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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향산 보현사를 찾아

모링가연구가 2009. 4. 27. 03:45

    묘향산 보현사를 찾아

 

                                        하일식(고대사분과, 연세대 교수)


▣ 청천강을 따라서


묘향산을 찾은 것은 2005년 7월 26일. 9시 좀 넘어 평양 고려호텔을 출발했다.

섭씨 30도를 넘는 날씨에, 에어컨이 작동되지 않는 소형버스를 타고 2시간 넘는 거리를 간다는 것. 남한 생활에 젖은 이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 사실 우리 스스로에게 “언제부터 그랬냐”고 묻는다면, 그닥 오래되지도 않았지만.

연배가 높은 분들은, 에어컨이 안나오는 것보다도 시속 80Km의 속도에 창문을 열고 달렸을 때 들어오는 바람을 맞는 것을 힘들어 했다. 주석단이 타는 소형 벤츠야 그렇지 않지만, 소형버스들은 에어컨이 달려 있지만 작동되지 않았다. 또 오래된 것들이라 기계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 시속 80Km를 넘지 않게 운전한다는 것이 기사의 설명이다.

▲ 청천강 : 며칠 전에 비가 와서 물이 좀 흐렸고, 덕분에 수량이 평소보다 좀 많은 편이라 했다.

 

평양에서 묘향산에 이르는 고속도로는 아주 잘 닦여 있었다. ‘관광도로’라고 했는데, 평소 통행량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아스팔트 색깔과 상태가 말해준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런데 서울의 강변북로처럼 산 아래를 끼고 다리를 놓아 건설한 구간이 많았다. “왜 저쪽에 평지가 이어지는 데 이렇게 건설했나?”는 물음에, “그래야 농경지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대답 - 사실 딱히 그 목적이 1차적이었던가를 검증할 수는 없지만.

차창 밖으로 보이며 쭉 이어지는 강 이름을 묻자 들려온 대답에 나는 도착할 때까지 창 밖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청천강이었다. ‘살수대첩’이다, ‘명도전과 미송리형 토기의 대략적인 남한계(南限界)다’ 말은 많이 했지만,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 아니던가.

북한 사람들은 남한 방문객들이 몰래 사진을 찍어가서 비난하는 데 이용하는 경우를 흔히 보아왔기에, 차창 밖 사진을 찍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금지한다. 청천강 사진을 얻고 싶어서 달리는 차 안에서라도 1컷 찍을 것을 부탁했더니 “하선생만 몰래 찍어시라”는 대답. 농담같은 허락이다. 그래서 최대 속도로 달리는 차 안에서 셔터 속도를 높이고 연사 모드로 찍어보았으나 대부분 신통찮았다.

 ▲ 묘향산 : 국제친선전람관에서 멀리 찍은 일부. 묘향산 역시 가을 단풍 때이라야 제격이라고 했다.

 

묘향산에 이르는 동안, 강물에 허리까지 담그고 물고기를 잡는 사람들, 강가에 나와 멱을 감는 어린이들이 간간히 보이는, 우리네 여느 강가와 다름없는 풍경을 눈에 담으며, 그렇게 2시간 가량을 달렸다.



▣ 묘향산 보현사


묘향산에 도착한 것은 11시가 좀 넘는 시간. 북한 사람들이 ‘보여주고 싶어 하는’곳인 「국제친선전람관」을 보았다. 김일성 주석이 받은 선물들을 전시한 곳을 먼저 보고, 김정일 위원장이 받은 것들을 전시한 곳을 나중에 보았다.

 

▲ 국제친선전시관 : 이 건물은 국방위원장이 받은 것들을 전시한 곳이다. 주석이 받은 것을 전시한 곳은 붐비는 인파로 인해 사진 찍을 의욕을 잃었었다.

 

보현사는 점심을 먹기 전에 보았고, “그래도 묘향산에 오르는 시늉이라도 해봐야 한다”는 중론에 따라 점심 후에 짧은 등산을 통해 맛만 보았다. 온몸이 땀으로 젖는다. 역시 여름은 남과 북이 차이가 없고, 산하(山河) 풍경도 마찬가지이다. 그만큼 좁은 땅인데도 이렇게 잘라져 있으니…

 

 

   ▲묘향산 무릉폭포 :

  산에서는 꽤 부지런한 편인 나도 “더 올라가지 않겠다”고 했다. 어차피 제대로 못 볼 바에야(덥기도 하고).

 

 

 

 

 보현사는 기대를 하고 갔던 곳이다. 경치 좋은 다른 곳들이야 그렇다손 치고, 역사 공부하는 이에게 문헌기록을 통해 알고 있는 유적지를 처음 가본다는 것이 주는 설레임이야 새삼 말할 게 있으리오. 특히 유명한 김부식이 쓴 「보현사비」가 있는 곳이며, 서산대사가 입적한 곳이기도 한 곳이다. 나중에 다시 사진을 보여드리겠지만, 「보현사비」의 제액(題額)은 고려 인종의 친필 행서가 아닌가. 

 

 

▲ 조계문 : 원래는 이 문을 시작으로 천왕문, 해탈문을 지나 법당에 닿았겠지만, 지금은 경내 오른쪽 옆으로 입구를 내어 관람객을 받고 있다. 옆구리를 터서 드나드는 것처럼 좀 어색하다고 할까.

 

어쨌든, 옆구리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범종각이다. 그러나 이 속에 들어 있는 종은 원래 보현사의 것이 아니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금강산 유점사의 종을 옮겨다 놓은 것이라 한다. 종의 제작 연도는 1469년(예종1). 높이 2.1m, 무게 7.2t.

 

▲ 범종각

 

 

▲ 유점사 종

 

절 안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선택적이긴 했겠지만, 해방 이후 문화유산 보존에 대한 관심은 남한보다 북한이 먼저 기울이지 않았던가. 이에 대한 관심도 최고 지도자의 입을 빌어 드러내고 있는 것이 우리네 정서와 약간 다른 것일 뿐. 그래서 이런 문구가 자꾸 눈에 특이하게 들어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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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태양을 머리에 이고서 사찰 경내를 돌아다니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남한의 사찰을 둘러볼 때도 주로 가을 아니면 봄, 그리고 드물게나마 간혹 겨울에 찾은 적은 있지만, 한 여름에 어느 절을 찾아간 기억은 거의 없다. 그러나 "언제 이곳에 또 오랴"는 생각이 몸을 움직이고, 그나마 거의 '살아 있는 절'이 아니어서 현존 경내가 그다지 넓지 않았던 것이 역설적인 다행이랄까(?) [사실 나는 사찰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니고, 공부도 짧아 잘 알지도 못한다. 그러나 직접 갔다온 죄(?)로 사진이나마 소개하면서 간단한 메모를 남겨보려 한다.]


▲ 보현사 : 떠나면서 바라본 모습

  보현사는 우선 묘향산이라는 명산에 자리잡았다는 것, 그리고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맹활약했던 서산대사가 입적한 곳으로 이름높다.

  처음 지어진 것이 고려 광종 때였고(968년, 광종 19), 현종대에 탐밀(探密)·굉확(宏廓) 두 승려가 동남쪽 조금 떨어진 곳에 터를 닦고 수백간 규모의 사찰을 새로 지었다. 묘향산이라는 산 이름, 보현사라는 절 이름도 이 때 얻었다.

  이후 불사(佛事)가 줄곧 이어졌고, 1067년(문종 21) 문종은 토지를 하사하고 사적(事蹟)을 기록케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문묵(文墨)이 소실되어 옛 일을 알 수 없게 되자 인종이 김부식에게 명하여 이 절의 사적을 기록하고 돌에 새겨서 길이 남겨지도록 하였다. 이런저런 내력들을 새긴 비가 바로「보현사비」이다.

▲ 보현사비 : 김부식이 문장을 짓고 문공유(文公裕)가 글씨를 썼다.

▲ 보현사비 제액 : 고려 인종의 친필이다.

  보현사는 신흥 금(金)나라에 쫓긴 거란의 잔당들이 압록강을 넘어 침입해왔던 1216년(고종 3)에 불타기도 했고, 이후 화재로 소실된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여러 차례 중창을 거치면서 조선시대를 거쳐 20세기 전반기까지 규모를 유지하였다. 지금은 많은 전각(殿閣)들이 사라지고 한 손으로 꼽을 만큼의 몇 건물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보현사에는 두 개의 석탑이 있다.

  하나는 1044년(靖宗 10)에 세운 구층탑이다. 1층 탑몸돌에는 감실을 파놓았다. 다보여래상을 안치했었다고 하여 '다보탑'이라고도 한다. 그 뒷쪽에는 탑을 세운 내력과 연도를 새겨두었다.


▲ 구층탑

   대웅전 지붕은 황색 기와를 얹었다. 하루 전에 보았던, 복원해놓은 동명왕릉과 정릉사 등에 있는 건물기와들도 마찬가지로 황색이었다. 고구려 기와의 대표색이 황색이라서, 사찰의 주요 건물까지 그렇게 사후에 정비한 것인지, 아니면 원래 그러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대웅전 앞에 있는 것은 팔각십삼층탑이다. 고려 말기의 것으로 추정하는데, 얼핏 남한에서 자주 보던 오대산 월정사의 팔각구층탑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층수를 비롯하여 다른 데가 있다. 꼭대기 상륜부는 한국전쟁 때 부서진 것을 새로 보수해넣은 것이라 한다.


▲ 대웅전과 십삼층탑 : 북한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절터’가 아닐 바에야, 북한에 있는 절도 절이라. 절에는 스님이 없을 수 없을 수 없다는 듯, 약간의 손님들이 들이닥치자 '근무하는 스님'이 대웅전으로 들어가 향을 피우는 등 "절에 왔음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남한의 '살아 있는 절'과 비교했을 때, 한 가지 편한 것은,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대웅전을 들여다 볼 때 한 쪽켠에 서 있는 보살님이 앙칼진 목소리로 "사진 찍으면 안돼요"라고 하는 모습을 접할 수는 없다. 서운하냐구요? 천만에 !

  법당 마닥이나 문 앞에 <실내 촬영 금지>라고 쓴 팻말도 물론 없다. 대략 편하다!


▲ 대웅전 내부

   대웅전을 지나 동쪽으로 조금 걸으면 관음전이 나온다. 뭐하는 곳인지는 말 안해도 누구나 잘 알 것이다. 일반적으로 관음전은 대웅전 구역과는 좀 구별된 별도의 장소에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보현사 관음전은 크기도 큰 차이가 없이 거리만 좀 떨어진 채 대웅전과 동서(東西)로 나란히 함께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북한쪽의 동명왕릉(물론 복원한 것이지만), 평양성 대동문, 연광정 등을 보면서, 한 가지 남한과 다르게 느낀 점은, 단청의 색감(色感)에서 차이가 난다는 것 - 사진을 제시하니 만큼 주관적인 설명은 생략하자.

▲ 관음전

   관음전에서 다시 동쪽을 보면 수충사(酬忠祠)가 보인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휴정(休靜)의 사당이다. 좀 게으른 방법이지만, 입구의 안내문 사진으로 이 글의 설명을 대신해보자. 북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분위기의 한 조각도 함께 전달할 겸…


▲ 수충사

▲ 수충사 입구의 안내문

   수충사 남쪽에 청기와를 얹은 건물에는 팔만대장경 인본(印本) 일부가 보관되어 있다. 오랜만에 실내에서 설명을 듣는 시간이다.

  이쯤까지 일행과 함께 움직이다가, "사람 없는 유적 사진을 좀 찍고 싶어서"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대부분이 북한 안내원의 설명에 열중하고 있는 만큼(최소한 경청하는 척이라도 하고 있었을 것), 건물이나 탑을 찍을 때 이들의 모습을 불가피하게 함께 담을 위험이 없는 시간이 아닌가. 위의 사진들은 이렇게 해서 좀 깨끗하게 나온 것들의 일부를 선별한 것이다.

  더 많은 사진을 소개하려 해도, 번잡해질까 이 정도로 그치는 것이 좋을 듯하다.


▲ 다라니 석주, 청기와 건물이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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