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 탁(禹 倬) 한 손에 막대 자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白髮) 막대로 차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춘산(春山)에 눈 녹인 바람 건 듯 불고 간 데 없다. 적은 듯 빌어다가 머리 위에 불리고자 귀밑에 해 묵은 서리를 녹여볼까 하노라. 1263(원종 4)-1342(충혜왕 복위 3). 고려의 학자. 호는 역동(易東), 본관은 단양. 문과에 급제, 벼슬은 성균관 좨주(종3품)에 이르렀음. 경사와 역학에 통달했음. - 이조년(李兆年)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은 삼경(三更)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1269(원종 10)-1343(충혜왕 복위).고려의 문신. 호는 백화헌. 매운당. 본관 은 경산, 진사로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충혜왕 때 예문관 대제학(정2품)을 지냈음. 충혜왕의 음탕함을 간언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했음. 시문에 뛰어났음. - 최 영(崔 塋) 녹이상제(綠耳霜蹄) 살지게 먹여 시냇물에 씻겨 타고 용천 설악을 들게 갈아 둘러메고 장부의 위국 충절을 세워볼까 하노라. 1316(충숙왕 3)-1388(창왕 즉위). 고려의 명장. 본관은 창원. 팔도 도통사가 되어 명나라를 치고자 군사를 일으켰으나, 이성계의 회군으로 실패한 후 피살되었음. 벼슬은 문하시중(정승)에 이르렀음. - 정몽주의 모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白鷺)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창파(滄波)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이성계를 병문 가던 날, 80이 가까운 노모는 간밤의 꿈이 흉하다고 하면 서 문밖까지 따라나오며 이 노래를 불러 아들의 가는 것을 말렸다고 한다. - 이 색(李 穡) 백설(白雪)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梅花)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夕陽)에 홀로 서 있어 갈곳 몰라 하노라. 1328(충숙왕 15)- 1396(태조 5). 고려의 문신. 학자. 삼은(三隱)의 한 사람. 호 는 목은, 보관은 한산(韓山). 14세에 진사가 된 후,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했음. 그 후 여러 중직을 거쳐 판문하부사(종1품)에 승진, 이성계 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다가 유배 생활을 했음. 문하에 권근, 김종직, 변계량 등을 배출하여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했음. - 이방원(李芳遠)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萬壽山)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서 백년까지 누리리라. 1367(공민왕 16)-1422(세종 4). 조선 제 3대 왕인 태종의 이름.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우왕 때에 문과 급제, 조선 개국에 주동적 역할을 했음.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두 차례나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복 동생과 개국 공신들을 주살 했으나, 즉위 후 정치에 많은 업적을 남겼음. - 정몽주(鄭夢周)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白骨)이 진토(塵土)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1337(충숙왕 복위 6)-13929(공민왕 4). 고려의 문신. 학자. 삼은(三隱)의 한 사람. 호는 포은(圃隱), 본관은 영일(迎日). 문과에 장원 후 많은 벼슬을 거쳐 벽상삼한 삼중 대광(정1품), 문하시중 등을 역임.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로 추앙되고, 시문에 능하여 시조 '단심가'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하며, 서화에도 뛰어났음. 조선 태종 때 영의정에 추앙되었음. - 이존오(李存吾) 구름이 무심(無心)탄 말이 아마도 허랑(虛浪)하다 중천에 떠 있어 임의 다니면서 구태여 광명(光明)한 날 빛을 따라가며 덮나니. 1341(충혜왕 복위 2)-1371(공민왕 20). 고려의 문신. 호는 석탄(石灘). 본관 은 경주. 20세에 문과에 급제, 우정언(右正言)에 올랐을 때, 신돈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지방 관으로 좌천되었음. 후에 공주 석탄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울분으로 병이 나서 31세의 나 이로 죽었음. 대사성에 추증되었음. - 길 재(吉 再)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人傑)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 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1353(공민왕 2)-1419(세종 1)고려의 학자. 삼은(三隱)의 한 사람. 호는 야은 (冶隱). 금오산인(金烏山人), 본관은 평해(平海). 문과에 급제 후 성균관 박사. 문하 주서 등 의 벼슬을 지냈음. 조선 시대에는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 하여 고향 선산에 은거하면서 후 진 양성에 진력했음. 특히 김숙자(金叔滋)에게 성리학을 가르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로 그의 학통을 잇게 했음. - 정도전(鄭道傳) 선인교(仙人橋) 나린 물이 자하동(紫霞洞)에 흐르느니 반 천년 왕업이 물소리뿐이로다. 아이야, 고국흥망(古國 興亡)을 물어 무엇하리요. ?-1398(태조 7). 고려 조선의 문신. 학자. 호는 삼봉(三峰), 본관은 봉화(奉 化). 이색의 문인. 문과에 급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조준, 남은 등과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을 개국하는데 공이 컸음. 1차 왕자의 난 때 참수되었음. 유학의 대가로 조선 개국 후 군사, 외교, 성리학, 역사, 행정 등 다방면에 걸쳐 초기의 건국 작업에 활약했으며, 숭유배불 (崇儒排佛)을 국시로 삼게 하여 유학의 발전을 기했음. '삼봉집' '경제문감' 등 많은 저서를남기고, '고려사' 37권을 찬진했음. 문장과 시에 능했다. - 조 준(趙 浚) 술을 취해 먹고 오다가 공산(空山)에 자니 뉘 날 깨우리, 천지 즉 금침(衾枕)이로다. 광풍(狂風)이 세우(細雨)를 몰아 잠든 나를 깨와라. 1346(충목왕 2)-(1405태종 5). 고려, 조선의 문신. 호는 송당(松堂), 본관은 평양. 문과에 급제, 벼슬이 영의정부사에 이르렀음. 이성계를 도와 개국공신이 되었는데, 토지 제도에 해박한 학자로 '경제육전'을 편찬했으며, 시문에도 탁월했음. - 맹사성(孟思誠) 춘) 강호(江湖)에 봄이 드니 미친 흥이 절로 난다. 탁료계변(濁 溪邊)에 금린어(錦鱗魚) 안주삼고 이 몸이 한가로움도 역군은(亦君恩)이삿다. 하) 강호에 여름이 드니 초당에 일이 없다. 유신한 강파(江波)는 보내느니 바람이라 이 몸이 서늘하옴도 역군은(亦君恩)이샷다. 추) 강호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쪄있다. 소정(小艇)에 그물 실어 흘러 띄워 던져두고 이 몸이 소일(消日)하옴도 역군은(亦君恩)이샷다. 동) 강호에 겨울이 드니 눈 깊이 자히 남다. 삿갓 비껴 쓰고 누역으로 옷을 삼아 이 몸이 춥지아니함도 역군은(亦君恩)이샷다. 1360(공민왕 9)-1438(세종 20). 고려 조선의 문신. 명재상. 호는 고불(古佛), 본관은 신창(新昌). 우왕 때, 문과에 급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1431년(세종13) 좌의정에 이르렀음. 황희와 함께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으며 시문에 능하고 음률에도 밝아 향악을 정리하고 스스로 악기를 제작했음. - 이 직(李 稷) 가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 소냐 아마도 겉 희고 속 검을 손 너뿐인가 하노라. 1362(공민왕 11)-1431(세종 13). 고려 조선의 문신. 호는 형재(亨齋), 보관은 성주(星州). 16세에 문과에 급제 후, 고려 때는 예문관 제학(정3품), 조선조에서는 개국 공신으로 여러 벼슬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음. - 변계량(邊季良) 내게 좋다하고 남 싫은 일 하지 말며 남이 한다 하고 의(義) 아니면 좇지 말라. 우리도 천성을 지키어 생긴 대로하리라. 1369(공민왕 18)-1430세종 12).고려, 조선의 문신. 호는 춘정(春亭), 본관은 밀양. 문과에 급제, 조선조 대제학을 20여 년 간 지내는 동안 명 문장가로 유명했다. - 최덕지(崔德之) 청산이 적료(寂寥)한데 미록( 鹿)이 벗이로다 약초에 맛들이니 세미(世味)를 잊을로다. 벽파(碧波)에 낚시 대 메고 나니 어흥(漁興)겨워 하노라. 1384(우왕 10)-1455(세조 1). 조선의 문신. 학자. 호는 연촌(烟村), 본관은 전주. 식년 문과에 급제, 벼슬이 예문관 제학(종2품)에 이르렀음. - 김종서(金宗瑞) 삭풍(朔風)는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 변성(萬里邊城)에 일장검(一長劍) 짚고 서서 긴 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세라. 장백산(長白山)에 기를 꽂고 두만강(豆滿江)에 말 씻기니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우냐. 어떻다 능연각상(凌煙閣上)에 뉘 얼굴을 그릴꼬. 1390(공양왕 2)-1453(단종 1). 조선의 문신, 명장. 호는 절재(節齋), 본관은 순천. 16세 때 문과에 급제, 1433년(세종 15) 함길도 관찰사가 되어 변경을 침입한 여진족을 격퇴하고 6진(六鎭)을 설치했음. 단종 때 좌의정으로 어린 단종을 보필,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에 의해 격살되었음. - 이 개(李 塏) 방(房) 안에 혓는 촉(燭)불 눌과 이별하였관데 겉으로 눈물 지고 속 타는 줄 모르는고 저 촉(燭)불 날과 같아서 속 타는 줄 모르도다. 1417(태종 17)-1456(세조 2). 조선의 충신. 사육신의 한 사람. 호는 백옥헌(白玉軒), 본관은 한산(韓山). 이색의 증손. 20세에 문과에 급제, 훈민정음의 창제에 참여했음.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렀을 때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되었음. 시문이 청결하고 글씨를 잘 썼음. - 박팽년(朴彭年) 가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 명월(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 단심(一片丹心)이야 고칠 줄이 있으랴. 1417(태종 17)-1456(세조 2).조선의 문신. 사육신의 한 사람. 호는 취금정(醉琴軒). 본관은 순천. 18세 때 알성 문과에 급제, 성삼문과 함께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음. 형조참판으로서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처형되었음. - 성삼문(成三問) 수양산(首陽山)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 하노라. 주려 죽을 진들 채미(採薇)도 하는 것가. 비록애 푸새엣 것인들 긔 뉘 땅에 났더니.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어 있어 백설이 만 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 1418( 태종18)-1456(세조 2). 조선의 학자. 사육신의 한 사람. 호는 매죽헌(梅竹軒), 본관은 창녕. 생원으로 식년 문과에 급제, 문과 중시에 장원. 벼슬이 좌부승지(정3품)에 이르렀음. 집현전 학사로 훈민정음 창제 및 '동국정운'편찬에 참여하여 많은 공을 세웠음. 세조가 즉위하자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39세로 처형되었으며, 온 가족이 죽음을 당했음. - 유응부(兪應孚) 간밤에 불던 바람 눈서리 치단 말가 落落長松이 다 기울어 가노매라. 하물며 못다 핀 꽃이야 일러 무삼하리요. ?-1456(세조 2). 조선의 장군. 사육신의 한 사람. 호는 벽량(碧梁), 본관은 기계(杞溪). 무과에 급제, 세종, 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벼슬은 동지중추부사(종2품)에 이르렀음.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잡혀 죽음을 당했음. - 원 호(元 昊) 간밤에 울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내여다 이제야 생각하니 임이 울고 보내도다. 저 물이 거슬러 흐르고자, 나도 울어 예리라. 생육신의 한 사람. 호는 무항(霧巷), 본관은 원주. 1423년(세종 5)식년 문과에 급제, 벼슬이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음. 단종 초에 수양대군의 위세가 날로 더해지자 고향 원주에 은거하다가, 1457(세조3) 단종이 죽자 영월에 가서 3년 상을 마쳤음. 세조가 호조 참의 벼슬로 불렀으나 끝까지 응하지 않았음. - 남 이(南 怡) 장검(長劍)을 빼어들고 백두산(白頭山)에 올라보니 대명천지(大明天地)에 성진(腥塵)이 잠겼세라. 언제나 남북풍진(南北風塵)을 헤쳐 볼까 하노라. 1441(세종 23)-1468(예종 즉위). 조선의 무신. 17세로 무과에 장원. 세조의 총애를 받았음. 이시애의 난 때 우 대장으로 이를 토벌하고, 서북 면의 건위주를 정벌한 다음 27세의 나이로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이를 시기한 유자광의 모함으로 죽음을 당했음. - 월산대군(月山大君)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無心)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라. 1454(단종 2)-1488(성종 9).성종의 형. 이름은 정. 문장이 뛰어나 그의 시가 중국에까지 널리 애송되었음. - 김굉필(金宏弼) 삿갓에 도롱이 입고 세우 중에 호미 메고 산전을 흩매다가 녹음에 누웠으니 목동이 우양을 몰아 잠든 나를 깨와다. 1454(단종 2)-1504(연산군 10). 조선의 학자. 호는 한훤당(寒暄堂), 본관은 서흥(瑞興). 김종직의 문하에서 '소학'을 읽고,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일컬었음. 사마시에 합격,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형조좌랑(정6품)에 이르렀으나,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일파로 몰려 뮤배, 갑자사화 때 사사되었음. 성리학에 통달했으며, 문하에 조광조, 김안국 등의 학자가 배출되었음. 우의정에 추증. - 성 종(成 宗) 있으렴, 부디 갈따, 아니 가든 못할소냐. 무단히 싫더냐, 남의 말을 들었느냐. 그래도 하 애닲고나, 가는 뜻을 일러라. 1457(세조 3)-1494(성종 25). 조선의 제9대 왕. 13세에 즉위하여 재위 기간 중 문운이 극성하고, 조선 초기의 문화가 비로소 개화했음. 경사백가와 성리학에 정통하였으며 사예(射藝)와 서화에도 능했음. - 이현보(李賢輔) 굽어는 천심녹수(千尋綠水) 돌아보나 만첩청산(萬疊 靑山), 십장홍진(十丈紅塵)이 얼마나 가렸는고. 강호(江湖)에 월백(月白)하거든 더욱 무심하여라. 1467(세조 13)-1555(명종 10). 조선의 문신. 호는 농암(聾巖), 본관은 영천(永川). 식년문과에 급제, 벼슬이 지중추부사(정 2품)에 이르렀음. 자연을 노래한 많은 시조를 지었고, 10장으로 전하던'어부사(漁父詞)'를 5장으로 고쳐 지은 것이 '청구영언'에 실려있다. - 조광조(趙光祖) 저 건너 일편석(一片石)이 강태공의 조대(釣臺)로다. 문왕은 어디 가고 빈 대(臺)만 남았는고. 석양(夕陽)에 물차는 제비만 오락가락하더라. 1482(성종 13)-1519). 조선의 학자, 문신. 호는 정암(靜庵), 본관은 한양. 진사를 거쳐 알성 문과에 급제,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도덕적 이상 정치를 꾀하여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다가 훈구파의 반발을 야기, 무고로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음.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영수로서 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음. - 송인수(宋麟壽) 창랑(滄浪)에 낚시 넣고 조대(釣臺)에 앉았으니 낙조청강(落照淸江)에 빗소리 더욱 좋다. 유지(柳枝)에 옥린(玉鱗)을 꿰어들고 행화촌(杏花村)으로 가리라. 1487(성종 18)-1547(명종 2). 조선의 문신. 호는 규암(圭庵), 본관은 은진(恩津). 별시 문과에 급제, 벼슬이 대사헌(종2품)에 이르렀음. 윤원형, 이기 등의 미움을 받던 중, 을사사화 때 한성부 좌윤에서 파직, 청주에 은거하다가 그들에 의해 사사되었음. 성리학의 대가로 선비들의 추앙을 받았음, - 김 구(金 絿) 오리의 짧은 다리 학의 다리 되도록애 검은 까마귀 해오라기 되도록애 향복무강(享福無彊)하사 억만세(億萬歲)를 누리소서. 1488(성종 19)-1534(중종 29).조선의 문신. 서예가. 호는 자암(自庵), 본관은 광주(光州). 김굉필의 문인. 생원, 진사를 거쳐 별시 문과에 급제, 벼슬이 부제학(정3품)에 이르렀음. 글씨에 뛰어나 조선 초기 4대 서예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힘. 선조 때 이조참판에 추증. - 서경덕(徐敬德) 마음이 어린 후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萬重雲山)에 어느 임이 오리 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1489(성종 20)-1546(명종 1). 조선의 학자. 호는 화담(花潭), 본관은 당성(唐城). 가세가 빈한하여 독학으로 공부해서 13세에 '서경'을 해독했으며, 18세에는 '대학'에 통달했음. 어머니의 요청으로 생원 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학문에만 전심했음. 박연폭포, 황진이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림. 우의정에 추증. - 송 순(宋 純) 풍상(風霜)이 섞어 친 날에 갓피온 황국화를 금분(金盆)에 가득 담아 옥당(玉堂)에 보내오니 도리(桃李)야 꽃이온 양 마라 임의 뜻을 알괘라. 꽃이 진다하고 새들아 슬퍼 마라 바람에 흩날리니 꽃의 탓 아니로다. 가노라 희짓는 봄을 새워 무삼하리오. 1493(성종 24)-1583(선조 16). 조선의 문신. 호는 면앙정(傘仰亭), 본관은 신평(新平). 별시 문과에 급제, 벼슬이 우참찬(정2품)에 이르렀음. - 주세붕(周世鵬) 지아비 밭갈러 간데 밥고리 이고 가 반상(飯床)을 들오되 눈썹에 맛초이다. 진실로 고마우신 이 손이시나 다르실까. 1495(연산군 1)-1554(명종 9). 조선의 문신. 학자. 호는 신재(愼齋), 무릉도인(武陵桃人), 본관은 상주(尙州). 생원으로 별시에 급제, 벼슬이 동지중추부사(종2품)에 이르렀음.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을 창설했음. 청백리에 녹선 되었고, '육현곡(六賢歌)' '태평곡(太平曲)' 등 장가와 '군자가(君子歌)' 등 단가 8수가 전함. - 성 운 (成 運) 전원(田園)에 봄이 오니 이 몸이 일이 하다 꽃남근 뉘 옮기며 약(藥) 밭은 언제 갈리. 아희야 대 베어 오너라, 삿갓 먼저 결으리라. 497(연산군 3)-1579(선조 12). 조선의 학자. 호는 대곡(大谷). 속리산에 은거했으며, 이지함, 서경덕, 조식 등과 교유하며 학문에 정진했음. - 조 욱(趙 昱) 유벽(幽僻)을 찾아가니 구름 속에 집이로다. 산채(山菜)에 맛들이니 세미(世味)를 있을노라. 이 몸이 강산풍월(江山風月)과 함께 늙자 하노라. 1498(연산군 4)-1557(명종 12). 조선의 학자. 호는 용문(龍門), 본관은 평양(平壤). 용문산에 은거했으며, 명종 때 성수침, 조식 등과 함께 현사로 뽑혀 벼슬이 장수 현감에 이르렀음. 이조참의에 추증. - 이 황(李 滉)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료. 초야우생(草野愚生)이 이렇다 어떠하료. 하물며 천석고황(泉石膏 )을 고쳐 무엇하료. 청산(靑山)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流水)는 어찌하여 주야(晝夜)에 긋지 아니는고. 우리도 그치지 말아 만고상청(萬古常靑)하리라. 청량산(淸凉山) 육륙봉(六六峰)을 아는 이 나와 백구(白鷗). 백구(白鷗)야 헌사하랴 못 믿을 손 도화(桃花)로다 도화(桃花)야 떠나지 마라, 어주자(漁舟子) 알까 하노라. 1501(연산군 7)-1570(선조 3).조선의 학자, 문신. 호는 퇴계(退溪), 본관은 진보(眞寶). 진사시를 거쳐 식년 문과에 급제, 벼슬은 우찬성, 양관 대제학에 이르러 은퇴했음. 주자학을 집대성한 대유학자로, 율곡 이이와 함께 쌍벽을 이루었으며,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음. 영의정에 추증. RM의 많은 저서는 '퇴계전서'에 수록되어 있음. - 조 식(曺 植)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세라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디뇨, 나는 옌가 하노라. 삼동에 베옷 입고 암혈에 눈비 맞아 구름 낀 볕뉘도 쬔 적이 없건마는 서산에 해 지다 하니 눈물겨워 하노라. 1501(연산군 7)-1572(선조 5). 조선의 학자. 호는 남명(南冥), 본관은 창녕. 지리산에 은거하며 성리학을 연구, 당시 유학계의 대학자로 추앙되었음. 조정에서 여러 차례높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퇴, 문하에서 김효원, 김우옹 등 저명한 학자들이 배출되었음. 죽은 후 영의정에 추증. - 황진이(黃眞伊)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둘에 내어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 님 오신 날 밤이면 굽이굽이 펴리라.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임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月沈) 삼경(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하리요.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一到) 창해(滄海)하면 다시오기 어려워라.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어져 내 일이여, 그릴 줄을 모르더냐. 있으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情)은 나도 몰라 하노라. 1502 ?(연산군 8)-1540?(중종 35). 조선의 시인. 명기. 기생 명은 명월(明月). 황진사의 서녀(庶女)로 어머니 밑에서 사서삼경을 읽었고, 시(詩), 서(書), 음률(音律)에 모두 능하였으며,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했음.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부렸음. - 김인후(金麟厚) 엊그제 버힌 솔이 落落長松 아니런가. 적은 덧 두던들 棟樑材 되리러니 이 후에 명당(明堂)이 기울면 어느 남기 받히리. 1510(중종 5)-1560(명종 15). 조선의 문신. 유학자. 호는 하서(河西), 본관은 울산. 김안국의 제자. 별시 문과에 급제, 부수찬 때 부모 봉양을 위해 옥과 현령으로 나갔음. 을사사화 후에는 병을 이유로 고향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전심했음. 천문, 지리, 의학, 산수, 율력에도 정통했음. - 계 랑(桂 娘)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리(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1513(중종 8)-1550(명종 5).조선의 여류 시인. 부안의 명기. 성은 이씨. 본명은 향금(香今), 호는 매창(梅窓). 계랑(桂娘), 계생(桂生). 가사, 한시를 비롯하여 가무 현금(玄琴)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多才多能)한 여류예술인이었음. 작품으로는 가사와 한시 70여수외에 금석문(金石文)까지 전해지고 있음. - 유희춘(柳希春) 미나리 한 포기를 캐어서 씻으이다. 년 데 아니라 우리임께 받자오이다. 맛이야 긴치 아니커니와 다시 씹어 보소서. 1513(중종 8)-1577(선조 10). 조선의 문신 호는 미암(眉巖), 본관은 선산(善山). 부인은 여류 문인인 송덕봉(宋德峯). 김안국의 문인. 별시 문과에 급제, 벼슬은 이조참판에 이르러 사직했음. 경사(經史)에 밝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음. 저서 '미암일기'는 귀중한 사료임. - 송 인(宋 寅) 들은 말 즉시(卽時) 잊고 본 일도 못 본 듯이 내 인사(人事) 이러하매 남의 시비(是非) 모를로다. 다만지 손이 성하니 잔(盞) 잡기만 하리라. 1516(중종 11)-1584(선조 17). 조선의 학자. 명필. 본관은 여산(礪山). 중종의 사위로 벼슬이 도총관(정2품)에 이르렀음. 시문에 능하였고, 이황, 조식, 이이, 성혼 등 석학들과 교유하였으며, 글씨에도 능하여 산릉(山陵)의 지(誌)와 궁전의 액(額)으로부터 사대부의 비갈(碑碣)에 이르기까지 많은 글을 짓고 썼음. - 양사언(楊士彦)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1517(중종 12)-1584(선조 17). 조선의 문신. 서예가, 호는 蓬萊, 본관은 청주. 식년 문과에 급제, 강릉부사, 함흥부윤 등을 역임했음. 글씨를 잘 써서 조선 전기의 4대 서야가로 불렸음. - 박계현(朴啓賢) 달 밝은 오례성(五禮城)에 혀 남은 벗이 앉아 고향(故鄕) 감루(感淚)를 뉘 아니 지리마는 아마도 위국단침(爲國丹 )은 나뿐인가 하노라. 1524(중종 19)-1580(선조 13). 조선의 문신. 본관은 밀양. 진사를 거쳐 식년문과에 급제. 벼슬이 병조판서. 지중추부사(정2품)에 이르렀음. - 기대승(奇大升) 호화(豪華)코 부귀(富貴)키야 신릉군(信陵君)만 할까마는 백년(百年)이 못하여서 무덤 위에 밭을 가니 하물며 여남은 장부(丈夫)야 일러 무삼하리요. 1527(중종 22)-1572(선조 5). 조선의 성리학자. 호는 고봉, 본관은 행주. 식년 문과에 급제, 벼슬이 대사간(정3품)에 이르렀음. - 고경명(高敬命) 보거든 슬뮈거나 못 보거든 잊히거나 제 나지 말거나내 저를 모르거나 차라리 내 먼저 츼여서 그리게 하리라. 1533(중종 28)-1592(선조 25). 조선의 문인. 의병장. 호는 제봉(霽峰), 본관은 장흥. 식년문과에 장원, 벼슬은 동래부사에 이르렀음.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고 왜군과싸우다가 전사했음. - 이양원(李陽元) 높으나 높은 남게 날 권하여 올려두고 이 보오 벗님네야, 흔드지나 마르되야. 내려져 죽기는 섧지 아녀도 임 못 볼까 하노라. 1533(중종 28)-1592(선조 25).조선의 문신. 호는 남파(南坡), 본관은 전주. 알성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임진왜란 때 유도대장으로 타군과 합세하여 크게 승리한 후 영의정에 올랐음. - 유자신(柳自信) 추산(秋山)이 석양을 띄고 강심(江心)에 잠겼는데 일간죽(一竿竹) 둘러메고 소정(小艇)에 앉았으니 천공(天公)이 한가(閑暇)히 여겨 달을 조차 보내도다. 1533(중종 28)-1612(광해군 4). 광해군의 장인. 진사로 벼슬이 한성부 판윤에 이르렀으나, 뒤에 인조반정으로 삭직되었음. - 성 혼(成 渾) 말없는 청산(靑山)이요 태(態) 없는 유수(流水)로다. 값없는 청풍(淸風)이요 임자 없는 명월(明月)이라. 이 중에 병(病) 없는 몸이 분별(分別) 없이 늙으리라. 1535(중종 30)-1598(선조 31). 조선의 학자. 호는 우계(牛溪), 본관은 창녕(昌寧). 17세 때 감시 초시에 합격했으나 신병으로 과거를 단념, 경학연구에 정진했음. 임진왜란 때 우참찬에 올라 좌참찬(정2품)에 이르러 관직에서 물러났음. 일찍부터 율곡 이이와 교분이 두터웠으나 학설에 있어서는 퇴계 이황의 학설을 지지, 이이와 6년에 걸친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논쟁을 벌여 유학 계의 큰 화재가 되었음. - 이 이 (李 珥) 고산(高山) 구곡담(九曲潭)을 사람이 모르더니 주모 복거(誅茅卜居)하니 벗님네 다 오신다. 어즈버, 무이(武夷)를 상상(想像)하고 학주자(學朱子)를 하리라. 일곡(一曲)은 어드매오, 관암(冠巖)에 해 비친다. 평무(平蕪)에 내 걷으니 원근(遠近)이 그림이로다. 송간(松間)에 녹준(綠樽)을 놓고 벗 오는 양 보노라. 이곡(二曲)은 어드매오, 화암(花岩)에 춘만(春滿)커다. 벽파(碧波)에 꽃을 피워 야외로 보내노라. 사람이 승지(勝地)를 모르니 알게 한들 어떠리. 구곡(九曲)은 어디매오, 문산(文山)에 세모(歲暮)커다. 기암괴석이 눈 속에 묻혔세라. 유인(遊人)은 오지 아니하고 볼 것 없다 하더라. 1536(중종 31)-1584(선조 17). 조선의 학자. 문신. 호는 율곡(栗谷), 본관은 덕수(德水). 13세로 진사 초시에 합격, 그 후 생원시, 식년 문과에 장원, 이조 판서, 판돈녕부사(종1품)등을 지냈음. 조선 유학 계에 이황과 쌍벽을 이룬 학자로, 당쟁의 조정, 대동법의 실시에 노력하는 등 많은 활약을 했음.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음. - 정 철(鄭 澈) 내 마음 베어내어 저 달을 만들고자 구만리 장천에 번드시 걸려 있어 고운 임 계실 곳에 가 비취어나 보리라. 어버이 살아신 제 섬길 일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찌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니 돌이라 무거울까 늙기도 설워라커든 짐을조차 지실까. 재 너머 성권농(成勸農) 집에 술 익단 말 어제 듣고 누운 소 발로 박차 언치 놓아 지줄 타고 아해야 네 권농 계시냐, 정좌수(鄭座首) 왔다 하여라.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 꺾어 산(算) 놓고 무진무진 먹세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 적 덮어 주리어 매여 가나, 유소보장(流蘇寶帳)에 만인이 울어 예나, 어욱새 속새 덥가나무 백양 숲에 가기곳 가면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소소리바람 불 제 뉘 한 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 파람 불 제 뉘우친들 어찌리. 1536(중종 31)-1593(선조 26)조선의 문신. 문인. 호는 송강(松江), 본관을 여일(迎日). 기대승. 김인후의 문인. 진사시, 별시 문과에 각각 장원, 여러 벼슬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음. 시가문학의 대가로, 시조의 윤선도와 쌍벽을 이루었음. '송강집' '송강가사'등이있고, 시조 70여수가 전함. - 서 익(徐 益) 녹초(綠草) 청강상(晴江上)에 굴레 벗은 말이 되어 때때로 머리 들어 북향(北向)하여 우는 뜻은 석양(夕陽)이 재 넘어가니 임자 그려 우노라. 1542(중종 37)-1587(선조 20). 조선의 문신. 호는 만죽(萬竹), 본관은 부여. 별시 문과에 급제, 벼슬이 의주목사에 이르렀으나, 탄핵을 받은 율곡 이이를 변호하는 상소를 했다가 파직되었음. 시조를 잘 했음. - 한 호(韓 濩) 짚방석 내지 마라, 낙엽(落葉)엔들 못 앉으랴. 솔불 혀지 마라, 어제 진 달 돋아온다. 아해야, 박주 산채(薄酒山菜)일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1543(중종 38)-1605(선조 38).조선의 명필. 호는 석봉(石峯), 본관은 삼화, 개성 출신.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격려로 서예에 정진하여 왕희지와 안진경의 필법을 익혀서 독창적인 경지를 확립, 호쾌, 강건한 서풍을 창시했음. 진사시에 합격, 천거로 가평군수, 존숭도감 서사관을 지냈으며, 후기의 김정희와 함께 조선 서예 계의 쌍벽을 이루었음. - 조 헌(趙 憲) 지당(池塘)에 비 뿌리고 양류(楊柳)에 내 끼인 제 사공(沙工)은 어디 가고 빈배만 매였는고 석양(夕陽)에 짝 잃은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노매. 1544(중종 39)-1592(선조 25). 조선의 문신. 의병장. 호는 중봉(重峯), 본관은 배천(白川).이이, 성혼의 문인. 식년 문과에 급제, 벼슬은 전라도 도사에 그쳤음.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를 수복하고 금산에서 7백 의병과 함께 모두 전사했음. 성격이 강직하여 항상 불의에 항거했으며, 이이의 문인 중 가장 뛰어난 학자의 한 사람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음. - 이순신(李舜臣) 산산(閑山)섬 달 밝은 밤에 수루(戍樓)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는 남의 애를 끊나니. 1545(인종 1)-1598(선조 31). 조선의 명장. 자는 여해(汝海), 본관은 덕수(德水). 서울 출신. 식년문과에 급제, 미관 말직만 지내다가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승진했음.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통제사로 거북선을 만들어 큰공을 세우고 전사했음. 충성심이 강하고 전략이 뛰어난 용장으로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 등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영의정에 추증, 시호는 충무. - 이원익(李元翼) 녹양(綠楊)이 천만사(千萬絲)ㄴ들 가는 춘풍 매어두며 탐화봉접(探花蜂蝶)인들 지는 꽃을 어이하리 아무리 사랑이 중한들 가는 임을 어이하리. 1547(명종 2)-1634(인조 12).조선의 문신. 호는 오리(梧里), 본관은 전주. 생원으로 별시 문과에 급제, 여러 내외직을 거쳐 수차 영의정을 지냈음. 임진왜란 때 공이 컸으며, 대동법을 실시케 하여 국민의 부담을 덜게 했음. 문장에 뛰어났고,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음. 서민적인 인품으로서 '오리 정승' 이란 이름으로 많은 일화가 전함. - 장생(金長生) 대 심어 울을 삼고 솔 가꾸어 정자로다. 백운(白雲) 덮인 데 나 있는 줄 제 뉘 알리. 정반(庭畔)에 학(鶴) 배회(徘徊)하니 긔 벗인가 하노라. 1548(명종 3)-1631(인조 9). 조선의 문신, 학자. 호는 사계(沙溪), 본관은 광산(光山). 송익필, 이이의 문인. 학행으로 천거되어 형조 참판에 이르렀음. 예학과 성리학 연구, 조선 예학의 태두로서 기호학파를 형성하여 조선 유학 계에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루었음. - 한 우(寒 雨) 어이 얼어 자리, 무삼 일 얼어 자리. 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조선 선조 때의 평양 명기로,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부른 '북천이 맑다커늘...'에 화답한 시조 1수가' 청구영언에' 전함. - 홍 랑(洪 娘) 멧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에손데. 자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곳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조선 선조 때 함경도 경성의 명기. 시조를 잘 했음. 1573년 삼당시인(三唐詩人)이요, 팔 문장(八文章)의 한 사람인 최경창이 북평사(北評使)로 함경도 경성에 있을 때, 그 막중(幕中)에 머물렀음. 1575년 최경창이 병들자 경성에서 7주야(晝夜)를 달려 서울에 이르렀는데, 그것이 말썽이 되어 최경창이 벼슬을 내놓게 되었다는 일화도 전함. - 이항복(李恒福) 철령(鐵嶺) 높은 봉(峰)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 원루(孤臣寃淚)를 비 삼아 띄어다가 임 계신 구중 심처(九重深處)에 뿌려본들 어떠리. 1556(명종 11)-1618(광해군 10). 조선의 문신. 호는 백사(白沙), 본관은 경주. 알성 문과에 급제, 여러 요직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많은 공을 세웠음. 오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오성대감이라 불렀으며, 오성과 한음(이덕형의 호) 의 일화로 유명함. 1617년(광해군 8)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항복이 이를 적극 반대하다가 관직이 삭탈 되고 이듬해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가는 도중에 읊은 시조로, 후에 광해군이 듣고 눈물을 흘렸다 함. 이항복은 귀양지 북청에서 죽었음. - 이덕형(李德馨) 큰잔에 가득 부어 취토록 먹으면서 만고(萬古) 영웅(英雄)을 손꼽아 헤어보니 아마도 유령(劉伶) 이백(李白)이 내 벗인가 하노라. 1561(명종 11)-1613(광해군 5). 조선의 문신. 호는 한음(漢陰), 본관은 광주(廣州). 별시 문과에 급제, 여러 요직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요청하는 등 공이 컸음. 광해군 때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삭직 당함. '오성과 한음'의 일화로 유명하며, 글씨에 뛰어났음. - 박인로(朴仁老) 반중(盤中) 조홍(早紅) 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柚子) 아니라도 품음직 하다마는 품어 가 반길 이 없으니 글로 설워하나이다. 동기(同氣)로 세 몸 되어 한 몸 같이 지내다가 두 아운 어디 가서 돌아올 줄 모르는고. 날마다 석양(夕陽) 문외(門外)에 한숨 겨워하노라. 1561(명종 16)-1642(인조 20). 조선의 무신. 시인. 호는 노계(蘆溪). 본관은 밀양. 임진왜란 때 별시위가 되어 왜적을 무찔렀고, 1599년(선조 32) 무과에 급제, 벼슬이 용왕위 부호군(종4품)에 이르렀음. 천재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많은 걸작가사를 남겼으며, 송강 정철을 계승하여 가사문학을 발전시키는데 큰공을 세웠음. 태평사, 누항사, 선상탄 등 많은 가사와 시조를 남겼음. - 김상용(金尙容) 사랑이 거짓말이, 임 날 사랑 거짓말이. 꿈에 뵌단 말이 긔 더욱 거짓말이. 날같이 잠 아니 오면 어느 꿈에 뵈이리. 1561(명종 16)-1637(인조 15). 조선의 문신. 호는 선원(仙源), 본관은 안동. 김상헌의 형. 증광 문과에 급제, 여러 내외직을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음. - 이정구(李廷龜) 님을 믿을 것가, 못 믿을슨 임이시라. 미더운 시절(時節)도 못 믿을 줄 알았어라. 믿기야 어려워마는 아니 믿고 어이리. 1564(명종 19)-1635(인조 13). 조선의 문신. 학자. 호는 월사(月沙), 본관은 연안(延安). 윤근수의 문인. 진사로 증광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음. 한문학의 대가로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신흠, 장유, 이식과 함께 조선 중기의 4대문장가로 일컬어짐. - 신 흠(申 欽) 한식 비 온 밤에 봄빛이 다 퍼졌다. 무정한 화류도 때를 알아 피었거든 어떻다 우리의 임은 가고 아니 오는고. 술이 몇 가지요, 청주와 탁주로다. 다 먹고 취(醉)할선정 청탁(淸濁)이 관계하랴. 달 밝고 풍청(風淸)한 밤이어니 아니 깬들 어떠리. 1566(명종 21)-1628(인조 6). 조선의 학자. 문신. 호는 상촌(象村). 본관은 평산(平山). 진사시로 별시 문과에 급제,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음. 정주학자로 문명이 높았고, 장유, 이식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학 대가로 일컬어졌으며, 글씨를 잘 썼음. - 장 만(張 晩) 풍파(風波)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사니 구절(九折) 양장(羊腸)이 물도곤 어려왜라. 이 후란 배도 말도 말고 밭 갈기만 하리라. 1566(명종 21)-1629(인조 7). 조선의 문신. 호는 낙서(洛西). 본관은 인동(仁同).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별시 문과에 급제, 여러 내외직을 거쳐 우찬성(종1품)에 이르렀음. 문무를 겸비하고 재략이 있었음. 영의정에 추증되었음. - 김덕령(金德齡) 춘산(春山)에 불이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는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1567(명종 22)-1596( 선조 29). 조선의 의병장. 자는 경수(景樹), 본관은 광주(光州). 성혼의 문인.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정돈, 여러 차례 적의 대군을 무찔러 왜적이 가장 무서워하는 의병장의 한 사람이 되었음. 1596년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무고로 옥에 갇혀 국문을 받다가 옥사했음. 나중에 신원 되어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음. - 정 온(鄭 蘊) 책 덮고 창을 여니 강호에 배 떠 있다. 왕래(往來) 백구(白鷗)는 무슨 뜻 먹었는고 앗구려, 공명(功名)도 말고 너를 쫓아 놀리라. 1569(선조 2)-1641(인조 19)조선의 문신. 호는 동계(桐溪). 본관은 초계(草溪). 정인홍, 정구의 문인. 정인홍이 권신이 되자 절교했음. 진사로서 별시 문과에 급제, 병자호란때 이조 참판(종2품)으로서 김상헌과 함께 적화를 주장했음. 영의정에 추증. - 김상헌(金尙憲)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 다시 보자 한강수(漢江水)야. 고국(故國) 산천(山川)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時節)이 하 수상(殊常)하니 올동말동하여라. 1570(선조 3)-1652( 효종3). 조선의 문신. 호는 청음(淸陰), 본관은 안동(安東). 윤근수의 문인. 정시 문과, 문과 중시에 각각 급제,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음. 숭명파 (崇明派)로 절의(節義)가 있어 신망을 받았으며, 글씨를 잘 썼음. - 이안눌(李安訥) 천지(天地)로 장막(帳幕) 삼고 일월(日月)로 등촉(燈燭) 삼아 북해수(北海水) 휘어다가 주준(酒樽)에 대어두고 남극(南極)의 노인성(老人星) 대하여 늙을 뉘를 모르리라. 1571(선조 4)-1637(인조 15). 조선의 문신. 시인. 호는 동악(東岳), 본관은 덕수. 정시 문과에 급제, 여러 내외직을 거친 후 예조 판서에 이르렀음. 청백리에 녹선(錄選)됨. 시인 권필과 쌍벽을 이룬 시인으로 이태백에 비유되었고, 글씨도 잘 썼음. 좌찬성에 추증. - 홍서봉(洪瑞鳳) 이별하던 날에 피눈물이 난지 만지. 압록강(鴨綠江) 내린 물이 푸른빛이 전혀 없네. 배 위의 허여 샌 사공(沙工)이 처음 보롸 하더라. 1572(선조 5)-1645(인조 23). 조선의 문신. 호는 학곡(鶴谷), 본관은 남양. 사마시를 거쳐 별시 문과, 문과 중시에 급제,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음. 병자호란 때 최명길과 함께 화의를 주장했고, 수차에 걸쳐 청나라 진영에 왕래하며 항복의 절차를 협의했음. 문장과 시에 능했고, 글씨도 뛰어났음. - 정충신(鄭忠臣) 공산(空山)이 적막(寂寞)한데 슬피 우는 저 두견(杜鵑)아 촉국(蜀國) 흥망(興亡)이 어제오늘 아니어늘 지금히 피나게 울어 남의 애를 끊나니. 1576(선조 9)-1636(인조 14). 조선의 무신. 호는 만운(晩雲), 본관은 광주(光州). 무과에 급제,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우고 그 후 포도대장,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역임. 천문, 지리, 의술 등 다방면에 정통했고 청렴하기로도 이름이 높았다. - 장 현(張 炫) 압록강(鴨綠江) 해진 후에 어여쁜 우리 님이 연운(燕雲) 만리(萬里)를 어디라고 가시는고 봄 풀이 푸르거든 즉시 돌아오소서. 조선 인조 때 통역관.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심양에 끌려갈 때 따라간 바 잇고, 나중에 지사(知事) 벼슬을 지냈음. - 김광욱(金光煜) 공명(功名)도 잊었노라 부귀(富貴)도 잊었노라. 세상 번우(煩憂)한 일 다 주어 잊었노라. 내 몸을 나머지 잊으니 남이 아니 잊으랴. 세(細)버들 가지 꺾어 고기 꿰어들고 주가(酒家)를 찾으려 단교(斷橋)를 건너가니 왼 골에 행화(杏花) 져 쌓이니 갈 길 몰라 하노라. 1580(선조 13)-1656(효종 7).조선의 문신. 호는 죽소(竹所), 본관은 안동. 증광 문과에 급제, 벼슬이 좌참찬(정2품)에 이르렀음. 이언적, 이황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정인홍을 탄핵했으며, 폐모론 때에는 정청에 참여하지 않아 파직 당한 일이 있었음. - 홍익한(洪翼漢) 수양산(首陽山) 내린 물이 이제(夷齊)의 원루(寃淚) 되어 주야(晝夜) 불식(不息)하고 여흘여흘 우는 뜻은 지금의 위국(爲國) 충성을 못내 설워하노라. 1586(선조 19)-1637(인조 15). 조선의 문신. 3학사의 한 사람. 호는 화포(花浦), 본관은 남양. 이정구의 문인. 생원으로 정시 문과에 장원. 평양부 서윤을 지냈음. 병자호란 때 화의론에 적극 반대, 오달제, 윤집과 함께 청나라에 잡혀가 살해되었음. 영의정에 추증. - 윤선도(尹善道) 산수간(山水間) 바위 아래 띠집을 짓노라 하니 그 모른 남들은 웃는다 한다마는 어리고 햐암의 뜻에는 내 분인가 하노라. 보리밥 풋나물을 알마초 먹은 후에 바위 끝 물가에 슬카지 노니노라. 그 밖의 여남은 일이야 부랄 줄이 있으랴. 잔 들고 혼자 앉아 먼 뫼를 바라보니 그리던 임이 오다 반가움이 이러하랴. 말씀도 웃음도 아녀도 못내 좋아하노라. 내 벗이 몇이나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東山)에 달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앞 개에 안개 걷고 뒤 뫼에 해 비친다. 배 떠라 배 떠라, 밤 물은 거의 지고 낮 물이 밀어온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강촌 온갖 곳이 먼 빛이 더욱 좋다. 1587(선조 20)-1671(현종 12). 조선의 시인. 문신. 호는 고산(孤山). 본관은 해남(海南). 진사로 별시 문과 초시에 장원, 증광 문과에 급제, 벼슬이 예조 참의. 동부승지(정3품)에 이르렀음. 성격이 강직하여 여러 사정으로 20여 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고, 19년간 은거 생활을 했음. 그 동안 훌륭한 작품을 남겨, 가사문학의 대가인 정철과 더불어 시조 문학의 대가로 국문학사상 쌍벽을 이루었음. - 이명한(李明漢) 서산(西山)에 일모(日暮)하니 천지(天地)에 가이없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니 임 생각 새로워라. 두견(杜鵑)아, 너는 누를 그려 밤새도록 우나니. 꿈에 다니는 길이 자취 곧 나량이면 임의 집 창(窓)밖이 석로(石路)라도 닳으련마는 꿈길이 자취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 1595(선조 28)-1645(인조 23). 조선의 문신. 호는 백주(白洲), 본관은 연안. 벼슬이 예조 판서에 이르렀음. 성리학에 조예가 깊고, 시와 글씨에 뛰어났음. 병자호란 때 척화파로 심양에 잡혀갔던 의분을 노래한 6수가 전함. - 정두경(鄭斗卿) 금준(金樽)에 가득한 술을 슬카장 기울이고 취한 후 긴 노래에 즐거움이 그지없다. 어즈버, 석양(夕陽)이 진(盡)타 마라 달이 좇아 오노매. 1597(선조 30)-1673(현종 14). 조선의 문신. 학자, 호는 동명(東溟), 본관은 온양. 이항복의 문인. 별시 문과에 장원, 벼슬이 홍문관 제학(종2품) 이르렀음. 시문과 서예에 뛰어났음. 대제학에 추증. - 정태화(鄭太和) 술을 취케 먹고 두렷이 앉았으니 억만(億萬) 시름이 가노라 하직한다. 아해야 잔 가득 부어라, 시름 전송하리라. 1602(선조 35)-1673(현종 14). 조선의 문신. 호는 양파(陽坡), 본관은 동래. 별시 문과에 급제, 여러 내외직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음. -강백년(姜栢年) 청춘에 곱던 양자(樣子) 임으로야 다 늙었다. 이제 임이 보면 날인 줄 알으실까. 진실로 날인 줄 알아보면 고대 죽다 설우랴. 1603(선조 36)-1681(숙종 7). 조선의 문신. 호는 설봉(雪峰), 본관은 진주. 정시 문과에 급제, 좌참찬(정2품)에 이르렀음. 영의정에 추증. - 송시열(宋時烈) 임이 헤오시매 나는 전혀 믿었더니 날 사랑하던 정을 뉘에게 옮기신고 처음에 뮈시던 것이면 이대도록 설우랴. 1607(선조 40)-1689(숙종 15). 조선의 문신. 학자. 호는 우암(尤庵). 본관은 은진(恩津). 김장생, 김집의 문인.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 천거로 여러 벼슬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음. 왕세자(경종)책봉을 반대하다가 제주도에 귀양, 상경도중 사사되었음. 일생을 주자학 연구에 몰두한 거유(巨儒)로 예론(禮論)에 밝았으며 뛰어난 학식으로 많은 학자를 길러냈음. 글씨는 대자를 잘 썼음. 그의 많은 저서는 <송자대전(宋子大全)>에 수록되어 있음. - 효 종(孝 宗) 청강(淸江)에 비 듣는 소리 긔 무엇이 우습관대 만산(萬山) 홍록(紅綠)이 휘두르며 웃는 고야. 두어라, 춘풍(春風)이 몇 날이리 웃을 대로 웃어라. 청석령(靑石嶺) 지나거냐, 초하구(草河口) 어디메오. 호풍(胡風)도 참도 찰사 궂은 비는 무슨 일고. 뉘라서 내 행색(行色) 그려다가 임 계신 데 드릴꼬. 1619(광해군 11)-1659(효종 10). 조선 제 17대 왕. 봉림대군에 봉해졌을 때, 병자호란으로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 볼모로 잡혀가 8년 동안 있었음. 청나라에 원한을 품고 이를 설욕하고자 북벌(北伐)을 계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음. - 인평대군(麟坪大君) 세상 사람들이 입들만 성하여서 제 허물 전혀 잊고 남의 흉 보는고야. 남의 흉 보거라 말고 제 허물 고치과저. 1622(광해군 14)-1658(효종 9). 조선 효종의 아우. 병자호란의 비분을 읊은 시가 전하며, 글씨와 그림에 모두 능했음. - 이화진(李華鎭) 草堂에 깊이든 잠을 새소리에 놀라 깨니 梅花雨 갓 갠 가지에 夕陽이 거의로다. 아희야 낚대 내어라, 고기잡이 늦었다. 1626(인조 4)-1696(숙종 22). 조선의 문신. 호는 묵졸재(默拙齋), 본관은 여주. 정시 문과에 급제, 벼슬이 우부승지(정3품)에 이르렀음. - 남구만(南九萬) 동창(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긔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 1629(인조 7)-1711(숙종 37). 조선의 문신. 호는 약천(藥泉), 본관은 의령. 송준길의 문인. 사마시를 거쳐 별시 문과에 급제,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음. 문사(文詞). 서화(書畵)에 뛰어났음. - 이 택(李 澤) 감장 새 작다하고 대붕아 웃지 마라. 九萬里 長天을 너도 날고 저도 난다. 두어라, 일반 飛鳥니 네오 긔오 다르랴. 1651(효종 2)-1719(숙종 45). 조선의 무신. 벼슬이 평안도 병마절도사(종2품)에 이르렀음. - 박태보(朴泰輔) 흉중(胸中)에 불이나니 오장(五臟)이 다 타간다. 신농씨(神農氏) 꿈에 보아 불 끌 약 물어보니 충절(忠節)과 강개(慷慨)로 난 불이니 끌 약 없다 하더라. 1654(효종 5)-1689(숙종 15). 조선의 문신. 본관은 반남. 알성문과에 장원, 이조좌랑. 암행어사 등을 역임했음. 인현왕후의 폐위를 극력 반대하다가 심한 고문을 당하고 죽었음. 영의정에 추증. - 김창업(金昌業) 벼슬을 저마다 하면 농부 할 이 뉘 있으며 의원이 병 고치면 북망산이 저러하랴. 아해야 잔 가득 부어라, 내 뜻대로 하리라. 1658(효종 9)-1721(경종 1). 조선의 문신. 호는 노가재(老稼齋), 본관은 안동. 영의정 김수항의 4남. 영의정 김창집의 아우. 도학,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음. 그림에도 뛰어났음. - 김유기(金裕器) 춘풍(春風) 도리화(桃李花)들아, 고운 양자 자랑 말고 장송(長松) 녹죽(綠竹)을 세한(歲寒)에 보려무나 정정(亭亭)코 낙락(落落)한 절(節)을 고칠 줄이 있으랴. 조선 숙종 때의 명창. 시조를 잘 했으며 김천택과 교분이 두터웠음. - 주의식(朱義植) 말하면 雜類라하고 말 않으면 어리다 하네. 貧寒을 남이 웃고 富貴를 새우는데 아마도 이 하늘 아래 사롤 일이 어려왜라. 조선 숙종 때의 가인. 호는 남곡(南谷). 숙종 때 무과에 급제, 칠원 현감을지냈음. - 김성최(金盛最) 자네 집에 술 익거든 부디 날 부르시소 내 집에 꽃 피거든 나도 자네 청해 옴세. 백년(百年) 덧 시름 잊을 일을 의논(議論)코자 하노라. 조선 숙종 때의 문신. 호는 일로당(佚老堂), 본관은 안동. 진사시에 합격, 1683년(숙종 9) 단양군수에 이어 내외직을 역임. 통정대부로 목사(정3품)에 이르렀음. - 구지정(具志禎) 쥐 찬 소리개들아, 배부르다 자랑마라. 청강(淸江) 여윈 학(鶴)이 주리다 부럴소냐. 내 몸이 한가(閑暇)하여마는 살 못 찐들 어떠리. 조선 숙종 때의 문신. 시인. 본관은 능성(綾城). 남구만의 추천으로 임용되어 공주, 황주 등의 목사를 지냈음. - 윤두서(尹斗緖) 옥에 흙이 묻어 길가에 버렸으니 오는 이 가는 이 다 흙만 여기도다. 두어라, 흙이라 한들 흙일 줄이 있으랴. 1668(현종 9)-? . 조선의 문인. 화가. 호는 공재(恭齋), 본관은 해남. 진사시에 합격, 시문에 능했고, 동식물, 인물 등을 잘 그렸음. 현재(玄齋) 심사정, 겸재(謙齋) 정선과 함께 삼재(三齋)라 불림. - 윤 유(尹 游) 대동강(大洞江) 달 밝은 밤에 벽한사(碧漢 ) 띄워두고 연광정(練光亭) 취한 술이 부벽루(浮碧樓)에 다 깨거다. 아마도 관서 가려(關西 佳麗)는 예뿐인가 하노라. 청류벽(淸流壁)에 배를 매고 백은탄(白銀灘)에 그물 걸어 자 남은 고기를 눈살 같이 회쳐 놓고 아희야 잔(盞) 자로 부어라, 무진(無盡)토록 먹으리라. 1674(현종 15)-1737(영조 13). 조선의 문신. 호는 만하(晩霞), 본관은 해평. 생원으로 정시 문과에 급제, 벼슬이 예조판서에 이르렀으며, 당대의 명필로 이름을 떨쳤음. - 조현명(趙顯命) 헌 삿갓 짧은 도롱 삽 짚고 호미 메고 논둑에 물 보리라, 밭 기음이 어떻더니. 아마도 박장기(朴杖棋) 보리술이 틈 없는가 하노라. 1690(숙종 16)-1752(영조 28). 조선의 문신. 호는 귀록(歸鹿). 본관은 풍양 (豊壤). 진사로 증광 문과에 급제, 어려 내외직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음. 탕평책을 지지, 영조의 정책 수행에 적극 협조했고, 청렴한 생활로 일관했으며,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음. - 김수장 늙고 병든 정(情)은 국화(菊花)에 붙여 두고 실같이 허튼 수심 묵포도(墨葡萄)에 붙여 두고 귀밑에 흩나는 백발은 일장가(一長歌)에 붙였노라.
1690~? 자 자평(子平). 호 노가재(老歌齋). 숙종 때 병조에서 서리(書吏)를 지냈다. -임 제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었는다.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白骨)만 묻혔는다. 잔(盞) 잡아 권(勸)할 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 북천(北天)이 맑다커늘 우장(雨裝) 없이 길을 나니 산(山)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왕방영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 유성원 초당(草堂)에 일이 없어 거문고를 베고 누워 태평성대(太平聖代)를 꿈에나 보렸더니 문전(門前)에 수성 어적(數聲漁笛이) 잠든 나를 깨와다. - 황 희 (黃禧) 대추 볼 붉은 골에 밤은 어이 뜻들으며 벼 벤 그루에 게[蟹]는 어이 내리는고. 술 익자 체 장수 돌아가니 아니 먹고 어쩌리. 강호에 봄이 드니 이 몸이 일이 하다. 나는 그물 깁고 아해는 밭을 가니 뒷뫼에 엄기는 약을 언제 캐려 하느냐. - 원천석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로다. 오백 년 왕업(王業)이 목적(牧笛)에 붙었으니 석양(夕陽)에 지나는 손이 눈물겨워 하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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