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립장군(申砬將軍)
탄금대 신립장군(申砬將軍) 위령탑
1546(명종 1)∼1592(선조 25). 본관은 평산(平山), 자(字)는 입지(立之)로
이조 판서 신상의 손자이며 생원 신화국(申華國)의 아들이다.
조모가 종실(宗室) 부림군(富林君)의 딸이며,
백모(伯母)가 역시 종실 고성군(固城君)의 딸인 만큼 당당한
사족 집안이었으나 어릴 때부터 글읽기 보다는 무예닦기를 좋아하여
명종 23년(1569) 무과에 급제한 뒤 무신으로 나아가 선전관(宣傳官)
도총관,도사경력 등의 벼슬을거쳐 진주 판관으로 나갔다.
여기서 진주 목사 양응정(梁應鼎)의 권유로 학문을 익힌 후
선조 16년(1583) 온성 부사로 있을 때 훈융진(訓戎鎭)을 공격하여 온
야인(野人)추장 이탕개(尼湯介)를 격퇴하였고, 또 경원부와 안원보
종성 등 지역으로 수시로 침략하여 온 야인을 그때마다 격파, 섬멸함으로써
용맹을 떨치고 두만강의 변경지대에 설치된 6진을 온전하게 보존하는데
결정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 공으로 1584년 함경도 북병사로 임명되었으며,
남철릭(남천익(藍天翼),무관(武官)의 공복(公服) 환도,수은갑두구 등을 하사받았다.
1587년 왜선이 전라도 흥양현에 침입하자 우방어사로 임명되어
군관 30명을 영솔하여 토벌하였고, 축첩관계로 인한 삼사탄핵으로
파직되었으나 곧 복직되어 함경도 남병사가 되었다.
1588년 고미포(古未浦)의 야인부락을 공격, 분탕하고 돌아왔으며
함부로 부하를 처형하였다 하여 동지중추부사로 한동안 물러나 있었다.
1590년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 왜군이 파죽의 기세로 진격해 오자 도 순변사로 임명되어
부장 김여물(金汝汨)과 함께 80여 명의 군관과 시정백도(市井白徒) 수백명을 모병하여
충주로 남하, 적을 요격코자 하였다. 여기서 부장 김여물 등의 조령(鳥嶺)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한 방어진지구축론을 취하지 않고, 충주성의 서북지역에 있는 달천부근의
평야에서 남한강을 뒤로 둔 배수진을 치고 기병을 이용한 정면 전투를 전개하였다가
고니시(소서행장(小西行長)을 선두로 한 왜군의 대대적인 공격 앞에 중과부적으로
패배, 탄금대로 물러난 후 물속에 투신하였다.
그가 왜 조령의 천연적 요험을 버리고 달천에 진을 쳤는가에 대해서는
그의 무장으로서의 능력이나 인물됨과 관련하여
후일 여러 사람에 의하여 논란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그의 딸이 신성군(信城君 : 선조 4남, 인빈 김씨(仁嬪金氏) 소생,
인조(仁祖) 생부(生父) 정원군(定遠君)의 친형)의 부인이 되었고, 또 그의 생질서
(甥姪淚 : 그의 매부(妹夫) 구사맹(具思孟)의 사위)가 정원군(定遠君 : 선조 5남,
인빈 김씨(仁嬪金氏) 소생)으로서 인조의 생부(生父)였던데다 그의 아들 신경진(申景?),
신경인(申景?) 신경유(申景裕)의 형제가 인조반정에 참여, 반정공신으로 책봉되어
인조 이후 권문(權門)으로 등장함에 따라 그러한 논란을 떠나서 충절인으로 포증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신립장군과 병사들이 최후로 자결을 선택하고 투신한 탄금대 절벽바위
신립장군 순국지지비(申砬將軍 殉國之址碑)
申砬將軍 殉國之址碑(신립장군 순국지지비) 비문내용
宣祖二十五年(一五九二年) 四月 二十八日 八道都巡邊使 申砬將軍이
從事官 金汝 과 더불어 鳥銃砲火의 數十萬 倭賊을
槍劍弓矢의 八千軍士로 맞아 싸우다가 戰勢不利하자
金公과함께 敵陣에 突入하여 數十賊을 擊殺한 뒤
彈琴臺 이곳 열두대에서 享年 四十七를 一期로 哀惜하게 爲國殉節하시다.
신립장군의 묘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신대리 산 1-1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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