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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의의

모링가연구가 2012. 5. 12. 19:09

  • 족보의의
  • 족보의 의의 족보(族譜)는 성씨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의 하나로 시조(始祖) 부터 역대 조상의 얼과 우리 나라의 역사가 담겨져 있으며 우리 나라 대부분의 사람이 족보에 실려있어 나와 집안의 뿌리를 알수있는 한 집안의 역사책이다. 이에 따라 옛날부터 족보는 집안의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이를 대할때는 상위에 모셔놓고 정한수를 떠서 절을 두번한 후에 경건한 마음으로 살아계신 조상을 대하듯 하였으며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이처럼 소중하게 여겨온 족보가 해방후의 서양화와 지금의 핵가족 제도가 되면서 봉건사상의 유물로만 생각하고 도외시하는 경향이 일고 있다. 그러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에서, 또 지금도 '근본이 없는 사람' 으로 치부되었을 때 그하나만으로도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조상들이 족보를 왜 그렇게 소중히 여겼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족보는 '피의 기록이며 혈연의 역사' 이다. 우리 조상들이 목숨을 바쳐가면서 지켜온 족보를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이어야 할 것이다. 족보의 역사 우리 나라의 족보는 세계에서 부러워 할 정도로 잘 발달된 족보로 정평이 나있으며, 계보학의 종주국으로 꼽힌다. 외국에도 족보학회나, 심지어는 족보전문 도서관이 있는 곳이 있는 등 가계(家系)에 대한 관심이 많지만 우리처럼 각 가문마다 족보를 문헌으로까지 만들어 2천년 가까이 기록 해온 나라는 없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의 계보학 자료실에는 600여종에 13,000여권의 족보가 소장되어 있다. 성씨 관계의 가장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는 족보는 원래 중국의 6조(六朝)시대에 시작되었는데 이는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이었으며, 개인의 족보를 갖게 된것은 한(漢) 나라때 관직등용을 위한 현량과(賢良科)제도를 만들어 과거 응시생의 내력과 조상의 업적 등을 기록한 것이 시초이다. 특히 중국 북송(北宋)의 문장가인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에 의해서 편찬된 족보는 그후 모든 족보의 표본이 되었다. 우리 나라의 족보는 고려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으로 고려 의종(18대, 1146~1170)때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이 처음이다. 그러나 고려사를 보면 고려 때에도 양반 귀족은 그 씨족계보를 기록하는 것을 중요시 하였고, 관제(官制)로서도 종부시(宗簿寺)에서 족속보첩을 관장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귀족 사이에는 보계를 기록 보존하는 일이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 집안에서 사적으로 간행되기 시작하였으나, 1476년(조선 성종7년)의 안동권씨 성화보(安東權氏 成化譜)가 체계적인 족보 형태를 갖춘 최초의 족보이다. 이후 1565년(조선 명종20년)에는 문화유씨 가정보(文化柳氏 嘉靖譜)가 혈족 전부를 망라하여 간행되면서 이를 표본으로 하여 명문세족에서 앞을 다투어 족보를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7세기 이후 여러 가문으로부터 족보가 쏟아져 나오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족보가 이 때 만들어 지기 시작했다. 조선 초기에 간행된 족보의 대부분은 족보간행을 위해 초안을 하고 관계 자료를 충실히 보완한 뒤 간행에 착수하여 내용에 하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후의 족보들은 초안이나 관계 자료의 검토, 고증도 없이 자의적으로 간행된 것이 많았다. 그리하여 자의적인 수식이 가하여 졌음은 물론이며 조상을 극단적으로 미화하고, 선대의 벼슬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조작하고, 심지어 명문 집안의 족보를 사고 팔거나 훔치는 경우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대주의 사상에 젖어 시조의 유래를 중국에 두어 기자(기원전 1122년 우리나라에 왔다고 함)를 따라 우리 나라에 왔다고 하거나, 중국의 인물을 고증도 없이 조상이라고 하는 식으로 족보를 꾸미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중화사상에 물들은 일반적인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며 족보를 간행함으로써 자신의 가문의 격을 높이려는 마음에서 야기된 것이었다. 족보의 종류1. 대동보(大同譜) 같은 시조 아래에 각각 다른 계파와 본관을 가지고있는 씨족을 함께 수록하여 만든 족보책이다. 2. 족보(族譜), 종보(宗譜) 본관을 단위로 같은 씨족의 세계를 수록한 족보책으로, 한 가문의 역사와 집안의 계통을 수록한 책이다. 3. 세보(世譜), 세지(世誌) 한 종파 또는 그 이상이 같이 수록되어 있거나, 한 종파만 수록된것을 말하며 동보(同譜), 합보(合譜)라고도 한다. 4. 파보(派譜), 지보(支譜) 시조로 부터 시작하여 한 종파만의 이름과 벼슬, 업적 등을 수록한 책이다. 이들 파보에는 그 권수가 많아 종보를 능가하는 것도 적지 않다. 파보는 시대가 변천함에 따라 증가되어 가고, 그 표제에 연안김씨 파보, 경주이씨 좌랑공파보, 순창설씨 함경파 세보 등과 같이 본관과 성씨 외에 지파의 중시조명 또는 집성촌, 세거지 지명을 붙이고 있으나, 내용과 형식에서는 족보와 다름 없다. 5.가승보(家乘譜) 본인을 중심으로 수록하되, 시조로 부터 자기의 윗대와 아랫대에 이르기까지의 이름과 업적, 전설, 사적을 기록한 책으로 족보 편찬의 기본이 된다. 6.계보(系譜) 한 가문의 혈통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이름자만을 계통적으로 나타낸 도표로서, 한 씨족 전체 또는 한 부분만을 수록한 것이다. 7.가보(家譜)와 가첩(家牒) 편찬된 형태, 내용에 상관없이 동족 전부에 걸친 것이 아니라 자기 일가의 직계에 한하여 발췌한 세계표(世系表)를 가리킨다. 8.만성보(萬姓譜)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라고도 하며, 국내 모든 성씨의 족보에서 큰줄기를 추려내어 모아놓은 책으로 모든 족보의 사전 구실을 하는 것이다. 청구씨보(靑丘氏譜), 잠영보(簪纓譜), 만성대동보(萬成大同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이 있다. 9.기타 문보(文譜), 삼반십세보(三班十世譜), 진신오세보(縉紳五世譜), 호보(號譜)와 같이 현달한 조상의 세계를 명백히 하려고 한 보서(譜書)나 대방세가언행록(帶方世家言行錄), 보성선씨오세충의록(寶城宣氏五世忠義錄) 등과 같이 조상 중 충,효,절,의가 특히 뛰어난 사적과 공훈을 수록한 것도 있다. 또한, 환관(내시) 사이에도 계보를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성이 다른 자손을 입양시켜 자손으로 삼고 가계를 보존하고 있는 양세계보(養世系譜) 등도 있다. 성씨 유래 설명 우리는 오랫동안 성씨를 사용해 온 민족이다. 뿌리가 없는 민족이라면 길가에 버려진 잡풀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 보학(譜學)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은 인간산맥(人間山脈)의 큰 뿌리가 확실하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누구의 자손이며, 누구의 혈통인가? 이곳은 우리가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는 각 성씨의 원조(原組)의 뿌리를 정확하게 캐낸 인맥(人脈)의 역사 바로 그것이다. 이제 여러분은 이 자료를 통하여 나의 뿌리에 대하여 조금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제가 이 곳을 다녀가시는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자기의 부모(父母)와 조부모(祖父母)의 이름 정도는 한자로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램입니다. 賈(가)氏 이 성씨는 소주(蘇州) 가씨 단본으로 원래 중국의 성씨로써 그 시원(始原)은 요제(堯帝)가 작은아들 公明을 가(賈)에 봉함으로써 賈로 성씨를 삼게되어, 주나라 혜왕때 가화(賈華)란 사람이 있었고, 한나라 고려 후기에 가수(賈壽)는 랑중령(郞中令)이 되었으며, 진(晋)나라 때 가효(賈孝)는 나라에 공을 세워 가(賈)성을 하사 받았다. 우리 나라의 가(賈)씨는 선조 때에 임진왜란에 전공을 세우고 전사한 賈維鍮가 시초라 함. 簡(간)氏 이 성씨는 가평(加平) 외에도 남양(南陽), 서산(瑞山), 영광(靈光), 경주(慶州), 인동(仁同), 배양(裵陽), 해주(海州)등 여러 본이 전하고 있지만 "가평"이 주된 본관이다. 원래는 중국의 성씨로써 간백(簡伯)의 후예로 전하며, 언제 우리 나라에 들어왔는지는 문헌에 나타나 있는 것이 없으므로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가평간씨의 시조 간유(簡有)는 고려 25대 충렬왕 때 사람으로 중랑장을 지낸 사람이다. 그의 후손 간홍(簡弘)이 역시 장군으로 가평간씨의 일파를 이루었고, 또, 간세진(簡世縝)을 파조로 하는 또 다른 일파가 있다. 葛(갈)氏 이 성씨는 제갈씨에서 갈린 성씨라는 설이 유력하다. 신라 덕흥왕 때 귀화한 성인데 고종 때 제갈홍(諸葛泓)의 형제가 복성을 각각 1자씩 나눠 쓰기로 하여, 형은 제(諸)씨로 동생은 갈(葛)씨로 나누었다는 것이다. 역사상 드러난 인물은 별로 없다. 고구려 장수왕 때의 장군으로 갈노(葛盧)란 사람이 있다. 甘(감)氏 감씨는 본관이 합포(合浦)감씨 단본이다. 또는 창원(昌源)감씨로 부르기도 한다. 감씨는 중국의 성씨로써 은나라때 감반(甘盤)이란 사람이 있고 후한(後漢)의 감영(甘英)은 경략가(經略家)로 유명한 반초(班超)의 부장(部將)으로써 안식국(지금의 이란)을 거쳐 시리아에서 지중해를 건너 로마제국으로 진격하려다가 지세가 불리하여 회군하고 말았지만 중군인이 서아시아에 관한 지식을 넓히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감씨가 우리 나라에 어느 때 들어왔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합포 감씨의 시조는 고려말 우왕 때 사람인 감위조(甘威朝)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때 감상중(甘尙中)이 문과에 올라 군위현감 (軍威縣監) 시강원전적(侍講院典籍)등을 역임했다. 姜(강)氏 강씨의 본관은 문헌상으로는 1백여 본이 나타나 있으나, 오늘날까지 분명히 전해오는 진주(晋州), 금천(衿川), 안동(安東), 백천(白川), 해미(海美), 동복(同福), 광주(光州), 봉일(鳳壹), 법전(法田)등 9본뿐인데, 그것도 모두가 대종(大宗)인 진주에서 갈려진 것으로, 다만, 강씨가 모여사는 지방 이름들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진주강씨의 시조 강이식(姜以式)은 모든 강씨의 첫 시조가 된다. 시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 온다. 그 가운데 하나는 수(隨)나라 사람으로 수양제(隨煬帝)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정동대원수(征東大元帥)로 출정했다가 고구려에 귀화했다는 것과, 또 하나는 고구려 사람으로 요동(遼東)을 정벌할 때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출정했다는 설이 있다. 현재 진주강씨의 80%는 강창서(姜彰瑞)의 후손으로 그 가운데서는 강사첨(姜師瞻)의 자손이 가장 많다. 대종파(大宗派)는 시조에서부터 강창서(姜彰瑞)에 이르기까지 계보(系譜)를 달고 있지만 분명치 않고, 은열공파(殷烈公派)의 본을 따르고 있다. 금천강씨파(衿川姜氏派)는 시조에서 강한찬(姜邯贊)에 이르기까지의 계보를 각각 따르고 있으나 모두가 확실하지 않다. 은열공파의 중시조(中始祖)인 강민첩과 금천강씨파의 강감찬은 다같이 고려사에 크게 무훈을 세운 병장들이다. 고려 초엽인 성종에서 현종에 이르는 약 80년 사이에 세 차례나 거란족의 침입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 제 3차 침입이 가장 규모가 컸다. 그 때 소배압(簫排押) 이끄는 거란 대군을 귀주(龜州) 싸움에서 상원수(上元帥) 강민첩 장군과 강감찬 장군이 각각 통쾌한 승리를 거두어 역사상 유례 없는 대첩을 장식하였다. 강씨는 조선시대에 상신(相臣) 5명, 대제학(大提學) 1명, 청백리 7명을 냈다. 통정공파(通亭公派) 통정공파(通亭公派)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강희안(姜希顔), 강희맹(姜希孟) 형제를 꼽는다. 조부인 강준백(姜准伯)은 고려 때 대사헌을 지내고 조선개국 후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를 역임하였다. 강희안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이 되어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고, 뒤에 호조참의(號曹參議)를 지냈다. 강희맹은 당대의 문장가이며 서화가였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직제학 병조정랑을 거쳐 명나라에 다녀온 후 이조판서에 올랐다. 그는 세조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죽은 후에도 성종은 서거정(徐居正)을 시켜 그의 유고(遺稿)를 편찬케 했다. 강희맹은 강희안의 조카이다.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都承旨) 등을 역임하고 수양대군의 등극을 도와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뒤 좌참찬, 우의정, 영의정에까지 이르렀다. 연산군 때 우의정을 지낸 강귀손(姜龜孫)은 그의 아들이다. 통계공파 통계공파의 姜동은 세종때 관찰사를 지낸 강자평(姜子平)의 아들로, 성종 때 지평(持平)을 거쳐 연산군 때 대사간(大司諫)으로 있다가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참화를 입었으나, 그의 세 아들 호(滸), 택(澤), 온(溫)은 모두 영달하였다. 온(溫)의 다섯 아들 가운데 맏이인 강사상(姜士尙)은 명종 때 대제학(大提學), 도승지(都承旨), 대사헌(大司憲)등을 지냈고, 선조 때에는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을 역임하였다. 그의 네 아우 가운데 사안(士安)은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지냈고, 사필(士弼)은 관찰사를 지냈다. 강사안(姜士安)의 아들 강신(姜神)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 관찰사, 부제학,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냈다. 강인(姜絪)은 임진왜란 때 왕을 잘 호위하여 진창군(晋昌君)에 봉해졌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적진을 왕래하며 외교로써 공을 세웠다. 은열공파(殷烈公派) 은열공파(殷烈公派)에서는 강백년(姜栢年), 강현, 강세황(姜世晃)의 3대가 유명하다. 강백년(姜栢年)은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효종 때 충청,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청백리로 뽑혔다. 그의 아들 강현도 형조판서, 대제학 등을 지냈다. 강세황(姜世晃)은 강삼(姜三)의 아들로써 육조의 참판을 고루 지냈으며, 특히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다. 고종 때 좌의정을 지낸 강노(姜 )는 강세황(姜世晃)의 증손인데, 철종 때는 대사간을 지냈고, 뒤에 병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인헌공파(仁憲公派)의 강석기(姜碩期)는 인조 때 우의정을 지냈다. 이 밖에 명신(名臣)으로는 광해군 때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낸 사필(士弼)의 아들 정, 명종 때 공조판서를 지낸 강현(姜顯) 등을 들 수 있고, 학자로는 강항(姜沆)이 이름났다. 그 밖에 청련하고 강직하여 강경파로 일컬어진 숙종대에서 영조대까지 활약항 인물로는 특히 강석보(姜碩寶), 강복(姜樸), 강필신(姜必愼), 강필경(姜必慶) 등을 꼽을 수 있다. 강석보(姜碩寶)는 현종 때 문과에 올라 대사간(大司諫)을 지냈고, 강복(姜樸)은 영조 때 부교리(副校理)를 지냈으며, 강필신(姜必愼)은 지평(持平)을, 강필경(姜必慶)은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등을 지냈다. 구한말 황성신문(皇城新聞)의 발행인의 한사람인 강위(姜瑋)는 시인으로도 유명했다. 근세에 와서는 독립투사였던 강우규(姜宇奎) 의사를 꼽을 수 있다. 康(강)氏 강(康)씨의 본광은 십여본이 전하고 있지만 그 중 신천(信川), 곡산(谷山), 재령(載寧)이 대본으로 오늘날엔 이 세본 이외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강씨의 도시조는 기자조선 시대 기자(箕子)의 막료였던 강숙(康叔)이고, 시조는 전설상의 인물인 호경(虎景)으로 전한다. 그는 신라 말엽의 사람으로 성골장군이라 일컬으며, 백두산으로 부터 각지로 유랑하다가 송도(개성) 부소산(扶蘇山) 골짜기에 자리잡고 살았다고 한다. 뒤에 강충(康忠)이란 아들을 낳고 충(忠)은 또 보육(寶育)을 낳으니 이 보육이 곧 고려 태조 왕건의 외고조부 되는 사람으로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자 원덕대왕으로 추존되었다. 하지만, 강씨의 중시조이며 실질적인 시조는 충렬공 강지연(康之淵)이다. 그는 고려 고종 때(몽고 침입 때) 호종공신(扈從功臣)으로 신성부원군(新城은 신川의 옛 이름)에 봉해짐으로써 신천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오늘날 모든 강씨는 이 강지연(康之淵)의 후손이다. 강득용(康得龍)은 조선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친 오라버니이다. 그는 고려 공민왕조에 삼사우사(三司右使)를 지냈는데 조선이 건국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생각으로 관악산에 들어가 연주암에 살면서 매일같이 연주대에 올라 송경(松景, 개성)을 바라보며 통곡했다. 연주암 연주대의 명칭은 이 때 생겼다. 조선태조는 그를 안릉부원군(安陵府院君)에 봉하고 정안공(靖安公)이란 호를 내렸고, 후손은 재령(載寧)에 관적했다. 강씨는 고려조에 강조(康兆, 목종 때 무신, 도총관)을 비롯 강증(康拯, 예종시 평장사), 강호문(康好文, 공밍왕조 판전교사사), 강순룡(康舜龍, 공민왕와조 찬성사) 등을 배출하여 명문에 속했지만 이조에 와서는 왕후를 냈으면서도 왕자의 난으로 인해 별로 빛을 보지 못했다. 조선시대 때 문과 급제자는 36명인데 신천(新川)이 20명, 곡산(谷山)이 7명, 재령(載寧)이 2명, 본관을 알 수 없는 사람이 7명이다. 强(강)氏 본관은 충주(忠州)이며, 원래 중국의 성씨로써 진(晋)나라의 대부 강채(强釵)의 후손으로 전하는데, 언제 우리 나라에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 江(강)氏 중국 제양(濟陽)에서 남 백익(伯益)의 후예, 강국(江國)이 있어 씨로 정함 甄(견)氏 주요본관은 황?(黃?)이며, 시조는 견훤(甄萱)으로 되어있다. 앞서 견훤의 아버지 아연개(阿慾介)는 원래 본성이 李씨로써 농사를 짓다가 신라 말기에 지금의 상주에 웅거하여 스스로 장군이 되어 고을을 다스렸다고 한다. 그러니까 신라 말기에 세력을 떨친셈이다. 그의 아들 견훤은 유명한 후백제의 왕이다. 견훤의 아버지 아연개(阿慾介)는신라 진흥왕의 후손이 되는데, 견훤이 아직 젖먹이 였을 때 밭에서 일을 하면서 그를 수풀 밑에 두었더니 난데없이 호랑이가 나타나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것이었다. 그는 점차 자라면서 몸집이 크고 생김생김이 범상치 않았다는 것이다. 신라 말기에 나라의 기강이 어지러워지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허덕일 때, 여기 저기서 군도들이 벌떼같이 일어나게 되자, 이 틈을 탄 견훤(眞聖女王 6년)은 무리를 모아 지금의 광주를 점령하여 세력을 확장하던 끝에 8년 뒤인 효공왕 4년에는 지금의 전주를 점령하고 후백제를 세웠다. 그 뒤 후고구려의 궁예와 자주 충돌하고 그 곳에서 떨어져 나온 왕건(王建)의 고려와도 일진일퇴(一進一退)하는 한편,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 까지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우는 등 한 때 군사적으로 우세를 보이기도 했다. 堅(견)氏 본관은 천령(川寧, 여주지방)과 사양(沙梁, 수원지방), 김포(金浦), 충주(忠州) 등이 있으며,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開國功臣)인 견권(堅權)이다. 景(경)氏 이 성씨의 시조는 경차(景磋)다. 그는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그의 후손이 고려조에 벼슬하여 요직에 있었다. 아들 설정(洩淨)은 보문각대재학(寶文閣大提學)을 지냈고, 설정(洩淨)의 아들 상조(祥組)는 직제학 대사공(大司空)을, 상록(祥祿)은 좌복야를 지냈다. 그의 후손들 중 경기도병마절도사(京畿道兵馬節度使)를 한 경세정(景世貞), 세정의 아들 일창(日昌)은 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를 역임했다. 8세손 세양(世楊)은 조선태조 때 무과에 올라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다. 慶(경)氏 이 성씨는 청주 경씨 단본으로 시조는 고려 명종 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낸 경진(慶珍)이다. 그의 아들 경대승(慶大升)은 의협심이 강하여, 후에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그의 후손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른 경복흥(慶復興)이 있다. 그의 두 아들이 조선 개국 후에 각각 벼슬을 하였다. 조선시대에 14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으며, 그 중 대표적 인물로는 경세창(慶世昌), 경세인(慶世仁) 등이 있다. 경세창(慶世昌)은 선조 때 문과에 올라 부제학(副提學), 황해도관찰사, 호조참판(戶曹參判) 등을 지냈다. 그리고, 경혼(慶渾)은 명종 때 대사간(大司諫), 부제학(副提學),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부제학 호조참판을 지낸 경섬(慶暹)이 있다. 桂(계)氏 이 성씨는 수안(遂安)계씨 단본으로 명대(明代)의 귀화 성씨로 알려졌다. 시조는 명나라의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낸 계석손(桂碩遜)이다. 역사상 대표 인물로는 계덕해(桂德海)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영조 때의 학자로써 별식 문과에 장원하여 예조좌랑(禮曹佐郞) 찰방(察訪) 등을 역임했으며, 문집 계찰방집(桂察訪集)을 냈다. 근대 인물로는 독립운동에 투신한 계화(桂和)가 있다. 高(고)氏 고(高씨)는 양(梁)씨, 부(夫)씨와 함께 탐라(耽羅, 제주도의 옛 이름)의 지배 씨족으로 이들 3성의 탄생에 대해서는 삼성혈(三姓穴) 전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옛날 사람과 만물이 없었을 때 한라산 북쪽 기슭 모흥혈(毛興穴)에서 세신이 솟아났다. 양을나(良乙那), 고을나(高乙那), 부을나(夫乙那)가 그들이다. 그들은 수렵을 하며 살았는데 하루는 바다에 이상한 상자가 떠내려와 건져보니 세 미녀와 오곡의 종자와 망아지, 송아지가 들어 있었다. 세 신인은 세 미녀와 각각 결혼하여 농사를 짓고 살게 되니 그로부터 탐라는 융성해졌다는 전설이 있다. 결국 삼신 중의 고을나(高乙那)가 고씨의 시조라는 것이다. 앞의 전설에서 알 수 있듯이 고씨의 본관은 제주를 대종으로 하고, 장흥(長興), 연안(延安), 용담(龍潭), 담양(潭陽), 선령(宣寧), 고봉(高峰), 옥구(沃溝), 상당(上黨), 횡성(橫城), 금화(金化), 토산(兎山), 회령(會寧), 안동(安東) 등 10여본이 문헌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모두 제주에서 떨어져 나간 것임에 틀림없다. 제주고씨 세보(濟州高氏 世譜)에 따르면 탐라의 군주는 고을나(高乙那)로 부터 45세(世)까지 高씨가 세습해 내려오다가 46세(世) 고말로(高末老)가 고려 신하가 되니 이가 곧 고씨의 중시조가 되는 셈이다. 이 무렵부터 고씨는 속속 육지로 진출하기에 이르렀다. 고(高)씨중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는 총 77명인데 본관별로 나눠보면 아래와 같다. 장흥(長興) 29명, 제주(濟州) 28명, 개성(開城) 8명, 안동(安東) 2명, 횡성(橫城) 2명, 강화(江華)·장진(長津) 각 1명, 나머지 6명은 본관이 미상이다. 제주고씨(濟州高氏) 대표적인 인물은 고득종(高得宗)이다. 그는 조선태종 때 효행이 두터워서 벼슬에 천거되어 직장(直長)을 지내다가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대호군(大護軍), 예빈사판관(禮賓寺判官) 등 벼슬을 지내고 세종 때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두 차례나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통신사로 일본에 가 천황의 서계(書契)를 가지고 돌아온 후 한성판윤, 이조판서 등을 지냈는데 특히 문장이 뛰어났다. 장흥고씨(長興高氏) 고경명(高敬命)으로 이름이 났다. 그는 중종 때 문신이자 화가로 조광조(趙光組) 등과 친교를 맺었다가 을묘사화에 연루된 고운(高雲)의 손자요. 명종 때 대사간을 지낸 고맹영(高孟英)의 아들이다. 그는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에 뽑히고 교리, 옥당(玉堂) 등 벼슬을 지낸 유학자였다. 선조 때 동래부사로 있다가 벼슬을 떠났던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장흥에서 6천여 의병을 이끌고 싸우다 군사들과 함께 전사했다. 개성고씨(開城高氏) 광해군 때 우산판관을 지내고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의 작자로 전하는 고상안(高尙顔) 등 문신 학자를 많이 배출했다. 영조때 창령현감(昌寧縣監)으로 어진 정사를 베풀어 고창령(高昌寧)이란 별명을 듣고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고유(高裕), 조선 중엽의 대표적 시인으로 세조에서 영조 대의 서민시집인 소대풍요(昭代風謠)를 엮어낸 고득언(高得彦)이 빼어났다. 曲(곡)氏 곡(曲)씨의 본은 용궁(龍宮), 면천(沔川)이며, 고려 태조 때에 평찰(評察) 벼슬을 한 곡근회(曲矜會)가 있다. 骨(골)氏 계출이 불명하나 수양제(隋楊帝) 때의 골의(骨儀), 본래 천축(天竺) 사람으로 장안(長安)에 살며 군승(郡承) 貢(공)氏 중국 광평(廣平)에서 남. 아들을 공후(貢後)자(字)로써 씨를 정함. 孔(공)氏 공(孔)씨는 곡위(曲韋) 공(孔)씨 단본이다. 시조는 공자(孔子). 그의 53대손 공소(孔紹)가 고려 충정왕 때 노국대장공주를 수행하여 와서 평장사의 벼슬을 받고 고려에 귀화했다. 조선정조 때에 공자의 고향인 곡위(曲韋)를 관향으로 하사 받았다. 공소(孔紹)의 아들 노(努)는 고려조에 집현전태학사, 평장사 등을 지냈다. 노(努)의 큰 아들 공부(孔府)는 우왕 때 문과에 올라 집현전태학사를 지내고 조선시대에 검교한성부윤과 보문각 대제학을 지냈다. 둘째 아들 공은(孔隱)은 우왕 때 문과에 올라 평장사를 지내고, 조선이 개국한 뒤 은퇴했다. 태종이 여러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공서?(孔瑞?)은 중종 때의 강직한 신하로 경기도 관찰사 등의 벼슬을 지냈다. 조선조 문과 급제자는 8명이다. 公(공)氏 본관은 김포(金浦) 공(公)씨 하나뿐이며, 시조는 고려 대 장군 공순영(公純永)으로 전한다. 그의 선대는 중국 노(魯)나라 왕족의 후손으로써 공윤보(公允輔)가 18학사의 한 사람으로 난을 피해 신라 경덕왕 14년에 우리 나라에 들어와 경기도 김포에 살았다고 한다. 역사상 주요 인물로는 조선중종 때 사람 공규(公珪)가 있다. 그는 중종 17년에 문과에 합격되여 서작(薯作), 정언(正言)등을 거쳐 성균관 전적(典籍)에 이르렀는데, 시문(詩文)에 능했다고 한다. 郭(곽)氏 곽(郭)씨는 문헌에 6본으로 되어 있으나 오늘날엔 현풍(玄風)과 청주(淸州) 2본 뿐이다. 현풍(玄風) 곽(郭)씨의 시조 곽경(郭鏡)은 원래 송나라 사람으로 고려 인종 때 귀화하여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문하시중평장사에 이른 사람이다. 청주(淸州) 곽(郭)씨는 신라 헌강왕 때 시중을 지낸 곽상(郭祥)을 시조로 하고 있는데 그들 역시 중국에서 건너온 귀화인으로 알려져 있다. 현풍(玄風) 곽(郭)씨 조선시대 때 이름난 도덕 가문으로 정려(충신이나 열녀가 난 고장에 나라에서 세워 표창하던 문)가 12개나 되었다. 때문에 12정려하면 으레 현풍(玄風) 곽(郭)씨의 애기가 따른다. 현풍(玄風) 곽(郭)씨중에서도 청백리 곽안방(郭安邦, 세조 때 익산군수)의 자손이 그러했다. 그의 현손에 주(走)자 항렬의 8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 곽월(郭越, 선조 때 부사), 곽준(선조 때 안음현감), 곽율(선조 때 초계군수) 3형제가 특히 빼어나고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크게 활약했기 때문에 당시 현풍 8주의 호칭으로 영남 일대에 이름을 떨쳤다. 그 중 곽준의 집안은 1문3강(一門三綱)의 집으로 유명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안음현감으로써 호남의 황석산성을 끝까지 지키다가 전사했다. 이 때 그의 두 아들 곽리상(郭履常), 곽리후(郭履厚)도 뒤따라 전사했다. 그리고 그의 딸과 며느리도 남편이 전사하자 스스로 목을 매어 뒤따라 죽었다. 이리하여 한 집안에 삼강이 한꺼번에 나온 것이다. 나라에서는 정려를 세워 길이 표방했음은 물론이다. 곽재우(郭再祐)는 홍의장군으로 유명하다. 그는 황해도 관찰사 곽월(郭越)의 아들이고 조식의 문인으로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한 사람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붉은 구름무늬 비단갑옷을 입고, 투구에 백금 날개를 달고, 단숨에 천리를 달리는 백마를 타고 나타나 의병을 일으켜 왜병을 곳곳에서 무찔렀다. 의령, 삼가, 초계, 창령 등에 귀신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게릴라식 전투로 크게 기세를 올렸다. 종내 영남의 모든 고을이 함락되었지만 그는 끝까지 의령을 지켯다. 그 뒤 진주목사겸 경상우도조방장이 되었지만 광해군 5년 영창대군을 구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사직했다. 조정에서 여러차례 병마절도사, 수군통제사 등의 벼슬을 주었지만 모두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한 때 자기의 경륜을 펴보기 위해 부총관(副摠官), 한성부좌윤, 함경도좌윤으로 나갔으나 조야가 어지러움을 탄하여 다시 은둔 생활을 했다. 조선시대 때 곽씨의 문과 급제자 수는 57명이며 본관별로는 현풍(玄風)이 30명, 청주(淸州) 14명, 해미(海美) 4명, 선산(善山)과 풍산(風山)이 각 3명이고, 본관 미상이 3명이다. 具(구)氏 구(具씨)는 세조에서 11대 영조까지 약 3백년간 많은 장수와 공신을 배출하여 무관집안으로 손꼽힌다. 구(具씨)는 문헌상으로나 현존하는 실제로나 능성(綾城) 단본으로 알려져 왔으나 창원(昌原)에 관적한 또 다른 구씨가 있다. 창원(昌原) 구(具)씨는 원래 구(仇)씨였는데 이조 중엽에 공훈을 세워 구성(具姓)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능성(綾城) 구(具)씨의 시조는 고려 벽상공신, 검교상장군인 구재유(具在裕)다. 그는 송나라 한림학사 주잠(朱潛)의 사위인데 주잠이 우리 나라에 귀화할 때 사위인 그도 따라온 것이 아닌가 생각되고 있다. 능성(綾城) 구(具)씨는 6대손 대에서 아홉파로 갈라진다. 그 중 도원수파·판안동파·좌정승파 등 3파가 이조에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그들은 크게 번창하여 오늘날 구씨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능성(綾城) 구(具)씨는 이들 대에 와서 비로소 빛을 내기 시작하여 세조 때에 구치관(具致寬)이 영의정을 지내면서 정치의 중추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들은 조선시대에 정승 2명을 비롯하여 공신 9명과 부마 3명을 배출했다. 공신 9명은 씨족수에 비하여 굉장히 많은 슷자이다. 더구나 중종반정 공신 구현휘(具賢暉), 구서영(具書永), 인조반정 공신 구굉(具宏), 구인후(具仁 ), 구인즐(具仁 )등 5명이 반정 공신이고, 나머지도 왕위 옹립과 관련이 있는 공신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능성(綾城) 구(具)씨는 조선시대에 총562명의 과거 급제자를 냈는데, 그 중 진사가 144명, 문과가 55명, 무과가 363명으로 무과가 단연 우세하다. 그 중에서도 영조 때까지 장신(將臣)급이 9명이나 나왔는데 그 숫자는 그 때까지 장신 총수의 12분의 1에 해당한다. 이들 명단을 보면 구사직(具思稷, 광해조, 병사, 수사), 구굉(具宏, 인조조, 훈련대장, 어영대장), 구인후(具仁 , 인조조, 어영대장), 구인기(현종조, 총술사), 구문치(具文治, 현종조, 훈련대장, 어영대장),구감(具鑑, 숙종조, 총술사), 구성임(具聖任, 영조조, 금위대장, 훈련대장), 구선복(具善復, 영조조, 어영대장, 훈련대장) 등으로 이들 장신은 대부분 한양의 경비 혹은 군사의 훈련을 맡은 사람들이라 자연히 왕권의 향방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다. 구치관(具致寬)은 구씨 중 첫 번째 공신인데 예조의 즉위에 공을 세워 좌익공신 3등에 오르고 세조의 심복이 되어 나중에 영의정에 까지 이르렀다. 뒤에 세조의 손자 성종이 13세에 왕위에 올라, 나이 어린 임금의 지위를 빼앗았던 세조의 선례가 되풀이 될까 두려워 가장 위협적 존재인 구성군 이준(세조의 손자로 28세에 영의정)을 제거하게 되는데, 이 때 그와 6촌간인 구문신(具文信)도 가담.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올랐다. 구인후(具仁 )는 원래 김장생의 문인이었는 데 선조 때 국난을 당하자 문과를 뜻했던 그의 생각을 버리고 무과를 택해 인조반정 후 각기 무반의 요직을 두루 지냈고, 효종 때 병조판서에서 좌의정에 이르렀다. 구굉(具宏)은 형조·공조·이조판서 등을 전 후 아홉번이나 역임한 인물이다. 이와 같은 능성(綾城) 구(具)씨의 정치적 위세는 중종에서 인조에 절정을 이루었는데 정조초 훈련대장 구선복(具善復)의 역모와 사도세자 사건을 계기로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그 밖의 인물로는 좌정승과 시조인 구?이 있다. 그는 고려 우왕 때 좌시중(左侍中, 좌의정급)을 지냈는데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숨어 조선태조가 좌정승을 주어 불렀지만 끝내 응하지 않았다. 丘(구)氏 이 성씨는 편해구씨 단본으로 시조는 구대림(丘大林)이다. 그는 중국 한나라 사람으로 일본을 가다 풍랑을 만나 편해에 표착하여 그곳에서 자리잡고 살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과 급제자가 6명이다. 그 중 대표적 인물은 성종 때 좌찬성에 이른 구종직(丘從直)이다. 그는 문장과 경학·역학의 대가였으며, 그의 아들 구달손(丘達孫)은 문과에 올라 직제학(直提學)에 올랐고, 숙손(夙孫)은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냈다. 邱(구)氏 고대 중국의 구(丘)씨 가운데는 공자의 휘(諱, 이름)가 丘인 것을 피해 구(邱)씨로 개성(改姓)한 사람이 더러 있었다고 전한다. 菊(국)氏 본관이나 시조 등 자세한 것은 전하는 것이 없으나 현존하고는 있다. 鞠(국)氏 본관이 담양 국씨 단본으로 시조는 송나라에서 고려에 들어와 살게된 국양(鞠樑)이다. 그의 아들 대애(代崖) 국유(鞠 )가 공민왕때 부통사가 되어 도통사 최영과 함께 탐라(제주도)를 토격하고 병부상서겸 판의금부사에 올랐는데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 그의 자손에 학자로 강직한 국경례(鞠經禮)가 있으며, 그의 후손에 벼슬한 사람이 많아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번창했다. 國(국)氏 본관은 담양(潭陽), 풍천(豊川), 현풍(玄風), 영양(英陽), 금성(金城), 대명(大明) 등이 있다. 국씨는 원래 옛 백제의 대성(大姓)으로써 번성하였으나 고려 이 후 소멸하고, 현재는 통털어 2백 여명이 생존할 뿐이다. 역사적 인물로는 백제 무왕(武王) 때 벼슬한 국지모(國智牟)와 고려 태조(太祖) 때 원외랑(員外郞) 벼슬을 한 국현(國鉉)이란 사람이 있다. 君(군)氏 군(君)씨는 국세조사당시(1960년)에 나타난 성시이다. 弓(궁)氏 본관은 토산(兎山) 하나뿐이며, 시조는 고려 숙종 때의 우문감(右門監)을 지낸 궁제(弓濟)이다. 그의 후손 궁원일(弓元一)이 조선시대 고종 때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다. 근대 인물로는 독립운동가 궁달초(弓澾楚), 궁억노(弓億魯), 궁현섭(弓顯燮), 궁인성(弓寅聖) 등이 있는데, 그 중 궁인성(弓寅聖, 평함, 순천출신)은 독립단의 평남 단장으로 활약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15년간의 옥살이를 겪고 중국에 망명하여 독립투쟁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權(권)氏 권(權씨)는 숫적으로나 질적으로 대성으로 꼽히면서도 안동(安東) 권씨와 예천(醴泉) 권씨 단 두 본 뿐이다. 그 두 본이 모두 고려조에 내려진 것이 특색이다. 안동(安東) 권씨의 시조는 권행(權幸)으로 원래는 신라 종성(宗姓)인 김씨였다. 고창군(現 安東) 별장인 그는 신라 말엽 견훤이 경애왕을 죽인데 격분하여 견훤과 싸우는 한편 고려 창업에 한창이던 태조 왕건에게 넘어갔다. 태조는 김행(金幸)과 함께 고려 신하가 되기를 자청한 김선평(金宣平), 장정필(張貞弼)에게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태사(三韓壁上功臣 三重大匡太師)란 벼슬을 내리고 특히 큰 공을 세운 김행(金幸)에게 권(權)씨 성을 하사했다. 예천(醴泉) 권씨의 시조 권섬(權暹)은 원래 성이 흔(昕)씨 였다. 고려 충목왕(忠穆王)의 휘(諱)가 역시 같은 흔(昕)이어서 나라에서 그의 외가의 성인 권씨로 고치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안동 권씨의 일부가 한 때, 왕(王) 씨가 되었던 일이 있어 재미있다. 권행(權幸)의 12대손인 권담(權潭)은 다섯 아들을 두었다. 그 중 넷째인 재(載)가 충선왕의 귀여움을 받아 그의 양자가 되었다. 왕은 그에게 왕?이란 이름을 내렸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으로 바뀌자 다시 권씨로 돌아왔다. 오늘날 안동 권씨들이 왕?의 자손을 가리켜 왕권(王權)집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그 것이다. 능동실기(陵洞實記)에 따르면 권씨도 조선조에 문과 급제자가 무려 390명이나 되는데 그 중 359명이 안동이고, 12명이 예천이다. 단위 씨족별로 이만큼 화려한 예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안동(安東) 권(權)씨 안동 권씨는 고려 말엽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확고한 기반을 다졌다.그들은 10세를 전후하여 크게 14파로 갈라졌는데 그 중에서는 추밀원 부사공파(樞密院 副使公派)와 복야공파(僕射公派), 그리고 인가파(仁可派)에서 인물이 낳이 났다. 부사공파(副使公派)의 권담(權潭)은 그 자신은 물론 다섯 아들과 세명의 사위 등 아홉명이 모두 군(君)으로 봉해져 당대 9봉군(當代九封君)으로 이름을 떨쳤다. 당대 9명이 봉군된 일은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라는 게 안동 권씨들의 자랑이다. 권근(權近)은 이색(李穡)과 정몽주(鄭夢周)의 제자이면서 그들 두사람에 버금가는 고려말의 대 학자다. 그는 고려조에 여러 벼슬을 지내고 조선태종 때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는 예문관대재학(藝文館大提學), 대사성(大司成),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 등을 지내고 왕의 명령으로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찬했다. 그가 지은 입학도설(入學圖說)은 후일 이황(李滉), 장현광(張顯光)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문학에 뛰어났고, 양촌집(陽村集), 사서오경구결(四書五經口訣), 입학도서(入學圖書) 등 저서를 남겼다. 권율은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이 함락된 후 광주 목사가 되어 왜병을 무찌르고 전라도 순찰사가 된 사람이다. 그는 행주산성에서 2청8백의 적은 병력으로 왜장 소조천(小早川)의 3만의 대군을 맞아 유명한 행주대첩(幸州大捷0을 올렸다. 그 전공으로 도원수(都元帥)에 올랐다. 예천(醴泉) 권(權)씨 시조 권섬(權暹)의 증손 맹손(孟孫)은 조선문종(文宗) 때 이조판서와 중추부원사를 지냈고, 맹손(孟孫)의 손자 오복(五福)은 호당(湖堂)에 뽑히고, 연산군 때 교리로써 무오사화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라 하여 극형을 받았다. 그는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斤(근)氏 본관은 청주 하나 뿐이고 역사에 자세히 나타난 것은 아직 없다. 琴(금)氏 이 성씨의 본관은 봉화(奉化), 계양(桂陽), 강화(江華), 안동(安東) 등이 문헌에 전하나 지급은 봉화금(奉化琴)씨로 일원화되었다. 시조는 금용식(琴容式)이며, 중시조 금의(琴儀)를 1세로 하고 있으며, 그는 고려 명종 때 사람으로 문장에 뛰어나 지공거시관(知貢擧試官)을 맡아보며 많은 인재를 길러냈으며, 琴학사(學士)라고 불리었다. 조선시대에서는 금난수(琴蘭秀)와 금응협(琴應夾)을 들 수 있는데, 금난수(琴蘭秀)는 명종 때 장노원사평을 지냈다. 그 외에 많은 학자들이 있고, 문과에 급제한 사람은 모두 14명이다. 奇(기)氏 행주로써 단본이다. 이 성씨는 고려조의 번창한 씨족으로 고종 때 기윤위(奇允偉), 기윤?(奇允?)이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1명의 영상(領相)과 22명의 문과 급제자와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단종 대 대사헌(大司憲)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맑고 깨끗한 관리였다. 그의 증손 기준(奇遵)은 을묘팔현(乙卯八賢)의 한 사람으로써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을 거쳐 응교(應敎)가 되었다가 을묘사화로 여러 선비들과 화를 당해 유배되었다. 그의 아들 대항(大恒)은 부제학 및 대사헌등 여러 직을 거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역임했다. 학문으로 유명한 기고봉(奇高峰)이 있다. 기자훈(奇自獻)은 영의정(領議政)에 올랐고, 항일운동을 한 기정진(奇正鎭)은 구한말 사람으로 성리학(性理學)의 6대가(六大家)의 한 분이다. 箕(기)氏 본관은 행주(幸州) 하나뿐이며, 시조는 옛 기씨(箕氏)조선의 기자(箕子)의 후손으로 일컬고 있다. 그런데, 옛 기자(箕子)의 후손으로 전해오는 행주기(幸州箕)씨가 따로 있는데, 기씨(箕氏)는 이미 기(奇)씨의 동원(同源)인 것으로 짐작된다. 吉(길)氏 본관은 해평(海平)으로 단본이다. 이 성씨가 오늘날 명문이라 일컬어짐은 고려말 3은(三隱)의 한 사람인 길재(吉再, 야은(冶隱))의 음덕이 두고두고 빛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경상도 선산부 해평에서 지금주사(知錦州事)를 지낸 길원진(吉元進)의 아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당대에 이름난 석학들한테 성리학을 배웠으며, 우왕 때 문과에 급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와 문하주서(門下注書) 등을 지내다가 고향에 와서 효도를 하면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는 유도(儒道)의 참다운 실천자였고, 정직하고 의로웠으며, 효행(孝行)은 극진하였다. 吉?는 선조 때 문과에 올라 시평, 장령(掌令) 등을 역임했으며, 조선시대 때의 문과 급제자는 7명이다. 근대 인물로는 길선주(吉善宙)가 있다. 그는 우리 나라 최초의 기독교 목사가 되었으며, 육영사업에도 노력했고, 3·1운동 때에는 33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저서로 강대보감(講臺寶鑑)과 말세론(末世論) 등이 있다. 金(김)氏 김씨의 본관은 무려 600여 본이 나와 있으나 시조가 뚜렷이 밝혀져 있는 것은 약 1백여 본 정도에 불과하다. 이들 여러 김씨는 크게 나누어 가락국(駕洛國)의 수로왕(首露王)을 시조로 하는 김해(金海) 김씨 계(系)와 신라의 알지(閼知)를 시조로 하는 경주(慶州) 김씨 계(系)두 갈래로 크게 나뉘어지며, 지금 사용되고 있는 김씨는 거의 모두가 수로와 알지계에서 갈리어 나간 것이라고 한다. 수로왕(首露王) 삼국유사의 가락국 기록에 의하면 가락에는 본디 9명의 촌장(村長)이 있어 각 지방을 다스렸는데, 이들 9명은 어느 해 (後漢 建武 18년) 구지봉(龜旨峰)이란 산에 올라 신탁(神託, 신의 뜻에 맡김)에 의해 가락국을 다스릴 군장(軍長)을 얻고자 의식을 거행했더니 마침내 하늘에서 6개의 해만한 황금알을 담은 금상자가 내려왔다. 이튿날 이 여섯알이 동자(童子)로 변하여 그 중 먼저 나온 수로(首露)를 가락의 임금으로 삼았고 나머지 다섯 동자도 각각 5가야(伽倻)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김알지(金閼知)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신라 제 4대 탈해왕(脫解王) 9년 봄, 어느날 새벽 경주 계림(鷄林)에서 이상한 닭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곳에 가 보았더니, 울창한 소나무 숲 높은 가지에 금빛 찬란한 작은 궤가 걸려 있고, 그 밑에서 흰 수탉이 울고 있었다. 그 궤를 가져와 열어 보니 뜻밖이도 용모가 비범한 사내 아이가 들어 있는지라, "하늘이 내려주신 아들"이라고 크게 기뻐하며 거두어 길렀다고 한다. 이 아이가 곧 알지(閼知)다.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金이라 지어 주었다는 것이다. 경주 김씨의 원조(元祖)인 김알지는 신라 왕실의 박(朴), 석(昔), 김(金) 세성중의 하나인 바로 그 김씨 이다. 간성김씨 시조 김생명(金生溟)은 대보공 김알지의 후예라 전해질 뿐 문헌이 없어 세계를 알 수 없다. 그는 금강위(金剛尉)를 지냈다.간성군(杆城君) 길(吉)을 시조로 전해지는 문헌도 있다. 후손들이 본관을 간성으로 했다. 1930년도 국세조사 통계에 의하면 후손이 함남 안변군 문산면 일원에 45호, 함남 안변군 신모면 용포리에 54호가 살고 있었다. 감천 김씨 시조 김만추(金萬秋)는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전해질 뿐 문헌이 없어 세계를 알 수 없다. 그는 문과 급제자로 전하며 후손들이 본관을 감천이라 했다. 강릉김씨 강릉 김씨의 시조 주원(周元)은 신라통일을 이룩한 태종무열왕 김춘추(金春秋)의 5세손이다. 그는 신라 혜공왕 13년 이찬으로 시중이 되었고, 신라 선덕왕 6년 왕이 죽고 아들이 없어 여러 신하들의 회의에서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갑자기 큰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범람하여 건너지 못해 입궐하지 못하게 되자 하늘의 뜻이라 하여 즉위를 포기하였다. 이에 원성왕이 즉위하니 그가 내물왕의 12대손 김경신이다. 그후 원성왕은 그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유했으나 끝내 사양하고 강릉으로 은거하자 원성왕은 그의 겸손함에 감복하여 명주군왕으로 봉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강릉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후손으로는 시조 주원의 8세손 상기(上琦 )가 고려 예종때 평장사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인존(仁存)은 문과에 급제하여 직한림원을 거쳐 개성부사가 된 후에 상서예부원외랑, 기거사인, 기거랑 등을 역임하고, 1102년(숙종 7) 이부낭중 겸 시강학사로 승진하고, 중서사인이 되었다. 1105년 숙종이 죽자, 고부사로 요나라에 다녀와서 예부시랑 간의대부에 올랐다. 예종 때 한림 학상승지, 병부, 예부, 호부의 상서, 정당문학, 참지정사를 역임하고, 수사도 중서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 상주국에 올랐다. 인종 때 판비서성사 감수국사의 한직에 있다가 뒤에 익성동덕공신이 되었고, 삼증대광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문하시중에 이어 수태부 문하시중 판이부가 되었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난 학자로서 중요한 국사마다 반드시 왕의 자문을 받았다으며,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김고(金沽)도 평장사를 지냈다. 한편 인존의 아들 3명도 모두 평장사를 역임하여 명문의 전통을 이어왔으며, 조선 때 와서 가문에 우뚝선 인물은 세조의 패륜에 통분하고 저항하여 매서운 절의를 지켰던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시습(時習)을 들수 있다. 5세에서 13세까지 성균관 대상성 김반(金泮)의 문하에서 [공자] [맹자] [시경] [서경] [춘추]를, 사범지종으로 일컬어진 윤상(尹祥)에게서 [예서]와 [제자백가]를 배웠다. 세조 1년 나이 21살 때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읽던 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으로 고친 후 방랑의 길을 떠났다. 세조 4년 [탕유관서록후지]를, 세조 6년에는 [탕유관동록후지]를 썼으며, 세조 9년에는 [탕유호남록후지]를 저작했다. 세조 4년 책을 구하러 한양에 갔다가 효령대군의 권고로 세조의 불경언해 사업을 도와 내불당에서 교정의 일을 맡았으며 세조 11 년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을 짓고 독서를 시작하여 을 썼다. 성종 12년에 47세에 환속, 성종 16년에 [독산원기]를 썼다. 그후 수차에 걸쳐 와 등의 명작 저서를 남겼다. 그는 절개를 지키며 고고한 지성으로 불교와 유교의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이상의 세계를 문학에서 찾으며 살다간 불행한 천재였다. 절개를 지키면서 불교ㆍ유교의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정조 6년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영월의 육신사에 재향되었다. 시호는 청간이다. 예조 판서를 역임한 첨경(添慶)의 현손 시혁(始奕)은 판돈령부사를 지냈으며 시환(始煥)과 시형(始炯)도 예조 및 병조판서를 역임했다. 시환의 아들 상성(尙星)은 호조 및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시영의 아들 상집(尙集)은 영조 31년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사관을 거쳐 영조 37년 정언이 되어 이듬해 경현당의 문신 제술에서 장원하여 문명을 날렸다. 시혁의 아들 상철(尙喆)은 영조 12년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지평ㆍ교리에 이어 영조 29년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대사간, 한성부 판윤, 이조,병조,형조의 판서,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영조 42년 우의정에 오르고 영조 48년에 좌의정 영조 51년(1775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학덕이 뛰어나 영조의 신임을 받았고, 우의정 때 우리나라 문물과 제도를 부분별로 망라한 문헌의 필요성을 느껴 왕에게 건의, 찬칩청을 두어 1770년 (영조 46) 를 편찬케 함으로써 뒷날 많은 편의를 가져왔다. 1781년 (정조 5) 기로소에 들어간 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그외 계락(啓洛)은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우참찬ㆍ대사헌 등을 역임하였으며 경사백가에 통달하여 문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철명(哲命)의 아들 기종(起宗)이 광해군 10년 문과에 장원하고 이괄(李适)의 난 때 무공을 세워 진무공신 2등에 올라 벼슬이 호조판서에 이르렀다. 조선의 문신 행(行)은 국평(國平)의 아들로 명종 21년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선조 8년 무장현감이 되어 안평대군의 중도가를 간각하여 간행했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강서김씨 시조 김반은 자가 사원(詞源), 호는 송정(松亭)이다. 그는 1399년(정종1)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1405년(태종5) 권근(權近)의 을 선사(繕寫)하여 성균관 주부가 된 후 성균관에 40여년간 재직했다. 세종때 여러차례 대사성을 지내면서 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김구(金鉤), 김말(金末)과 함께 경학삼김(經學三金)이라 불리었으며, 만년을 강서(江西)에서 보냈다. 그의 선계와 관향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국조방목(國朝榜目)》에 본관이 강릉으로, 거주지는 강서로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후손들이 강릉김씨에서 분적, 그가 살던 강서를 본관으로 한 것 같다. 강서의 학동서원(鶴洞書院)에 제향, 경북 영주군 풍기읍 창낙2동 915번지에 후손 김윤식이 살고 있다. 강양김씨 시조 김제(金濟)는 대보공 김알지의 후예라 전해질 뿐 문헌이 유실되어 세계를 알 수 없다. 그는 지중추를 지냈다고 전할 뿐 연대와 사적은 상고할 수 없다. 한편 경주 김씨 계림군(鷄林君) 파조 균의 후손이라고 전하는 문헌도 있는 점으로 보아 후손들이 선계를 설정하여 거주지인 강양(江陽:합천의 옛이름)을 본관으로 하고 제를 시조로 한 것으로 짐작된다. 강음김씨 시조 김처곤(金處坤)은 경순왕의 제4자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후손으로 전할 뿐 문헌이 유실되어 세계를 알 수 없다. 그는 김양묵(金養默)의 아들로 1768년(영조44) 정시문과에 병과로, 1800년(정조24) 중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강음(江陰:金泉)으로 한 연유와 전후 세계는 전혀 알 수 없다. 후손 김근오(金根五)가 조선 철종조에 진사, 김응룡(金應龍)이 서화에 능했다. 그 외에 찰방 정윤(正允)의 후손으로 전하는 문헌도 있다. 강화김씨 강화김씨(江華金氏)는 같은 신라계 김씨이면서도 김성(金晟)을 시조로 하는 개성파(開城派), 김송학(金松鶴)을 시조로 하는 용천파(龍川派), 그리고 김광(金光)을 시조로 하는 숙천파(肅川派)등 세 파가 있는데 그 중 용천파와 숙천파는 같은 혈족이면서도 그 상계의 휘자(諱字)에 차이가 있어 일원화하지 못하고 족보를 따로 하고 있다. 개성파(開城派) 개성파 시조 김성은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제4자 은열의 8세손 세응(世應)의 둘째아들로 1144년(고종24)에 출생하여 고려 명종조에 참지저사(參知政事)를 지내고 난을 평정한 공으로 하음백(河陰伯)에 봉해졌다. 하음은 강화(江華)의 옛이름이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강화로 하였다고 한다. 용천파(龍川派) 용천파 시조 김송학(자:千生)은 1497년(연산군3)에 출생, 훈련원 주부(訓練院主簿)를 지내다가 1542년에 의주(義州)로 들어왔다. 그의 조부 태후(泰厚)는 김임경의 8세손으로 장연(長淵)에서 출생, 김종직(金宗直)에게서 수업하였으며 벼슬은 훈련원 도정(訓練院都正)에 이르렀다.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강화로 몸을 피했지만 류자광(柳子光)의 탄핵으로 용천(龍川)에 유배당했다. 이듬해 사면되었으나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용천에서 세거하면서 분관을 강화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숙천파의 족보에 의하면 용천파 시조 송학의 조부 태후의 휘가 옥점(玉點)으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유래는 비슷한 것으로 보아 같은 계통이 아닌가 싶다. 숙천파(肅川派) 숙천파는 개성파와는 달리 명종(鳴鍾)계의 분적종이다. 숙천파 족보에 의하면 경순왕의 제3자 영분공(永芬公) 명종의 후손인 정숙공(貞肅公) 김인경이 고려 고종 초에 거란군이 침입했을 때 조충(趙沖)과 함께 이를 토평한 공으로 장연군(長淵君)에 봉해져서 본관을 장연으로 삼았으나 1232년(고종19) 몽고군의 난을 피해 왕이 강화로 몽진할 때 인경의 아들 궤(軌)가 상서(尙書)로서 왕을 호종하여 강화로 간 후에 그 자손이 그곳에 남아 살면서부터 본관을 강화로 고쳤다. 그 후 궤의 6세손 영직(永直)이 강화에 경성으로 이사해 살다가 그의 아들 도정공(都正公) 옥점(玉點)이 다시 용천으로 이거하여 용천파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궤의 현손 윤의 둘째아들 참판공 광(光:永直과 형제간)이 숙천으로 유배당해 숙천파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개령김씨 시조 김현선(金玄繕)은 고려조에 장군으로 대보공 김알지의 후손, 혹은 경주인으로 전할 뿐 세계를 알 수 없다.에는 그가 개성김씨로 시조로 기록되어 있고,에 고려조의 인물로 현기(玄器), 현덕(玄德)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시조 김현선은 그들과 형제간으로 개성김씨에서 분적,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본관을 개령(開寧)으로 한 것 같다. 개성김씨 개성 김씨 시조 용주(龍株)는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고려 문종 8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누차 여진 정벌에 공을 세워 추충공신으로 책록되었고 개성부사를 거쳐 평장사를 역임한 후 개성군에 봉해짐으로 후손들은 의성 김씨에서 분적하여 개성을 본관으로 삼았다. 그의 손자 준(畯)은 문과에 급제하고 고려 예종때 평장사를 역임하였으며 준의 세 아들중 차남 지경(之慶)이 상서를 지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황(滉)이 조선 명조 21년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군수를 거쳐 선조 25년 임진왜란때 아우 유(濡), 지(漬)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삭녕에 주둔하여 학행으로 유명했으며 조헌(趙憲)등 우수한 제자를 배출, 세상 사람들이 어촌선생이라 불렀다. 조선의 이름난 화가로 상의원 별제에 이른 응환(應煥)은 정종 12년 왕명으로 금강산을 유력하면서 그림을 그렸고 일본의 지도를 만들기 위해 일본으로 가다 부산에서 죽었다. 이때 김홍도가 어린 나이로 수행하여 장사를 치른 후 혼자 대마도에 가서 지도를 그려 가지고 와서 왕에게 바쳤다. 그외 화가로 이름난 득신(得臣)은 인물화를 잘 그려 심사정(沈師 正)ㆍ정선(鄭敾)과 함께 영조 때의 삼재로 불리웠고 그의 동생 석신(碩臣)은 풍속화로 유명했다. 결성김씨 결성김씨는 대보공 김알지의 후예이면서 계통을 달리하는 두 파가 있다. 경순왕의 후손으로 김녕김씨 시조 김시홍의 10세손 김연의 둘째아들 김예철의 후손으로 전하는 상주파 외에 에 의하면 이조판서를 지낸 김달손을 시조로 하는 위원파가 있다. 후손들이 본관을 결성으로했다. 평북 위원군 화창면 문명리에 살던 위원파는 6·25때 월남하면서 족보를 유실하여 중간 계대를 상고할 수 없다. 경산김씨 시조 김인궤(金仁軌)는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제8자 일선군(一善君) 추(錘:善山金氏 시조)의 아들 위옹(渭翁:三陟金氏 시조)의 9세손 윤성(允成)의 맏아들로서 고려조에 문하시중(門下侍中), 전법총랑(典法摠郞), 호군전객령(護軍典客令)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조에 이부상서, 좌복야, 상장군등을 지내고 경산군(慶山君)에 봉해진 육화(育和)를 1세조로, 본관을 경산(慶山)으로 하여 삼척김씨(三陟金氏)에서 분적했다. 고려 말의 김룡(金龍)은 이 집안을 대표하는 인물로 1세조 육화의 7세손이며 고려조에 문하시랑(門下侍郞), 태자태사(太子太師)등을 지낸 영수(英秀)의 증손이다. 그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남녘으로 몽진할 때 중랑장으로 호종하여 1등공신이 되고,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해적의 노략질을 금하도록 교섭했다. 또 정료위(定遼衛)에 사신으로 가서 고가노(高家奴)와 수교를 맺는 등 외교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다. 한편 와 등 여러 문헌에 의하면 고려 충숙왕조에 찬성사를 지내고 경산군(慶山君)에 봉해진 김이(金怡)를 시조로 하는 춘양김씨(春陽金氏)가 있는데, 김이의 상계가 경산김씨의 시조 인궤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같은 혈족이면서도 이의 출생지가 복주(福州)의 속현 촌양이기 때문에 사적(賜籍)지는 경산이나 출생지인 춘양을 본관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춘양김씨가 경산김씨의 분적종인지도 알 수 없다. 이 외에도 조선조에 문과에 급제한 김한(金翰)을 시조로 하는 또 다른 경산김씨가 문헌에 보인다. 경주(慶州) 김(金)씨 김알지계 가운데서도 대종(大宗)인 경주김씨는 파계가 복잡하여 그 전모를 파악하기가 어려운데, 서로 계통을 알지 못하는 분파를 포함하여 대충 8∼9파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주김씨의 대표적인 파로는 은설공(殷設公)파, 태사공(太師公)파,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파, 영분공(永芬公)파, 호장공(戶長公)파 등을 들 수 있다. 그중 역사상 인물을 많이 배출하기는 은설공파와 태사공파가 으뜸이며, 경주김씨가 조선시대에 배출한 6명의 재상과 3명의 왕비가 모두 이 두파에서 나왔다. 은설공(殷設公)파 은설(大安君)은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로 전한다. 이 은설공파는 고려 때의 장군 김순웅(金順雄)을 시조로 하는 피가 대표적이다. 김순웅의 12대손에 김균이란 이가 있다. 그는 고려말에 밀직부사를 지내고, 조선 개국공신 등에 올라 좌찬성을 지냈는데, 그의 후손에서만 세 사람의 상신(相臣 : 재상급 신하)과 숱한 판서급 인물이 배출되었다. 김종순(金從舜)은 김균의 손자로써 세조 때 한성부판윤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 : 결백한 관리)에도 뽑혀져 있는데, 그 자손에서 대대로 어질고 훌륭한 신하가 잇달아 나왔다. 그의 아들 치운(致運)은 이조참판, 치운의 아들 천령(千齡)은 연산군 때 문과에 장원하여 호당(湖堂)에 뽑히고 부제학(副提學)을 지냈으며, 천령의 아들 만균(萬鈞)은 중종 대 문과에 장원하여 예조판서, 형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명종 때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의 아들 명원(命元)이 선조 때의 좌의정이다. 김명원(金命元)은 이퇴계의 문인(門人)으로 명종 때 문과에 장원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고 선조 22년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평란공신(平亂功臣)에 올랐으며,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호조·예조·공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한 그는 정유재란 때는 병조판서겸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공을 세우고 우의정이 되었다가 좌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유학에도 깊었으며, 특히, 병서(兵書)와 궁마(弓馬)에 능했다. 그의 아들이 수렴(守廉)이며, 손자가 남중(南重)이다. 김수겸은 인조 때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거쳐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등을 역임하고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김남중은 광해군 때 문과에 올라 여러 관직을 거쳐 효종 때 공조·예조·형조판서 등을 지냈다.김주신(金柱臣)은 만중의 손자다. 숙종 때 순안현령(順安縣令)을 지내면서 어진 관리라고 칭찬을 받았다. 그의 딸이 숙종의 비(妃 : 仁元王后)가 되자 국부로써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에 봉해지고 도총관 호위대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또 문장에도 뛰어났다. 김주신의 손자로 정조 때 형조판서를 지낸 효대(孝大)의 아들이 사목(思穆)이다. 김사목(金思穆)은 영조 때 문과에 급제, 부승지, 호조참판을 거쳐, 정조 때 대사헌(大司憲)과 황해도·경기도·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했으며, 순조 때 우의정·좌의정에 올랐다. 김?집(金?集)은 사목의 손자다. 그는 헌종 때 좌참찬(左參贊),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등을 역임했으며, 역사학에 밝았다. 김창희(金는昌熙)는 정집의 아들로써, 고종 때 벼슬에 올라 호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냈고, 임오군란때는 청나라에서 온 사신을 맞는 영접관이 되고, 뒤에 공조판서 양관 대제학을 역임했다. 김영작(金永爵)은 김사목(金思穆)의 조카로써 철종 때 대사헌·호조참판을 지냈으며, 시와 글에 능하며 소정집(邵亭集)이 전한다. 김홍집(金弘集)은 바로 영락의 아들이다. 그는 개화파(開化派)의 거두(巨頭)로써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하면서 전권대신(全權大臣)이 되어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한 뒤 사임했다. 그 뒤 동학혁명의 혼란을 틈타서 침투한 일본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1∼2차 친일 내각이 성립되자 그는 총리대신(總理大臣)으로써 갑오경장의 혁신정책을 수행했다. 을미사변(乙未事變) 직후 제 3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자 그는 단발령 등 과격한 개혁정책을 폄으로써 국민대중의 분노를 일으켰다. 그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은 국민대중의 공감과 지지를 얻지 못했으나 갖가지 사회제도의 개혁과 양력 사용, 종두법 및 우편제도의 실시 등은 우리 나라 근대화를 촉진하는 계기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대사공(大師公)파 고려말의 절개가 굳은 신하로 유명한 김자수(金自粹)는 태사공의 8대 손이다. 그는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올라 벼슬이 좌상시(左常侍 : 정 3품)에 이르렀다가 고려가 망하자 고향인 안동에 은거했다. 뒤에 조선태종이 형조판서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다가 나라(고려)망한 슬픔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영유(金永濡)는 자수의 손자다. 그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을 지내고 황해도·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성종 때 두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개유 등을 지냈다. 김임(金任)은 김자수의 증손으로 사사를 지냈고, 세필(世弼)은 自의 현손으로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쳤으나 사화(士禍)때 마다 임금의 잘못을 규탄하다가 유배 되었다가 사망한 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김홍랑(金弘郞)은 자수의 8세손이다. 그는 효종 때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는데, 그의 자손에서만 3명의 재상과 왕비 한사람이 나와 은설공파의 좌의정 김명원의 자손과 더불어 경주 김씨의 2대 명문으로 꼽힌다. 김흥경(金興慶)은 숙종 때 문과에 급제, 승지·대사간 등을 거쳐 경종 때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지내다가 신임사화(辛壬士禍)로 파직되었으나, 영조가 즉위하자 도승지가 되고,이듬해 우참판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영조의 탄평책(蕩平策)에 반대 했다가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김한개(金漢 )은 흥경의 아들로써 영조의 딸과 화순숨옹주(和順翁主)와 결혼하여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지고 도총관 제조(提調) 등을 지냈는데, 글씨에 뛰어나 八법을 다 잘써 애익주문(哀謚州文)을 자주 썼다. 김석주(金碩柱)는 예조판서를 지냈는데, 김한개(金漢 )의 아들이요. 김석주(金碩柱)의 아들이 노경이다. 김노경(金魯敬)은 순조 때 문과에 급제, 육(六)조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순조 말엽에 권력을 전횡했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헌종 때에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숨졌으며, 철종 때에 관직이 복구되었다. 그는 글씨로 유명했으며, 그의 아들이 김정희다. 김정희(金正喜)는 순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설서(設書), 검열(檢閱), 암행어사(暗行御史) 등을 거쳐 헌종 때 대사성·이조참판에 이르렀는데, 두 차례에 걸쳐 도합 13년간이나 유배생활을 하는 등 정치적으로 많은 풍파를 겪었다. 그는 스물네살 때 아버지를 따라 북경(北京)에 가서 당세의 거유(巨儒)들과 사귀었다. 그는 학문에 있어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했고, 서예(書藝)에 있어서는 역대 명필의 장점을 연구하여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이루어 전무후무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그림에 있어서는 난초와 대, 그리고 산수가 뛰어났고, 사실(寫實)보다는 품격(品格)을 위주로 남종화(南宗畵)의 정신을 고취했다. 또한, 금석학에도 조예가 깊어 북한산비(北漢山碑)가 종래에 무학대사(無學大師)의 것이라는 설을 부인하고 신라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임을 밝혀냈다. 그는 아호가 추사(秋史), 완당(玩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파(果坡), 노과(老果), 등 백여개가 있는 것으로 전한다. 순조 때 형조·병조판서 등을 지내고 시와 글에도 뛰어났던 김어응(金魚應)은 노경과 4촌간이며, 그의 아들 김도희(金道喜)는 헌종 때 형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다. 김한구(金漢耉)는 영조의 국부(그의 딸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貞純王后)로써 어영대장을 지냈다. 이 밖에도 순조 때 우의정에 오른 김귀주(金龜柱), 영조 때 노론의 우두머리였던 김유경(金有慶) 등이 있다.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파 중종 때의 학자인 김정(金淨)은 정랑(正郞) 효정(孝貞)의 아들로써 대표 인물인데, 그는 중종 2년에 문과에 급제, 도승지·대사헌 등을 지내고, 형조판서로 예문관제학을 겸임했다. 조광조(趙光組)와 더불어 미신의 타파, 향약(鄕約)의 시행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시와 글에도 뛰어났고 그림에도 능했다. 호장공(戶長公)파 고려 인종 때의 명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