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유물방

국보급 유물

모링가연구가 2011. 12. 20. 16:50

 조선 전기에는 청자라고 불렀지만 20세기 전반에 와서 고유섭(高裕燮:1905~44)이 '백토로 분장한

회청색의 사기'라는 의미에서 분청사기라는 명칭을 붙였다. 여기서 사기(沙器)는 19, 20세기 전반에

일반인이 쓰던 백자들 중에서 비교적 조질(粗質)을 가리키는 '상사기'(常沙器)에서 따온 것으로서

분청사기가 청자에 비하여 조질이 많았던 때문으로 생각된다. 분청사기는 유태(釉胎)나

장식기법에서 14세기의 상감청자를 계승한 것이지만, 15세기 중기에 이르면 상감청자의 조형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모를 하면서 수요자층이 확대되어 다량생산체계에 들어섰다. 즉 고려 말기에

상감청자 요지는 20여 개소에 불과했지만 조선 전기에 분청사지 요지는 전국으로 확산되어 200여

개소에 이르렀다. 질적으로도 양질과 조질 등 다양해졌으며, 기종(器種)·시문(施紋)·기법·문양소재 등

다종다량(多種多量) 생산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17세기 이전까지 자기를 만들었던 나라는 우리나라와 중국뿐이었다
안남자기라는 베트남 자기가 있으나 그 질이 형편 없어서
도자기라 부를수가 없다.

일본의 자기 역사는  17세기초  임진왜란때 끌려간 조선도공으로 시작되었고 
유럽은 18세기초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15세기 조선초기에 상감청자가 쇠퇴하자 청자를 만들던 도공들이
전국 각지에 흩어지게 되었는데, 이들이 도자기를 만들때 사용한 재료의 질과
제작 여건이 나빠지면서 제대로된 색의 청자를 구울수가 없게 된다.

분청사기는 이런 색이 아름답지 못한 청자에 백토를 발라
이쁘게 도색(분칠)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그래서 분청사기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도자기이다 .

 
분청사기의 중요한 특징은 관요의 엄격한 관리하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전국에 흩어졌던

도공들이 자유롭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 모습이 아주  서민적인 느낌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 공예사상 매운 드문 일이다.

어느나라던 그 나라 공예는 지배층의 산물이었기에 그시대 기술과 지배층의 취향이
배어화려하기 마련이고 이는 우리나라 청자도 마찬가지인데,
분청사기만은 각 지방의 도공들이자신들이 개발한 방식에 의하여
자신들의 정서를 반영하여  자유롭게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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