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진화가 오승윤 그림
|
|
|
|
|
|
|
|
|
|
|
|
|
|
|
|
|
|
|
|
|
|
|
|
|
오승윤 화백 (1939~2006)
오 화백은 1939년 개성에서 태어났고 8.15해방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이후 화순 동복으로 이주한 뒤 초등학교 6학년까지를 이곳에서 마쳤고
지금의 광주 지산동으로 옮겨왔다. 부친은 한국근대미술의 선봉
오지호 선생이며 가계는 근동이 알아주는 선비집안이었다.
그가 고교 3년이던1959년, 서울에서 있었던 전국학생실기대회에서
『소묘』로 최고상을 받았고 그것이 인연이 돼 미술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때 한국에는 추상미술의 물결이 유행처럼 밀려들어 너나없이 그 물결에
휩쓸리고 싶어했다. 그럴 때에도 오 화백은 그림의 정석은 튼튼한 기초에
있다고 생각하고 한국의 자연이나 풍물을 구상화로 표출했는데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부친의 영향이 컸다. 1974년부터는 전남대학교에 봉직하면서
예술대학을 창설했다. 그야말로 후진양성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1980년 초 자신의 회화적 재충전을 위해 파리로 건너갔고 그때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아카데미 그랑드 쇼미에르 등 유명 미술관의 전시품을 감상하고
인체 그리기에 돌입했다. 오승윤 화백의 조형언어는 말하자면 원리 면에서는
'풍수'이지만 방법 면에서는 '오방정색'의 자기대입이라고 할 수 있다.
평론가인 빠뜨리스·드·라 뻬리헤르씨는 오승윤은 20세기 거장의 반열에 들면서
자기관의 조형기법을 갖춘 작가라고 평하였다. 오승윤 화백의 회화적 세계성은
우선 80년대를 분수령으로 탐색되고 창출된 것이다. 이제 오승윤 화백은
우리 민족의 정서와 자연을 담보로 한 거대한 화맥을 소유한 대부호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채굴하면서 '이것은 꼼짝없는 오승윤만의 그림'이라 할만한
움직일 수 없는 세계를 세계인의 미감 위에 올려놓았다.(오승윤 화백 홈피에서)
<출처;http://cafe.daum.net/hknetizenbonboo>
'그림 모음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인도_ 옛 그림 속에 나타난 한국의 여성 (0) | 2009.05.30 |
---|---|
빨래터의 여자와 남자 (0) | 2009.05.30 |
‘봄 소식’을 그린 화가 이호신 (0) | 2009.05.30 |
섹 시 포 토 (0) | 2009.05.28 |
2차대전때 실종된 미폭격기 달에서 발견 (0) | 2009.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