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옛시방

有感(유감) - 조식(曺植)

모링가연구가 2009. 4. 30. 05:23

有感(유감) - 조식(曺植)




    有感(유감) 조식(曺植) 忍飢獨有忘飢事(인기독유망기사) 굶주림을 참는 데는 배고픈 일을 잊는 수밖에 없으니, 總爲生靈無處休(총위생령무처휴) 모든 백성들은 어디에도 쉴 곳이 없구나. 舍主眠來百不救(사주면래백불구) 집 주인은 잠만 자고, 아무것도 구제하지 않으니 碧山蒼倒暮溪流(벽산창도모계류) 푸른 산의 푸른빛만 저문 개울물에 드리워져 있네. 요점 정리 작자 : 南冥 曺植(남명 조식) 연대 : 조선 중기 형식 : 한시, 5언 절구 주제 : 治者(치자)와 被治者(피치자)의 대항적 관계 출처 : 南冥集 내용 연구 舍主(사주) : 임금 백(百) : 백성 이해와 감상 유감은 표현한 대로 굶주린 백성들의 아픔을 노래했다. 집주인 곧 治者(임금)와 백성 즉 被治者(피치자)와의 대항적 관계로 읽힌다. 집주인(임금)은 할 일을 내팽개치고 잠만 자고 있으니, 백성의 주림을 구제할 방도는 달리 없는가.. 배주림을 잊는 수밖에 없는 딱한 사정이다. 結句(결구)에서 푸른 산의 푸르름만 저녁 시냇물에 비치어 가득 흐른다고 하여 시적 공간을 객관화하므로써 독자의 상상력을 불러 일으킨다. 시의 行間(행간)에서 우리는 백성의 주린 창자 속에서 꼬르륵 거리는 소리를 듣는 듯 하다. 聽無聲(청무성)의 경지를 읊고 있다. 백성의 고단한 삶을 이토록 유감있게 들을 수 있는 귀를 열고 있다니, 푸른 산은 虛飢(허기)를 뜻하며 시냇물은 虛飢(허기)가 가득한 남루한 백성의 삶을 반영하고 있다. 아집과 탐욕에 찬 경거망동으로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볼썽사나운 위정자들의 추태와 세계적인 대경제불황에 허덕이는 우리 국민의 고달픈 삶을 보며 동병상련의 정을 통감한다. 심화 자료 曺植(조식) 1501(연산군 7) ~ 1572(선조 5).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이황과 더불어 영남 사림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삼가현(지금의 경남 합천군 일대) 토동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생원 안습(安習)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승문원 판교 언형(彦亨), 어머니는 인주이씨이다. 김우옹·곽재우는 그의 문인이자 외손녀 사위이다. 조식은 외가에서 태어나 살다가 아버지의 벼슬살이에 따라 5세 무렵 서울로 이사했다. 20대 중반까지는 아버지의 임지인 의흥(義興)·단천(端川) 등 외지에 살기도 했으나 대개 서울에 살았다. 성수침(成守琛)·성운(成運)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힘썼으며, 25세 때 〈성리대전 性理大全〉을 읽은 뒤 크게 깨닫고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2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고향에 돌아와 지내다가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炭洞)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정진했다. 1538년 유일(遺逸)로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1543년에는 경상감사 이언적이 만나기를 청해도 응하지 않았다. 45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에 돌아온 후 계속 고향 토동에 머물며 계복당(鷄伏堂)과 뇌용정(雷龍亭)을 지어 거하며 학문에 열중하는 한편 제자들 교육에 힘썼다. 1548년 전생서 주부(典牲暑主簿), 1551년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1553년 사도시 주부(司導寺主簿), 1555년 단성현감(丹城縣監), 1559년 조지서 사지(造紙暑司紙)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퇴했다. 단성현감 사직시 올린 상소는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왕과 대비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오로지 처사로 자처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자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551년 오건(吳健)이 문하에 입문한 이래 정인홍(鄭仁弘)·하항(河沆)·김우옹(金宇)· 최영경(崔永慶)·정구(鄭逑) 등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을 배웠다. 61세 되던 1561년 지리산 기슭 진주 덕천동(지금의 산청)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에 힘썼다. 1566년 상서원 판관(尙瑞院判官)을 제수받고 명종의 부름에 응해 왕을 독대(獨對)하여 학문의 방법과 정치의 도리에 대해 논하고 돌아왔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한 뒤 여러 차례 그를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568년 선조가 다시 불렀으나 역시 사양하고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무진대사 戊辰對事>를 올렸다. 여기서 논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1569년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이란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사퇴했고, 1570년 선조의 소명(召命)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1571년에는 선조가 식물(食物)을 하사하자 이를 받고 사은소(謝恩疏)를 올렸다. 1572년 72세로 죽자 조정에서는 대사간에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했다. 1576년 조식의 문도들이 덕천의 산천재 부근에 덕산서원(德山書院)을 세운 뒤 그의 고향인 삼가에도 회현서원(晦峴書院)을 세웠고 1578년에는 김해의 탄동에 신산서원(新山書院)을 세웠다. 광해군 때 대북세력이 집권하자 조식의 문인들은 스승에 대한 추존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세 서원 모두 사액되었다. 또한 조식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정(文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