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 ,역사 .인물,방

대구 신숭겸장군 유적 (申崇謙將軍 遺蹟)

모링가연구가 2011. 7. 27. 12:36

        대구 신숭겸장군 유적 (申崇謙將軍 遺蹟)

 

대구시 동구 지묘동 526 소재 대구시 도기념물  1호

표충재 평산신씨 문중 소유

 

 

신숭겸장군 유적지

 

뒤쪽의 산이 왕산이다. 뒤쪽에 있는 건물이 표충사,

그 아래 좌측이 상절단 그 오른쪽 작은 건물들이 표충재,

맨 아래 건물이 관리실이고 오른쪽이 순절단이다.  

지금은 주변에 건물들이 들어섰다.

 

 이 곳은 고려(高麗) 태사(太師) 개국공신(開國功臣) 장절공(壯節公)

신숭겸 장군이 순절(殉節)한 곳이다.

신숭겸 장군은 태봉(泰封)의 기장(騎將)으로 있으면서

배현경(裵玄慶), 홍유, 복지겸 등과 포악(暴惡)한 궁예(弓裔)를 내몰고

왕건(王建)을 받들어 고려를 개국하였다.

 

장군은 그 뒤에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태조(太祖) 10년(927)

태조와 신라(新羅)를 도와 후백제(後百濟)를 공격할 때

대구(大邱) 공산(公山) 싸움에서 후백제군에 포위(包圍)되어

태조가 위기(危機)에 빠지자 태조를 숨기고

자신이 태조를 가장(假裝)하여 대신(代身) 전사(戰死)하였다.

 

태조는 장군의 죽음을 애통(哀痛)히 여겨

그의 시신(屍身)을 거두어 광해주(光海州)(지금의 춘천(春川))에 예장(禮葬)하고

그곳에 순절단(殉節壇)과 지묘사(智妙寺), 미리사(美理寺)를 세워

그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명복(冥福)을 빌게하고

일품전지(一品田地) 삼백무(三百畝: 약 만평)를 하사(下賜)하여 이를 수호(守護)하게 하였다.

 

조선(朝鮮) 선조(宣祖) 40년(1607)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유영순(柳永詢)이

폐사(廢寺)된 지묘사(智妙寺) 자리에 표충사(表忠祠)를 지어

공(公)을 모시도록 하였으며 그후 조정(朝廷)에서는 현종(顯宗) 13년(1672)에

이 서원(書院)에 사액(賜額)을 내리어 관리토록 하였다.

 

고종(高宗) 8년(1871)에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표충사가 훼철(毁撤)된 뒤부터는 후손들이

재사(齋舍)를 신축(新築)하여 지켜오고 있다.

 

  순절단

 

순절단

 

순절단에는 장절공이 전투시 입었던 피묻은 무장복장과

순절한 장소의 피 흘렸던 흙을 모아 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앞쪽의 꽃이핀 백일홍나무(배롱나무)는 수령이 400년이 되며,

대구시에서 신숭겸 장군나무로 명명 하였다.

 

 이곳은 후삼국 때(고려 태조 10) 왕건군과 견훤군의 격전장이었다.

신라를 침범해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던 신라 경애왕과 왕비 등을 죽이고

돌아오던 후백제의 견훤군은 경주로 달려오던 왕건군과 만나 큰 싸움을 치르게 된다.

 

그러나 태조 왕건의 군대는 견훤군에게 포위당해 왕건이 죽게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데 이때 신숭겸 장군이 태조로 변장하여

왕건을 탈출시키고 전사하였다. 이에 이곳에 그의 충절을 기려

표충단(表忠壇), 순절비각(殉節碑閣), 충렬비각, 표충재를 세웠다.

 

고려 의종 때 흙을 모아 단을 쌓았다고 하는 표충단은

높이 1.35m까지 돌로 쌓아 둘레를 돌렸으며 전체 높이 1.8m의 사각형이다.  

그 후 1819년(순조19)에 후손 신의직이 단을 3단으로 중수하고

단소(檀所) 내에 고려 장절신공 순절지라고 현각(顯刻)한 비석을 세웠다.

 

표충사(表忠祀)는 1607년(선조 40)에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柳永詢)이 세우고 사액(賜額)을 받았다.

충렬비각내의 충렬비는 신흠(申欽)이 짓고 김성현(金成玄)이 써

1607년 세운 것으로 100 x 20 x 80cm 크기이며 비대석(碑臺石)은 없다.

 

표충사 바로 뒤에는 신숭겸 장군이 죽음을 당할 때

왕건이 앉아서 그것을 보고 있었다는 작은 둔덕(왕산)이 남아 있다.

현재 유적지 입구에 유적지 관리 사무소라는 작은 현판을 건

현대식 기와집이 시비로 건립되어 있다.

 

위 유적 내용 속에는 다음 문화재들을 포괄하고 있다.

 

 

고려 태사 장절신공 충열지비(高麗太師壯節申公忠烈之碑)

 

신숭겸 장군을 모신 재실인 표충재 동쪽에 있는 비각에 보존되어 있다.

1607년(선조 40) 3월에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이 공의 외후손으로

이곳 유지를 살펴보고 크게 느낀는 바 있어 영남에 사는 후손들과 협력하여

지묘사 옛 터에 사우를 창건하고 충렬비를 세웠다.

비명은 예조판서 문정공 신흠이 짓고 글씨는 여주목사  김현성이 쓰고,

안변도호부사 김상용이 전자를 썼다.

 

정조5년(1781년) 비각이 허물어지면서 비가 넘어져 누운 것을

관민이 힘을 다해 모아 다음해 바로 세우고 같은 해에 비각도 개건(改建) 하였다.

고종9년(1872년) 후손들이 힘으로 비각(碑閣)을 중수하였고

1979년에 대구시에서 보수하였다.

 

보통 비를 밭치고 있는 거북이의 표정은 근엄하지만

이 비의 거북이는 귀엽게 웃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비신은 연백색 수세암인데 가로, 세로, 높이가 99 x 23 x 197cm이며,

반타원형 화강암으로 된 비석 덮개는 가로, 세로, 높이가 132 x 32 x 73cm이다.

비석 받침은 화강암을 거북 모양으로 깎아 만들었다.

가로, 세로, 높이가 140 x 150 x 40cm이다.

 

 

고려 장절신공 순절지지비(高麗壯節申公殉節之地碑)

 

이 비는 대구 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1호인 신숭겸 유적 내에 있다.

고려 개국 벽상 공신(高麗開國壁上功臣) 신숭겸(申崇謙)의 순절지에 세운 것이다.

신숭겸은 평산 신씨의 시조로 태봉(泰封)의 기장(騎將)으로 있다가

궁정 반정으로 궁예를 폐하고 왕건을 옹립하였으며,

견훤과의 공산 싸움(公山戰鬪) 때 왕건을 대신하여 전사했다.

 

이 비는 1819년(순조 19) 신숭겸의 28대손 신의직(申義直)이

대구 영장(營將)으로 부임했을 때 단을 세우고 비를 세웠다.

또한 1856년(철종7) 순절비 보호각을 창건 하였으며,

1872년(고종9) 1928년 중수하고 1986년에 정부 보조금으로 보수를 하였다.

 

 

 

대구 표충재에 걸려있는 고려 예종 어필.

 

 

고려예종어제라고 상단에 적혀있다. 예종 어필이 다수 있다.

 

대구신숭겸장군유적지

 

찾아 가는길

찾아가는 길은 경부고속도로 및 대구 포항고속도로 팔공산I.C에서

대구로 내려와 팔공로와 만나는데 팔공산측으로 우회전 가는 방법이 있다.

(표지판이 잘 되어 있음:신숭겸장군유적지)

 

대구에서는 대구공항 부근의 불로삼거리에서 공항옆 팔공로로 가면된다.

공항 팔공로에서는 동화사(桐華寺)로 약 6Km쯤 도로를 따라 가라가면

동화사와 파계사로 길이 갈라지는 곳에 파군현(破軍峴)이 있고,

고개를 넘으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조그마한 평지가 있고 이곳에 유적지가 있다.

유적지옆에는 지묘초등학교가 있다.

공항로에서는  표지판이 잘되어 있어 초행자도 쉽게 찾아갈 수 잇을 것이다.

 

유적지는 관리인원이 부족하여 평상시는 순절단을 제외하고는

열쇠로 잠구어 놓고 있어 순절단만 볼 수 있다.

대구 시티투어로 단체 관람때는 열어주고 가이드가 설명하여 주고

내부를 볼 수 있지만 시간이 짧고 투어 자체가 여러곳을 단체로 다니므로

특정지역 관람은 불편한 편이다.

자세한 것은 평산신씨 표충재종중(T: 053-985-1330)에 알아보고 가는것이 좋을것 같다.

   

모영재(慕影齋)

   대구시 동구 평광동(실왕리) 108 소재

 

  

 

이곳은 장절공의 영정각(影禎閣)이 있던 곳이다.

장절공의 영정은 본래 지묘사에 봉안되었었는데

지묘사가 헐린뒤에 대비사로 옮겨져 봉안(奉安)되었다가 순조 19년(1819년)

대구영사 김철득의 투장흉계(偸葬凶計)로 절과 함께 영정도 불타 버렸다.

 

그 후 순조 28년(1828년) 지묘동의 선비 최심의 고변으로

자손들이 이를 알고 관가에 연달아 송사를 한 결과 투장한 무덤 셋을 관가에서 파내고

1832년에 그 자리에 후손들이 영각 유허비를 세웠다. 

    

   재실은 1931년 高麗(고려) 開國(개국) 功臣(공신)인

壯節公(장절공) 申崇謙(신숭겸)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인데

매년 음 9月 9日에는 申氏門中(신씨문중)에서

合同(합동)으로 享祠(향사)를 지내오고 있다.

    

    1966년에 또 한차례 重修(중수)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慕影齋(모영재)는 影閣(영각)을 追慕(추모)한다는 뜻이다.

    방 3칸, 대청 1칸에 박공판을 단 맞배지붕으로 중방 밑은 모두 콘크리트로 막고 있다.

 

 

고려 태사 장절신공 영각 유허지비(高麗太師壯節申公 影閣遺墟之碑)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한

고려의 명장 신숭겸의 유허지에 세운 비이다.

재실 바로 곁에 있는 高麗太師壯節公 申公影閣遺墟碑

(고려태사장절공 신공영각유허비)는

원래의 것이 화재로 없어진 것을 1833년 후손인

承政院(승정원) 都承旨(도승지) 申正緯(신정위)가

새로 세워 碑文(비문)을 撰(찬)했으며

1848년(憲宗, 헌종 14)에 儒林(유림)에서 碑(비)를

保存(보존)하기 위하여 碑閣(비각)을 세웠다.

비각 아래 모영재(慕影齋)가 있다.

 

 

유허비

 

공산전투와 지명이름

팔공산주변의 지명은 공산전투로 인하여 이름이 정하여 진 곳이 많다.

자료에 의하면 은해사 입구가 첫 조우지라고 하는데 바로 이곳이 태조지이다.

 

또한 숙천에 있는 초례봉은 신의 도움으로 이기고자 제를 올렸다는 뜻의 봉우리이고,

신숭겸장군 유적지 표충단은 왕건을 대신해 죽은 신숭겸과

그 휘하 군졸을 기념하기 위한 곳이고,

오늘날 마을 이름 지묘는 신장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준 절 이름 지묘사에서,

그뒤 왕산(유적지 뒷산)은 왕건이 피해 달아났다는 뜻에서,

멀리 팔공산 염불암 뒤 일인석은 그가 도망가다가 쉬었다는,

다시 아래로 내려와 파계사와 동화사로 갈라지는 파군재는 고려군사가 패했다는 ,

봉무동에 있는 작은 바위 독좌암은 혼자 앉았다는,

불로동 옛이름 해안은 도망가다가 잠시 얼굴을 풀었다는,

평광동 시량리는 나무꾼이 왕을 잃은 곳, 즉 실왕했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들이다.

 

어느덧 사지에서 많이 벗어나 하늘을 쳐다보니 반달이라 반야월,

그래서 마음을 놓으니 안심이요, 그래도 못 믿어 더 나아가니 날이 밝은데

맑은 개울이 있자 청천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살내'와 염불암 뒤에 있는 '일인석', 불로동의 옛이름

'해안'은 긴장을 풀었다는 해안, 쏜 화살이 내를 이루었다는 전탄,

또한 무태는 왕건이 이 마을 앞을 지날때 게으른 사람 없이

모두 부지런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고,

휘하 병사들에게 게으름 피우지 말고 경계를 강화하라고 무태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연경은 지나가는 밤에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여,

동화천과 금호강이 만나는 곳 일명 살내는 왕건군사와

견훤군사가 쏜 화살이 내를 이루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전한다.  

팔공산, 앞산 계곡 어디에도 왕건의 얼이 스며 있지 않는 곳이 없다.

따라서 대구일원은 당시 승자였던 견훤에 관한 고사는 없고

패자였던 왕건에 관한 전설만 가득하니 정권을 창출하지 못한 원인이 아닐까!

그러나 왕건이 구사일생하여 오백년 고려를 이룩하게 한

신숭겸 장군의 거룩한 희생과 충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참고문헌: 《삼국유사》; 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 경북대 박물관, 1980,

《경북 달성 문화 유적》; 대구직할시, 1988,

《향토문화유적》; 대구직할시문화원, 1994,

대구의 금석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