다음 조맹부의 글씨까지 모두 섭렵하여 배웠다. 그는 서예야 말로 운필運筆을 통하여 한 개인의 진정한 개성과 인품, 나아가 사람됨의 본질을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가장 이상적인 예술로 여겼다. 그의 서예이론과 회화이론, 그리고 창작에 대한 생각과 방식은 진지하고 독창적이며 체계적이다. 그는 학구적인 서예가로서 단지 옛사람들이 쓴 서체의 겉모습을 맹목적으로 답습하기보다는 그 서체의 바탕이 되는 정신을 탐구하고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는 글씨와 그림을 통하여 서화의 가장 높은 이상 사심이 없는 인품과 성격 나아가 개성적인 표현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도판-27: 필유천균 P89>
동기창은 저서인 <화선실수필畵禪室隨筆>에서 남종화南宗畵를 북종화 北宗畵보다도 더 정통적인 화풍으로 여기는 “상남폄북론尙南貶北論”을 주창하였다. 그는 중국화 전통을 북종화北宗畵와 남종화南宗畵 커다란 두 흐름으로 나누고, 그 역사적 계보를 추적 두 갈래의 전통을 분석한 것으로 유명하다. 남종화는 직지인심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바로 사람의 마음을 깨?어 바로 보고 깨치어 성불한다)의 종지宗旨를 주장하는 남종선南宗禪과 마찬가지로 서화에 있어서도 예술가가 느끼고 표현하는 순간적이고 직관적인 체험과 순간적 표현을 강조한 반면, 북종화는 그러한 순간적 통찰력 보다점진적으로 터득되고 훈련된 기법에 기초하도록 가르쳤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런 주장은 후대 청나라 시대에 와서 서예의 남첩북비론 南帖北碑論(남쪽에서 발달된 종이와 비단에 쓴 필첩 위주의 서체와 비석글씨로 남긴 북쪽의 글씨에 관한 논의)이 나올 수 있는 모델이 되었다. 또한 서예와 함께 문인화의 지위를 전문적 화가나 화공畵工들이 그린 채색화보다 우위優位에 둠으로써 이후 문인화가 크게 발전할 수 있는 이론을 제공하였다.


<주자통서周子通書>
<도판-28: 중국서법 P72>
또한 그는 독만권서讀萬卷書 행만리로行萬里路(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의 길을 두루 여행하라)”고 설파하며서, 무릇 훌륭한 서화가가 되기 위하여는 문인적인 교양을 풍부하게 쌓고, 두루 여행을 하는 가운데 산수山水 속에서 시서화의 소재를 계속 찾아나서서 자연미의 무한한 충정을 풍부하게 관찰하고 체험해야 한다는 뜻을 남겼다. 그의 이런 말을 학창시절에 일찍 접한 나는 실로 만권의 책을 읽고 세계를 두루 여행하면서 내 삶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고자 노력하는 삶을 살고 있다. 추사 김정희의 학예일치學藝一致의 사상도 동기창의 독만권서의 사상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추사도 초기에는 동기창董其昌을 배우고, 후기에는 소동파와 당의 구양순의 서풍으로 거슬러 올라가 역대 명필을 연구한 다음 한나라 시대의 비석에까지 이르러 독특한 추사체를 완성할 수 있었다.
 
나는 뉴욕에 살 때인 2000년 미국의 Th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에서 발행한 <The Century of Tung Chi-chang 1555-1636>이란 465 쪽과 603쪽에 달하는 책 2권 한질을 구하였다. 1992년 미국의 세 도시에서 열린 <동기창 특별전>의 기념 도록이자 논문집인 이 방대한 저술에는 동기창의 시서화에 걸친 많은 작품들의 도판과 중국어 원문 및 영어번역본이 나란히 실려있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그의 예술의 세계가 얼마나 깊고 넓고, 아름다운가에 매료되었다. 또한 서양인들이 얼마나 깊게 중국의 서예와 회화에도 열심히 관심을 기울이고 연구하는 가를 알 수 있었다.
청淸나라의 정판교鄭板橋(1693~1795)
 정판교는 매우 개성이 강한 사람으로서 왕희지 이후 중국 황실의 사랑을 받아오던 전아하고 단정하며 유려한 서체의 글씨에서 벋어나 자신의 개성이 넘치는 육분반서六分半書라는 예서에 바탕을 둔 서체를 개발하였다. 정판교 이전의 서예가들은 대부분 하나의 작품속에서 하나의 특정 서체만으로 글씨를 썼다. 그러나 정판교는 여러 가지 서체를 혼합하여 조화롭게 씀으로써 현대적 조형미와 서예가의 개성표현의 새로운 방식과 양식의 세계를 열었다. 그는 또한 사대부뿐만이 아니라 민중의 사랑을 받은 글씨를 썼다. 그는 시서화에 모두 뛰어나 삼절의 경지에 이르렀다.
<도판-29: 필유천균 P97>
그가 글씨나 그림에서 찾은 것은 개성의 표현으로서의 괴怪(독창성)이다. 그는 당시 청나라의 양주에 살았던 개성을 추구한 양주팔괴揚州八怪(여덟 명 괴짜 서화가)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들이 추구한 개성을 바탕으로 한 괴는 고전으로 들어가서 새것을 찾아내는 입고출신入古出新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그의 혼합체적인 글씨는 다소 작위적인 기괴한 형태를 띠기는 하였으나 현대적 표현주의 서예의 길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된다. 내가 생각키로는 추사체와 같은 특이한 서체가 나올 수 있는 길을 개척한 것으로 여겨진다. 추사는 정판교의 문제점이라도 할 수 있는 의도적이며 작위적인 부분을 금석학의 연구를 통하여 얻은 고졸한 선과 획으로 극복하였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점이 추사 서예정신의 위대한 독창성과 완결성이며 정판교를 뛰어넘을 수 있었던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문인화와 글씨는 조선시대 말기의 우리나라의 문인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에 관하여는 이 책의 제2부와 제3부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행서 대련>
<도판-30: 정판교시서화정품집 P>
 
 
청나라의 오창석吳昌碩(1844~1927)
 
 

<도판-31: 필유천균 P31>
 
오장석은 중국의 청나라에서 크게 일어난 서예이론과 금석학을 깊이 연구한 끝에 그 결과를 모두 잘 소화하여 시서화 모두에 능하게 되었다. 한대의 비문을 깊이 연구하였고, 특히 석고문石鼓文을 연구하여 새롭게 해석한 운치있는 전서체의 글씨를 썼다. 전서·예서·해서·행서·초서의 다섯 가지 서체에 두루 정통하였다. 그의 글씨는 간결하면서도 힘이 있고 소박하면서도 중후하다. 해서는 굳세고 힘이 넘치며, 만년에는 전서·예서·광초狂草를 즐겨 썼다. 필획은 자연스럽고 운필은 호쾌하고 분방하다. 금석문金石文을 깊이 연구한 까닭에 전각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서예와 전각 모두에 있어 운필이 자연스럽고 힘차서 금석문의 참다운 맛을 느낄 수 있다. 그의 필묵은 노련하고 중후하며 웅혼하기까지 하다. 그의 문인화의 색조는 질박하고 온후하다. 그의 문인화에는 서예적인 운필의 맛과 멋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현대적 시서화 삼절의 경지를 보인 좋은 예이다. 그의 글씨와 전각, 문인화는 우리나라 개화기 문인화가들가 서예가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의 영운潁雲 김용진金容鎭 선생 같은 서화가분들이 많은 영향을 받았다.
 


<금문대련金文對聯>
<도판-32: 중국서법 P87>
 
위에서 다룬 중국 역대에 걸친 서예가들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스타일의 서풍과 모범을 후세의 사람들에게 보임으로써 서예 예술의 새로운 유파를 이루고 뒤를 이어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자연 그들이 쓴 서예작품들은 진귀한 보배가 되어 황실과 수집가, 박물관들의 손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위에 소개한 서예가 이외에도 중국의 역사를 통하여 수없이 많은 훌륭한 서예가들이 나왔다. 중국인들은 이들 옛 서예가들이 쓴 좋은 내용의 글들을 돌에 새기어 비를 만들거나, 목판에 새겨 걸었다. 글씨를 숭상하고 좋은 서예작품을 감상하기 좋아하는 중국인들은 역사상 훌륭한 작품들을 골라 모두 돌에 새기거나 비석으로 세운 다음 한 곳에 모아놓고 즐겼다. 이를 비림碑林(비석의 숲)이라고 한다. 유명한 비림은 중국의 옛 도읍인 뤄양洛陽과 시안西安, 공자가 태어난 취푸曲阜 등지에 있다. 나는 몇 년 전 산동의 칭따오靑島에서 최근에 새로 만든 비석공원을 방문한 일이 있다. 도교道敎의 성지聖地 중의 하나로 유명한 로산魯山 밑자락에 위치한 이 비석공원에는 회랑回廊 형태의 전통 건축물을 따라 옛 비석의 복제품을 세웠고, 벽면마다 가득 현대 중국의 유명 인사들과 서예가들의 작품을 새겨 붙였다. 중국인들은 오늘에도 이렇게 글씨를 숭상하며 서예를 최고의 전통예술로서 사랑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최근 비림이 만들어 졌다. 2002년 5월 한국비림원의 허유許由 이사장이 충청북도 보은군에 개관한 한국비림박물관에는 광개토왕비와 진흥왕순수비의 비문을 비롯, 안중근, 김정희, 김생, 신립, 남이장군, 왕희지, 안진경, 구양순 등 국내외 명필의 서체 200여 점이 돌에 새겨져 전시되어 있다. 여기에 전시된 작품들은 허 이사장이 4년여 동안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하여 한국과 중국의 주요 박물관과 기념관, 유적지 등을 찾아 다니며 직접 수집하거나 탁본한 것으로서,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과 관련된 각종 사료와 작품 등을 비석에 새겨 영구 보전함으로써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민족의 정신문화를 생생하게 가르칠 수 있으리라는 뜻에서 마련된 이색적인 박물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