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돌문화, 도자기문화,청동기문화
구들,온돌(溫突)
온돌은 단조선(檀朝鮮)시대 훨씬 이전부터 우리민족의 생활 속에 뿌리내려온 고유한 난방문화다. 지나(至那) 일본은 물론, 세계 어디에도 온돌은 없었고, 한반도와 만주,그리고 몽고 일부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온돌이 발견되는 지역은 모두 우리 배달민족의 옛터전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온돌방, 구들구조, 굴뚝 |
우리민족이 석기시대에 이미 주택난방장치로 온돌을 사용했다는 흔적은 여러 군데 산재한 유적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5만여년 전 함경도 회령 오동지역 구석기시대 주거지 유적에서는 구들로 추정되는 바닥과 벽의 형태가 발굴되었고, 함북 종성군 행관면 석기시대 유적에서는 난로에 해당하는 큰 독과 불피운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으며, 함북 웅기군(雄基郡) 송평동(松坪洞) 석기시대 주거지에서는 요즘과 같은 구조로 구들유적이 발견되었다.
또한, 6~7천년 전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 1호 주거지와, 평남 온천군 운상리 익산 유적 제1호 주거지, 그리고 5천여년 전 서울 암사동 움집터 제6호 신석기 유적지에도 구들유적은 남아있다. 영국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온돌을 'on-dol'로 표기하고, 한국의 바닥난방장치(floor-heating device)라고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구들(온돌) 구조와 구들고래
서양식 난방은 벽난로를 사용하여 열효율이 겨우 20~30% 수준인데 반해, 온돌식 난방은 구들장을 달구어 한동안 열을 잡아두기 때문에 열효율이 매우 높아, 어떤 난방과도 비교되지 않는다. 구들만 잘 놓으면 장작을 때고난 후에도 열기가 오래도록 지속되는데, 일류 대장이 정성을 기울여 구들을 들이면 방바닥 온기가 며칠씩 가기도 한다.
☞구들(온돌)의 구조(부뚜막아궁이), 단,함실아궁이에는 부넘기와 구들개자리가 없고 함실만 있다.
온돌의 구조는 아궁이,부넘기,구들개자리,구들고래,고래개자리,굴뚝개자리,굴뚝 등으로 구성되며, 아궁이에서 타오른 열기가 후렁이에서 부넘기를 넘어 구들장을 핥으며 방고래로 흘러들어가면, 불기 먹은 연기가 구들장에 열을 모두 건네주고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특별히 정해진 틀이 없어서, 구들대장의 기술수준에 따라 집집마다 구조가 달라지고, 지방마다 처한 기후와 환경에 적합한 구조로 진화하기도 한다.
부넘기와 불목
아궁이에서 불길이 넘어가는 둔덕을 부넘기(부넹기,불고개)라 하고, 아궁이와 고래 중간에서 연기를 잘 빨아들이도록 좁혀놓은 곳을 불목이라 하는데, 구들방 아랫목에서 가장 더운 자리에 해당한다. 부뚜막아궁이는 불길이 부넘기를 넘어 방고래로 빨려 들어가지만, 함실아궁이는 부넘기가 없어서 불기가 곧장 방고래로 밀고 들어간다.
부넘기를 잘 만들면, 아궁이에서 넘어가는 불꽃이 하얀색으로 피어나 그을음이 없다. 하얀색은 열효율이 매우 높다는 신호다. 부넘기는 40도 이상 기울기로 올라가야 좋은데, 부넘기 뒤에 만드는 불목 높이를 고래방향에 따라 달리해서 열효율을 높인다. 불목 위에 놓이는 이맛돌을 겹층으로 덛쌓아야, 방 아랫목 장판이 까맣게 타지 않는다.
불목의 넓이와 높이는, 아궁이의 센 화력을 모두 빨아들이는 크기로 만드는데, 혹한지역에서는 열기를 충분히 흡입시키기 위해 "불목은 넓고 구들개자리는 얕게" 하는 형식을 취하기도 한다.
아궁이 뒷부분 후렁이와 불목 사이가 너무 좁으면 열기가 제대로 빨려들지 못하고, 너무 넓으면 바깥에서 찬 공기가 아궁이로 흘러들어 구들이 빨리 식는다. 불목의 상태는 사용연료와 보온열기의 열효율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구들개자리는 아랫목 바로 밑에 고래바닥보다 30cm정도 더 깊게 판다. 고래보다 깊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불목을 넘어온 열기가 낮은 구들개자리 속 찬공기와 섞이면서 속도가 떨어져 고래 사이로 나뉘어 들어간다.
구들고래 입구에서 퍼지는 불길과 연기
부넘기,방고래,개자리,굴뚝으로 이루어지는 공간구조는 열기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예민한 열순환체계를 형성하게 된다.
장작이 타면서 올라간 불꽃열기는, 아궁이 후렁이에서 부넘기를 통과하여, 빠른 속도(베르누이원리)로 구들장을 달구어 덥히게 된다. 아궁이 바닥에서 솟구친 불길이 구들 속으로 급히 빨려들어가게 되면, 이제 서서히 넓게 퍼져나간다.
부네미를 넘어 방으로 들어온 불길은 구들장 불목에 세게 부딪친 다음, 각기 고래로 흩어져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불목에 세차게 부딪쳐야만 넓게 펴진 불길이 윗목으로 올라가면서 방이 골고루 넓게 따뜻해진다.
불목에서, 구들장을 가로불나누기로 놓아 불길을 양옆으로 나누더라도, 구들장을 덮고 불을 때면 불길이 불목에서 가운데로 모여 윗목으로 가게 된다
그러므로 구들을 놓을 때, 방 아랫목 불목에서 불길이 양옆으로 세차게 가도록 유도하는 기술이 구들놓기에서 가장 중요한 비법(秘法)이다.
불목을 치고 흩어져서 고래개자리 공간까지 올라온 열기는 고래능선 공간으로 나뉘어 들어가면서 방 전체를 뜨겁게 달군다.
고래능선을 통과하며 열을 방출한 연기는 굴뚝개자리에 모이게 되고, 개자리에 모인 연기는 굴뚝을 통해 밖으로 배출된다.
방고래 유형에는, 줄고래,부채고래,맞선고래,굽은고래,되돈고래, 또는 외고래,흩은고래, 그리고 그 신비한 아자(亞字)고래 등 종류가 다양하지만, 유형에 따라 제각기 장단점을 지니고 있다.
굴뚝과 개자리
부넘기,개자리,방고래,굴뚝 등, 구조물들이 모두 제역할을 다해야 조화를 이루어 열순환기능이 효율적으로 작동한다.
온돌에서 특히 중요한 요소는 굴뚝이다. 그런데,그 꿀뚝보다 더 중요한 핵심이 개자리다. 개자리가 없으면 온돌로서 기능할 수 없다. 온돌이 세계 최상의 난방장치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핵심요소가 바로 이 열이론에 기초한 발명품 즉, 텅빈 헛간 개자리였다.
오늘처럼 과학이 발전한 컴퓨터시대에도, 이 개자리 열이론을 능가할 만한 난방기술은 아직 없다. 개자리는 온돌문화의 금자탑으로, 고인돌,빗살무늬토기,비파형동검,잔무늬거울,금속활자,고려청자를 탄생시킨 배달문화의 원천이며, 천도(天道)의 그 무위신기(無爲神氣)였던 것이다.
개자리와 천부경(天符經)
개자리는 헛간,빈공간,바로 그것이다. 이는 용무용(用無用) 즉,무의 쓰임새,무를 써서 무력(無力)의 빈힘을 운용하는 것이다. 이 개자리로부터 비로소 무용(無用)과 무위(無爲)가 잉태된다. 천부경(天符經) 시무시(始無始) 종무종(終無終)에서 개자리의 용무용(用無用)이 나오고, 노자의 위무위(爲無爲) 행무행(行無行)이 나온다. 개자리는 천도(天道) 천리(天理)의 천부경에서 태어났고, 구들문화 한옥문화 역시 환인천제(桓因天帝)의 천부경, "일삼(一三)-삼일(三一)", 삼태극(三太極), 삼신(三神)사상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삼태극, 易數8괘, 천부경,분화,회전, 삼태극,분화,회전,귀일, 우주창조,일삼-삼일, 천부경,일시무(無)시일
이렇듯, '아궁이,개자리,굴뚝'의 오묘한 체계로 불을 다루는 신비한 불기술을 지녔기 때문에, 개자리 열조화술에 자유로울 수 있었고, 숯가마,장작가마,불가마를 창조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불가사의한 구들, 아자방(亞字房)
[펌]☞ 아자방(亞字房) -무릎높이 이중 온돌바닥으로, 아(亞)자 모양 구들방, 방높이 12자,
아자방(亞字房) 굴뚝, 경남 하동군 쌍계사 칠불암 아자방, 지리산 칠불사, 지방유형문화재 제144호
가야국 시조 김수로왕은 일곱아들 모두가 성불하매 칠불사를 지었고, 신라 효공왕(897~911) 때, 담공선사가 8m 이중 온돌바닥으로 아자방을 축조하였다. 아쉽게도, 6.25전쟁(단기4284년) 때 불에 타 재가 되었고, 4315년(1982) 구들대장(김용달)이 아자(亞子)구들을 다시 복원하였다. 전보다야 한참 못미치지만,그래도 한번 때서 일주일은 족히 간다고 한다.
한번 불을 때면 온기가 100일 동안 지속했다는 구들, 아자방(亞字房)은 온돌의 신비한 열보존기능을 한껏 자랑한다.
아궁이와 구들방, 한옥(韓屋)
'아궁이,개자리,굴뚝'이라는 온돌체계로부터 구들문화에 기초한 온돌식 한옥이 출현하였고, 점차 온돌식 주거생활에 알맞게 한옥도 한층 발전하였다. 온돌가옥은 9천년 이상 외형과 내실이 함께 발전하면서 온돌식 문화생활에 필요한 조건들을 두루 갖추고 오늘에 이르렀다.
높은 방, 한 방향으로 낸 굴뚝,아궁이, 낮춰 앉힌 부뚜막 아궁이, 장작불 때는 가마솥 안방.
추사 김정희 옛집. 바닥에서 높이 떠 있는 사랑채, 뒷뜰에 모신 굴뚝님, 김정희 고택
한옥은 구들체계를 갖추고 독특한 구조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온돌집만이 자아내는 아름답고 시원한 형태를 보인다. 낮춰 앉힌 아궁이와 높여 들인 구들장, 공간에 떠 시원한 대청마루, 바깥으로 멀리 내보낸 굴뚝 등, 한옥의 쓰임새는 저마다 역할을 다 하도록 높낮이까지 치밀하게 짜맞추어 지었다. 집채와 외형구도는 마당보다 몇단쯤 높게 자리잡아, 온돌구조와 열보존체계를 충실히 반영토록 열역학적 형태로 설계되었다.
그 결과, 난방은 물론 아름다운 지붕곡선과 자연에 어울리는 조형까지 맞물려 고품격 미감을 자아내는 한옥으로 승화하였다.
이렇듯, 한차원 품격높은 한옥에서 대자연과 벗하는 신선(神仙)들이 천도에 부합하는 신선생활을 즐기면서, 도선(道仙)의 풍류도술과 신선문화를 전승하여, 배달선조의 홍익인간 재세이화 이념을 이땅에서 실현해온 것이다.
하회 남촌댁,높은 구들방,누마루,기와선이 아름답다. 하회마을,아궁이(中)에 올라앉아 한결 시원하다.
경복궁 흥례문, 풍물놀이 줄타기, 오똑 선 지붕, 창경궁 문정전, 학처럼 날아오르는 선의 미학,
자금성 지나(至那), 웅장해서 짓눌린 지붕 밋밋한 선... 자금성, 무거운 기와 머리에 이고, 답답...
아궁이 실은 한옥이 기와 가뿐히 얹고 하늘 향해 날아오르고.., 웅장하게 짓눌려 땅속으로 가라앉는 지나(至那) 궁궐.
일본 교토, 제사(醍寺,다이코지) 금당, 백제식 사찰, 옥불사 대웅전, 상해, 마지못해 처마가 들렸다.
사합원(四合院), 북경 지나(至那), 유교양식 사합원(四合院), 북경 지나(至那), 뒤가 막혔다..
단군조선(BC.2333) 기와, 중앙박물관(左,中,2),광주박물관(右) |
기원전 단조선(BC.2333~BC.108)시대 기와유물이 평양 대동강 유역에서 발굴되었다.
기와 형태가 지금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기술수준이 매우 높아, 4천여년 전 단조선(檀朝鮮)시대에 이미 오늘과 같은 훌륭한 한옥에서 여유롭게 생활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가옥은 이미 아는 바와 같이 백제에서 건너간 백제형 기와집이고, 지나(支那)가옥은 의자생활에 부적합한 구조와 형태를 지니고 있어서, 지나식 창작 가옥이 아니라 온돌 없앤 한옥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옥에서 구들을 생략하고 외적 미감(美感)을 무시한 채, 폐쇠적인 지나식 생활에 맞도록 사방을 둘러막아 외부와 단절된 사합원(四合院)으로 정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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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다리, 가부좌(跏趺坐)
우하량 가부좌 여신상, 조각상과 자료 기초로 복원, 홍산 6000년전 |
책상다리,양반다리,결가부좌(結跏趺坐)는 우리 배달민족 만의 고유한 좌식생활 양식이었다.
환국,배달국,단조선을 거치면서 구들문화가 점차 발전하였고, 뜨거운 아랫목에 방석을 깔고앉는 좌식문화가 정착되면서 책상다리,가부좌 틀기가 자연스럽게 생활화한 것이다.
인도,지나(至那),일본 등지에는 원래 온돌문화가 없었다. 차디찬 맨땅이나 마루바닥에 엉덩이 대고 앉아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으니, 방석문화나 가부좌식 주거문화가 출현할 리도 없었다. 찬 마루나 의자에서 생활해야 하는 민족이 굳이 힘들게 조그마한 방석에 올라앉아 가부좌를 틀어야 할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천손(天孫)민족의 천도(天道),신도(神道),풍류도(風流道),도술(道術)을 전수받고자 하는 도인(道人)들이 정신수련과 심신단련을 위해 신선술,호흡술을 연마하면서 온돌문화의 책상다리 좌법을 자연스레 익히게 된 것이다.
가부좌는 하늘을 머리에 이고 곧은 자세로 앉아 수련하는 상투머리 천손민족 고유의 천인합일(天人合一) 수도좌법이다. 상투튼 머리가 하늘과 맞닿은 자세로 곧추 앉아 하늘의 영기(靈氣)를 내려받고 도통의 진경(眞境)에 들기 위하여 천도,신선도를 연마하는 책상다리,가부좌 기공법이 생겨난 것이다.
참선,호흡... 불도,유도,도교,기독교 등 모든 종교와 사상은 천부경, "일삼-삼일(一三), 삼태극(三太極)", 천도,신도,선도로부터 파생된 분파사상이며, 분파종교인 것이다.
상투,책상다리, 석가모니-티벳탕카, 상투,책상다리, 마하비로자나불 사물놀이, 책상다리 북장단,
가부좌 온돌방, 숯불화로,창호지문 온돌, 책상다리 방석,책상,문갑,사방탁자,병풍
하루종일 곧은 자세로 수신하며, 선녀생활 영위한다. 상투 가부좌 틀고 도 닦으며, 신선생활 즐긴다.
온돌방 장판, 방석,보료,책상다리, 한복,경대,개다리상,책상, 문갑,애기장,패물함,이층농, 병풍이 조화롭다.
우리 배달민족이 아름다운 한옥에서 고품격 문화를 영위하며 신선(神仙) 선녀(仙女)생활을 즐길 수 있었던 배경에는, 따끈따끈한 온돌방과 함께, 연기걱정 없이 쾌적한 공간을 조성해주는 굴뚝문화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었다.
안뜰 뒷뜰, 굴뚝문화
구돌 덕분에 우리네 굴뚝은 예술품이 되었다. 파아란 굴뚝연기는 방충 방역 역할까지 한다.
창덕궁 희정당 굴뚝 십장생굴뚝 10개(위), 경복궁 자경전 뒷뜰 담장
아미산 굴뚝, 경복궁 교태전, 보물 제811호, 담장에 죽 늘어선 그림, 창덕궁 대조전 굴뚝,
귀찮기만 하던 굴뚝을 바깥으로 멀리 내보내고, 거추장스럽던 굴뚝에 서화(書畵)와 조형미까지 가미하여 감상대상이나 장수,다산,수신 등, 심신수련 담장으로 활용한 혜지는 더 덛붙일 찬사가 필요없다. 담장문화라는, 세상 어디서도 들어볼 수 없는 정신문화를 창조하여, 천손민족의 신선다운 자세로 천지자연(天地自然)과 함께 어울리며 고매한 신선생활을 누려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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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 아궁이와 장작가마
황토 아궁이는 높은 화도를 무리없이 수용한다. 사토 섞인 황토 아궁이는 고화도용 장작가마다.
부뚜막 아궁이와 장작가마 아궁이. 열오른 부넘기와 불목
밤을 새워가며 장작불로 열기를 조절해주는 물레대장 겸 불대장.
아궁이, 온돌 사랑채 아궁이, 하회마을 양진당 미송리형 토기, 3000년전
구들,숯가마,장작가마,불가마는 아궁이에서 파생된 큰 아궁이에 속한다. 다만, 필요에 따라 구조가 조금 달라졌을 뿐, 나무 때는 방식이나 불 다루는 기술은 다를 바 없다.
우리네 장작가마는 봉우리가마, 뺄불통가마, 망뎅이가마, 오름가마 등으로도 불린다. 장작을 때 불길이 첫칸에서 타오르면 굴뚝역할도 함께 하여 다음 봉우리를 채우고,위쪽으로 계속 타올라간다. 이렇듯 장작가마는 수천년 전부터 이미 부넘기 개자리 구들체계를 갖추고 있어 신비한 불기술을 발휘하였다.
흔히들 구들체계를 잘 안다고 자부를 하지만 실은 하찮은 기술수준에 불과하여, 신비한 기능을 발휘하기에는 불가능하다. 우리 천손민족에게는 구들체계를 통달한 가마대장 불대장이 있었기 때문에 질좋은 가마에서 불을 마술처럼 활용할 수가 있었다. 구들을 모르면 장작가마는 커녕 도자기도 만들지 못한다. 설사 가마를 만들더라도 질좋은 가마상태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오직,구들에 통달한 고수급 불대장만이 개자리 장작가마를 만들고,가마조건과 상황에 맞게 산화불,환원불,중성불,검멕이불 등 여러 종류 불을 마음대로 땔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세계 도예가들이 신비한 고려청자 백자기술에 공들이는 것을 보면 우리네 불기술이 얼마나 신묘한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누구나 알 수 있는 부네미 개자리가 아니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구들체계가 아니다. 천부경 시무시 종무종을 터득해야만 구들에 통달하고, 용무용 무위유위를 통달해야만 개자리를 활용할 수 있다. 오직 천손 구들대장 불대장만이 수준높은 황토가마에서 빗살무늬토기,오지항아리,장독항아리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단조선,고려시대에는 신기(神技)를 알아보는 상류층 문화 고수들의 탁월한 심미안에 힘입어 대장마다 지닌 최상급 신술(神術)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조선(李朝鮮) 저급문화시대를 거치면서 물레대장,불대장,놋쇠대장 등 신인(神人)을 쟁이로 천대하여 기술을 퇴락시켰고, 지금도 역시 1만년 전통문화를 구닥다리라 무시하는 저질풍조에 떠밀려, 어렵사리 명맥이나마 유지해오던 대장의 신기마저 모두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이 땅에는 각 분야마다 전문기술을 터득한 최고수 대장 신인(神人)이 많이 있었다. 흙 다루는 대장은 장작가마에서 황토토기,장항아리를 빚었고,놋쇠 다루는 대장은 불가마에서 청동검 방짜놋쇠를 두드렸고, 구리쇠 다루는 대장 신인(神人)은 에밀레종을 부어내 천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하늘의 소리(天語)를 전하고 있지 않은가?
황토 아궁이와 황토 토기
아궁이에 불을 때면, 황토벽이 말라 토기가 된다. 곰 토우, 강원도 양양 오산리 유적, 7000년전.
황토,덧무늬토기(隆起文), 신석기시대 ☞고산리 항아리,1만2천년전 황토여신상,우하량,홍산,6천년전
가락식 무문토기, 송파구 ☞강원도,오산리 융기문토기, 8000년전 ☞양양 오산리 평저형토기, 8000년전
아궁이는 황토를 이겨서 만든다. 황토아궁이에 장작을 때면 황토벽이 말라 단단한 토기아궁이가 된다. 황토 흙덩이가 토기(700~1000oC)로 구어지는 것이다.
황토아궁이에 불을 때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황토그릇을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다. 황토토기를 만들면서 빗살무늬토기(1000oC),덧무늬토기(隆起文),민무늬토기(無紋토기) 등으로 다양하게 진화하였다.
열오른 아궁이에서 나무 탄 재가 날려 황토벽에 내려앉아 녹으면서 재유약이 개발되었고, 재유약토기와 고화도 옹기,도기,자기가 출현하였고, 나아가 고려청자(1300oC),이조백자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고산리 토기와 고려청자
☞고산리,덧무늬사발,1,2000~9000년전, 고려청자상감국화문완,보물1032호, |
고려청자상감국화당초문완, 국보115호 |
1만년전 제주 고산리토기와 1천년전 고려청자 대접은 모양이 일치한다. 굽모양 그릇모양이 똑같고, 휘어올라간 곡선도 전혀 다르지 않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려청자 사발은 국보로 지정될 만큼 일류대장이 정성들여 만든 명품이다. 보통사람은 이러한 선을 그려내지 못한다. 숙달된 물레대장만이 이처럼 아름다운 곡선을 단번에 쓱 뽑아올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웬만큼 물레를 차는 사람이라면 이 청자대접의 예술성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 1만년 전에, 그것도 토기로, 이런 우아한 선을 그려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수준급 물레대장이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물레가 아니고는 이런 토기모양을 만들어낼 수가 없다. 설사, 타래를 틀어 만들었다 하더라도, 발물레를 병용치 않고는 이렇듯 정교한 굽선과 곡선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국보 제115호, 고려 청자상감국화당초문(靑磁象嵌菊花唐草文) 대접
국보115호 청자대접의 안 바닥을 보면, 가운데에 손가락으로 눌러 동그랗게 패인 자리가 있고, 거기서 이어진 내부곡선 흐름이 그릇 외형과 닮아서, 안팎의 곡선형태가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고산리사발 안 곡선도 역시 국보 청자대접과 같은 굽선 모양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리라는 것이다.
원래, 황토로 타래를 쌓아서는 이렇게 수준높은 곡선이 나오지 않는다. 오직 물레로 돌려야만 이런 가냘픈 곡선이 성형될 수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토기나 도자기는 700~800oC 불에서 초벌을 굽는다. 굽는 도중 질흙이 마르면서 수분이 증발해 그릇크기가 10~20% 정도 줄어드는데, 그때 그릇두께가 일정해야만 질흙이 같은 비율로 수축되면서 어느정도 변형된 그릇모양을 갖추게 된다. 그런데, 흙두께가 일정치 않으면 얇은 부분과 두꺼운 부분의 수축비율이 달라져 두터운 부분에 금이 가 갈라지게 된다.
금이 가는 현상은 굽쪽이 훨씬 민감한데, 바닥이 두꺼우면 거의가 다 갈라지고 만다. 그래서 갈라지지 않도록 손가락으로 눌러 바닥두께를 얇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굽두께가 안팎으로 균일하기 위해서는, 고산리사발이나 청자사발처럼 굽선이 얇게 치켜올라가도록 굽모양을 만들어줘야 하기 때문에, 그처럼 여리고 아름다운 선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굽과 바닥을 종이장처럼 얇게 깎아내자면 이 토기사발 형태가 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이 형태가 실패없이 사발을 만들 수 있는 기법이 되어 고려청자대접의 전형으로 정착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고산리 토기사발은 분명 일류대장의 작품이며, 그 솜씨로 미루어 1만년 전에 이미 발물레를 찼다는 것이다.
1만년 긴 시차를 두고 고산리사발과 고려청자사발이 같은 방식 같은 모형으로 이어져왔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이 땅에서 세계 최고의 고려상감비색청자가 탄생할 수 있었던 근원은 바로 1만년 발물레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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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인(天附印)과 잔무늬거울(多紐細紋鏡,靑銅鏡)
잔무늬거울, 다뉴세문경(多뉴細紋鏡), 국보 제141호, 지름 21.2㎝, 신석기시대,단군조선
다뉴세문경(多紐細紋鏡)은 신석기시대 청동거울로서, 뒷면에는 고리(뉴,紐) 2∼5개가 있고, 가늘게 정교한 무늬가 조각되었고, 주석을 더 섞어 빛이 잘 반사되도록 하였다는 점이 그 이전까지 발견되던 거친무늬거울과 다른 특징이다.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多紐細紋鏡)은 가는 선 13,000개가 0.3mm 간격으로 아름답게 새겨져 있어, 현대 컴퓨터기술로도 흉내내기 어려울 만큼 세밀하다. 이 잔줄무늬 청동거을은 지름이 21.2㎝로 현존하는 잔무늬거울 중에서 가장 클 뿐더러, 구리(銅)나 주조(鑄造)상태,문양 등 모든 면에서 월등히 뛰어나, 단조선시대의 청동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천부인(청동검,청동방울,청동거울),국보143호, 단군조선, 국보146-1호,팔수형동령,충남 논산
국보 제143호로 지정된 "청동검,청동방울,청동거울" 유물군은, 전남 화순군 대곡리 신석기시대 무덤유적에서 집을 수리하던 노인(구채천)이 발굴하여 국보로 지정된 청동유물이다.
국보 제146-1호 팔수형동령(八手形銅鈴,충남 논산)은 짧은 점선을 음각무늬로 곱게 장식하였다. 잔무늬청동거울은 대부분 청동방울,청동검과 함께 발굴되고 있어서, 제사장이나 신인정치 등 단조선(檀朝鮮)의 실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비파형동검과 청동기문화
경주박물관 |
단군조선,대구 |
평남 덕천시 남양 유적16호 팽이그릇 집자리에서 비파형창끝 활촉 등 기원전 38세기 청동기유적이 발견되었고, 평양 부근 상원군 장리1호 고인돌무덤에서도 청동방울 2개, 청동 2인교예 장식품 1개, 청동끌 1개 등 청동제품이 나왔는데, 그 절대연도는 기원전 30세기 전반에 해당한다. 이러한 연대는 단조선(檀朝鮮) 훨씬 이전에도 평양을 중심으로 청동기문화가 발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양 상원군 룡곡리 4호, 5호 고분에서는 비파형창끝과 청동단추가 발견되었고, 사람 뼈 전자상자성공명법 측정결과 4539±197년 전으로 나타났다. 평양시 강동군 순창리 글바위 5호 무덤에서는 기원전 25세기경 금동귀고리와 금동가락지가 발굴되었다. 따라서, 금동유물 연대와 청동유물 연대도 기원전 26세기로 올라가고, 기원전 2333년 단조선(檀朝鮮) 건국도 사실로 확인되었다.
우리민족의 청동문화는 매우 뛰어나 세계 최고수준이었다. 단조선 초기의 요령성 여대시 강상무덤에서 발굴된 청동실 장식품은 0.25mm 구리실로 짜 엮었는데, 이렇게 가는 구리실을 뽑아내는 기술은 오늘의 기술로도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단조선(檀朝鮮)의 요령성 심양 정가와자 6512호 무덤에서 발굴된 비파형동검과 청동화살촉은 주석함량이 다르다. 비파형단검은 청동 72.43%, 아연 6.84%, 주석 13.52%였고, 청동화살촉은 66.39%, 11.62%, 9.93%였다. 이는 강도가 필요한 단검에는 주석량을 높이고, 대량 소모되는 활촉에는 주석량을 낮춘 결과다.
한나라,"주례 고공기"에, 주나라 청동주조법은 구리와 주석만 썼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청동에는 구리,주석 뿐 아니라 아연이 상당량 포함되었다. 이는 우리만이 지닌 청동 및 황동기술을 의미한다. 과학자들은 청동에 아연을 섞는 황동합금을 세계사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송나라 때까지만 해도 청동에 아연이 별로 포함되지 않았다고 전한다.
우리 선조들이 아연의 특성을 잘 알았다는 것은 기술수준이 매우 높았다는 의미다. 아연은 용융점이 327.4oC로 매우 낮다. 점성 역시 작고 유동성이 좋아 주물 만드는 데는 용이하지만, 기화점은 907oC로 기화하기 쉬운 단점이 있다. 청동과 아연은 비등점이 달라 고도의 합금기술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민족은 청동제품에 아연을 넣음으로써 황동의 색채를 아름답게 했을 뿐만 아니라 주물의 성질도 좋게 만들었다.
이렇듯, 단조선은 매우 정교한 청동기술을 갖추고 있었다. 청동검,청동거울,청동방울에서 보듯이,단조선의 청동기술은 섬세 정교하여, 주조기술의 극치를 이루었던 것이다.
흔히들, 고인돌시대라고 하면 미개 원시사회라고 생각하기 일쑤다. 그러나 고인돌은 단조선시대의 산물로서, 청동기를 만들어 사용하던 청동문화 시대였던 것이다. 고인돌무덤에서 출토되는 빗살무늬토기, 청동검, 청동도끼 등은 모두 단조선 초기부터 제작된 청동기물이었다. 거기에 제작기술까지 월등히 뛰어나 4~5천년 전에 이미 현대의 컴퓨터로도 재현못할 정도로 엄청난 고급기술을 창조하고 활용한 청동문명시기였던 것이다.
우리 배달민족이 청동기를 만들어 사용한 연대는 단조선시대 훨씬 이전 6000~9000년전 환국,배달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환웅천제(BC3898)는 환인천제로부터 천부경과 천부인, "비파형동검,청동방울,청동거울" 3개를 하사받고,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었고, 신인(神人) 단검천제는 환웅천제로부터 천부경 천부인을 전해받고 단조선(檀朝鮮)을 열었다.
신인(神人) 단검천제로부터 천부경, 천부인, 천도(天道)를 이어받은 천손족 배달신선(仙人)들은 이땅에서 천지도행법에 따른 심신수련을 통해 고매한 신선의 삶을 누려왔다. 이러한 수도행(修道行)이야말로, 배달민족이 천인합일(天人合一) 이룬 지상신선(地上神仙)으로 거듭 태어나도록 천도(天道)를 전해준 하늘의 뜻(天意)이 아니겠는가?
놋쇠와 대장간
방짜 징 방짜 놋그릇
놋쇠는 구리와 주석을 78% 대 22% 비율로 섞어, 숯불과 풀무(풍구)로 흙도가니에서 1600oC로 끓여내어 만든다. 품질 좋은 구리와 주석으로 만든 청동(靑銅)합금을 다시 불에 달구며 망치로 두들겨 만든 놋쇠를 방짜,방짜유기라 한다.
합금비율이 다르거나 불순물이 섞이면 망치로 두드리는 과정에서 깨져버린다. 많이 두드려야 강도가 높아지고, 합금이 제대로 돼야 닦을수록 빛을 발한다. 숯불에 15회 이상 담금질해 두드리면 놋쇠조직이 치밀해져 강도가 높아지고 광택이 나게 된다.
대장간, 김홍도 |
좋은 방짜쇠를 만들자면 고도로 숙련된 제조기술이 요구되며, 우두머리 원대장을 중심으로, 앞망치,곁망치,셋망치(1,2,3), 그리고 가질대장, 네핌대장, 갯대장, 바깥풍구, 안풍구 등, 11명 1조가 되어 치밀하게 협업을 해야만 한다.
방짜유기에는 잡쇠나 불순물이 들어있지 않아, 주로 식기류, 놋대야, 징,꽹가리 등을 만들었다. 방짜 놋쇠제품은 인체에 해롭지 않아 식기로 애용하였고, 소리가 맑고 고와 타악기로 활용하였다.
놋그릇은 벌레가 접근치 못해 식품이 잘 썩지 않고, 살균작용도 해서 인체에 해가 없으며, 자주 닦지 않아도 광택이 수백년을 간다.
이처럼, 방짜놋쇠 제조법은 현대과학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합금기술로, 세계에서도 유례없는 신기술이다. 방짜쇠,방짜기술이야말로 우리 선조가 5천년 훨씬 이전부터 이미 세계 최고의 청동기술을 창조하여 사용해왔다는 실증역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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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강단 일제식민사학자들은 별 근거도 없이, "우리민족의 청동기시대는 BC.3000년~BC.500년이고, 철기시대는 BC300년~AD원년까지 300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나(至那)측 사기(史記)나 한서(漢書)에는, "우리 배달민족이 놋쇠(구리+주석)를 만들어 사용한 청동기시대는 6000년도 훨씬 이전이고, 철기시대도 5000년 훨씬 이전에 해당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 이(夷) |
이통차작철(夷通借作 ) 철고문철자(古文鐵字) -한서(漢書),권28-
이(夷)에서 철( )자가 나왔고, (철)은 鐵(철)의 옛글자다.
결국, 夷(이), (철), 鐵(철)이 모두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철)자는 夷(이)에서 나온 옛 이(夷)자고, 동이(東夷)란 동(東)쪽에 살며 쇠, 철(鐵,)을 사용한 민족이라는 뜻이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철(쇠)은 원래부터 오직 우리 동이(東夷)민족 만이 제조해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이(東夷)의 이(夷)자는 철( )의 옛글자라는 것만 보아도,배달민족이 청동과 철을 처음 만들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또, 사기(史記,권1)에는 다음과 같은기록도 있다.
蚩尤受盧山之金 而作五兵 明非庶人.
치우가 노산(盧山)의 쇠(金)로 오병(五兵)을 만들었다. 분명 보통사람이 아니다.
有蚩尤 兄弟八十一人 竝獸身人語 銅頭鐵額 食沙石子 造立兵仗刀戟大弓.
치우는 형제가 81명인데 짐승 몸으로 사람 말을 한다. 구리머리에 쇠이마(銅頭鐵額,동두철액)를 했으며, 모래와 돌을 먹고 칼,창,큰활 등 무기를 만들었다.
이는, BC.2700년경에 배달국(九黎,구리) 14대 자오지(慈烏支)환웅(桓雄,檀雄,BC.2748~2598), 세칭 치우천자(蚩尤天子)가 투구와 갑옷(銅頭鐵額)을 만들어 착용했다는 기록으로, 우리민족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청동과 철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결국,우리 배달민족의 청동기,철기, 제작연대는 5~6천년 이전 배달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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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파형동검과 빗살무늬토기 문화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 김운회, 단조선,4000년전 |
비파형동검(左2),세형검(右4),단조선 |
고인돌 무덤에서 출토되는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은 단조선 영역 안에서만 한정적으로 나타난다.
신석기시대(8000년전), 청동기 유적지(단조선,4000년전), 김운회 |
청동기 사용지역은 단조선 영역에서 시작하여 북서쪽으로 길게 분포되어 있다.
고인돌 분포지역은 거의 대부분이 한반도와 단조선 영역에 속한다. 비파형동검 분포지역은 고인돌 분포지역과 일치한다. 고인돌무덤에서 출토되는 청동거울 연대와 이동경로는,문헌기록에 나타나는 단조선 이동시기 및 경로와 일치한다. 비파형동검,청동방울,잔무늬거울은 고인돌무덤 안에서 함께 출토되며, 이 3가지 천부인(天符印)은 바로 삼국사기 단조선의 실체다.
빗살무늬토기 문화권,8000년전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빗살무늬토기,서울 암사동↑ 8000년 전
3000~8000년전 신석기시대에 빗살무늬토기 사용지역은 지나(至那) 만리장성을 경계로, 그 위에서 북서쪽으로 길게 분포된다. 이로서,만주와 한반도에서 고대 배달문명이 일어나 서쪽으로 나아가 유럽전역에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땅에는 8천년 이전에 이미 빗살무늬토기가 있었고, 그 전에 토기 만드는 장작가마가 있었고, 그 전에 장작가마 만드는 황토아궁이 구들이 있었고, 그 전에 구들체계로 생활한 배달민족의 실상이 신석기시대 유물로 확인되었다. 이로서,온돌로부터 불을 당긴 배달문화가 주위로 전해져 인류문명으로 발전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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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인터넷 검색 수집 및 조합 편집.
[참조]☞http://cafe.daum.net/sowoozee3/3OjR/4
[참조]☞http://kr.blog.yahoo.com/shim4ro/2136
[참조]☞http://sparkbbs.dreamwiz.com/cgi-bin/rbbsview.cgi?section=KOSA-DAPSA&start=0&po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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