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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ㆍ비원 특히 가을 날 단풍 들 때와 낙엽질 때가 가장 아름다운 창덕궁!
돈화문 앞 길거리에 세워진 간판 창덕궁(사적122호)은 1405년 경복궁 다음으로 지어진 별궁이었다. 정궁인 경복궁의 동쪽 방면에 있다 해서 '동궐'이라고도 했다 금천교가 세워지고(1411) 돈화문이 건립되는가 하면(1412) 조선 제 9대 성종때부터는 여러 임금들이 여기서 지내 본궁역할을 하는궁궐이 됐다. 임진왜란 때에는 창덕궁은 불에 타고 만다. 선조가의주로 피난을 가자 이에화가 난 백성들이 궁궐을 방화한 것이다 1611년 광해군에 의해 다시 지어진 궁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가 잘이루어져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으며 인정전, 대조전, 선정전, 낙선재등
많은 문화재가 곳곳에 있어 눈길을 끈다
창덕궁은 1997년 12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유네스코(UNESCO) 세계 유산위원회에서 수원 화성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창덕궁 후원은 태종 때 만들어 진 것으로 임금을 비롯한 왕족들이 휴식하던 곳이다. 후원은 북원(北苑), 금원(禁苑)이라고도 불렀으며, 고종 이후 비원(秘苑)으로 불렀다. 낮은 야산과 골짜기에 원래 자연 그대로 모습을 간직한 채 꼭 필요한 곳에만 사람의 손을 댄 우리나라의 으뜸가는 정원이다
부용정과 부용지, 주합루와 어수문, 영화당, 불로문, 애련정, 연경당등을 비롯한 수많은 정자와 샘들이 곳곳에 있다.드디어 돈화문이 활짝 열렸다. 1976년 이래 가이드 인솔에 의한 관람만이 허용되던 창덕궁이 2006년 6월15일부터 매주 목요일에 한해 자유 관람을 허용한 것이다. 대상 지역은 낙선재를 제외한 궁궐 일대와 후원의 거의 모든 구역으로, 이제는 창덕궁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온종일 만끽하며 사진이나 화폭에 담을 수 있게 됐다. 11월3일 토요일에 혼자서 카메라 들러메고 가을이 무르익어 가는 창덕궁의 가을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궁내에서 본 돈화문
창덕궁의 정문으로 원래는 화강석조의 하얀색 댓돌이 있었고 그 위에 이층으로 세운 중문이었다. 이런 양식은 옛날 삼국시대로부터 궁궐의 정문으로 채택되어 왔다.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대문은 광화문으로,
홍예문이셋이 열린 육축(陸築)위에 올려 세운 구조이다
돈화문과는 그 모습이 완연히 다르다. 창덕궁의 모든 구성은 이궁(離宮)으로 서의 조촐한 맛을 지니고 있다. 돈화문은 그런 구조를 대표한다 창덕궁과 더불어 돈화문도 임진왜란 때 불에 탔다. 복구된 것은 선조 40년(1607)이었다. 조선 궁궐에 현존하는 중문으로서는 제일 오래된 건물이다.
진선문 ◇ 진선문 창덕궁에는 궁 정문에서부터 정전에 이르는 주출입선에 세 개의 문이 세워져 있다. 세 개의 문은 돈화문, 진선문, 인정문인데, 돈화문은 제일바깥에 위치한 창덕궁의 정문이고, 다음 금천교를 건너 만나게 되는 진선문은 외행각 주출입문이며, 마지막 인정문은 내행각 주출입문이다.
이처럼 진선문은 창덕궁 주출입선상에 위치한 중문이므로 문의 전후로는 어도를 두었다.
진선문은 남북축의 돈화문이나 인정문과는 달리 동서축으로 세워져 있어,
돈화문으로 들어와 북측으로 진행하다 동측으로 꺾어서 금천교와 진선문을 지나게 되며 다시 북측으로 꺽어서인정문으로 들어가게된다
외행각의 동측 진선문에 대응하는 위치에는 숙장문이 세워져 있어 진선문과 함께 동서축을 이루고 있다. 진선문 북측 행각끝에는 동으로 정청(政廳)을 연결시키고 남측 행각끝에서는 동으로 내병조(內兵曺)가 연결된다.
인정문 ◇ 인정문 (보물 제813호) 임금이 만조백관과 조회를 하려면 인정전에 모인다. 인정문을 들어서야 참예할 수 있다. 인정문은 인정전을 에워싼 행각의 대문으로 남쪽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나지막한 댓돌에 설치한 돌층층다리를 올라서면 ,우,중앙 3간문을 들어서게 된다. 다른 곳의 대문과는 그 구조와 장식이 다르다. 원래의 모습에서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행각(行閣)은 전시장으로 쓰던 것을 개조하여 복원하였다. 태종 5년에 창건한 것이나 임진왜란을 겪고 복구 되었다가 인조반정 때 손상을 입었다. 영조 20년(1744)에 불에 탔는데, 이듬해 곧 중건되었다. 순조 3년 인정전이 불에 타 이듬해 재건되는데, 이때 인정문의 보수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인정전 ◇ 인정전 (국보 제225호) 임금이 높이 앉아 내려다볼 수 있도록 어좌를 중앙에 두고 여러 가지장엄을 베풀면서 권위있게 지은 법전이 각 궁궐마다 있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법전으로 궁궐의 배설로는 외전의 중심이 된다. 외전은 보통 내전의 남쪽에 있어 중요한 전각들을 자오선을 주축으로 하는 선상에서 좌향시키기 마련인데, 창덕궁은 경복궁에서와 같은 규범에서 벗어났다. 이궁이란 점을 강조하면서 지형에 따라 적절히 배설하는 방도를 강구한 것이다. 건물형태는 이중의 월대 위에 중층으로 세워진 집인데, 들어가보면 아래 위층이 트여 있다. 20칸 크기의 다포계 공포양식을 지닌 전각으로, 조선조 말기의 양식을 보여준다. 전각안 천정 중앙에는 봉황 한쌍이 장식되어 있고,
북측 중앙에 닫집으로 장엄된 용상(어좌)이 설치 되어 있다
숙장문
◇ 숙장문 숙장문은 돈화문으로부터 인정전 외행각을 거쳐 선정전 및 내전지역(內殿地域)에 이르는 주출입선상에 위치하는 문으로써, 외행각의 동측면이자, 어차고의 서측편에 위치한다. 북측으로는 인정문 좌월랑과 담장으로 연결시켰고, 남측으로는 인정전 외행각의 동행각과 연결하였다. 그러나 숙장문과 함께 인정전 외행각은 인정전 내행각과는 다소 틀어진배치로 되어 있으며, 진선문과 함께 동서방향의 축(軸)을 형성하고 있다.
문의 전면에 해당하는 인정전 외행각의 내부 쪽에는 어도를 두었는데, 진선문 및 인정문과 연결된다. 어도는 중앙부와 양측부로 나누어 세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중앙부를 양측부 보다 높여 두 단으로 구성하였다.
희정당 ◇ 희정당 (보물 제815호) 대조전 남쪽에 있으며, 임금의 거처로, 평시 임금이 정사를 보던 곳이다. 중앙의 정면 3칸, 측면 3칸을 통간(通間)으로하여 응접실로 사용하였고, 응접실의 서편은 같은 크기로하여 회의실로 사용하였다. 응접실의 동쪽벽 상부에는 <총석정절경도>, 서쪽에는 <금강산만물초승경도>가 걸려 있다. 고종은 경복궁이 완성되기까지는 여기에 머물렀고, 순종이 승하할 때 끝까지 여기에 있었다. 대한제국은 옛부터의 관습과 개화에 따른 신식문물을 절충시키는 시국에 처했을 때라, 임금의 처소도 전각은 옛법에 따르고 내부는 서양식으로 장치하는 방식을 반영하였다. 지금의 전각은 1917년 화재를 입어 소실되었던 것을 1920년에 경복궁 강녕전을 헐어다 중건한 것이다
대조전 ◇ 대조전 (보물 제816호) 침전 여섯 중에 으뜸은 왕비의 침소인 곤전이다. 곤전은 임금의 정침 바로 뒤에 위치하여 중심되는 자리를 차지한다. 창덕궁의 곤전은 대조전으로, 희정당의 바로 뒷편에 일곽을 구성하고 있다.
경복궁의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다 희정당을 지을 때 왕비의 침전이던 교태전도 함께 옮겨다 대조전을 지었는데, 고스란히 옮긴 것이 아니라 창덕궁에 적합하도록 그 구조는 새롭게 하였다. 궁내의 다른 전각엔 용마루가 있으나 왕비의 처소에는 용마루가 없다. 따라서 궁의 어디에서나 용마루 없는 지붕이 중궁전임은 쉽게 알 수 있다. 전각 중앙에 자그마한 월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출입할 때 잠시 머물거나 하례때 의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준비된 것이다. 월대의 정면과 좌우에 돌층계가 설치되어 보도에 이어졌고, 월대 좌우 귀퉁이에는 청동 드므를 설치하였다. 이는 거기에 물을 담아두면 공중에서 내려다본 화마가 제 모습이 물에 비친 데 놀라 화기를 거두어 도망쳐 버린다는 데서 유래된 장치이다. 이곳은 성종·인조·효종·현종·철종·순종 등이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낙선재 ◇ 낙선재 『궁궐지』에서는 창경궁에 속한 건물로 기록되고 있으나 근래에는 창덕궁에서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건물로 창덕궁의 동남쪽에 창경궁과 이웃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승정원 일기』와 낙선재 상량문에 헌종 13년(1847)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된 건물로서 국상을 당한 왕후와 후궁들이 거처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으로 전하고 있다.
순조 28년(1828)에 건립된 연경당보다 20년 뒤에 세워진 곳으로 궁궐에 조영되는 주거 건축술로서 그 구성의 법식과 보존 상태가 훌륭하며, 특히 지형과 환경에 따라 자유 분방하며 다양한 건축물을 보여 주고 있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희정문 ◇비원(秘苑)◇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창덕궁(昌德宮)의 후원. 창덕궁은 조선왕조의 이궁(離宮)으로 1405년에 창건되었다. 창덕궁의 전체면적은 14만4299평인데 그 후원인 비원의 면적은 약 10만평 쯤 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비원을 후원·금원·북원 등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1904년부터 비원이란 명칭을 사용하였다.
연산군은 비원 속에 새와 짐승을 방목하여 사냥을 즐기기도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창덕궁이 불타고 후원인 비원도 폐허가 되었다. 그 후 1610년 광해군에 의하여 창덕궁을 복구하면서 비원에 작은 정자들을 짓고 기이한 꽃과 나무를 심고 괴석(怪石)을 모아 화려한 후원을 조성하였는데 아름답고 사치함이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경관이었다.
1636년 인조는 비원의 북쪽 계곡 옥류천(玉流川)이란 개울가에 소요정(逍遙亭)·청의정(淸의亭)·태극정 (太極亭)을 짓고 샘을 파고 소요암(逍遙巖)에 둥근 물길을 파서 폭포를 만들었는데, 이 소요암 바위에 인조가 쓴 옥류천(玉流川)이란 글자가 새겨 있다. 그리고 이 바위에 1690년 숙종이 쓴 오언시(五言詩)가 새겨 있는데,
“흐르는 물은 삼백척 멀리 나르고 흘러 떨어지는 물은 멀리 하늘에서 내리며 이를 보니 흰 무지개가 일고 온 골짜기에 천둥과 번개가 친다”라 하였다.
1645년에는 취향정(醉香亭)을 짓고 1692년에는 애련지 (愛蓮池)의 연못을 파고 연못가에 애련정을 지었다.
1776년 영조는 왕실도서관인 규장각(奎章閣)을 지었으며, 그것이 지금의 주합루(宙合樓)이다. 정조(1776∼1800) 때에 부용지(芙蓉池)의 연못과 부용정(芙蓉亭)의 정자가 조성되었다.
주합루
어수문 ◇주합루(宙合樓) 정조가 즉위하던 해에 주합루가 완성된다.
실학의 분위기가 팽배하던 시절에 정조는 등극하여 유능한 문신들과 더불어 문치에 노력한다.
임금 자신이 박식하여 많은 저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서책들을 많이 출판하였다. 주합루를 짓고 아래층을 규장각이라하여 수만 권의 책을 보존하는
서고로 꾸몄다.
여기에서 나라에 진출할 동량들을 육성시켰다. 또한 주합루 주변을 아름답게 가꾸어서 영화당에서 취재된
인재들 양성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였다. 주합루 남쪽에 어수문을 짓고 그 앞에 방지(부용지)를 팠다. 방지의 중앙엔 당주(當洲)를 만들고 잘 생긴 소나무를 심었다.
연못에 당주가 있어야 재록(財祿)을 누린다는 설에 따른 것이다.
방지의 서편엔 누각이 있고 지변(池邊)에 입수하는 물을 토하는
이무기머리상이 있다. 동쪽엔 영화당이, 남쪽엔 부용정이 있다.
부용지
◇ 부용지(芙蓉池)
부용지는 장방형 연못으로 못 가운데에는 직경 9미터의 원형 섬이 조성되어 있다. 원래 이곳에는 숙종 때부터 연못이 있었으며, 1707년 지금의 부용정 터에 택수제가 건립되었던 것을 1792년에 정조가 택수제를 헐고 부용정을 개건한 것이다.
부용정 옆에는 석분위에 아름다운 괴석(怪石)이 심어져 선산을 상징하고 있다. 부용지에는 수련(睡蓮)이 심어져 있고 북쪽의 주합루와 동쪽의 영화당,
남쪽의 부용정이 수면에 오색아롱진 그림자를 드리우면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수놓인다.
부용지의 수원(水源)은 지하에서 솟아오르며, 비가 올 때는 서쪽 계곡의
물이 용두의 입을 통하여 입수하게 되어 있다.
못 속에는 잉어나 붕어 등의 물고기를 길러 임금이 낚시나 뱃놀이를 했던 곳이다. 동남쪽 호안(護岸)에는 이채롭게 물고기 한 마리가 조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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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정
◇ 부용정(芙蓉亭)
영화당에서 과거를 보고 급제를 하면 주합루에 올라가 왕실도서관의 수만
권의 서책을 읽으면서 능력을 함양하게 된다. 그때 그 일을 축수해 주는
자리가 부용정이다. 부용정의 평면은 亞자형이면서 변화를 주어서, 작은 건물이지만 그 구성이 복잡해 보인다. 한쪽의 두 다리를 연못 속에 담그고
섰다. 연꽃에서 아름답게 피어난 한송이 꽃과 같은 정자를 꾸민 것이다.
정조 때 개건했는데, 구조로 보아 특이한 정자이다. 동쪽에 열린 문을 열고
들어서면 불발기창이 달린 창과 외짝의 문이 있다. 그 안에 들어서면 단문 이다. 필요할 때 문짝을 열어 걸면 온 천지가 한꺼번에 정자 안으로
달려드는 듯하다.
◇ 영화당
조선왕조에선 옛 제도에 따라 국가의 동량(棟梁)을 뽑는 일을 과거제도에 의존하였다. 공개시험으로 우수한 인재를 발탁하는 방법이었다. 지방에서
초시에 합격한 사람들만 골라 임금이 친히 참석한 자리에서 시험을 치게 하였다. 이를 전시(殿試)라 하는데, 영화당은 그런 과거를 보는 장소였다.
원래 이곳은 임금이 신하들과 꽃구경을 하고 시를 지으며 놀던 곳이다.
정조 때부터 이곳을 과거장으로 사용하여, 영화당에는 시관이,
그 앞 춘당대
에는 응시자들이 자리잡고 과거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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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경당(演慶堂)
순조 28년 당시의 사대부집을 모방하여 창덕궁 안에 지은 유일한
민가형식의 건물로, 사랑채의 당호가 연경당이다.
사랑채엔 안채가
이어져 있고 사방에 행각들이 설비되어 있다.
이른바 아흔아홉간
집의 구성이 완비되어 있어
당시 사대부 주택을 잘 보여주며 한국
주택사나 생활사 등 여러 측면에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섬돌 아래 세벌대 댓돌이 있고,
그 앞에 초헌이나 말을 타고 내릴 때
딛는 노둣돌이 있다. 대청은 4칸이며,
툇마루를 놓았다. 동쪽에 2칸의
내루(內樓)가 있어 마루방이 되고,
서편에 4칸의 방이 사랑방이다.
사랑방 머리맡엔 벽장이 있고 다시 다락이 있다.
애련정과 애련지
◇ 애련지(愛蓮池)
주합루 후원으로 해서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층층다리를 딛고서면
건너편에 방지(方池)가 있고
그 북쪽에 단문의 정자가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뜨인다.
애련정이다. 애련정에 들어가 앉으면 난간위로 기둥에
장식한 낙양각이 드리워지는데,
마치 그림틀의 액자 같아서 앉아서 내다
보는 경치가 한폭의 그림 같다.
철따라 변하는 기막힌 경관을 여기에서
즐길 수 있다.
연못에 물을 담기 위하여 입수시키는 부분의 석조는 아주
단조로우나 재기(才氣)가 넘친다.
애련지 주위 단풍
애련지
애련정
![Photobucket - Video and Image Hosting](http://i164.photobucket.com/albums/u22/csparkk-2007/Changdeokgung/Changdeokgung10028.jpg) 애련지
비원의 단풍
비원의 단풍
비원의 단풍
비원의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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