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주의(Realism) 화가들
1. 밀레의 종교적 사실주의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ois Millet, [만종]The Angelus,
프랑스의 바르비종garbizon 화파 화가인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cois Millet(1814~1875)는 1848년의 파리 혁명에 고무되어 시급한 사회문제에 눈을 돌렸다. 그는 초기의 초상화와 에로틱한 누드화를 버리고 시골 농부들의 삶에 애정적으로 접근했다. <씨 뿌리는 사람>(1850년)과 <이삭 줍는 여인들>(1857년)에서 그는 농부와 가난한사람들에게 경건하고 정감 어린 이미지를 부여했다.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에서는 거대한 체구의 한 농부가 새로 갈아엎은 밭에 열심히 씨를 뿌린다. 소박한 농부가 씨를 뿌리는 장면은 땅의 재생 능력과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한다. 농부를 사회의 불안정한 사회요소로 생각하는 정치적인 부유층들은 그의 급진성을 공격했고, 자유주의자들은 농부와 서민의 지위를 높이는 그의 작품을 찬양했다.
(그림 77-1)밀레의 [이삭줍는 여인들]Jean Fran?ois Millet,The Gleaners
넓은 밭에는 높은 밀단들이 보이고, 허리를 굽혀 추수한 밭에 떨어져 있는 이삭을 열심히 줍고 있는 여인들은 당당하고 경건한 인물로 그려져 있다. 서서 허리를 구부린 여인이 시어머니 나오미같고, 분홍색 수건을 머리에 쓰고 분홍 토시를 낀 가운데 있는 여인은 시어머니의 권고로 고향에 돌아간 룻의 동서 오르파Orpah같다. 청색 모자를 쓴 젊은 여자가 룻일 수 있다. 우리가 자라던 어린 시절, 일제하의 한국은 농촌사회였고, 경건한 기독교 가정뿐아니라 어느 소설가가 말했듯이 마을 이발소 등에서도 이 그림의 복사본을 볼 수 있었다. 식민지의 일본 관헌 당국은 조선의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농촌을 피폐하게 만든 죄악감에 이런 그림을 권장한 것 같다. 농촌을 떠난 요즘의 세대들은 일종의 향수로 이 그림을 좋아하는 지도 모른다.
2. 쿠르베의 사실주의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1819~1877)도 밀레와 같이 1848년 유럽의 혁명적 분위기가 고무되었던 화가였지만 그는 6월 혁명의 파리 시가전에는 직접 참가하지 않았다. 고향 오르낭Ornans에 있는 부모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은 참전하지 않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심시켰다. 그가 혁명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것은
첫째로 그가 소총이나 대포로 싸우는 것을 믿지 않으며 그것은 자기의 원칙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그가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는 변명했다. 그는 지난 10년 동안 지적인 싸움을 위해 노력했다고 하였으나 사실 그는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양초와 비누를 만드는 시골의 부유한 부모 덕택에 1840년 가을, 파리에 법학을 공부하러 올 수 있었으나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문인들, 화가들과 어울려 보헤미안 생활을 했다. 문인 친구 가운데는 그가 초상화를 그려준 보들레르도 있었다. 그는 1848년의 혁명전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혁명의 덕을 톡톡히 볼 수 있었다. 1847년까지도 그는 살롱전에서 번번이 입신하치 못했으나 혁명 후 1848년 민주화된 살롱전에는 누구나 출품할 수 있었고, 그 해에 쿠르베는 10점이나 출품했다. 이듬해 7월의 살롱전에서 그의 작품 <오르낭에서의 저녁식사 후에>는 관객의 시선을 끌었고, 정부가 구입할 정도로 심사위원들의 평이 좋았다. 심사위원회는 그에게 메달도 주었다.
(그림77-2)<돌깨는 사람들>
이 그림은 쿠르베가 메지에르Maisieres의 길가에서 일하는 노동현장의 두 일꾼을 발견하고 그들을 그의 화실에 초청하여 완성했다고 한다. 꾸르베는 '비참함이 이렇게 완벽하게 표현된 것은 드문 일이어서 이내 그림 하나가 나에게 떠올랐다'고 회상했다. 이 그림에서 쿠르베는 먹고살기 위해 어린 나이에 노동 현장에 뛰어든 소년의 삶은 결국 비참한 노인의 처지로 끝나고 만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화가는 당시의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폭로해 상류사회를 비난하고, 정치적 사회적 정의를 부르짖고 있다. 침울한 산을 배경으로 노인 앞의 자갈밭에 버려진 냄비는, 60년대 한국에서 고속도로를 닦으며 라면을 끓여 대충 점심을 때운 노동자들의 비참한 모습을 연상시킨다. 피에르 푸르동Pierre-Joseph Proudhon 같은 혁명가는 <돌 깨는 사람>이 자본주의와 잠재적 탐욕을 저주한 작품으로 받아들였다.
(그림77-3) A Burial at Ornans
또한 그의 인물들이 겹겹이 장례식장을 메우고 있다. 무릎을 꿇고 있는 무덤을 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신부나 관에 시선을 주지 않고 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에 초점이 없고, 그들의 멍한 표정은 무관심과 체념에 가깝다. 이는 장례식이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실생활임을 말해준다. 오르낭의 장례식은 죽은 자의 고별을 알리는 엄숙하고 뜻깊은 의식이 아니다.
<쿠르베씨, 안녕하세요>The Meeting (Bonjour, Monsieur Courbet) 1854
쿠르베의 [스튜디오, 나의 예술생애에 대한 7년간의 알레고리]
The Artist's Studio, Alternative title: A True Allegory Concerning Seven Years of My Artistic Life. 1855,
Oil on canvas, 141.34 x 235.43 inches / 359 x 598 cm
'그림 모음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국경 왕미방 趙國經 王美芳 - 美人圖 미인도 (0) | 2010.06.19 |
---|---|
박수진_만남_도자 (0) | 2010.06.13 |
Vincent Van Gogh 의 수채화 (0) | 2010.06.09 |
FELIX MAS PAINTINGS (0) | 2010.06.07 |
Alexander Devyatkin (0) | 2010.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