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는 우리 나라 3대 사찰 중 하나로 손꼽히는 큰 절로,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자장율사가 세웠다.
대웅전은 원래 석가모니를 모시는 법당을 가리키지만, 이곳 통도사의 대웅전에는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고 건물 뒷면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설치하여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 그 때문에 통도사라는 절 이름도 금강계단을 통하여 도를 얻는다는 의미와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극락으로 이끈다는 의미에서 통도(通度)라고 하였다 한다. 지금 건물은 신라 선덕여왕 때 처음 지었고,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조선 인조 23년(1645)에 다시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5칸이고, 지붕은 앞면을 향해 T자형을 이룬 특이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바깥쪽 기단 부분과 돌계단 층계석, 계단 양쪽(소맷돌)부분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이어받은 뛰어난 연꽃조각을 볼 수 있다. 금강계단은 금강과 같이 단단하고 보배로운 규범이란 뜻이다.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 있다는 상징성을 띠고 있으며, 지금 있는 금강계단은 고려·조선시대를 거쳐 여러 차례 수리한 것이다. 양식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금강계단 형태를 띠고 있는데, 가운데에 종 모양의 석조물을 설치하여 사리를 보관하고 있다. 1층 기단 안쪽 면에는 천인상을 조각하고 바깥쪽 면은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 제석의 모습을 조각하였다. 지은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건축인 대웅전과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담고 있는 금강계단은 각각 건축 구조와 건축사 연구, 계단(戒壇)이 가지고 있는 그 의미에서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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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부처님 진신사리’ 중생과 함께… |
신라 자장율사 금강계단 짓고
중국서 가져온 가사.사리 모셔
부처님 없는 대웅전 법당 특징
통도사 대웅전.
양산 통도사가 불보종찰로 불리는 까닭은 이곳에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졌기 때문이다. 통도사에 부처님 사리가 봉안된 것은 신라 선덕여왕 때로,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돌아온 자장율사(590~658)가 가사(袈裟)와 사리를 모셔온 이후부터다. 스님은 646년 통도사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조성하고 그 안에 사리와 가사를 봉안했다고 한다.
선덕여왕 재위 말년에 조성된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5칸이며, 다포양식이다. 지붕은 앞면을 향해 T자형을 이룬 특이한 구조다. 묵서명에 따르면, 당우가 현재 모습을 갖게 된 때는 조선 인조 23(1645)년으로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다시 지은 것이다. 대웅전 바깥쪽 기단과 계단에만 창건 당시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조각양식을 보인다. 우선 기단부에는 연화문과 용머리문양이 선명하게 남아있고, 또 돌계단과 계단 양쪽 소맷돌 부분도 화려한 꽃으로 장식돼 있다. 자칫 지나치기 쉬운 꽃살문도 찬찬히 살펴보면 뜻밖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문을 가득 채운 갖가지의 꽃모양 조각들이 아름다움을 더한다.
통도사 대웅전의 가장 큰 특징은 법당 안에 부처님이 모셔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금강계단에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돼 있기 때문이다. 다만 큰 창을 만들어 내부에서 뒷편 금강계단을 직접 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법당 외부 사면에도 각각 다른 이름의 편액이 걸려있는데, 동쪽은 대웅전, 서쪽은 대방광전, 남쪽은 금강계단, 북쪽은 적멸보궁이라고 돼 있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대웅전도 우수하지만, 통도사를 대표하는 성보는 단연 금강계단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담고 있어 부처님이 중생들의 곁에 함께 있음을 상징하는 금강계단은 한국불교의 계단사(戒壇史)와 건축사에도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대웅전 뒷편의 금강계단. 불교신문 자료사진
지금의 금강계단은 고려.조선시대를 거쳐 모두 일곱 차례 수리한 것이다. 금강계단의 초층은 너비가 약 990㎝, 총높이가 약 300㎝이다. 이중의 넓은 방단(方壇) 중심에는 직경 150㎝정도의 복련과 앙련의 받침 대석을 놓고 그 위에 석종(石鐘) 모양의 부도를 안치해 놓았다. 사리는 석종형 부도 안에 봉안돼 있다.
부도의 표면에는 비천상과 사리함 등이 조각돼 있다. 2층으로 돼 있는 기단의 위쪽에는 4면마다 비천상이 새겨져 있고, 하단의 4면에는 여래상과 보살상 조각들이 남아 있다. 또 석단 네 귀퉁이에는 계단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해 놓았다.
한편 계단은 본래 계를 주거나 계를 설하는 단을 말하는데, 금강계단에는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마음으로 계를 지켜야한다는 뜻이 숨겨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자장율사가 만든 통도사 금강계단이 최초이며, 금산사 방등계단과 달리 출가자만 계를 받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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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의 사리가 어떻게 新羅에… | ||||
通度寺(통도사)는 「석가모니의 眞身舍利(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절」로 유명하다. 그래서 「佛寶(불보)사찰」로 불린다. 기록에 따르면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서기 643년 신라의 慈藏律師(자장율사)가 唐(당)나라로부터 귀국할 때 모셔 왔다고 한다. 자장율사가 어디서 누구로부터 「부처님의 사리」를 얻어 왔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通度寺舍利袈裟事蹟略錄(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자장이 당나라 終南山(종남산) 雲際寺(운제사)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이다. 문수보살이 승려로 화신하여 자장에게 袈裟(가사) 한 벌과 眞身舍利(진신사리) 100개, 그리고 頭骨(두골: 머리뼈)·持節(지절: 손가락뼈)·염주·경전 등을 주면서 말했다. 『이것은 내 스승 釋迦(석가)께서 친히 입으셨던 가사이고, 또 이 사리들은 부처님의 진신사리이며, 이 뼈는 부처님의 머리뼈와 손가락뼈이다』> 종남산이라면 唐나라의 수도였던 長安(지금의 西安)의 남방을 지켜주는 鎭山이며 중국 불교의 聖地(성지)이다. 필자는 10여 년 前 종남산에 가서 운제사의 옛터를 답사한 적이 있다. 운제사가 있던 자리에는 黨고위간부 등 상류층의 자제들이 다니는(당시 1년간의 학비가 韓貨 200만원을 웃돌았다) 「博迪學校(박적학교)」라는 초·중등 9년 과정의 사립학교가 들어서 있었다. 印度(인도)에서 입적한 후 11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석가모니의 사리를 新羅(신라) 승려가 중국땅에서 구해 귀국했다는 기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俗人으로서는 헤아리기 어려운 신앙상의 문제이다. 그런데도 필자는 통도사를 찾을 때마다 진신사리에 얽힌 기록과 관련하여 끝없는 호기심으로 迷妄(미망)에 휩싸이곤 한다. 경부고속도로 통도사 IC를 빠져나오면 통도사를 감싸안은 靈鷲山(영취산)과 마주한다. 여기서 지방도로를 따라 2km 西進하면 바로 통도사 입구이다. 영취산이라면 부처님 在世時 마가다(Magadha)國 王舍城(왕사성) 동북쪽에 있던 기사굴산을 漢譯(한역)한 이름이다. 석가모니께서 후반 생애의 대부분을 기사굴산에서 지내면서 불법을 說(설)했던 만큼 그곳은 당연히 불교 최고의 聖地다. 戒壇을 쌓고 사리와 가사 봉안 그렇다면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에 있는 통도사 뒷산의 이름이 왜 영취산인 것일까. <그대(자장)는 末世에 계율을 지키는 사문이 될 것이므로 내(문수보살)가 이것들(진신사리 等)을 그대에게 주노라. 그대의 나라 남쪽 鷲捿山(취서산) 기슭에 毒龍(독룡)이 거처하는 神池(신지)가 있는데, 거기에 사는 용들이 毒害(독해)를 품어서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니 그대는 그 용이 사는 연못에 戒壇(계단)을 쌓고 이 佛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면 三災(삼재: 물·불·바람으로 인한 재앙)를 면하게 되어 만대에 이르도록 멸하지 않고 불법이 오랫동안 머물러 天龍(천룡)이 그곳을 옹호하게 되느니라> 위의 기록을 보면 통도사를 품고 있는 영취산의 본래 이름은 취서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양산의 영취산은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포근하고, 피곤한 衆生이면 누구라도 받아줄 듯한 넉넉한 모습이다. 印度의 영취산도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한다. 대웅전 내부에 佛像이 없는 까닭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는 경내가 전국에서 가장 넓은 절이다. 절 이름을 通度寺라고 지은 까닭은 「전국의 모든 승려가 이곳에서 득도한다(爲僧者通而度之)」, 「만법을 통달하여 중생을 제도한다(通萬法度衆生)」는 뜻이라고 한다. 매표소를 지나면 바로 소나무 숲길, 가파르지 않아 좋다. 그 숲길을 따라 길게 뻗은 계곡. 겨울의 찬 바람소리와 어울린 계곡의 물소리가 상큼하다. 돌다리 삼성반월교를 지나면 「靈鷲山通度寺」라고 쓰인 扁額(편액)이 걸린 一住門(일주문)과 만난다. 書畵(서화)의 大家 흥선대원군(高宗의 生父) 李昰應(이하응)의 글씨다. 얼마쯤 걸었는지 의식하지도 않았는데 이내 제2의 관문인 天王門이다. 불자들을 수호하는 四天王이 동서남북 4방을 지키고 있다. 이제 不二門으로 다가선다.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으로 解脫門(해탈문)이라고도 한다. 不二門에 들어서면 벌써 통도사의 중심건물인 대웅전의 자태가 드러난다. 건물 상부의 형태가 팔작지붕의 복합형인 丁자형의 특이한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정면격인 남쪽에는 金剛戒壇(금강계단), 동쪽은 大雄殿(대웅전), 서쪽은 大方廣殿(대방광전), 북쪽은 寂滅寶宮(적멸보궁)이란 편액을 달고 있다. 건물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5칸으로 오히려 아담하다. 공포(지붕의 무게를 받치게 하려고 기둥머리 같은 데에 짜맞추어 댄 닭벼슬 모양의 나무쪽들)는 다포식(공포를 기둥 위에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꾸며놓은 화려한 양식)이다. 동쪽과 남쪽에 대웅전으로 오르는 돌 층층다리를 냈다. 소맷돌에 새긴 연화문이 優美(우미)하다. 대웅전 내부 천장은 층급을 두어 중심부를 높게 처리했고, 바닥엔 우물마루를 깔았다.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仁祖 23년(1643) 때 友雲 스님에 의해 중건된 것이다. 건물의 基壇(기단)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웅전 내부에는 佛壇(불단)만 있을 뿐 불상은 없다. 건물 바로 북쪽에 있는 금강계단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셔 두었기 때문이다. 佛家에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보다 더 귀중한 것은 있을 수 없다. 석가모니는 스스로의 위상을 「天上天下唯我獨尊(천상천하유아독존)」임을 선언한 바 있지 않았던가. 金剛戒壇―通度寺의 寺格 높이는 결정적 구조물 금강계단이야말로 통도사의 寺格(사격)을 높여 주는 결정적인 구조물인 것이다. <자장은 귀국하여 善德女王(선덕여왕)과 함께 취서산을 찾아서 독룡이 산다는 못에 이르러 용들을 위해 설법을 하였다. 그런 뒤 자장은 못을 메우고 그 위에 계단을 쌓았다> 위의 인용문에 기록된 戒壇이 바로 금강계단이다. 「금강」이란 말은 금강석, 곧 다이아몬드다. 금강석은 그 어떤 물건이라도 깨뜨릴 수 있는 강인한 광석이다. 646년 금강계단을 쌓은 자장율사는 이곳에서 승려들을 득도시켰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장은 어떤 인물인가. 여왕과 함께 절터를 보러 다녔다면 결코 평범한 신분의 승려는 아니었을 터이다. 자장은 탄생연대가 명확하지 않지만 元曉(원효)와 義相(의상)보다 약간 앞선 시대의 승려였다. 三國遺事(삼국유사)에 따르면 그는 眞骨(진골) 출신의 소판(신라 16관등 가운데 3위) 金武林(김무림)의 아들로서 속명은 善宗(선종)이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불교에 귀의했다. 선덕여왕이 그의 현명함을 듣고 臺輔(대보)로 임명하여 여러 번 불렀으나 그는 거절했다. 드디어 왕이 칙사를 보내 『취임하지 않으면 목을 베리라』고 위협했지만 그의 태도는 단호했다. 『나는 단 하루를 살더라도 戒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破戒(파계)를 하고 100년 동안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수도에만 힘쓰던 자장은 선덕여왕 5년(636) 제자 實(실) 등 10여 명을 데리고 당나라에 들어가 불경을 깊이 연구하고 8년 후에 藏經(장경)과 佛具(불구)를 가지고 귀국, 신라불교의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분황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궁중과 황룡사에 大乘論(대승론)·菩薩戒本(보살계본) 등을 강론했고, 大國統(대국통)이 되어 승려의 규범과 승통의 전부를 주관했다. 그에게 律師(율사)라는 칭호가 붙은 것은 그가 계율의 사범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佛制(불제)에 의해 僧尼(승니)의 잘못을 검찰하는 신라불교의 「교장선생」이었던 것이다. 금강계단은 위아래의 넓은 2중 네모 基壇으로 조성되어 있다. 基壇의 크기는 아랫단 한 변의 길이가 약 9.8m이고, 윗단은 약 7m이다. 높이는 상하 각각 40cm, 82cm이다. 석단의 네 귀퉁이에는 사천왕 입상을 배치했다. 석단의 외곽에는 한 변이 약 13.7m인 돌 울타리를 둘렀고, 戒壇 정면에는 石門을 두었다. 戒壇의 아랫단 面石에는 총 32구의 불보살상을, 윗단에는 飛天像(비천상)을 새겼다. 戒壇의 상층 중심부에는 직경 150cm 규모의 伏蓮(복련)과 仰蓮(앙련)의 받침대석을 넣고, 그 위에 石鐘(석종) 모습의 부도가 안치되었다. 부도의 표면에는 飛天像(비천상) 등을 새겼고, 정면인 남쪽에는 구름 속에 寶盒(보합)의 향로를 조각했다.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훔쳐보기 금강계단은 처음 축조된 이후 일곱 번에 걸쳐 수리했고, 그때마다 모습이 조금씩 변하여 지금은 원래의 것과 많은 차이가 있다고 한다. 이렇게 수리를 거듭했던 것은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석종부도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들춰보는 일이 잦았던 탓이기도 하다. 三國遺事에 의하면 고려 고종 22년(1235) 상장군 金利生과 시랑 庾碩(유석)에 의해 금강계단의 석종부도가 들려졌다. 문헌상 최초의 기록이다. <상장군 金公 利生과 庾侍郞 碩이 왕명을 받아 江東을 지휘할 때 符節(부절: 임금이 내린 證票)을 가지고 절에 와서 돌 뚜껑을 들어 禮(예)를 드리고자 하니, 승려가 前例(전례)를 들어 어렵다고 하였다. 金利生과 庾碩이 군사를 시켜 굳이 돌 뚜껑을 들게 하였다…. 서로 돌려보며 禮敬(예경)하였는데, 사리함 속의 유리 통이 조금 상해 금간 곳이 있었다. 이에 庾公이 水晶函(수정함) 하나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마침 기부하여 함께 간수해 두게 하고 그 사실을 기록하였으니 그때는 강화로 천도한 지 4년째인 을미년(1235)이었다> 금강계단은 이 이후에도 倭寇(왜구)나 明나라 칙사 등의 횡포에 의해 여러 차례 수난을 당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도 훼손의 위기를 겪었다. 寺蹟記(사적기)에 따르면 영남지방이 왜병에게 점령되자 의승장 惟政(유정)은 통도사의 진신사리를 大小 두 개의 함에 나누어 담아 금강산에 있던 그의 스승 休靜(휴정)에게 보냈다. 이에 休靜은 『영남이 침해를 당하고 있으니 이곳 역시 안전한 장소는 못 된다. 영취산은 뛰어난 장소이고 문수보살이 점지한 곳이다. 戒(계)를 지키지 않는 자라면 그에게는 오직 금과 보배만이 관심의 대상일 것이고 信寶(신보)가 목적은 아닐 것이니 옛날 戒壇을 수리하여 안치하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함 하나를 통도사로 되돌려 보내고 나머지 함 하나만 태백산 葛盤地(갈반지)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俗界와 仙界의 경계선 대웅전 뒤편에는 통도사의 창건설화와 얽힌 九龍池(구룡지)라는 네댓 평짜리 연못이 있다. 俗傳(속전)에 따르면 자장율사에게 항복한 독룡은 모두 아홉 마리였는데, 그중 한 마리가 굳이 이곳에 남아 戒壇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자장은 그 청을 받아들여 연못 한 귀퉁이를 메우지 않고 남겨 그 용이 머물도록 허락했다고 한다. 지금의 九龍池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 이 작은 연못 속에는 사람들이 던진 동전들이 많이 가라앉아 있는데, 동전이 부식하면서 내뿜는 독성 때문에 이곳에 사는 물고기들이 수난을 당하고 있다. 아무리 심한 가뭄이 와도 이 연못의 수량은 전혀 줄어들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일대가 원래 습지대였음을 알 수 있다. 오후 6시, 범종각에서 북소리와 종소리가 함께 울러퍼졌다. 이제 俗人들은 절 밖으로 나가야 할 시간이다. 사진작가로서 예총 양산市 지부장을 맡고 있는 김보안 양산여중 교장 등 知人들이 통도사 매표소 앞 경기식당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기식당은 산채정식을 잘하기로 꽤 이름난 음식점인데, 반찬 가운데 곤달비(취나물의 일종) 장아찌가 별미였다. 통도사의 寺下村(사하촌)도 러브호텔 등이 들어서 꽤 울긋불긋하다. 천리길을 달려와 영취산 자락을 헤집고 다닌데다 저녁밥에 곁들인 반주 몇 잔의 효력으로 나른하여 일찌감치 사하촌의 여관에 들었다. 숙면의 1박을 하고 이른 아침 상큼하게 일어나 다시 통도사로 올라갔다. 俗界와 仙界는 통도사 정문을 경계로 확연하게 구분된다. 아침안개를 머금은 숲길은 眞景山水畵(진경산수화), 바로 그것이다. 사진작가 趙明東씨가 대웅전 내부의 촬영을 끝내자 통도사 포교국장 선오 스님이 금강계단 石門의 열쇠를 따고 우리 일행을 안내했다. 석종부도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앉은 殿閣의 지붕들도 이제는 아침안개를 조금씩 조금씩 털어내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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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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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44호 통도사 대웅전
통도사 대웅전(보물 144호) (경남 양산군 하북면 지산리 583) 신라 선덕여왕 15년(646)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 되어 인조 19년(1641) 우운대사가 중 건했다. 지붕 용마루 가운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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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350호 통도사 석가여래괘불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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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괘불탱 보물 1351호 경남 양산시 조선 정조 연꽃가지를 든 보살형 입상의 모습이 단독으로 그려진 괘불이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보물 1352호 통도사 화엄탱
통도사화엄탱 보물 1352호 경남 양산시 조선 순조 흑칠 바탕에 금가루를 사용하여 그린 흑탱화로, 「화엄경(華嚴經)」의 칠처구회(七處九會)의 내용을 그린 변상도이다. 「80화엄경」의 복잡한 내용을...
보물 1353호 통도사 영산회상탱
통도사영산회상탱 보물 1353호 경남 양산시 조선 영조 석가가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산회상을 그린 탱화인데, 탱화란 액자나 족자형태로 만들어 법당에 걸 수 있게 만든 불교그림을 만한다....
보물 1373호 통도사 금동천문도
통도사금동천문도 보물 1373호 경남 양산시 조선 효종 전면에는 천구(天球)의 북극을 중심으로 둥글게 북극으로부터 적도부근에 이르는 영역의 별자리들이 표시되어 있고, 항현권((恒顯圈)(주극성(週極星)...
국보 290호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
모시지 않고 건물 뒷면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설치하여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 그 때문에 통도사라는 절 이름도 금강계단을 통하여 도를 얻는다는 의미와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극락으로 이끈다는...
통도사 대웅전(보물 144호) (경남 양산군 하북면 지산리 583) 신라 선덕여왕 15년(646)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 되어 인조 19년(1641) 우운대사가 중 건했다. 지붕 용마루 가운데에...
보물 74호 통도사국장생석표
통도사국장생석표 보물 74호 경남 양산시 고려시대 통도사를 중심으로 사방 12곳에 세워놓은 장생표의 하나로, 절의 동남쪽 약 4㎞지점에 거친 자연석면 그대로 서있다. 이 절의 경계를 나타내는 표시이며,...
보물 11-6호 양산통도사동종
양산통도사동종 보물 11-6호 경남 양산시 조선 숙종 조선 숙종 12년(1686)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보물 334호 통도사 은입사동제향로
통도사은입사동제향로 보물 334호 경남 양산시 고려시대 향로란 절에서 마음의 때를 씻어준다는 의미를 지닌 향을 피우는데 사용하는 기구를 총칭하는 말로 화완, 향완이라고도 한다. 향로는 모양에...
보물 471호 통도사 봉발탑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로 대장경을 모시고 창건하였기 때문에 초창기부터 중요한 절이었다. 이 봉발탑은 통도사의 용화전 앞에 서 있는 것으로 무슨 용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석가세존의 옷과 밥그릇을...
보물 1354호 통도사 청동은입사봉황문향완
통도사청동은입사봉황문향완 보물 1354호 경남 양산시 조선 현종 국내에 전해져 오는 고려·조선시대 고배형 청동은입사향완(高杯形靑銅銀入絲香완)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넓은 테두리(口緣部)가 둘러진...
보물 1041호 통도사 영산전 팔상도
통도사영산전팔상도 보물 1041호 경남 양산시 조선 영조 부처가 태어나 도를 닦고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일생을 8부분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이다. 가로 151㎝, 세로 233.5㎝의 비단에 채색하여 그린 이...
보물 1042호 통도사 대광명전삼신불도
통도사대광명전삼신불도 보물 1042호 경남 양산시 조선 영조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 등 삼신불을 그린 삼신불도이다. 가로 3.15m, 세로 4.6m의 비단에 채색하여 그린 이 삼신불도는 3폭으로 되어...
보물 1350호 통도사 석가여래괘불탱
통도사석가여래괘불탱 보물 1350호 경남 양산시 조선 영조 꽃가지를 든 석가여래의 모습이 단독으로 그려진 괘불이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보물 1351호 통도사 괘불탱
통도사괘불탱 보물 1351호 경남 양산시 조선 정조 연꽃가지를 든 보살형 입상의 모습이 단독으로 그려진 괘불이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보물 1352호 통도사 화엄탱
통도사화엄탱 보물 1352호 경남 양산시 조선 순조 흑칠 바탕에 금가루를 사용하여 그린 흑탱화로, 「화엄경(華嚴經)」의 칠처구회(七處九會)의 내용을 그린 변상도이다. 「80화엄경」의 복잡한 내용을...
보물 1353호 통도사 영산회상탱
통도사영산회상탱 보물 1353호 경남 양산시 조선 영조 석가가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산회상을 그린 탱화인데, 탱화란 액자나 족자형태로 만들어 법당에 걸 수 있게 만든 불교그림을 만한다....
보물 1373호 통도사 금동천문도
통도사금동천문도 보물 1373호 경남 양산시 조선 효종 전면에는 천구(天球)의 북극을 중심으로 둥글게 북극으로부터 적도부근에 이르는 영역의 별자리들이 표시되어 있고, 항현권((恒顯圈)(주극성(週極星)...
국보 290호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
모시지 않고 건물 뒷면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설치하여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 그 때문에 통도사라는 절 이름도 금강계단을 통하여 도를 얻는다는 의미와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극락으로 이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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