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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Realism) 화가들

모링가연구가 2010. 6. 9. 09:09

사실주의(Realism) 화가들



    1. 밀레의 종교적 사실주의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ois Millet, [만종]The Angelus,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발표하던 1848년에는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사회주의 계급의식과 노동자들의 권한과 착취에 대한 문제의식이 미술에 반영되어 많은 변화가 일어날다. 예술가들은 아카데미가 즐겨 다루던 역사나 신화를 버리고, 노동자와 가난한사람과착취당하는 서민을 그들의 주제로 선택했다.

    프랑스의 바르비종garbizon 화파 화가인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cois Millet(1814~1875)는 1848년의 파리 혁명에 고무되어 시급한 사회문제에 눈을 돌렸다. 그는 초기의 초상화와 에로틱한 누드화를 버리고 시골 농부들의 삶에 애정적으로 접근했다. <씨 뿌리는 사람>(1850년)과 <이삭 줍는 여인들>(1857년)에서 그는 농부와 가난한사람들에게 경건하고 정감 어린 이미지를 부여했다.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에서는 거대한 체구의 한 농부가 새로 갈아엎은 밭에 열심히 씨를 뿌린다. 소박한 농부가 씨를 뿌리는 장면은 땅의 재생 능력과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한다. 농부를 사회의 불안정한 사회요소로 생각하는 정치적인 부유층들은 그의 급진성을 공격했고, 자유주의자들은 농부와 서민의 지위를 높이는 그의 작품을 찬양했다.


    (그림 77-1)밀레의 [이삭줍는 여인들]Jean Fran?ois Millet,The Gleaners

    <이삭 줍는 여인들>(그림77-1)에서는 가난한 여인들의 모습이 경건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 그림은 성서에 나오는 다윗 왕의 증조모가 되고, 훗날 예수의 집안 할머니가 된 룻Ruth의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룻은 모압Moab 땅의 처녀로 그 나라에 이민 온 히브리 청년과 결혼했다. 남편이 죽자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Naomi를 따라 이스라엘 베들레헴에 왔고 여기에서도 시어머니를 잘 섬겼다. 룻은 너무나 가난하여 추수가 끝난 밭에 나가 떨어진 이삭을 주워 살아야 했다. 며느리를 기특하게 여긴 시어머니는 부유한 친척 보아즈Boaz의 밭에서 이삭을 줍도록 허락을 받아 내었고, 젊은 과부의 딱한 처지를 생각하여 충고도 해주었다. 시어머니가 시킨대로 어느 날밤 얌전한 룻은 들에서 자는 보아즈의 발 밑에서 잤다. 부자 친척은 여인의 고운 마음씨와 행동을 알고, 그녀를 책임지고 후에는 결혼까지 했다. 이 룻이 훗날 다윗과 예수라는 훌륭한 인물들을 낳은 가문의 조모이다.

    넓은 밭에는 높은 밀단들이 보이고, 허리를 굽혀 추수한 밭에 떨어져 있는 이삭을 열심히 줍고 있는 여인들은 당당하고 경건한 인물로 그려져 있다. 서서 허리를 구부린 여인이 시어머니 나오미같고, 분홍색 수건을 머리에 쓰고 분홍 토시를 낀 가운데 있는 여인은 시어머니의 권고로 고향에 돌아간 룻의 동서 오르파Orpah같다. 청색 모자를 쓴 젊은 여자가 룻일 수 있다. 우리가 자라던 어린 시절, 일제하의 한국은 농촌사회였고, 경건한 기독교 가정뿐아니라 어느 소설가가 말했듯이 마을 이발소 등에서도 이 그림의 복사본을 볼 수 있었다. 식민지의 일본 관헌 당국은 조선의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농촌을 피폐하게 만든 죄악감에 이런 그림을 권장한 것 같다. 농촌을 떠난 요즘의 세대들은 일종의 향수로 이 그림을 좋아하는 지도 모른다.

    2. 쿠르베의 사실주의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1819~1877)도 밀레와 같이 1848년 유럽의 혁명적 분위기가 고무되었던 화가였지만 그는 6월 혁명의 파리 시가전에는 직접 참가하지 않았다. 고향 오르낭Ornans에 있는 부모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은 참전하지 않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심시켰다. 그가 혁명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것은
    첫째로 그가 소총이나 대포로 싸우는 것을 믿지 않으며 그것은 자기의 원칙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그가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는 변명했다. 그는 지난 10년 동안 지적인 싸움을 위해 노력했다고 하였으나 사실 그는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양초와 비누를 만드는 시골의 부유한 부모 덕택에 1840년 가을, 파리에 법학을 공부하러 올 수 있었으나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문인들, 화가들과 어울려 보헤미안 생활을 했다. 문인 친구 가운데는 그가 초상화를 그려준 보들레르도 있었다. 그는 1848년의 혁명전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혁명의 덕을 톡톡히 볼 수 있었다. 1847년까지도 그는 살롱전에서 번번이 입신하치 못했으나 혁명 후 1848년 민주화된 살롱전에는 누구나 출품할 수 있었고, 그 해에 쿠르베는 10점이나 출품했다. 이듬해 7월의 살롱전에서 그의 작품 <오르낭에서의 저녁식사 후에>는 관객의 시선을 끌었고, 정부가 구입할 정도로 심사위원들의 평이 좋았다. 심사위원회는 그에게 메달도 주었다.


    (그림77-2)<돌깨는 사람들>

    그는 떠오르는 화가로서 고향 오르낭에 돌아가 1849년 9월부터 몇 개월간 파묻혀 열심히 그림에만 몰두했다. 그 결과 그의 사실주의의 3대작이라고 불리는 <돌 깨는 사람들>, <오르낭의 장례식>, <장에서 돌아오는 팔게이의 농부들>을 완성했다. <돌 깨는 사람들>(그림77-2)에서 화가는 한 노인과 소년이 한낮의 뙤약볕 아래 돌을 깨고 운반하는 노동의 현장을 그렸다. 노인은 밀짙모자를 쓰고 찢어진 조끼를 입고, 무릎을 기운 남루한 바지를 입고, 떨어진 양말 뒤꿈치를 드러낸 채 왼쪽 무릎은 꿇고 오른쪽 무릎은 세우고서 힘겨운 노동을 한다. 그를 거들고 있는 소년의 웃옷은 여기저기 찢어졌고, 바지에 멜빵 띠를 하나만 걸치고, 짐이 무거워 돌을 담은 바구니를 무릎으로 받치고 있다. 우리에게서 고개를 돌린 이들의 얼굴에서는 표정을 읽을 수 없다. 이 무명의 노동자들은 자기들의 근력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힘든 일에 종사하는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이다.노인은 일하기에 너무 늙었다는 것을 망치를 든 그의 거칠고 뼈만 남은 손에서 알 수 있다. 소년은 학교에 갈 어린 나이에 고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이 그림은 쿠르베가 메지에르Maisieres의 길가에서 일하는 노동현장의 두 일꾼을 발견하고 그들을 그의 화실에 초청하여 완성했다고 한다. 꾸르베는 '비참함이 이렇게 완벽하게 표현된 것은 드문 일이어서 이내 그림 하나가 나에게 떠올랐다'고 회상했다. 이 그림에서 쿠르베는 먹고살기 위해 어린 나이에 노동 현장에 뛰어든 소년의 삶은 결국 비참한 노인의 처지로 끝나고 만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화가는 당시의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폭로해 상류사회를 비난하고, 정치적 사회적 정의를 부르짖고 있다. 침울한 산을 배경으로 노인 앞의 자갈밭에 버려진 냄비는, 60년대 한국에서 고속도로를 닦으며 라면을 끓여 대충 점심을 때운 노동자들의 비참한 모습을 연상시킨다. 피에르 푸르동Pierre-Joseph Proudhon 같은 혁명가는 <돌 깨는 사람>이 자본주의와 잠재적 탐욕을 저주한 작품으로 받아들였다.


    (그림77-3) A Burial at Ornans

    시골 서민들의 생활상을 꾸밈없이 표현하는 쿠르베의 사실주의 기법을 1850년 살롱전에 출품하여 전시된 <오르낭의 장례식>(그링 77-3)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화가는 황량한 시골인 자신의 고향 오르낭의 들판에서 거행되는 삭막한 장례식 장면을 꾸밈없이 묘사했다. 왼쪽에서는 검정 옷에 검정 모자를 쓴 네 사람이 흰 띠로 관을 메고, 검정 십자가를 높이 들고, 교구장인 신부와 함께 입장한다. 신부는 성서를 읽으며 장례식을 집행하고 있고, 무덤을 파다가 나온 일꾼은 우리 앞쪽으로 판 직각의 무덤 앞에 엄숙히 무릎을 꿇고 떠나간 사랑에게 최후의 경의를 표한다. 그 뒤에는 붉은 가운을 걸친 두 명의 집사장이 서있다. 무덤 주위에는 가족들이 슬픔의 눈물을 참으며 둘러 서있고, 흰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가족들도 있다. 흰 개 옆에 있는 망토를 걸치고 짧은 가죽바지를 입고 파란 긴 양말을 신은 사람은 오르낭의 시장으로 알려져 있다. 시장의 뒤에 있는 젊은 소녀는 시장의 딸이고, 그의 어깨 너머에서 흰 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여인은 시장의 여동생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의 인물들이 겹겹이 장례식장을 메우고 있다. 무릎을 꿇고 있는 무덤을 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신부나 관에 시선을 주지 않고 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에 초점이 없고, 그들의 멍한 표정은 무관심과 체념에 가깝다. 이는 장례식이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실생활임을 말해준다. 오르낭의 장례식은 죽은 자의 고별을 알리는 엄숙하고 뜻깊은 의식이 아니다.



    <쿠르베씨, 안녕하세요>The Meeting (Bonjour, Monsieur Courbet) 1854

    이 작품은 1850년 살롱전에서 입상했지만 1555년 파리 국제전시에 출품했다가 거절당한다. 쿠르베는 <쿠르베씨, 안녕하시오>의 주인공인 그의 친구 알프레드 부뤼야스AIfred Bruyas의 개인 비용으로 전시 장소를 마련하게 된다. 이 때 그의 명작 <스튜디오, 나의 예술생애에 대한 7년간의 알레고리>라는 작품도 함께 전시되었다.


    쿠르베의 [스튜디오, 나의 예술생애에 대한 7년간의 알레고리]
    The Artist's Studio, Alternative title: A True Allegory Concerning Seven Years of My Artistic Life. 1855,
    Oil on canvas, 141.34 x 235.43 inches / 359 x 598 cm

    1871년 그가 지지했던 파리 코뮌이 실패하자 쿠르베는 체포되어 감금되었다. 그는 말년에 스위스로 쫓겨나 스위스의 산야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면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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