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mes Whistler
The Falling Rocket
검은색과 금색의 녹턴 - 떨어지는 불꽃
휘슬러...
그를 재판장으로 데리고 갔던 문제의 그림이다.
`공중의 면전에 물감통을 끼얹은 그림'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작품.
이 그림에 영감을 받아
관현악곡 `녹턴'을 작곡했던 드뷔시.
`회화에서 중요한것은 주제가 아니라
그것을 색채와 형태로 전이시키는 방식' 이라고 휘슬러는 말한다.
휘슬러가 본 밤의 인상만큼이나
음울하고 몽환적인 바이올린 소리가 생각난다.
chopin - nocturne
제임스 애봇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1834-1903)는 진정한 국제인이었다. 그는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러시아에서 보냈으며 웨스트 포인트에서 공부했고(화학에서 낙제했다.) 해군에 있을 때는 지도제작자로 일하면서 에칭 기술을 배웠으며, 1855년에는 파리로 1859년에는 다시 런던으로 이주했다. 재기 넘치는 멋쟁이이자 심미주의자였던 그는 잠잠했던 전성기 빅토리아 시대의 예술계와 사회에 충격과 놀라움을 불러 일으켰다.
1855년 학생의 신분으로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는 쿠르베의 그 유명한 개인전 <사실주의 전시관>을 보았고 관변미술인 파리 살롱전에 대한 공격에 충격을 받았다. 1859년에 살롱전에서 퇴짜를 맞은 휘슬러는 마네와 함께 후일의 낙선전과 유사한 전시회를 가졌는데 여기서, 선보다는 양감과 색채로 입체감을 표현한 휘슬러의 <피아노 앞에서>가 쿠르베에게 인정받게 된다. 결국 휘슬러는 쿠르베의 영향을 깊이 받게 되었고, 때로 그와 함께 작업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루브르에 있는 벨라스케스의 섬세한 색조와 일본 판화의 평면적이면서도 도식화된 패턴에 매혹되어 꽤 오랫동안 영감을 얻기도 했다. (일본 판화는 1850년대 파리에 속속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1860년대에 휘슬러는 일본 작품들을 상당히 수집했다.)
1859년에 런던으로 자리를 옮긴 이래 휘슬러는 쿠르베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1863년 낙선전에 출품했던 그의 유명한 <흰 옷의 소녀>는 마네의 <풀밭위의 식사>와 함께 웃음거리가 되었는데 라파엘 전파인 로제티가 그리던 젊은 여인의 무언가를 동경하는 듯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흰색의 색조를 주조로 한 절묘한 작품으로, 후에 휘슬러는 여기에 '백색 교향곡 no. 1'이라는 제목을 덧붙였다. 이는 회화에서의 미묘한 색조의 차이에 점점 몰두하면서 문학적 내용보다 그림의 순수한 형식적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의 신념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이다. 그의 음악적 제목들 - 교향곡, 편곡, 후의 그 유명한 야상곡-은 분위기 음악과 상응되는 색조, 색채 그리고 선의 조화에 대한 그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것들이다.
초상화에 있어서도 그는 자연주의적 묘사보다는 추상적 형태의 우월성을 주장했다. 19 세기의 유명한 초상화 중 하나인 (그러면서 역설적으로 가장 사실적이기도 한) <미술가의 어머니>에 그가 붙이고 싶어 했던 제목은 '회색과 검은색의 배열 no.1'이었다. 이 작품의 차분하고 섬세한 색조는 벨라스케스를 반영하고 있지만 평면화된 공간, 화폭에 절묘하게 계산된 배열은 20세기 회화의 추상적 편향을 예견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특성은 젊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1882년 파리에서 이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 쇠라뿐 아니라 보나르나 뷔야르 같은 앙티미스트들에게도 수용되었다. 초상화의 주제에 대하여 휘슬러는 일반대중이 관심을 가질 권리를 공공연하게 부정하였다. 즉 검은색과 흰색의 배열이란 "검은색과 흰색의 배열일 뿐이며 내 경우에는 이 그림이 우리 어머니를 그렸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일반대중이 그 초상의 주인공에 대해 무엇 때문에 관심을 가지며 또 가져야 한단 말인가?"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휘슬러는 이 작품에서처럼 순수한 조형적 가치를 강조하고 그의 또 다른 작품들에서는 즉흥적인 자연스러움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상주의 이론이나 실천에 진정으로 함께한 적은 결코 없었다. 그러나 인상파처럼 그의 작품이 당시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휘슬러와 기존의 영국 미술 및 일반대중과의 마찰은 <떨어지는 불꽃: 검은색과 황금색의 야상곡>이 전시된 1876년 런던 전시회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1874년경에 그려진 이 작품은 런던의 오락공원에서 펼쳐진, 밤하늘에 쏟아지는 여러 가지 색깔의 불꽃을 본 즐거움을 그린 서정적 예찬이다. 영국의 평론가 존 러스킨은 불분명한 이유를 들면서 그 작품에 대해 반발했다. (왜냐하면 러스킨은 터너의 후기 작품을 옹호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예술적인 권위와 예언가에 못지 않게 민족적인 윤리사상가로서의 최고의 위치에 있던 러스킨은 유명한 기고문에서 "대중의 면전에...한 통의 페인트를 내던졌다."고 휘슬러를 비난했다. 휘슬러는 이에 대해 그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최종 재판은 (돌이켜보건대) 역사에 남는 가장 흥미로운 재판 중의 하나가 되었다. 휘슬러의 번득이는 재치는 그가 그린 불꽃 못지 않았다. 그가 남긴 몇몇 구절들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그 그림을 "해치우 데" 얼마나 걸렸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틀쯤"이라고 대답했는데, 그러면 이틀간의 작업에 200기니나 요구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아니다. 나는 일생을 걸려 깨달을 수 있는 지식에 200기니를 요구했다."라고 답했던 것이다. 이 대답은 법정의 박수갈채를 받았으며 그 박수갈채는 오늘날까지도 울려퍼지고 있다. 휘슬러는 승소했지만 단지 명목상의 손해배상금 1파딩(1/4페니)을 받았을 뿐이며, 재판 비용은 그를 파산하게 만들었다.
크레몬 빛: 푸른색과 은색의 야상곡
휘슬러의 색채 화음은 다른 작품들에서는 <불꽃>에서보다 훨씬 가라앉아 있다. 아마 대낮의 산문적인 산업도시를 신비스러운 꿈 같은 시-반사되는 빛을 받아 여기저기서 반짝이는 그림자가 흐르는-로 만들어내는, 황혼질 무렵의 템스 강에서의 사색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1872년에 그린 <크레몬 빛: 푸른색과 은색의 야상곡>같은 작품들은 모네의 안개 낀 루앙 대성당 연작보다 그의 20년이나 앞서는 것이다.
휘슬러의 색채 화음은 다른 작품들에서는 <불꽃>에서보다 훨씬 가라앉아 있다. 아마 대낮의 산문적인 산업도시를 신비스러운 꿈 같은 시-반사되는 빛을 받아 여기저기서 반짝이는 그림자가 흐르는-로 만들어내는, 황혼질 무렵의 템스 강에서의 사색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1872년에 그린 <크레몬 빛: 푸른색과 은색의 야상곡>같은 작품들은 모네의 안개 낀 루앙 대성당 연작보다 그의 20년이나 앞서는 것이다.
논쟁을 좋아하고, 일부러 적의를 불러일으켰던 휘슬러는 말년에 특히 시커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기도했지만 영국인의 취향을 프랑스 미술의 새로운 가치와 화해시킬 수 있는 이상적인 선구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대중들은 그의 능란하고 섬세한 에칭을 좋아했으며, 또한 그는 실내장식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는 명료하고도 평이한 색을 사용해 빅토리아 시대의 거추장스러움을 몰아낸, 단순화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나는 그림에서 일체의 외?관심을 제거하면서, 나의 작품속에 예술적 관심만을 표시하는 것을 의미했으리라...그것은 우선 선, 형태, 빛깔 등의 배합이며, 그리하여 나는 대칭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될 그 배합이 갖는 부수성도 활용시켰다." 휘슬러는 순수한 형식적 조화를 추구하여 오늘날 미국 추상화를 예언하였다.
Annabel lee by james Whistler
Old Battersea Bridge
Old Battersea Bridge
Chelsea
Peacock Room
Wapping
Purple and Rose
Chelsea Wharf,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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