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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임금과 왕실의 한글편지

모링가연구가 2009. 4. 10. 05:39

조선의 임금과 왕실의 한글편지


정조가 외숙모에게 보낸 편지

봉투 숙모님께

내용
가을바람에 기후(氣候) 평안(平安)하시온지, (숙모님의) 문안(問安) 알기를 바라옵니다. (숙모님을) 뵌 지가 오래되어 섭섭하고 그리웠는데, 어제 (숙모님께서 보내신) 편지를 보고 (나니) 든든하고 반갑사오며, 할아버님께서도 평안(平安)하시다고 하니 기쁘옵니다. 원손(元孫)

해설 정조가 원손(元孫) 시절 외숙모[홍봉한(洪鳳漢)의 부인]에게 보낸 문안 편지. 1750년대. 정조는 8세 때 세손(世孫)에 책봉되므로 이 편지는 그 이전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린 나이라서 글씨체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문안 편지의 형식에 맞추어 쓰려고 노력한 흔적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다.



선조가 정숙 옹주에게 보낸 편지

내용 (네가 쓴) 편지 보았다. (정안 옹주의 얼굴에) 돋은 것은, 그 방이 어둡고[너 역질 앓던 방] 날씨도 음(陰)하니 햇빛이 (그 방에) 돌아서 들면, 내가 (돋은 것을) 친히 보고 자세히 기별하마. 대강 약을 쓸 일이 있어도 의관과 의녀를 (그 방에) 들여 대령하게 하려 한다. 걱정 마라. 자연히 좋아지지 않겠느냐.
만력 31년(선조 36, 1603년) 계묘년 11월 19일 오전 10시경

해설 1603년(선조 36) 선조가 정숙 옹주에게 보낸 편지. 이 무렵 정숙 옹주의 동생인 정안 옹주는 마마(천연두)에 걸려 궁중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그 병세를 걱정하는 언니 정숙 옹주의 편지에 대한 선조의 답장이다.
혼인한 지 얼마 안 되는 어린 딸의 얼굴에 흉한 마마  자국이라도 남으면 어쩌나 염려하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마음과 다른 자식들을 안심시키려는 배려가 짧은 글속에 담겨 있다. 이때 정숙옹주 나이는 17세, 정안옹주의 나이는 14세였다. 그뒤 정안옹주는 병이 다 나아 정숙옹주보다 훨씬 더 장수 하였다고 한다.


 
숙종이 명성 왕후에게 보낸 편지

봉투 (手決) 명안공주방(明安公主房)

내용
밤사이 평안하시옵니까. (대궐을) 나가실 때 "내일 들어오시옵소서" 하였사온데, 해창위(海昌尉, 명안공주의 남편인 오태주(吳泰周))를 만나 떠나지 못하시는 것이옵니까. 아무리 섭섭하셔도 내일은 부디 들어오시옵소서.

해설
숙종이 어머니인 명성 왕후(현종비)에게 보낸 편지. 1680년경. 편지 봉투에 수신처가 '명안공주방'으로 되어 있는 것은 이 때 명성 왕후가 혼인한 지 얼마 안 된 셋째 딸 명안 공주 집에 다니러 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편지는 어머니가 누이동생 집에 가서 환궁 기일을 지키지 않자 숙종이 환궁을 재촉하는 내용이다.
 


효종이 장모에게 보낸 편지

봉투 답상장(答上狀)
        장정승(張政丞) 댁(宅) (手決)

내용
새해에 기운이나 평안하신지 궁금합니다. 사신(使臣) 행차가 (심양으로) 들어올 때 (장모님이) 쓰신 편지 보고 (장모님을) 친히 뵙는 듯, 아무렇다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청음(淸陰, 김상헌[1570~1652]의 호)은 저리 늙으신 분이 (심양에) 들어와 어렵게 지내시니 그런 (딱한) 일이 없사옵니다. 행차 바쁘고 하여 잠깐 적사옵니다. 신사(辛巳, 인조 19년, 1641년) 정월(正月) 초팔일 호(淏)

해설 1641년(인조 19) 효종이 봉림 대군 시절 청나라 심양(瀋陽)에 볼모로 가 있을 때 장모[장유(張維)의 부인]의 편지를 받고 쓴 답장. 외국에서 쓰인 한글 편지라는 점과 주격 조사 '가'가 사용된 점이 주목된다. 당시 23세의 젊은 왕자는, 함께 잡혀 와 있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고생에 대하여 염려하고 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다가 끌려 온 김상헌은 이 때 이미 72세의 나이였다. 편지 끝의 '호'는 효종의 이름인데, 후대에 와서 임금의 이름을 가리기 위해 휘지(諱紙)를 붙여 놓았다.



인선 왕후가 숙명 공주에게 보낸 편지 

내용 (네가 쓴) 편지 보고, 아무 탈 없이 있으니 기뻐하며, (너를) 보는 듯 반가워한다. 사연도 보고 못내 웃었다. 그만큼 하여 두면 아무리 쓰려고 한들 임자 없는 일에 뉘라서 애써 할 사람이 있겠느냐. 옷감도 지금까지 못 얻었으니 그것이 완성되기 어려울까 싶다. 너무 조르지나 마라. / 숙경(淑敬)이는 내일 나가게 되었다. 그것(=숙경)조차 마저 나가면 더욱 적막할까 싶으니 가지가지 마음을 진정치 못할까 싶다. 언제 너희나 들어올까, 눈이 감기도록 기다리고 있다.

숙경(淑敬) : 숙경공주(淑敬公主). 효종과 인선왕후 사이의 막내딸. 효종 10년(1659)에 원몽린(元夢麟)에게 하가(下嫁)하였음. 따라서 위 편지는 1659년 이후의 편지로 추정.<구체적으로는 효종 10년(1659년)~현종 12년(1671년) 사이>

해설 인선 왕후(효종비)가 둘째 딸 숙명 공주에게 보낸 편지. 17세기 중엽. 인선 왕후의 한글 편지는 70여 편이 현전할 만큼 특히 공주들과의 편지 왕래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문장 구성도 좋을 뿐 아니라 글씨체 또한 전형적인 궁체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 편지는 막내딸 숙경 공주가 혼인한 후, 궁에 들어왔다가 나가게 되었을 때의 서운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편지 사연 중간의 가로획(一字)은 화제가 바뀜을 표시한다.



흥선 대원군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

봉투 마누라(=부인)께 전함

내용
그사이 망극(罔極)한 일을 어찌 만리(萬里) 밖에서 눈앞의 짧은 편지로 말하오리까. 마누라(=부인)께서는 하늘이 도우셔서 (조선으로) 돌아가셨거니와 나야 어찌 살아서 돌아가기를 바라오리까. (떨어져 지낸) 날이 오래되니, 옥도(玉度)가 엄정하시고(?) 태평(泰平) 태평하시고, 상감과 자전(慈殿)의 안부 모두 태평하시고, 동궁마마 내외(內外) 편안히 지내기를 두 손 모아 빌고 또 비옵니다. 나는 다시 살아 돌아가지는 못하고 만리 밖 고혼(孤魂)이 되니, 우리 집안 대(代) 잇는 일이야 양전(兩殿, 임금과 왕비)에서 어련히 보아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나) 다시 뵙지도 못하고 (살아갈) 세상이 오래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으니 지필(紙筆, 종이와 붓)을 대하여 한심하옵니다. 내내 태평히 지내시기를 바라옵니다.

해설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 청나라에서 부인에게 보낸 편지. 임오군란(1882년 6월) 이후 잠시 정권을 장악했던 흥선 대원군은 다음 달인 7월 청나라에 납치되어 끌려가 4년 동안 연금되었다. 이 편지는 그해 10월에 보정부(保定府)에서 쓴 편지이다. 권좌에서 밀려난 자의 통한과 자포자기의 심정이 구구절절이 사무친다. 서화가로도 유명한 대원군답게 한글 글씨체 또한 필력이 넘쳐, 굵은 획과 가는 획의 조화가 한글의 조형미를 잘 드러내 준다.



순명효 황후(순종비)가 김상덕에게 보낸 편지

내용 작년에 소식 들은 후 궁금하여 매양 얘기하고 있었는데, 설 쇠기를 태평히 하셨는가 싶으니 기뻐하옵니다. 여기서는 (옛날) 지내던 생각이 지난 때에 미치면 이 몸이 없어지고자 하는 말씀을 한 붓으로 다하기 어렵사옵니다. 요사이는 상감께서 두루 평안하시고, 세자도 걸음걸이는 끝내 불편하시나 그 외는 모두 평안하시니 축하드리옵니다. 나는 신병(身病)이 성한 날 없사오며 (병세가) 내내 (잘 낫지 않고) 오래 끌어 대강만 적사옵니다. 정월(正月) 이십삼일

셩후: 성후(聖侯). 임금의 안위.
예후: 예후(睿候). 왕세자의 병환.

해설 1904년 1월 순명효 황후(순종비)가 황태자비 시절, 위관(韋觀) 김상덕(金商悳, 1852~1924)에게 보낸 편지. 김상덕은 세자(나중의 순종)의 스승이었는데, 순명효 황후가 의지하는 바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 편지는 안부와 황실의 근황, 그리고 자신의 신병을 토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꽃병 그림의 붉은 편지 봉투와 국화꽃이 인쇄된 화려한 시전지(詩箋紙)가 이채롭다. 궁체 흘림체의 세련된 글씨도 눈여겨볼 만하다. 순명효 황후는 병세가 더욱 깊어져 그해를 못 넘기고 33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