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유물방

고 려 청 자

모링가연구가 2012. 4. 18. 17:40

 

고   려   청   자

 

 

 

 

 

                                      정양모(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서언-토기와 청자와의 관계

 

 낮은 화도의 산화번조상태에서 구워낸 토기(옛날 우리 표기는 와기이다)에서 고화도 환원번조의 석기(석기라는 표현은 영어로 스톤웨어의 일본식 번역이라고 생각되나 아직 그에 상응하는 용어가 없어 그냥 사용한다.) 단계에 이르면 가마에서 자연히 생겨나는 재테가 고온의 토기표면에 내려앉아 태토속에 포함되어 있는 규사질과 합쳐져 녹아붙어 자연유가된다.이러한 자연유의 성분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것을 잿물(=유약. 초기 것은 회유라고 함)이라한다. 이 잿물을 토기표면에 바르고 고온으로 구워내면 회유토기(회유토기:일반적으로 회유토기라고 하나 정확하게 기술하려면 회유석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가 되고 회유토기가 청자 발생의 시초이다.

 

중국에서는 이 회유토기의 시원이 은대에 있었고 한대에 들면서 유면이 조금 매끄럽게 되며 이러한 단계를 시원적 또는 초기적 청자라고 할 수 있다. 육조시대에는 이보다 발전하여 어느정도 청자의 모습을 갖추고 백자도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당대에 청자가 세련되기 시작하여 만당. 오대에 질적으로 완벽한 청자가 되고 공예적인 높은 세련을 보였다. 중국에서는 이즈음에 화남과 화북지방에서 다같이 청자를 만들었지만 화북지방의 것은 제질이었으며 오대까지 중국청자를 대표하는 것은 양자강 하류에서 널리 생산되던 청자 중에서도 절강성 북동쪽 상임호반일대를 중심으로 널리 퍼져있던 가마에서 만들어낸 소위 월주청자였다.

 

당말오대의 월주청자의 태토는 철분이 약간 섞인 백토며 유약도 철분이 약간 섞인 장석유로 화도는 1250c 정도에서 거의 자화된 것으로 월주비색청자로 널리 알려진 고전적청자였다. 978(태평무이)에 월국이 멸망하면서 월주요는 쇠퇴하고 월주요의 기술이 이때를 전후하여 중국남.북방으로 확산되어 각처에서 이와 유사하거나 그 자방 그 시대의 특징이 있는 새로운 청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중 대표적인 예가 소위 북방청자라고도 불리우는 요주요계통 청자와 북송여관요청자,용청요청자,남송관요청자 등이다. 이중에서도 중국 도자사상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1986년에 발견된 하남성 봉풍현 대영진 청량촌의 여요(1)와 이 여요와의 관계가 아직 확실치 아니하나 12세기초 북송휘종 년간에 만들어졌다. 생각되는 여관요청자이며 남송관요아 용선요의 작품도 높이 평가된다.

 

우리나라는 5~6,000년전 경인 신석기시대 부터 흙을 빚어 번조한 토기를 사용하였으며 삼국시대에는 고화도로 번조한 토기를 만들었다.(석기). 삼국토기중에서도 신라.가야토기를 질적으로 가장 우수한 것이어서 1200C 이상이 올라가는 고화도 환원번조로 표면색은 청색을 머금은 회유색이고 무쇠같이 단단한 것이었다. 이시대는 매장하는 시대여서 많은 유물이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특히 신라.가야고분에서는 토기작품이 매우 많아서 그 수량은 상상을 능가할 만큼 대량매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 토기는 기형이 다양하나 바닥이 둥글거나 아니면 높은 받칠이 있고 표면에 주로 기하학적으로 구성된 음각문양이 있으며 선의 흐름이 강하고 직선적이어서 제여적이로 의예적인 형태를 하고있다. 그러나 이러한 토기는 부장품이며 이러한 의예적 형태외에 단순한 기형의 생활용 토기가 있었으나 전체적인 흐름은 역시 지선주조의 것이었다.이러한 삼국시대의 토기를 거쳐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면 토기에서 자기로 이행되는 기반이 확립되었다.

 

통일신라시대 토기는 부장용보다는 주로 실생활용으로 안정된 것이었다. 또한 이때는 토기표면에 유약을 입힌 연유계의 녹유.갈유토기와 회유토기가 발달하여 이유토기가 어느 정도 열도에 오르고 있어서 토기에서 자기로 이행되는 기반이 확립되고 있었다. 자기에 대한 지식은 삼국시대로 부터 육조청자(매우 소량이지만 백자기와 흑유자의 유입도 있음)의 유입이 상당량에 달하고 있었으며 9세기경으로부터 만당도자기(주로 청자와 일부 백자)와 그 기술이 해로를 통하여 우리나라 서해안과 일부 남해안에 많이 유입되어 초기청자인 소위 일휘굽계 청자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일휘굽 청자는 9세기 후반경에는 이미 신라에서 번조한 것 같다.(2).

 

 

 

 

1. 초기청자

 

. 해무리굽(일휘문굽)청자


중국 정강성 월주청자의 영향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이 일휘문굽계 청자는 9세기 후반경부터 비롯되어 10세기까지 계속되었다고 생각된다. 일휘문계 청자요지는 우리나라 서해안과 남해안일대데 분포되었으며 그 위치는 다음과 같다.

 

전남 강진군 대구면. 칠양면일대,전남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전북 고흥군 와산면 용계리,동면 반암리, 전북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충남 서산국 서연면 오사리,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동 용인군 이동면 서리와 평안남도 강서군 도차면 이리 사기동 등이며 이와 유사한 가마가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원흥리에 있다. 이 초기청자를 대표하는 기형으로 소위 일휘문굽 대접이 있다. 이 대접은 굽모양이 일휘문굽(해무리굽)이고 내화토비짐눈에 측사면이 직선인 점등 공통적인 특색이 있고 그외에 내저에 원각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으며 굽밑면의 넓이가 아주 넓은 것과 약간 넓은 것 등이 있다.

 

대체로 굽밑면의 넓이가 약간 넓은 것은 내저에 원각이 없으며 유약이 얇고 갈색을 머금었으며 태토의 입자가 매우 곱다.(초기청자 I형식). 굽밑면의 넓이가 넓은 것은 내저원각이 있고 유약이 약간 두꺼운 편이며 초기임에도 불구하고 비색이 진하나 그 발색이 아름다운 것이 있다(초기청자II형식. 이번 전시에는 이 초기청자중 아름다운 청자를 수십점 출품하였다. 이들 두가지 유형의 대접이 발견되는 가마중 초기청자 I형식 청자대접이 발견되는 가마는 서산군 성연면 가마와 양주군 부곡리가마 고흥군 두원면가마 등이며 이 가마들은 같은계통이라고 생각된다.

 

초기청자II형식 청자대접이 발견되는 가마는 대표적인 가마가 강진군 대구면과 칠양면 가마이며 그외에 고창군 아산면가마와 진안군 성수면가마 등이 있고 이 가마들은 역시 같은 계통이다. 이와같이 초기청자가마는 거기서 발견되는 청자대접의 양식에 의해서 양분되는데 용인군 이동면 서리가마에서는 내저원각이 없고 굽이 조금 넓은 초기청자 I형식 대접과 내저원각이 있고 굽이 넓은 초기청자II형식 대접이, 즉 두가지 계통의 청자가 같이 출토된다.

 

용인군 이동면 서리의 가마(3)에서는 발굴에 의해서 이들 두가지 계통의 청자가 각기 층위를 달리하는 곳에서 발견됨으로 매우 주목되며 초기청자연구자료로 그 학술적 가치가 자못 크다. 요인의 경우 굽이 약간 넓고 내저원각이 없는 초기청자 I형식 대접은 퇴적층의 최하층 하부에서 다량발견되며 같은 기형의 백자도 소량이지만 발견된다. 이 최하층 상부에서는 같은 유형의 청자가 소량 발견되고 백자가 다량 발견된다. 최하층 위인 상층에서는 굽밑이 넓고 내저원각이 있는 초기청자 II형식인 굽밑이 넓고 내저에 원각이 있는 청자가 약간 뒤지는 시기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와같은 견해를 우리나라 서남해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초기청자가마에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는 좀 더 신중히 고려해야 되겠지만 우선 양자를 선후관계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자료로서 초기청자 I형식 요지에서는 아직까지 문양이 있는 파편이 출토되지 않았으나 초기청자 II형식 가마에서는 해무리굽의 형태가 퇴화된 상태의 가마에서 음각문양이 나오기 시작하고 또 말기 해무리굽대접에 음각국당초문이 있는 예가 최근에 발견되었다. 실제로 우리박물관에서 조사한 강진 용운리 10세기말경으로 추정되는 요지의 초기청자 II형식의 말기단계에서 해무리굽 파편에 초벌구이한 음각당초문양이 발견되었고 해무리굽은 아니지만 일반다리굽 청자대접에 음각국당문초문이 있는 예가 수편 발견된 바 있다(이번 전시에는 이들 초기 청자II형식의 말경에 속하는 해무리굽대접에 음각국당초문이 있는 대접과 이 시기의 최말기거나 11세기초경으로 보이는 청자음각국당초문대접과 접시들이 여러점 전시된다.

 

국당초문이 출현하는 단계에서 해무리굽은 퇴화되고 대접의 기형도 바뀌면서 작은 다리굽이 되고 구상이 약간 외반되는 곳에 한줄 음각대선이 있게된다. 따라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우리청자 최초의 문양중 하나는 음각국당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초기청자 I형식 가마는 용인군 이동면 서리가마를 제회하고는 그 가마가 다음 시기까지 연속적으로 운영된 예가 없다. 따라서 선행하는 우리 국내 가마의 특성과 월주요의 장점을 취하여 초기청자 II형식 가마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상과 같이 양자를 선후관계로 볼 수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 선후관계가 큰 차이 없이 병행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전라남도 강진청자 요지의 경우 해무리굽 중에서도 초기요지(해무리굽의 퇴화형식이 없는 요지)에서는 문양이 있는 파편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시대적인 격차없이 거의 동시에 시작했을 가능성도 있다.초기청자 II형식 가마에서는 초기청자 I형식 가마의 영향도 생각할 수 있지만 점기상태에서 청자로 이행된지 얼마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환원번조가 잘 되고 겁본을 사용한 본격적인 청자를 번조하기 시작하였으며 강진일대의 청자가 가장 세련되었다. 그 이유는 서남해안의 청자요중에서도 강진일대의 청자요가 다른 가마에 비해 보다 직접적으로 9세기전반 동북아 해상무역의 왕자였던 장보고의 해상활동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4).

 

장보고에 의한 중국청자의 수입과 청자기술의 도입으로 서해안과 남해안에 청자번조기술이 전파되고 특히 강진은 장보고 해상활동이 중심이었던 완도와 가깝고 청자를 만들기에 적합한 조건 즉 태토,,나무 등이 풍부하였고 해상의 수군을 이용하여 제품이 경주와 기타지역으로 운반하기 편리하였을 것이다. 또한 고려건국후에는 중앙린 개경과 연결되어 관요로 이어져서 여기 가마가 집중적으로 운영되고 중국 남북방요의 영향을 체계있게 수용하고 정리하였기 때문에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전술한 바와같이 서남해안일대의 이들 초기청자 II형식 중 그 질이 우수하고 발색이 이미 비색에 가까운 상태의 청자는 전남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 사당리등 가마에서 번조한 청자이다.

 

초기청자 II형식중 그 질이 약간 떨어지며 발색이 비색에 훨씬 못 미치는 청자는 전북 고강군 아산면 용계리 청자를 들 수 있다. 깅진의 용운리 청자는 치밀하게 자화된 상태이며 발색은 암녹색.녹색.황갈색.녹갈색등을 머금은 장석계의 발달된 청자유약이 시유되었다. 기형과 굽의 형태, 도지미와 그릇사이에 놓고 번조하는 내화토목 등에 월주요의 영향이 가장 컸으며 이러한 초기청자의 기반위에서 11세기 이후 부터는 기형,문양 등에는 요주요, 임여요(요관요에 대한)계통의 가마 등과의 교류도 나타나 있으며 화원번조로 화도는 1250C를 넘는 우수한 질의 청자를 생산하고 있다.

 

고창 용계리 청자는 가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으나 강진청자보다 치밀하지 못하고 화원번조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여 황갈색을 머금고 있으며 태토와 유약도 정선되지 못하였으며 음각과 양각이 나오는 단계에서 단절되고 말았다.초기청자와 연관이 깊고 또 같은 백휘문굽 백자를 생산한 자기요지로서는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서리와 반곡마을에 있는 가마자리가 매우 주목할만하다. 필자가 1960년대에 발견한 이 가마는 초기 백자가마로서는 유일한 것으로 청자이외에 백자도 이미 9~10세기경에 생산되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 따라서 이때까지(20세기중엽까지) 일인학자들이 초기청자 또는 원시청자로 불렸던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소장 순화사년명 항아리도 백자를 번조하려다 약간 암갈색이 비낀 조질백자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초기청자의 바탕이 매우 든든하였기 때문에 이후 고려청자는 11세기말,12세기초 까지는 중국의 화서성 요주요계통.호남 장사요.황주 서촌요.정요.자주요계 등과도 교류가 있어 음.양각문양과 철화문이 생겨나는 등 청자의 문양과 종류도 다양해지고 백자.흑유 등 여러가지 도자기가 생산되며,기형.문양.번조수법 등이 점차 고려적으로 세련되어 가며 강진의 가마는 자꾸 확대되어 대구면의 용운리,계율리,사당리,수동리 일부,칠양면 삼흥리 일대로 확산되며 전북 부안군 보안면 유용리,진서면 일대의 가마도 관요형태의 대규모 청자요로 발전하였다.

 

. 녹청자


이러한 해무리굽 계통의 청자이외에 녹청자라고 명명한  일군의 조질청자가 있다. 녹청자는 태토가 거칠며 유약표면이 안정되지 못하여 우툴두툴하며 표면색은 고운 청자색이 아니라 녹청색 계통이다. 이 녹청자에 대하여는 종전까지 일휘문굽 청자보다 선행하는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원광대학의 윤용이 교수가 녹청자가 일휘문 청자보다 오히려 뒤에 나타났을 것이라는 매우 주목할 만한 견해(5)를발표하여 이를 검토한 결과 매우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녹청자는 일휘문청자가 만들어진 연후에 지방의 수요에 대한 공급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양질이고 자화된 일휘문청자는 고가한 것이어서 경주.개경등지의 상위계층과 지방귀족들이 쓸 수 있는 것이었으며 녹청자는 일반평민과 지방민이 사용한 것일 것이다. 실제로 양질의 우수한 청자를 생산하던 강진에서는 이미 초기청자 I형식의 말기단계에 녹청자 문양과 유사한 청자를 번조하였으며 조질청자를 번조한 예도 있으며 부안요지에도 후에 조질청자를 굽는 가마자리가 수개소씩 있어서 일부 민간의 수요에 응하였다고 생각된다.

 

녹청자를 주로 생산한 가마는 인천직할시 서구 경서동 전남 해남의 산이면일대에 있으며 주로 조질의 녹청자를 생산하는 일대요군이었으며 전북 함평군 손불면 양계리 ,동 영광군 영산면 오동리,충청남도 보령군 천북면 사호리, 경북 월성군 견곡면 래밀리,부산 덕포리(덕포리 요지는 시가지로 변하고 말았다.) 등에도 요지가 있다. 이들 녹청자요지중 염산면 오동리요지,함평군 손불면 양재리요지의 녹청자는 비교적 양질이고 기형도 다양하며 문양도 여러가지이며 이들 기형과 문양이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요지에서 발견되는 초기청자 II형식의 말기요지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종류가 많다.

 

이외에 인천 경서동요지,월성군 견곡면 내멀리요지,보령군 사호리요지와 남해 산이면 진산리,내송리요지의 일부 가마에서는 조질이고 기형과 문양이 단순하면서 각기 그 지방특유의 기형을 생산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 또한 해남 산이면 진산.내송요지는 녹청자중에서는 약간 양질청자를 생산한 가마도 있고 11세기말 12세기초까지 지속되면서 철화.퇴화 등 다양하면서 양질의 청자까지를 번조하고 있으며(6) 부산 덕포리가마는 지금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으나 철화문을 생산한 녹청자가마이다. 초기청자와 녹청자를 선후관계로 생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근거 자료가 있어서 여기 제시해 두고져 한다.

 

초기청자 II형식의 후기에는 음각문양이 나타나며 이어서 단순한 철화문.퇴화문도 등장하며 매우 귀하지만 상감문양도 있다. 그런데 양질녹청자가마에서는 음각.양각.특수음양각연변문과 상감등 여러기법의 문양이 있다. 문양이 등장한다는 자체가 이미 순수한 무문청자보다 뒤늦다는 증거가 된다. 이 문양들은 전술한 바와같이 초기청자 II형식의 중.후반경에 민간 수요용으로 발생.발전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녹청자요지에서 기다란 주름무늬와 기다란 주름무늬연판문 그리고 특수음양각연변문 등은 공통적인 요소인데 전술한 바와같이 해남 산이면의 경우는 이러한 공통문양과 여러가지 다른 기법의 문양이 나타나면서 12세기초까지 계속되면 각문양간에 시대적 격차는 크지 않다고 생각되므로 전체녹청자의 발생이 초기청자보다 뒤늦게 발생했다는 또다른 증거가 된다.

 

이외에 최근에 발견된 자료로서 녹청자 특수음양각연변문잔-내면에 거칠은 양인각연당초문이 시문된 조그만 잔의 예가 있다.양인각의 경우에는 음각문양보다 뒤늦은 것으로 초기청자의 전형식인 해무리굽 대접이 완전히 변형되어 새로운 대접이 나오는 단계의 가마에서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잔의 연대를 11세기 이후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또한 이와유사한 국당초문양은 중국의 하북 남쪽 하남의 북쪽에 위치한 자주요계 도자기에 등장하며 협서성 요주요계와 하남성 임요요계 등에서 각화문으로 이미 10세기말경부터 널리 사용되던 의장이나 이 잔과 형태가 비슷하고 가장 유사한 인화문의 문양구성은 요주요와 임요요청자에 있으며 그 편년은 대체로 11세기전반에서 12세기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시기(11~12세기초)에 요주요청자의 발견예가 많다. 여기서 또하나 문제가 되는 것은 요주요에서는 이러한 당초문을 편절조(각화,즉 깊은 반조각)의 각문으로 나타나는 것이 고식이면서 기본문양 표현 기법인데 압인문(양인각인화문) 11세기 전반경에는 이미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7).

 

따라서 우리의 녹청인화문국당초문잔이 요주요에서 압출문이 발생하는 초기인 11세기 전반경이라고 하더라도 초기청자시기를 지난 시기의 것임이 틀림없다고 하겠다. 다만 녹청자양인각(인화문) 국당초문잔의 내면문양이 내저중앙과 측사면에 걸쳐 지나치게 커다란 국당변문이 있고 나머지 측사면에는 매우 거친 당초문이 있다. 이러한 문양구성은 요주계요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며 또 이 잔의 외면에는 초기청자 II양식의 후기가마에서 나타나는 특수 연변문이 있기 때문에 이 잔의 양식이 녹청자의 하한이고 내면문양이 압출문이라 하더라도 이것을 종전의 요주요압출문(양인각) 발생연대와 연관을 시켜 그 하한을 내릴 수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들 녹청자는 중국에서도 마찬가지 양상이 나타나 절강성 요주요에서 양질의 청자가 만들어지고 있는데 절강성의 남쪽과 복건성 일부 광동성에서는 조질의 녹청자가마가 있어 보다 많은 지방수요에 응했었다고 생각된다. 이상 간략하게 기술한바와 같이 녹청자의 년대는 대략 10세기후반경으로부터 시작하여 11세기 전반경까지 많이 제작되었으나 점차 양질청자에 흡수되었으며 자형도 다양하지 않으며 대접.접시류가 대부분이고, 방구리.이형매병.치마병.광구장경병.항아리 등이 약간 있을 뿐이다.

 

 

 

2. 청자의 발전

 

. 11세기 전반


10세기말~11세기에 들어서면서 고려의 요지는 바야흐로 숙련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기형이 다양해지고 종전의 기형에 변화가 있으며 문양표현기법과 문양의 내용이 다양해진다. 대접의 경우 요주요식의 굽다리밑이 넓고(해무리굽) 측사면이 직선인 형식에서 굽다리밑이 좁아지고 대접이 우묵해지고 측사면이 완만한 내경된 곡선을 그리다가 구단부가 약간 외반되는 형식으로 바뀌며 내면 구단밑이 외반되기 시작하는 곳에 일조의 음각 대선이 생긴다(8).

 

초기청자시대의 병.주전자 등 금속기의 영향을 받았던 각 부위의 연결이 예리하게 꺾이고 강인한 형태에서 점차 모든 부위가 유연한 곡면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음각문양이 가늘고 부드럽게 세련되고 국당초문 파도어문,앵무문 등 그 종류가 다양해지며 요주요식 양인각(압출문 인화문:앞에 인용한 녹청자잔에 시문된 예를 보면 음인각과도 비슷하다)문이 많이 등장한다. 초보적 양각과 철화문.퇴화문이 나타나며 상감문양도 계속 시도된다.

 

화형대접,접시 등이 나타나며 과형 등 상형기명도 등장한다. 유약은 점차 밝아져서 12세기 전반기의 비색유로 접근한다. 용인군 이동면의 가마를 제외하고는 내화도가 강한 개비로 발전하여 갑발이 얇으면서 크게도 만들 수 있고 두번 세번 사용할 수 있어 11세기 이후의 요지에서는 갑발의 퇴적도 점차 줄어든다. 11세기 전반기의 고려국정은 잦은 결단의 침공을 막느라고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있었지만 국자감을 비롯한 고등교육을 일으켜서 인재를 기르는데 힘썼고, 국사의 편찬과 대정경조판을 시작하는 등 고려는 문화예술의 진흥에 자못 힘을 기울인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에 바야흐로 자예문화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던 중국의 송과 이웃해 있던 고려가 그 장케의 비약적 발전계기를 마련했을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11세기 전반기게 있어서 고려도자가 다다랐던 발전의 양상을 짐작할 수 있는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동몽고 흥안군에 있는 요의 성종 빙경릉의 음각청자편을 발견했었다는 제릉국태측씨와 소산부토부씨의 보고가 그 예이다. 이것은 당시의 요와 고려의 관계로 보아서 요왕실에서 보낸 고려왕실의 선물이었을 가능성이 클 뿐만아니라 이미 고려의 청자가 외국 왕실에 선물할 수 있을 만큼 세련을 보였다는 실증이 된다. 말하자면 11세기 전반기의 고려는 거듭되는 외침속에서도 자주성을 굳건히 지키면서 문화예술의 발전에도 소홀하지 않았던 것이다.

 

북송과 고려사이를 끊임없이 견제하는 요의 입장을 고려가 잘 가늠하는 일방 북송의 한족문화와의 접촉에서 실리를 얻어 고려청자의 발달도 바로 그러한 산물의 하나였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때 고려청자는 그 질과 기형문양등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고 있었고 여기에 요문화와의 접촉관계에서 얻어진 고려공예의 변화도 또한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전기한 요왕 빙경릉실중에 그려진 벽화서계도의 일면은 고려시대의 나전칠기 또는 청금은입사공예품에 나타나는 포앙수금문을 연상시켜주는 점으로도 주의를 끌만하다.

 

또한 이러한 한경은 고려청자양각으로써 또는 청자상감들에도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 정경과 닮은 데가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서긍의 저서인 '선화봉사고려도경'기사중의 한 대목은 고려에 투항해 온 결단사람들 손으로 고려공예가 한층 발전 했음을 뜻하는 것이지만 '고려사'에 나오는 결단인의 투항은 수백명에 불과했었다.

 

11세기초 무렵까지는 아직도 북송의 다양한 도자를 따를 만한 것이 못되었으나 10세기 후반경으로부터 말기형 해무리굽대접이 나타나기 시작할 무렵 아직 짜임새 없는 음각국당초문이 전남 강진 용운리.계율리 등 일대 요지의 파편들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그것이 이때까지 이어졌고 용운리 17호 요지 등 파편에서 볼 수 있는 쌍앵무문대접이나 초화음각문.양인각부조문같은 유형의 청자가 11세기 중엽무렵까지의 양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무렵 도자기가 어느 정도 양산체제에 있었으나 고려인의 유기호상도 대단해서 일반 식기류는 아직도 유기의 비중이 컸던 것 같다. 이것은'송사'고려전 현종6(1015) 송에 갔던 어사민관특사 곽원이 '토민가기명실동위지'라고 말한 대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도자기는 아직도 널리 사용되지 못하고 있었고 더구나 동초에는 동기류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듯하다.


. 11세기 후반 12세기 초


이상과 같이 긴 숙련기를 거쳐서 고려의 도자기는 11세기 중엽부터는 세련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청자.백자의 기형과 의장에 유연한 곡선주조의 고려적인 풍모가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그 유.태의 질과 번조기술과 문양표현기법과 문양자체가 또한 진일보했던 것이다. 청자의 기형에서 일부 금속기를 모방한 주전자.광구병 등은 중국의 영향이 남아 있으나 대접.접시 등 일반기명들은 구단이 유연하게 외반되면서 날렵한 면이 다시 살아나 단정한 중에 예리한 맛이 깃들여 있다.

 

문양은 상감기법의 시도가 조금씩 늘어나고 특히 양인각이 새로운 면모를 보인다. 특히 11세기말경에 이르면 요삽요식의 각개문양의 주단을 날카롭게 부각시키는 방법은 점차 사라지고 문양의 부조가 아주 낮아지면서 매우 부드러운 문양이 된다. 또한 각개 문양의 중심부위가 더 두드러지면서 그 주의를 음각으로 마무리짓는 새로운 방법이 시도된다.

 

문양표현과 소재도 공예의장화된 당초문위주에서 운학문과 국약문,쌍용문,연동자문,연지문,목단당초문 등 사실적인 문양구성이 주류를 이룬다. 또한 아직까지 많은 문양구성이 당초문을 매체로하여 연속성을 갖추고 있으나 절지문,운학문 등 단독문양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종숙문양도 등장하기 시작한다.

 

11세기 중엽부터는 이러한 자예뿐만아니라 고려사상에 있어서도 문화사적으로 하나의 전기를 이루는 때였다. 즉 문종왕 치세(제위 1046~1082)동안에는 요..고려사이에 비교적 평화가 유지되고 문물의 교류가 잦았으며 특히 송과는 빈번한 사절 왕래를 통해서 얻어진 폭넓은 북송문화의 작극은 고려 신흥문화의 좋은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북송문화 접촉에 공헌한 대표적인 예가 문종왕의 왕자 대각국사의천의 도송이었다. 이러한 시대가 배경이 되어서 성숙도상에 있던 고려도자기가 그 기술의 차원을 높이고 주체적인 세련의 궤도위에 올랐을 것임은 능히 짐작되는 일이다. 이러한 무렵에 있어서 집고 넘어갈 자료들의 예를 들면 대강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청자상감(계축)명청자바릿대 : 상감명문(계축년주항대성지봉), 1073년추정(국립중앙

     박물관소장,동함선생기중유물)
(2) 청자양주기 등 강원도 삼척군 북평읍 삼호리 고려고분출토일괄유물 : 11세기

     말경 추정(국립중앙박물관소장)
(3) 백자철화반구병 : 11세기말경 추정(김병태소장), 백자철화해병(상기 삼척출토일괄유물)
(4) 청자철화초문반구치마병 : 11세기초~중엽 추정(국립중앙박물관소장)
(5) 백자청병(광주군 상산속리출토) : 11세기말추정(국립중앙박물관소장)


11세기 중.후반 이러한 고려도자 세련기에 있어서 눈에 띄는 특색은 유.태등 질이 일정하고 유약은 기포가 많으며 반투명성이며 전반기보다 녹색이 좀 더 줄었으며 태토도 철분이 줄어 밝은회색이며 번조시 환원이 잘 보장되고 있다. 기형과 그 마무리의 기법이 정제되었으며 일부 기형은 아직도 북송양식에서 탈피하지 못한 것이 많았고 장식 의장 또한 북송풍이 남아 있었다.

 

그중에서도 자세히 살펴보면 월주요계의 영향은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일부 북송 요주요.자주요.정요 양식이 반영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말하자면 이 기간중에 비록 요지에 있어서는 장족의 발전을 보였지만 고려특유의 조형감각은 점차 세련되어 가고 있는 과정이었다. 따라서 이 시대는 바야흐로 다가오는 12세기 전반기의 고려청자 절정기를 앞에 두고 북송 자예기술의 차원에 발돋움하면서 독창적인 고려도자예술 창조의 기틀을 착실하게 다져나갔던 시대였다.

 

 

 

 

3. 고려순청자의 절정기

 

. 순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 전반기 50년동안은 고려도자로서 뿐만아니라 한국 도자사중에서 하나의 절정기였다. 11세기 후반기이래 고려적으로 유연한 세련을 거듭해 온 청자와 백자는 유.태도 모두 차원을 바꾸어서 일정하고 한층 정치해졌다. 이것은 비단 도자기뿐만아니라 이 무렵의 고려공예와 회화 그리고 인쇄술의 발달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해서 고려자기는 기형과 의장 등 조형감각과 기술에 분명한 국풍화의 경향을 짙게 나타내게 된 것이다.

 

인종원년(1123)에 송휘종이 보낸 사신의 일원으로 구려에 왔던 서긍은 그의 저'선화봉사고려도경' 속에서 '도자색지청자 려인위지비색 근년이래제작공묘 색택구가 산예출향 적비색야 상위존수 하유앙연이승지 제기유비물최정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선 고려인이 청자색을 '비색'이라고 했다는 것과 '근대이래 그 제작이 공교해졌으며 색택이 더욱 아름답다'고 한 것, 그리고 '사자향로가 가장 정절하다'고 한 것에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당시의 송은 휘종 치세하에 문화가 꽃을 피우던 때였으며 그 고장에서 온 안목 높은 서긍이 고려의 청자를 그처럼 찬양했음은 그의 놀라움을 뜻하는 것이 될 것이다. 특히 고려사람들이 중국식의 호칭인 비색(청자)을 버리고 고려의 청자를 비색이라고 일컫게 된 것은 고려사람들이 그들의 청자유색에 대해서 그만한 긍지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볼수있다. 이것은 그 무렵 송인학자 태평노인이 그의 저'유중금' 속에서 천하제일을 다루는 속에 송청자의 비색은 빼놓고 고려청자의 비색을 천하제일로 꼽았던 사실과 서로 뒷받침이 되는 기록이다.

 

순청자 절정기의 비색은 시유된 유약의 두께가 얇으나 비취옥과 같이 녹색이 비쳤으며 유약내에 미세한 기포가 많아 반질투성으로 태토가 은은히 비춰 보인다. 그러므로 섬세한 음각이나 세밀한 양인각등이 은은하게 나타날 수 있어 한층 기품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보다 청자를 몇백년 먼저 만들기 시작하였으되 그 최고의 절정기는 우리 고려청자의 절정기와 거의 같은 중국청자의 최고봉이라 할 수있는 북송 휘종년간의 여관요청자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여관요청자는 기형자체도 엄정하며 예리하고 적절한 과장이 있어 냉엄한 기품이 있으며 유약은 얇으나 투명하지 아니하여 거기에 음각은 물론이고 양각문양도 있을 수 없으며 태토 또한 유약을 통하여 전혀 비춰보이지 아니한다. 우리 청자의 비색은 산속을 흐르는 맑은 물이나 모시발이라면 중국청자는 깊은 웅덩이의 물이거나 비단발과 같아서 하나는 맑고 은은하면서 투명하고 하나는 진하여 전혀 불투명하고 두꺼운 장막을 드리운 것과 같다.

 

이때는 유약과 함꼐 기면의 정리도 매끄럽고 전체적인 균형이 준수하고 경쾌하다. .주전자등 큰 그릇의 굽을 깍는 방법과 번조시 굽밑유약을 훑어내리고 눈을 받치는 방법도 가능한한 단아하고 깨끗하게 하였다. 눈을 받치는 방법은 11세기까지 내화토목을 점차 작게 하였으며 11세기 말경부터는 가사목으로 번조하는 새로운 기법이 등장하였다. 굽은 작고 예쁘게 깍고 굽밑까지 빈틈없이 시유하고 유약을 그대로 둔채 가사목 3~5개를 받쳐 번조하여 내외전면에 번조후 남은 흠자국을 극소화시켰다. .항아리 등 커다란 그릇은 내화토와 모래 비짐눈으로 번조하였으나 굽밑은 전대보다 깨끗하게 정리하였다.


. 청자의 종류


12세기 전반기의 고려도자를 종류별로 살펴보면서 독청적으로 발전된 모습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소문순청자


(2) 청자양각.음각.토각.운태


청자에 아무런 문양이 없는 것이 소문이다. 청자중 제일 많은 것이 아무 문양이 없는 것이고 이것이 청자를 대표하는 것이며 따라서 청자는 비색의 아름다움이 으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순청자비색이 완성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전술한 바와같이 중국인들이 인류역사상 가장 아름답다고 자부하는 북송 여관요(종전까지 여관요의 위치와 년대에 관하여는 분명히 할 수 있는 자료가 없었다. 1985년 겨울 하남성 보품현 대영진 청양촌에서 여요지가 발견되어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게 되었다.)

 

청자비색이 그 절정기에 달했을 때 북송의 지식인들이 고려비색을 천하제일로 평가한 것은 북송과 같은 시기에오히려 북송을 능가할 만한 독특한 세련을 보인데에 대한 경탄이며 고려비색의 독특한 아름다움에 기인한 것일 것이다. 이 시기의 비색과 조형의 아름다움은 인종왕능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청자고형화병과 청자접시 등 일괄유물이 기준이 된다. 그 조형은 고려청자가 부분적으로는 유려한 선을 지녔으되 전체적인 선이 유려한 선을 가지기 직전으로 다시말하면 유려한 선으로 흐르는 바로 그 시점으로서 이때의 선은 유연한 중에 예리함과 조용함을 함께 조화시킨 가장 아름다운 상태였다고 생각된다.

 

물론 이 기명들이 왕실의 부장용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왕실제식에 충실하여 유려함보다는 예리함이 깃든 유연함을 택했을 법하지만 그 보다는 고려청자의 조형이 유려함으로 변하는 바로 그 시점에 있다는 것에 뜻이 있다고 하겠다. 유약은 약간 짙은 비취색이며 얇지만 미세한 기포가 많아서 반투명성으로 은은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태토의 밝은 회색이 은은히 비춰보여 여기 깊은 맛을 더해 준다고 하겠다.

 

청자를 동물이나 식물모양대로 만든 것이 상형청자이다. 고려전기부터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한 상형청자는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고려청자조형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하겠다. 11세기 후반부터는 조금더 등장한 상형청자는 12세기 초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12세기 중엽에 가까울수록 유연한 중에 예리함이 깃든 청자에서 유려한 청자로 이행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상형청자 중에는 표주박,연꽃,죽순,사자,기린,오리,참외 등 수 많은 종류가 있으며 이들은 자연스러움 그대로이며 한 점도 과장하거나 과식한 것이 없으며 이러한 상형에서 얻어진 조형훈련이 오히려 고려청자를 자연스럽고 유려하게 가꾸는 하나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이 시기에는 양각문양도 많아지며 그 시문방법도 다양하게 전개된다.

 

양각,반음각,반양각에 주녹음각,양인각(압출문)과 양인각에 주녹음각등이 있으며 이들 문양이 조기상감과 병행시문되는 경우도 있으며 문양의 종류도 목단 등 각종 당초,포도동자,연지문,포류수금문,운학문 등 매우 다양해졌다. 음각은 가늘고 예리한 선도 남아있으나 점차로 선이 부드러워지고 또한 점차 굵은 선이 등장하고 이 굵은 선이 반양각으로 변한다. 음각은 예리하고 유려한 선의 음각도 있으며 반양각과 같이 사용되기도 하여 선이 약간 굵은 것도 있다. 투조는 그 수량이 매우 적으며 이것은 한국미술 전반에 흐르는 과식을 좋아하지 않는 품성때문일 것이다.

 

상태문은 매우 희귀하여 본인도 일렬를 보았을 뿐이지만 청자유약을 문양대로 베껴 내어 문양은 태토에 철분이 배어난 갈색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문양의 기명은 12세기 것인데 중국에서는 원대인 14세기 전반에 비로소 이러한 상태문이 등장한다.11세기 후반까지는 중국 월주청자의 문양,정요,자주요,요주요 등 문양의 영향이 남아 있어서 예리하고 덩굴져 연결되는 복잡한 것이었으나 이때에 들어서면 문양의 종류와 성격이 크게 변한다.

 

우선 문양의 종류로는 당초문계통으로 국당초문이 거의 사라지고 연.목단당초나 보상당초 등과 덩굴진 포도동자문 등이 새롭게 등장 하면서 공예의장화된 복잡하고 번잡한 것에서 사실적인 면을 살리면서 회화적으로 여유있는 구성을한다. 절지문의 등장도 전혀 새로운 변화이다. 목단.당초.연화절지등 단순한 것에서 다소 복잡하고 복합적인 목단.당초와 연당초절지문이 새로 등장한다. 또한 덩굴진 당초도 아니고 절지문도 아닌 전혀 회화적 구성이라고 할 수 있는 연지문,포류수금문 등이 새로 등장하고 단독문양인 운학문,운문,학문,앵무문 등이 나타난다. 이들 모든 문양은 문양의 주체로서 다시 말하면 이때까지 주문양만이 등장하다가 이 시기부터 점차 조조문이 등장하면서 주문양과 조조문이 거의 반드시 함께 등장하는 시기로 이행된다.

 

또 이 시기에는 대접 등 내외면이 있는 그릇들에는 대체로 일면에만 시문이 있다가 12세기 중엽에 가까울수록 내외양면으로 시문이 확산되기 시작한다. 또한 이 무렵 고려청자의 기명을 살펴보면 병류,주자류,정병,향등,유병류 등는 선행하던 토기나 그 시대의 청동이나 은제품에 그 의장문양과 더불어 전례가 있었던 것도 있으며 이러한 대표적인 예가 미국 보스톤 미술관에 있는 고려은제도금봉황진주자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동형의 청자사자자진주 등과 비교해 보면 곧 알 수 있다. 그들의 번안은 벌써 11세기부터 이루어지고 이때 12세기에 와서 그 형태가 고려적인 아름다움으로 바뀐 것이다.


(3)
초기의 청자상감


청자상감은 전초에서 언급한 바와같이 이미 초기청자 II형식시기인 10세기후반경에 매우 드물지만 그 실례가 있어 그 발생을 알 수가 있고(10) 11세기에는 명문(계축년조상'대성지본'명 청자상감 바릿대)을 상감으로 나타낸 경우가 수열있을 뿐 그 기법도 아직 거칠고 문양효과도 두드러지지 못하였다고 생각된다. 청자상감은 그러나 이때에는 이미 각 문양에 종속문으로 등장하거나 단독문,절지문으로 조금씩 나타나지만 이미 그 기술이 술견되고 문양 효과가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

 

종전까지는 인종왕능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청자일괄유물중에 청자상감의 출토가 없었고 '선화봉사고려도경'의 청자기사에 청자상감 이야기가 없었던 사실을 인용해서 우리나라 일부연구자(11)와 일본인 연구자들은 청자상감의 12세기 중엽 발생설을 내세웠으나 그것만으로는 논제가 희미하다고 생각한다.

 

인종왕능의 출토품은 교란된 유물을 조사수습한 것이었으며 초기 상감은 그 수도 적었겠지만 초기 일수록 일반적인 음각문이나 양각문을 주문양으로 하고 매우 제한된 어느 부분에만 종속문으로 약간의 상감을 넣었던 것이 그 특색이었기 때문에 아직 미완성의 단계에서 왕실의 부장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를 들면 청자양인각목단당초문완이나 청자양각연당초시명표형병 같은것들이다. 목단당초문완은 내면구녹에만 가늘게 상감당초문당하나를 둘렀을 뿐이며 청자양각연당초시명표형병은 전신에 연당초문을 양각한 다음 앞뒷면에 능화형을 만들고 그 안에 시명만을 흑상감했을 뿐이다.

 

 실제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963년 이후 발굴을 계속하고 있는 전남 강진군 대구면의 청자요지중에서 대구면 사당리 7호요지일대의 조사에서는 바로 이 시대 즉 12세기 전반에서 바로 중엽(1150년대)까지의 가마를 조사한 바 있다. 여기에서는 '고려사'세가 의종11(1157)조에 보이는 청자와의 실체를 밝혔으며 또한 12세기 전반 청자에서는 제일 앞선 것으로 여관요청자와 매우 유사한 형태의 화형탁잔 등이 나왔다.

 

이 일련의 잔류는 인종왕능에서 촐토되었다고 하는 일괄유물보다 어떤 형태의 부분이 훨씬 과장된 것이었으며 내화토눈을 작게 붙여 번조하여 11세기 이래의 오랜 번조수법을 알 수 있었다(12). 또한 인종왕능에서 발견된 일괄유물과 똑같은 자형.문양의 기명들이 수적으로는 가장 많고 바로 청자와를 반출하는 파편층과 연결된다.

 

인종왕능에서 발견되는 동류의 청자에는 수량은 적으나 상감편들이 간혹 발견되어 이 파편들을 보면 대접의 구단부에 종속문으로 좁은 당초문대만이 상감으로 나타나거나 외부 또는 내부에 국한된 일부에만 상감문양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상감기법은 청자의 태토위에 음각무늬를 새기고 그 새겨진 각흔안에 자토나 백토를 메꾸어 놓은 다음 시유해서 구워내면 자토는 흑색으로 백토는 백으로 발색되는 것이다. 이 기법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나 잔손질이 많이 가서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잘못하면 문양이 녹아서 유약에 흡수되고 반대로 유면에 빙열이 너무 많이 생기거나 또는 지거나 하는 경우가 있어 결과적으로 생산비가 많이 드는 것이다.

 

고려시대에 나타난 이러한 청자상감기법은 고려인의 창의로써 이루어진 독보적인 자예의장이다. 이러한 상감기법은 아마도 그 시대 청동그릇에 장식하는 금입사기법과 나전칠기의 시문법에서 격상되었을 것으로 짐작되어진다.그 신례로 일전의 청자ㅗ상감호앙수금문정병들의 무늬와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청동금입사포앙수금문정병들이 문양을 비교해 보기로 하자.


(4)청자동화


(5)철화청자.유화청자.철재청자


(6)연리문청자


청자동화 : 도자기에 산화동안료로 문양을 그리고 시유하여 번조하면 여러가지 색깔로 발색이 된다. 그 중에서도 자기에 산화동으로 문양을 그리고 고화도로 환원번조하면 붉은 발색으로 문양이 나타나며 이것을 동화(진사)발색이라고 한다. 자질(청자)에 진사로 선명한 발색을 처음 나타낸 것은 고려였으며 그시기는 12세기 전반기였다.

 

산화동에 의한 녹색의 발색은 도질의 경우 저화도에서 손쉽게 가능한 것이지만 고화도의 자질에서는 매우 어려운 것이며 고려청자의 진사발색은 세계최초의 개가였으며 자기에 시문하는 발색중 가장 화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인은 이 진사발색을 절대로 남용하지 아니하고 그 초기인 이 시기에는 잔이나 향로에만 약간 사용했을 뿐이며 12세기 중엽 상감의 성기이후에는 상감과 병행하였으되 상감부입의 극히 일부에 사용하여 액센트와 같은 효과를 나타냈을 뿐이다. 중국에서는 청백자에 진사발색을 시도하여 14세기 전반인 1320년대에 성공을 보기 시작하여 명대에 가서야 특히 선덕년간 백자에 아름다운 진홍의 진사발색이 성공한다.


철화청자.유화청자.철재청자 : 10세기에 이미 철화문청자와 퇴화문청자가 생겨나고 11세기에 그 수효가 많이 늘어났으며 특히 철화문이 더 많다. 철화문의 일부문양은 중국 요주요계 백유흑화의 자극으로 생겨난 것이라고 보여지는데 일설에는 황동성의 광주 서촌요와 관련되었다고도 한다. 초기의 산지로는 부산 덕포리와 11~12세기 초경 요지로는 해남 산이면 요지를 들 수 있는데 환원번조가 아닌 산화번조로 표면발색은 모두 갈색을 머금고 있다.

 

12세기의 청자 절정기에는 강진과 부안과같은 중심요에서도 소량 만들었으며 환원번조로 구운 청자색을 나타낸 것도 있다. 문양은 매우 다양하여 요주요계와 간이 주문과 종속문이 있고 문양이 도식화한 것이 있는가 하면 종속문이 없이 주문양만이 회화적이면서 매우 대담하게 재구성한 고려 독자적인 것이 있다.

 

퇴화문은 철화문에서 우리가 만즐어낸 것이며 문양구성은 주문양만이 있는 것이 있으며 미숙한 것도 있으나 종속문이 있는 경우도 주문양을 회화적인 구성으로 하여 고려 특유의 문양구성을 하고 있다. 매우 희귀한 예이기는 하나 청자에는 어느 면에 백토를 분장하고 분장부위에 음각으로 화병을 나타낸 것도 있고 퇴화문 주위에 백토분대대를 두르고 그 분장대에 음각으로 당초문등을 나타낸 경우가 있다. 철채는 청자태토위에 철분을 바르고 그 위에 청자유약을 입혀 번조한 것으로 발색은 대체로 흑색을 나타내는데 철분이 많은 안료를 바른 경우 적갈색이 된다. 적갈색의 경우 유약은 얇게 입혀진다. 철채청자는 11세기후반경으로 부터 12~13세기경까지 만들어졌는데 흑색발색의 경우에는 퇴화문과 상감문양이 있고 적갈색발색인 경우에는 면상감분양이 있다.


연리문청자 : 굽고난 후의 청자의 태토는 회색인데 이 청자태토에 검게 되는 태토와 희게 되는 백자태토를 한데 섞어 이겨 반죽하고 그릇을 만든후에 겉을 약간 깎아내면 그릇면이 검고 희고 회색이 섞여 마치 대리석과 같다. 이 위에 청자유약을 입혀 구워내면 맑은 비색속에 있는 자연의 대리석으로 깍아 놓은 것과 같게 된다. 중국에서는 우리보다 앞서 당대에 이미 이러한 연리문자기를 만들었지만 검고 희고 회색인 태토가 매우 일정하게 층을 이루면서 파도같이 배합되어 너무나 인위적인 구성을 지니고 있다.

 

 

 

 

4. 청자상감의 전성기(12세기 중엽~13세기 전반)

 

고려청자는 인종년간에 은은한 비색의 아름다움과 유연한 중에 예리함이 깃든 형태에 의하여 기품이 있으면서 부분적으로 유려한 선을 지니기 시작하였다. 여기 유연한 선을 지닌 음각.양각문양 등 이 담긴 모습과 함께 그 절정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고려청자에 있어서 제일차의 절정기 였으며 이때 청자의 모습은 북송의 여관요나 정요등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이들 북송의 명요중에서도 관중에서 사용하는 기명은 특히 중국적 특징을 더욱 잘 나타내고 있다. 이들 명기중 우선 여관요의 청자는 유색이 진하지 않으면서도 불투명하여 침잠되는 듯한 깊은 맛이 있는데 이때 우리 청자의 유색은 오히려 그 보다 비비색이 더 고우면서 반투명하여 은은한 중 맑은 맛이 있다. 기형은 여관요와 정요의 것이 보다 예리하고 냉엄함이 있는데 우리청자는 부드러움과 유연함이 깃들어 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고려청자는 제이차의 절정기를 맞게 된다.

 

보통 절정기는 한번이지만 고려청자에는 두번의 절정기가 있다. 그 두번째의 절정기가 고려 18대 의종년간이며 그 절정기가 조금씩 수그러들지만 대체로 몽고가 침입하여 커다란 국난을 당하는 1220년대까지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의종년간에는 상감기법과 상감시문이 본격화되면서 청자의 유약이 더 맑고 투명하여지고 기형의 예리함은 내제적인 정신으로 숨겨지고 표면은 은근한 양감이 있는 중 부드럽고 유려한 형태로 변모한다. 이때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청자상감의 전성기라고 할 수도 있고 청자유약이 한층 맑고 밝아진 시기라고도 할수있다. 12세기 중엽으로부터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고려도자기는 청자상감중심으로 급격하게 세련되어 양산되었으며 이러한 청자상감 전성시대는 몽고군의 내침으로 고려의 국토가 그들에게 짓밟히고 고려정부가 강화도로 들어가서 40년간에 걸치는 저항을 시작하는 1220년대 무렵까지 약 80년간에 걸쳤던 것이다.

 

청자상감법은 이 기간중에 다양화되고 청자전체가 양산되었으며 특히 그 상감의장 무늬에 있어서 12세기 전반기에 양인각문양 등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운학문 단독문양과 목단.국화절지 등 절지문양과 사실적이면서 회화적인 목단당초문 등이 상감으로 시문되어 문양으로 세련되는 등 독자적인 주제와 내용을 갖추게 되었다. 이때의 문양구성에 가장 주목할 것은 주문양과 종속문이 함께 등장하여 적재적소에 따로 시문되면서 서로 보완하는 입장에 있는것이다. 이로서 고려청자문양은 공예의 장으로서 하나의 완성을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내외양면이 있는 대접과 바래기같은 그릇에는 내외면에 모두 문양이 등장하여 내외의 균형을 잡게 된다.

 

문양은 12세기 전반기의 사실적이고 회화적인 것에서 조금씩 양식화되고 도식화되었지만 사실이 지니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살린 채로 그 과정이 이루어져 공예의장으로서 높은 품격을 함께 지닐 수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상감기법의 정밀화.다양화 때문에 필연적으로 청자유의 투명도가 추구 되었던 것이다. 즉 상감무늬가 세련될수록 그 투시효과에 신경을 쓰게 되었고 이러한 투명도의 추구때문에 오는 부작용 또한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이 즉 빙열이라고 일컫는 식은테의 일반화였다. 즉 이 청자상감 전성시대의 유조는 유질의 경도가 높아짐에 따라서 빙열이 유면전체에 분포되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며 이것은 12세기 전반기 순청자 전성시대의 빙열이 없는 유조와는 대조를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중국의 고월주요계 여관요등의 중국청자 질감과는 점점 거리가 더 생기게 되었으며 유의 질감뿐만 아니라 색감과 문양에서도 또 다른 고려청자 특유의 품격이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이러한 청자상감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예작중의 하나가 청자상감보상화문(13)대접이다. 이것은 1159년에 돌아간 문공유의 무덤에서 그 묘지명가 함께 나온 작품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1159년 무렵 또는 그보다 약간 더 거슬러 올라가는 시기의 것임이 분명하다.

 

이 대접의 상감기법에서 보여준 다양성과 그 세련도로 보아 청자상감기법이 개발된 후로도 한참 지나서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경지라는 느낌이 든다. 이보다 40년 뒤늦은 고려 명종왕(1202)지능에서 나온 청자상감절지문 대접은 유약과 상감의 세련도가 문공유묘출토 대접보다는 못하지만 이 두자료가 고려청자상감의 편년자료로서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이 두가지 모두 유의 투명도가 높고 맑은 비색이며 주문양과 종속문양의 포치가 짜임새있고 아름다운 것으로 보아 청자상감이 오랫동안 계속 정감을 다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12세기 중엽에서 후반기에 걸치는 시기의 걸작 예로서 두드러진것은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비롯해서 국립박물관과 기타 국내외의 개인 공사립기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여러 대접 주자..매병류들이다. 이들은 그 문양이 사실적인 문양을 약간 도식화한 것이나 자연의 운치가 감돌며 유가 투명도가 높고 청정한 회청색이며 설핀 빙열이 시원스럽게 분포되어 있다. 이 청자상감 전성시대( 특히 의종년간부터 명종시까지)에는 다른 모든 청자기법이 세련되어 화사한 꽃을 피웠던 때 이기도 하다. 전장에서 이미 언급한 동화청자,화청자,철채,연리문 등도 한껏 아름다워졌으며 품격이 높은 화금자기(청자)가 있으며 그외에 철유,흑유도 그 세련이 절정에 도달하였다.

 

이 청자상감 전성시대 80년간의 후기라고 할 12세기말부터 1220년대에 걸친 30년은 황금기였던 12세기 후반의 여세를 몰아서 청자상감이 그 정밀도를 어느정도 유지하던 때였지만 자형에 나타난 곡선의 성격과 음각문양 등에 약간의 시대적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즉 유의 청아도에 약간의 변조가 나타나서 유약이 좀 두껍고 그 색택이 좀 진하여졌으며 문양의단위가 작아지며 과밀화되는 경향이 나타나는가 하면 다른 일면에서는 산만화하는 경향도 엿보이기 시작한다.

 

자형에서 오는 곡선이나 상감음각에서 볼 수 있던 선률적인 아름다움이 차차 순화되는 도식화가 일층 더 빠르게 진행되어가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12세기 고려청자가 지녔던 미의 격조에 약간 이완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하겠다.순청자는 청자상감 전성기간과 그 이후에는 점차 그 수효가 줄어 들고 있었다. 이 기간동안의 순청자자료로서 매우 중요한 것은 국립박물관이 발굴조사한 청자요지(14)로 이 가마에서는 청자와도 번조한 고려청자 명요지이다.

 

고려청자와의 존재에 대해서는 `고려사' 의종세가 11(1157) 4월조에 왕이 왕궁 동쪽 이웃에 새로이 궁궐을 만들고 그곳에 세운 양이정에 청자를 덮었다는 기사로써 짐작되어 왔었다. 국립박물관이 발굴조사한 전남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의 청자요지가 바로 그 양이정에 덮었던 청자와를 구워낸 가마였다는 것은 개성 만월대에 있는 고려왕궁터에서 출토된 청자와와 같은 청자와편이 많이 출토된 사실로써 증명이 되었다.

 

이 사당리요지에서는 청자와뿐아니고 같은 층위에서 많은 순청자가 발견되었고 청자타일류의 파편들도 다양하게 나왔으며 그것들 중에도 청자상감과 소문이 섞여 있어서 상감기법이 성행하기 시작하였을 때에는 순청자의 수요가 더 많았으나 점차 상감청자의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한 고려궁실의 호사스러움을 짐작 할 수 있게 되었고 아울러 고려청자의 편년에 있어서도 빼놓을 수 없는 자료가 되었다. 1120년대이후 1270년대 중반인 원종때까지 고려도자와 상감기법은 쇠퇴의 내리막 길을 걷고 있었으나 문양과 자형은 그 이전의 모습을 어느정도 계승은 하고 있었다.

 

 

 

 

 

5.청자의 쇠퇴

 

.쇠퇴기(후반)개관


몽고군의 내란으로 수십년간에 걸친 사회불안과 경제의 혼란으로 그 처럼 정기어렸던 고려청자의 기품이 흐트러지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양상은 원종대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쇠퇴의 그림자는 청자의 기형,태토와 유약,번조수법 그리고 장식의장에 이르기까지 고루 미치게 되었고 이것은 지나간 영광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운명적인 것이었다.전국토가 몽고군에 유린당하고 원종대에는 몽고에 굴복하였다. 이와 전후하여 우리 영토를 들어 몽고에 투항하는 반역자와 왕권을 전황하는 연신이 수없이 흥발하는 중 왕세자는 인질로 왕자신까지도 몽고에 수지로 불려가는 등 국권은 흔들리고 국가도 극도의 혼란속에 충열왕이 원제의 부마로서 왕위에 올랐다.

 

억지에 의한 왕권의 확립으로 혼란이 숩게 안정된 것은 아니나 충열왕때의 고려청자는 일시 그 질이 좋아졌으며 그 보다는 고려청자가 일부 기형과 문양이 변화하는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는데 의미가 있다. 충열왕대에 일시적으로 원세력의 지배체제가 안정되면서 사회는 다시 평정을 되찾고 고려의 자예도 활기를 되찾는 듯 했었지만 그 이후 얼마 안있어 다시 쇠퇴일로를 걷게되고 결국은 과거의 괴도에서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청자상감의장은 과거의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였으되 조잡하고 거칠했으며 그 표현에는 밀도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상감의장의 일부를 인각으로 압여해서 손쉽게 처리하는 등 매우 절제없는 풍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 다음 시대에 등장하는 조선시대의 인화문지법의 시원이 되었던 것이다.말하자면 조선조 초기로 넘어가는 인화분청사기 의장의 전반적인 싹이었던 것이다.

 

살펴보면 1230년대부터 고려조가 쇠망해 버리는 1392년 무렵까지 고려의 자예는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그리고 간단없이 그 하강선을 더듬었다. 고려청자의 두드러진 곡선의 아름다움은 시대가 내려올수록 흐트러져서 우아 단정하기 보다는 혼란한 사회에 알맞는 무겁고 둔한 즉 실용성과 기능만을 생각한 안이한 편화의 조형으로 바뀌어 가는 경향이 짙어만 간다. 160년동안에 걸친 긴 경로를 하나로 묶어서 쇠퇴기라고 본 것은 고려의 국정이 그러했듯이 고려의 자예 또한 고려의 국운과 너무나 닮은 경로를 밟고 있었기 때문이다.


.쇠퇴기의 상황


이상은 쇠퇴기를 개관해 본 것이며 이 기간을 세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청자의 쇠퇴기는 대략3기로 구분할 수 있다.1기는 몽고가 침입하기 시작한 1220년대 말부터 원종대까지인 1270년대 중엽까지이며 제2기는 충열왕,충선왕,충숙왕까지, 3기는 1330년경부터 고려말까지이다.

 

이 쇠퇴기의 제1기에 있어서도 여전히 청자상감은 그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고 어찌보면 오히려 전보다 한층 양산화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 쇠퇴기중 제1기의 최후를 장식하는 편년자료로서 기사,경오,임신,계유,갑술,임오 등 간지명이 들어있는 일련의 자혈이 있다. 이 자혈들은 완형으로도 고려고분내에서 더러 발견되며 파편으로는 전남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7호요지 일대에서 많이 발견되었으며 그 중 기사명 자혈이 1980년대 초반부터 충남 대천앞바다에서 인양된다는 소문이 있었고 실제로 매장문화재로서도 신고된 바가 여러번 있었다. 이러한 사안을 감안해서 문화공보부에서는 1987년 여름 조사단을 파견하여 대천 앞바다의 임조일대를 탐사한 결과 40여점의 기사명접시와 대접을 인양한 바 있다.

 

이 일련의 유물은 상세한 정리와 분석을 해보아야 더욱 정확한 시대편년 자료가 되겠지만 `기사' 년은 원종10(1269)년이라고 생각된다. 이들 청자상감기사명 등 자혈에서 볼 수 있듯이 13세기 후반에는 이미 상감문양이 밀도를 잃었고 면상감이나 역면상감같이 밀도있고 정성들인 상감기법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12세기 중엽 이래로 계승된 문양이면서도 지나치게 변화된 선위주에 인화시문이 섞인 조잡하고 거칠은 표현으로 바뀌었으며 자형도 대접의 경우는 유연하고 유려한 미묘한 곡선의 변화가 없고 구변에도 외반이 없이 약간 내만된 채로 바로 올라간 모양만이 있고 굽다리도 약간 높고 넙적하게 되었으며 규사눈이 커져서 그 자국이 깨끗하지 못하다.

 

이러한 대접의 형태는 13세기 후반의 고려청자가 변모해가는 자취를 나타낸 새 양상이었다. 병이나 주전자같이 커다란 그릇들도 유려한 선이 경직되거나 지나치게 과장된 것도 있으며 둔한 선으로 바뀌었으며 따라서 전체의 균형을 잃고 있다. 태토도 거칠어졌으며 유약도 갈색 또는 녹색을 머금은 비색과는 거리가 먼 발색이며 굽의 정리나 번조시 눈을 바치는 방법도 매우 거칠어졌다.제이기는 원문화와 원을 통한 서역,서방문화의 영향이 간접적으로 고려문화에도 영향을 미친 때이다.

 

고려 도자기도 예외는 아니어서 기형중 대접의 구녹부가 외반된 것이 나타나며 편호가 생겨나고 문양에도 전혀 새로운 목단당초와 봉황당초,용봉운문,화훼당초문등이 등장하여 투각장식이 다시 나타나는 등 고려청자에 여러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변화는 몽고가 침입해서 국토를 유린하고 물자를 약탈할 때부터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나 충열왕이전까지는 그 영향이 미미하였으며 이후에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즉 그 이전에는 `기사',`경오'등 명문이 들어 있는 대접에 주로 보이는 문양과 그 기형이 고려청자의 모습이었으며 변화가 있었다면 거기에 매우 희귀하나 새로운 목단당초문이 나타나기 시작한다던가 인화문양이 많아진다던가 6각접시가 등장한다던가 하는 것 등이었다.

 

이 시기에는 종전까지 고려인들이 개발만하고 잘 사용하지 아니하였던 화금청자와 동화(진사)청자도 원과의 관계에서 부득이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 같다. 그 실례가 청자상감금채수하원문편호(국립중앙박물관소장)이다. 이것은 `고려사'(열전 권제18) 조인규전속에 고려왕실이 원 세조에게 보낸 화금자기에 관한 원 세조와 조인규와의 문답내용이 뒷받침 해주고 있다. 이것은 또한 `고려사' 충열왕23(1297) 정월임오초에 보이는 금화환기에 관한 기록과 더불어 이 시대에 새롭게 등장해서 한정된 기간에 사용되던 기형이며 또 거기 걸맞는 문양이 시문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즉 이 무렵이 되면 이제까지의 매병의 수가 줄어 드는 것 같으며 이러한 편호가 새롭게 등장했으나 원의 통제하에서 그들의 문화속성에 맞는 것으로 거기 맞추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유행한 것이며 또 다른면으로는 이제까지의 매병이 어떤 이상적인 자형이었던데 비해서 편호는 안정세를 보인 기능적인 면을 생각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는 점 등 그 시대상을 엿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편호에는 노속문인 연주문대를 인화로 날인해서 일부 상감공정이 간편화된 점이 있고 앞뒤 릉화형내 의 왕문양과 양측면의 문양이 정밀하지는 않으나 13세기 중엽의 조잡한 상감문양에 비하면 새로 등장한 문양이지만 훨씬 짜임새 있고 문양의 포치도 새로운 것이어서 고려청자에 새로운 미감을 불어 넣어 새로운 양상이 전개된 것이라고 하겠다.

 

여기에 더하여 상감문양의 뒷 부분과 그 언저리에 금으로 설채하여 12세기 전반의 말경에 시작된 화금시법이 이때의 특수한 상황으로 일시적으로 되살아난 것을 알 수가 있다. 다시말하면 이편호는 `고려사'충열왕대 에 수록된 화금자기와 일치되는 제반 특수성(화금청자편호의 형태 새로운 문양과 포치,인화문등)을 가짐으로해서 이 시기에 합당한 편년자료일 뿐아니라 이 시대 상황을 설명해 주는 자료라고 하겠다. 또한 이 시기에는 일부 왕실이나 귀족의 사용 도는 원에 보내지는 것이겠지만 일시 청자유약도 조금 탁해지긴 했으나 환원이 잘되어 고운 발색을 하고 있으며 진사청자도 전에 비해서 많아졌다. 유약이 안정된 실증으로는 이때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 화금청자(전기 편호와 화금청자대접-국립중양박물관소장)와 진사청자등으로 미루어 짐작이 된다.

 

또한 이때 등장했다고 생각되는 새 문양의 자혈에는 일시적이나마 세련된 기형과 문양과 유약의 명혈이 있다. 이때 유약의 특징은 유빙열이 없는 경우가 많고 유약이 두꺼우면서도 비색이 흐리고 기포가 많아 조금 뿌연 듯한 느낌이 드는 경우가 많으나 13세기 중엽보다는 훨씬 아름답고 특징있는 비색유약으로 발전되었다. 문양은 주문양자체가 새로운 소재 새로운 구성으로 표현된 것이 많고 종속문은 그릇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 다시 말하면 커다란 그릇에서는 종속문자체가 커졌으며 작은 그릇에는 종속문이 이각삼각으로 나타나서 그릇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으며 문양구성이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제삼기에 들어서면 청자가 보여주는 퇴보적인 변화는 한층 분명해 졌으며 또 속화되어 갔다.

 

원과의 관계는 물론 고려청치.사회.종교의 혼란으로 고려청자는 충열왕때의 일시적 안정이 있고 난 다음 극도로 퇴보의 일로를 걷고 있었다. 기형은 점점 둔하고 선은 흐트러졌으며 그릇은 두껍고 무거우며 문양은 본래 문양이 지녔던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의미를 전혀 상실하여 억지로 약화되고 이상하게 변형되었으며 인화문이 늘어난다. 또한 전혀 알 수도 없고 의미도 없는 선조문양을 흐트러진 채로 자꾸 답습하여 내려가다가 결국 몇개의 단절된 굴곡된 선으로 나타난다.

 

번조시의 받침이 14세기 중엽에 이르면 거의 전부가 모래받침이 14세기 중엽에 이르면 거의 전부가 모래받침이고 태토비짐눈이 생겨나고 규사눈은 점차 없어져서 굽바닥은 둔하고 지저분하게 된다. 이러한 쇠퇴기의 고려청자가 조선조 전기 분청기의 모체가 된다. 3기의 편년자료는 전남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요지의 동일층위에서 `지정'명과`정해'(1347)명 파편이 같이 나왔으며 또 이 층위에서 많은 파편자료가 출토되어 1347(충모왕 3)당시 청자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공민왕비 노국대장공왕의 묘호인 `정능'명이 들어 있는 접시파편 하나와 완형의 대접 하나가 있다. 이는 1365년이라고 생각됨으로 당시 청자모습의 일부를 살필 수 있다. 이외에 `을유사온서'명 청자상감유문매병(1345 추정), `양온'명 청자상감유연문편호(14세기후반),강원도 원성군 명전시요 삼층석탑에서 `홍무21년 부진(1388)4'명탑지와 함께 발견된 청자상감선문대접 등이 있다. 이들 일련의 편년자료를 토대로 이 기간의 청자의 모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릇은 두껍고 둔하고 무겁다. 환원번조가 보장되지 아니하여 점점 비색을 갈색과 황색으로 변하고 거기에 태토까지 나쁘고 거칠어져 흑색까지 곁들어 지고 태토속에 기포가 있는 채로 형성하여 부풀어 오르는 경우도 있다. 문양도 이미 설명했지만 전반적인 구성이 커다란 매병같은 경우엔 주문양이 줄어들고 종속문양이 커지며 대접같은 경우엔 주문,종속문이 없이 인화문만 늘고 나중에는 인화문도 몇 개만 남기고 몇 개의 선만 남는다(전기 명전시탑내발견 청자상감선문 대접). 매병의 경우 구부가 각이 지고 예리하던 것이 조금 완만한 나팔같이 되었으며 변부는 긴장되다 다시 이완되다가 끝에 가서 다시 긴장되며 허리는 길게 되었다가 다시 잘룩해지며 결국 조선조 초기 분청사기매병으로 이어져 구비치는 힘으로 변한다.

 

고려자기는 당군숭배 전통속인 토속신앙과 불교,노장,풍수도참사상 등을 배경으로 청자를 주로 생산하고 세련시켜 12세기 전반에 비색순청자로서 유례가 없는 독특한 특색을 나타냈고 12세기 중엽 유약을 맑고 밝게 발전시켜 청자상감으로서 다시 한번 꽃을 피웠다.

 

고려도자기 중에서는 청자가 특히 많이 생산되고 세련되었다. 토기에서 청자로의 이행은 인류문화 발전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으나 고려시대는 그 자연과 시대적 배경으로 청자가 특히 많이 생산되고 가장 세련되었다고 생각된다. 고려청자는 은은하면서 맑고 명랑한 비색,조각도의 힘찬 선을 지니고 기물과 일체가 된 시적인 운치가 있는 상감문양,유연하고 유려한 선의 흐름을 지닌 형태,한 두점 액센트로 강한색(진사발색)을 쓰는 이외에 모든 색을 담담하게 구사하는 등이 그 특색이며 아름다움이다.

 

 

 

 

주 석

 

1) 왕경정,사동청,주려려(여장의 발견),1987,10,상해인민미술출판사간행


2) 종전에 일본인학자들은 우리나라 청자의 발생에 관하여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소장(순화사년명)항아리를 들어 933년에 초보적.원시적 청자로 출발했고 11세기에 들어서서 비로서 청자다운 청자를 만들기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학문의 진전에 따라 이러한 학설은 전혀 잘못이라는 것이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먼저 1962년이후 국립박물관에서 우리나라 가마(요지)터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를 시작하여 청자가마에 대한 조사도 20여년이상 계속하고 있다. 그 결과 전남 강진군 대구면 일대의 청자가마터 조사,인천직할시 북구 서충경서동 녹청자 가마터에 대한 조사 등으로 초기청자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에서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이웃 중국,일본 등지에서도 여러가지 조사가 진행되어 우리의 초기청자에 대한 조사에 여러가지 근거를 더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서남해안에는 초기 청자가마가 많다. 그 대표적인 가마는 전남 강진군 대구면과 칠양면 일대에 있으며 이외에 북쪽으로부터 헤아려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평안남도 강서군 도창면2리 사기동,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원흥리,경기도 양주군 장흥면,부곡리,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서리,전북 진안군,성수면 도통리, 전북 고창군 아산면 용계리,전남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등이다.이들 가마에서는 대접.접시들 위주로 여러가지 생활용기를 만드는데 그 중 대접 한종류의 형태와 굽의 모양이 중국 소강성 동북부에서 번조되는 월주요산청자대접과 거의 같다는데 시점을 맞추어 본 것이다. 이 대접의 형태는 전기 삿갓을 뒤집어 놓은것과 같이 측사면이 직선으로 뻗고 굽다리 밑이 넙적하다. 또한 이때 월주요에서는 그릇과 도지미사이에 굽고 난 다음에 잘 떨어지도록 내화토눈을 받혀서 번조하였다. 중국측 보고서에 의하면 이들 소위 일휘문굽(해무리굽)대접 등은 8세기이후부터 번조하기 시작하여 10시기전반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일본에서는 그때 이러한 일휘문굽 청자를 수입하여 사용했는데 일부 그 그릇을 토기로 방제하여 사용했으며 토기로 방제한 것도 대략 10세기 중엽까지 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도 중국 월주요청자의 일휘문굽대접과 거의 똑같은 청자대접을 만들면서 후대에 만들었을 이유가 없다. 9세기전반에 장보고에 의한 활발한 해상활동과 우리나라 자체내의 여러가지 여건이 시유토기에서 청자를 사용할 수 있는 사회로 성숙되어 가고 있었으므로 월주요청자의 기술을 바로 신라에서 받아들여졌다고 생각된다. 또한 그 당시 신라조정이 혼란하였지만 장보고의 세력이 신라조정과 맞먹을 수 있을 만큼 성장하였다는 것은 해상활동에서 얻어진 부의 축적과 성작이 컸겠지만 이에 따른 그 일대의 경제.사회의 성장으로 이 지방이 개화되어 경주쪽보다도 완도를 중심한 서남해안 일대가 오히려 먼저 청자를 쓸 수 있었던 청자사용의 욕그가 컸었을지도 모른다.신라청자에 대한 것은 앞으로 좀 더 근거를 보완해야 되겠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이를 주장하고져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일휘문굽청자가 많이 발견되는 가마터에서는 국당초문계의 음각문양이 조금씩 나타나며 좀더 지나면 양인각문양도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중국측 보고에 의하면 당대에는 월주요청자에 문양이 거의 없으며 당말.오대에 가서야 문양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나라 초기 일휘문굽청자가마에서는 문양이 없으므로 그 사원을 9세기중경까지로 소급할 수 있지않을까 생각한다. 또한 우리나라 학계에서 종래 고려초 토기라고 생각하던 토기가 경주 안압지 발굴조사이래로 그 편년의 그릇됨을 시정하여 통일신라시대로 정정하고 있다. 이들 통일신라토기의 기형과 거의 똑같은 기형의 청자가 초기청자가마에서 발견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크고 작은 전접시,유병,귀가 달린 작은 항아리 등이다. 또한 이와 유사한 크고 작은 전접시,커다란 대접의 뚜껑 등이 유기로서 안압지에서 발견되는데 이들 또한 초기청자그릇에 있는 유형이다.

 

끝으로 안압지에서는 많은 도자기파편이 나왔다. 이를 층위별로 수습하지않고 한데 몰아 놓은 것이 40상자쯤 되었다. 1984년과 1985년에 걸쳐 본인이 이를 분류하여 본 결과 조선조중기의 백자파편이 제일 많고 다음 약간의 분청사기편,약간의 조선전기 백자편,또 약간이 우리나라 청자편과 중국의 청자.백자편이 있었다. 중국 청자와 백자편은 문양이 없는 월주청자 일휘문굽 파편이 제일 많고 기타 청자편 약간과 형주백자라고 생각되는 역시 일휘문굽 백자편과 기타 백자파편이 약간 있다.

 

고려청자 파편은 일휘문굽 청자파편 약간과 이와 동시대의 파편 약간가 이보다 훨씬 시대가 뒤지는 상감발생이후의 파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안압지는 신라 태자궁으로 알려졌으며 여기서 수집된 파편들로 미루어 보아 신라멸망이후에는 폐허였으며 고려중기이후로 주변에 약간이 민가가 들어섰으며 조선조중기이후에 민가가 많이 들어섰던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안압지에서 출토된 중국청자 일휘문굽파편과 우리나라 청자일휘문굽 파편은 거의 동시대이거나 우리나라 청자가 그러한 중국청자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으므로 그보다 약간 뒤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이러한 청자이 수량은 안압지에서 발견된 토기에 비하여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중국청자.백자도 수입품으로 귀하였을 것이고 우리나라 청자도 처음에는 귀하였을 것이다. 또한 이것도 문화의 전파와도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중국도자기가 호서지방에서는 많이 발견 되는데 신라지역에서는 거의 발견예가 없는 것과도 상통된다고 하겠다.


3) 김재열(용인서리고려백자요),발굴조사보고서1,1987,삼성미술문화재댄,호암미술관간행,김재열,(고려백자의 발생과 편년)고고미술177,한국미술사학회간행.


4) (고려도자요지의 발생에 관한 연구),1979, 순전대학교박물관간행


5) 윤용이,(고려도자요지의 연구) 고고미술 171.172합찬, 1986,한국미술 사학회발간,윤용이,(완도해저유물),1985,문화재관리공단 발행,윤용이,(간송문화)도자VI청자,1986,한국민족미술연구소 간행,윤용이교수는 이들 논문에서 해무리굽청자의 발생 즉 우리나라 청자의 발생을 10세기후반인 광종과 성종년간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녹청자의 발생을 그보다 더 뒤로 보았다.


6) 해남 산이면의 녹청자가마는 12세기초경까지 가마가 계속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가마는 11세기말경부터 양질의 청자도 일부 생산하였으며 특히 화청자.퇴화문 청자중에는 조질의 녹청자와는 전혀 다른 양질의 청자를 번조한 예가 많다. 그리고 양질의 청자를 번조하는 단계에서 단절되고 만다. 모든 녹청자가마에서 생산된 자료를 보면 11세기중.후반경에 단절되고 마는데 해남의 산이면경우만 12세기초까지 계속되었으므로 대체로 11세기후반경부터는 조질청자의 생산은 중단되고 강진과 부안 등지에서 양질청자위주의 생산을 하였다. 12세기이후에도 일부 치졸한 청자가 극소수 발견되지만 이후부터는 일반서민까지 양질청자를 사용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7) 시부양명(송대청자의 전계)(,북방청자의 발흥)참조,(`세계도자전집'12 ,1977,일본동경,소학관간행)


8) 도판7의 청자대접에서 도판14 청자음각국당초문대접으로 이 대접에서 다시 도판21 청자음각국당초문대접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참조하기 바람.


9) `송사'487,열전 제246, 외국3,대중상부8년도


10) 용인국 이동면 서리의 10세기경 해무리굽 층위에서 거치른 상감편이 출토된 바 있고 10세기후반경으로 추정되는 전남 함평군 손불면 양계리 1호요지에서도 청자흑색상감편이 2점 발견된 바 있다. (전남지방 도요지조사보고서II) 1988.12, 국립광주박물관 간행. p.56~59.p 70사진과 7 p.84 참조.


11) 윤용이, (고려도자의 변천) (간송문화) 도자VI청자,1986,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간행, p.84참조.


12) 강진군 대구면 청자요지유물은 국립박물관에서 십여년 조사하였다. 특히 대구면 사당리 일대에서는 7호 요지 부근의 민가(이용희씨 소유)와 그 뒤 밭에서 청자와를 번조한 가마를 발견하였다. 이 청자와를 번조한 요지는 7호요지보다 앞서는 시기로 12세기초로부터 12세기 중엽까지 계속되었으며 상감청자가 성행하는 초기에 7호요지로 이행된 것 같다.본문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이 가마의 퇴적에서는 제일 밑 바닥 건물요라고 생각되는 점토층이 깔린 곳에서 내화토목에 얇고 과장이 심한 여관요식의 잔류파편과 그와 유사한 파편들이 약간 나왔다. 그 위에서는 인종왕능출토식의 청자와 규사목이 있는 그보다 조금 유료한 선을 가진 청자와 청자와까지 출토 되었다.


13) 경기도 계풍군 문공초묘에서 출토된 이 대접은 하한이 1159년이다. 이 대접에는 내외양면에 짜임새있는 문양이 가득 포치되었다. 내면에는 구녹부에 종속문인 좁은 당초문대가 있으며 그 사이 넓은 면에 주문양인 국당절지문이 있다. 즉 내외면에 주문과 종속문을 갖춘 짜임새 있는 문양으로 가득 차고 문양자체는 약간 도식화되어 품위있는 공예의장으로 이 시대 상감문양을 대표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