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대표적 여류시인 중에 규수시인으로는 허난설헌을 이야기하며
기녀시인으로는 황진이와 매창을 이야기한다.
이화우(梨花雨)흩 날 릴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애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리(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이것은 이매창이 한양에서 부안에 놀러왔던 선비와 눈이 맞아 죽을 때까지 몸과 마음을 바쳐 서로를 사랑했던 연인 유희경을 그리워하며 읊은 대표적인 작품으로 이때 일반인들은 상상하기조차 하지 못 할 28세나 차이가 나는 사랑이었다.
유화홍염 잠시춘(柳花紅艶暫時春)
달수난의 옥협빈(撻髓難醫玉頰嚬)
신여하심 고냉(神女下堪孤冷)
무산운우 하래빈(巫山雲雨下來頻)
버들꽃 붉은 몸매도 잠시동안 봄이라서/고운 얼굴에 주름지면 고치기 어렵다오/선녀인들 독수공방 어찌 참으리/무산에 운우지정 자주 내리세
멋드러진 이 글은 촌은(村隱) 유희경이 변산 3절로 꼽히는 부안의 명기 이 매창과 한창 깨가 쏟아지는 호시절에 진정한 사랑을 실어 지어준 노래다.
이매창은 변산의 절경인 채석강과 이 고장시인 신석정과 더불어 부안 3절로 자랑하는 대표적인 여류 시인이다 개성의 명기하면 황진이를 말하고 부안에 명기하면 이 매창을 말한다 이 매창은 기생으로서 문필가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인으로 조선 선조6년에 관아의 아전인 이탕종이라는 사람의 딸로 태어났는데 계유년(癸酉年)에 태어났다고 하여 계생(癸生)계량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나 기생이 되면서 아호를 섬초(蟾初)라 했다가 스스로 매창이라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매창이 성장하여 자태와 몸매가 남다르게 아름다운데다 ■시■를 잘 짓고 노래를 잘하자 소문을 듣던 고을의 태수 서진사(徐進士)라는 사람이 태수(太守)의 권력을 앞세워 매창의 정조를 빼앗은 다음 곁에 두고 희희낙락 거리다가 서울로 발령이 나자 마지못하여 매창도 서울로 함께 따라 갔으나 무엇이 여의치 않았는지 얼마 되지 않아 부안으로 다시 내려와 이때부터 기생으로 변신한다 .
매창이 황진이처럼 풍류를 잘하게 된 동기는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처럼 집안이 가난하여 아버지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훈장 노릇을 할 때 이곳 저곳 서당을 따라 다니면서 귀동냥으로 배웠다 한다.
사람이 죽으면 살은 물이 되고 뼈는 흙이 되며 성질은 불이 되고 의식은 바람이 되고 결국 남는 것은 인연과 가치뿐이라는데 도덕이 무엇이고 타락이 무엇인지 모든 죄악은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다 아무렴 동서고금을 통하여 색욕이라는 욕심은 욕심이라기보다 하나의 본능이라고 보아야 옳을 것 같다.
매창이 유희경과 헤어져 부안에서 시름할 때 당대의 풍운아 허균이 목주 목사직을 파직 당하고 조정에 대한 울분을 삭이며 부안에 내려온다 그때 부안의 명기 이 매창과 정신적인 사랑을 즐겼으나 함께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행적으로 보아 정말로 그랬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고 역사는 기록하지만 아무튼 허균은 이 매창과는 정신적인 사랑을 나누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이요 민중소설인 홍길동전을 집필하였다.
매창은 천대받는 기생의 신분이었지만 물질의 풍요보다 정신적 가치를 귀중하게 여긴 시인으로 언행이 조신하고 정결했으며 정절이 굳은 모범적인 여성이었으나 38세의 젊은 나이에 병들어 죽었는데 병석에 누워 있을 때도 허균이 몸조리 잘하라는 위안의 편지를 보내는 등 각별하게 보살펴 준 사람으로 후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널리알려져있는 인물은 아니나 황진이와 버금가는 여류시인임에는 틀림없다.
자료출처 : 네이버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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