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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대 궁宮을 가다

모링가연구가 2009. 6. 26. 09:14

 

 

Life style|조선왕조 5대 궁宮을 가다

  경희궁 慶熙宮


살아 있는 슬픈 역사의 현장
서울의 5대 궁궐 중 경희궁만큼 잊힌 궁이 또 있을까. 사실 경희궁은 인조 이후 효종에서 철종까지 10여 명의 왕이 정사를 본, 조선 후기를 장식한 궁이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서쪽으로는 경희궁을 지어 임진왜란 등 수많은 사건에도 2백80여 년 동안 창덕궁과 더불어 그 웅장함을 지켜온 조선의 정신이었다. 조선시대 왕실은 민족의 정신적 중심이었고, 국민은 왕실 관련 건물들을 통해 왕실을 섬겨왔다. 따라서 일제가 조선을 삼키기 위해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왕실을 없애는 것. ‘모든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궁궐을 공원화한다’는 취지 아래 궁궐을 하나 둘씩 파괴해나갔다. 이에 따라 조선 후기 이궁(離宮)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경희궁은 경희공원으로 전락했다. 그래서 오늘날 경희궁은 조선 왕조의 위엄을 느낄 수 있는 궁궐의 유산이 아닌 공원으로 더욱 알려지게 된 것. 경희궁 터는 원래 민가가 있던 곳이나 ‘왕기가 서린다’ 하여 광해군 9년, 수백 호의 민가를 이주시키고 서궐(西闕)인 경희궁을 지었다. 일제의 만행으로 심하게 훼손되고, 유교 국가의 궁궐 대문이 사찰 정문으로, 정전인 ‘회상전(會祥殿)’은 1911년부터 10여 년 동안 학교 기숙사로 쓰이기도 했다. 전각과 문루가 99동에 이르던 경희궁이 방치된 채 뿔뿔이 흩어진 처량한 신세지만 1624년 창덕궁과 창경궁의 파괴로 인조가 10여 년간 이곳에 머물기도 했고, 경종이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식을 거행했을 뿐 아니라 숙종의 탄생을 목격했던, 엄연한 역사의 현장으로 존중받아 마땅한 곳이다.


위치 종로구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 뒤
입장시간 오전9시~오후6시(공휴일 오전 10시~오후6시)
입장료 무료
휴궁일 1월 1일, 매주 월요일
문의 02-724-0274~6

 
1, 2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철거되고 흩어진 경희궁은 우리 역사의 안타까운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궁궐이다. 원래는 전각과 문루가 99동에 이르는 거대한 궁궐이었으나 너무 많이 해체된 데다 복원 사업이 늦게 진행되면서 원형에 가까운 복원이 어려운 실정이다.
 
  경복궁 景福宮

군자 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
새로운 왕조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새 나라의 정통성을 세울 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정계의 고려풍 세력이 감히 넘볼 수 없고, 이제껏 고려의 백성이던 이들이 새로운 나라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지엄하고 강력한 무언가가 말이다. 그리하여 가장 먼저 지은 것이 조선의 첫 궁궐, 경복궁이다.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은 <시경>의 ‘군자만년 개이경복(君子萬年 介爾景福)’ 중 한 글귀에서 따온 것. 파란만장한 세월이었지만 한 왕조가 5백 년이나 지속할 수 있던 까닭을 경복궁의 이름에서 찾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그만큼 경복궁은 조선 왕조(朝鮮朝)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명실상부한 법궁(法宮)으로서 위엄이 강했다. 경복궁은 유교를 기반으로 한 위엄적인 규모나 절제 있는 배치로 궁에서의 생활 하나하나에도 엄격한 법도를 따라야 했다. 역대 왕 중에는 이궁인 창덕궁이나 창경궁에 머무르는 것을 좋아한 왕이 있을 정도니 그 엄격한 법도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겠다. 경복궁은 가장 규모가 크고 엄격한 유교 법도에 따라 지은 만큼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재건 작업이 늦게 진행되었고, 조선 5백 년 역사 중 3백 년의 세월 동안 정궁(正宮) 자리를 ‘창덕궁’에 내주어야 했던 비운의 궁이기도 하다. 그러나 경복궁은 조선 최초의 궁으로, 최대 규모의 궁이자 끊임없이 침략을 넘보는 외세에 맞서 싸워온 조선의 정신을 오롯이 담은 조선조의 당당한 제1궁임에 틀림없다. 한시바삐 경복궁의 완벽한 복원이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위치 종로구 세종로
입장시간 11~2월 오전9시~오후4시, 3월~10월 오전9시~오후5시
입장료 대인3천원(만7~18세 1천5백원)
휴궁일 매주 화요일
문의 02-3700-3900, www.royalpalace.go.kr
 
1 경복궁 사정전 내부. 2 우리 선조의 해학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해태 가족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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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정전 좌우에 위치한 동서쪽 행각 주춧돌은 둥근 것은 하늘, 네모진 것은 땅을 뜻한다. 신분이 높은 사람이 거처하는 전각이나 중요한 전각에는 둥근 기둥과 둥근 주춧돌을, 일반 전각에는 네모 기둥과 네모 주춧돌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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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동남쪽 행각 모서리 부근이다.
 
  창덕궁 昌德宮

자연과 어우러진 궁에서 한국의 정서를 느끼다
역대 임금들이 가장 좋아했던 궁, 자연과 어우러진 빼어난 후원이 있는 궁, 생생한 왕실 가족의 역사가 전해지는 궁이 바로 창덕궁이다. 창덕궁은 정궁인 경복궁의 이궁으로 태종 5년(1405년)에 지었으나 역사적 사건이나 지리적 요건으로 조선의 역대 왕들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남성적인 느낌이 강한 경복궁에 비해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지은 비정형적인 미와 원형이 현재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까닭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유일한 조선의 궁이기도 하다. 유네스코 보고서에 따르면 동아시아에서 이처럼 자연과 하나 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궁궐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라고 하니, 창덕궁에서는 역사적 가치를 따지기보다 조선의 선비가 된 듯 유유자적 풍월을 읊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특히 1976년 복원 사업을 시작한 후 무려 28년 동안 일반에 공개되지 않아 ‘비밀의 정원’이라 불린 창덕궁의 후원은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경치를 감상하기 좋도록 디자인한 부채꼴 모양의 정자 ‘관람정(觀纜亭)’과 ‘폄우사(貶愚 )’로 가는 길 잔디 위에 깔린 박석은 꼭 찾아서 볼 것. 엇갈리게 배치한 박석은 어린 왕손들이 팔자걸음을 연습하던 장소로, 창덕궁 관람의 숨은 재미를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임금이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지은 ‘낙선재(樂善齋)’는 창덕궁의 명소로 조선의 마지막 왕비 순정효황후 윤비가 왕조가 무너지고 순종이 승하한 뒤에도 당당히 이곳에 머물며 일제의 압박을 견딘 일 등 유명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많은 곳이다.
위치 종로구 와룡동
입장시간 10월1일~3월15일 오전9시15분~오후3시45분, 3월16일~9월30일 오전9시15분~오후5시15분
입장료 대인3천원(만7~18세 1천5백원)
휴궁일 매주 월요일
문의 02-762-9513, www.cdg.go.kr
*단 , 입장 시간은 언어권별(한국어·일본어·영어·중국어)로 정해져 있고, 안내원과 함께 관람해야 한다. 한국어 안내는 매시 15분과 45분이다.
 
1 희정당은 화재로 수난을 많이 당한 건물. 마차나 자동차가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입구를 돌출시킨 독특한 서양식 구조로, 봉건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개화하는 시기에 지었음을 알 수 있다.
2 창덕궁의 구조는 정형적인 일직선 축이 아닌 산세에 따른 독특한 구조로 건물이 배치돼 있다.
 
  창경궁 昌慶宮

지붕선이 아름다운, 왕실 가족을 위한 궁
“춘당의 봄빛이 예나 지금이나 같으니 태평성대라.” 그 유명한 <춘향전>의 이몽룡이 과거 시험을 치를 때 나온 시제인 ‘춘당춘색고금동(春塘春色古今同)’ 속 춘당은 바로 창경궁에 있는 춘당지(春塘池)를 가리키는 것이다. 효심 좋기로 소문난 성종이 돌아가신 역대 왕의 부인들, 즉 할머니와 어머니, 작은어머니의 거처가 걱정되어 별궁(別宮)인 창경궁을 지은 것이 그 시작. 원래는 왕실 가족을 위한 사적인 공간으로 사용되다 임진왜란 후 창덕궁이 정궁이 되면서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 공간을 보충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 까닭에 창경궁에는 여성적인 면면을 찾아볼 수 있는 공간이 많다. 그중 왕비가 머물렀던 ‘통명전(通明殿)’은 여인의 향기가 사방에 묻어나는 곳이다.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해하기 위해 요망한 물건을 묻어두었던 곳도 바로 통명전 아래다. 왕비의 처소인 통명전은 경복궁의 교태전, 창덕궁의 대조전과 같이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 지붕이다. 이는 지붕에 용마루가 있으면 그 용이 어린 용(탄생할 세자)의 기운을 눌러 좋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 궁궐의 많은 건물 중 왕비의 처소를 찾고 싶다면 지붕을 유심히 살펴보면 된다. 특히 창경궁은 겹겹이 보이는 지붕선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다. 홍화문(弘化門)을 지나 법전(法殿)인 명정전(明政殿)으로 가는 정해진 코스 대신, 홍화문을 지나 춘당지에서 태평성대(太平聖代)를 느끼고 양화당(養和堂)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택해보자. 언덕 내리막길에서 보이는 궁의 지붕들에서 창경궁만의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위치 종로구 와룡동
입장시간 11~2월 오전9시~오후4시30분, 3~10월 오전9시~오후5시 (3~10월 주말 오전 9시~오후6시)
입장료 대인 1천원(만7~18세 5백원)
휴궁일 매주 화요일
문의 02-762-4868, cgg.cha.go.kr
 
1 하늘에서 내려오는 악한 기운을 막기 위해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으로 불리는 잡상들을 지붕 위에 두었다. 궁전 곳곳에 귀신을 막기 위해 배치한 조각상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2, 3
통명전 서편에 자리한 연당 난간과 네모난 연당. 연당 가운데 연꽃 모양의 섬과 석분은 왕비의 공간이었음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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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구조의 궁궐 내부.
 
  경운궁慶運宮

전통 궁궐과 서양식 건물이 공존하는 곳
우리에게 ‘덕수궁(德壽宮)’으로 더욱 잘 알려진 이 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 왕실의 위엄을 깎아내리기 위해 ‘왕위에서 물러난 왕’을 의미하는 ‘덕수(德壽)’라는 이름을 고종황제에게 붙이고 고종황제가 기거하던 궁인 경운궁을 덕수궁으로 부르던 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져온 것. 일제의 수모에도 불구하고 고종황제는 힘을 키우기 위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서방 외교의 일환으로 궁 안에 서양식 건물을 지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정관헌(靜觀軒)이나 석조전(石造殿)은 이러한 민족의 애환과 고종황제의 애타는 외교적 몸짓을 읽을 수 있는 곳이다. 경운궁은 애초에 궁으로 지은 곳이 아니다.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 피난한 선조가 돌아왔을 때 모든 궁궐이 불에 타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다행히 월산대군의 집이 불타지 않은 채 남아 있어 그 사가를 빌려 궁으로 삼았고, 창덕궁이 재건된 후에는 경운궁이란 이름의 빈 궁궐로 2백 년의 세월이 흐른다. 그 후 일제의 압박을 피해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황제가 증축을 명해 비로소 임시 궁궐이 아닌 정궁으로 인정받게 된 것. 경운궁의 증축은 외침을 슬기롭게 극복한 선조의 뜻을 본받아 다시 한번 대한제국을 일으켜보려던 고종의 의지가 담겨 있다. 결국 고종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독살당하고, 주인을 잃은 경운궁은 일제에 의해 무차별 훼손되며 비운의 궁궐로 전락했다. 경운궁 내의 유일한 2층 건물인 ‘석어당(昔御堂)’에 단청을 쓰지 않은 것도 우여곡절이 많은 조선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위치 중구 정동
입장시간 오전9시~오후8시
입장료 대인 1천원(만7~18세 5백원)
휴궁일 매주 월요일
문의 02-771-9951, www.deoksugung.go.kr
* 덕수궁 미술관은 덕수궁 관람권을 구입한 후 미술관에서 별도의 관람권을 구입.
 
1 휴식·연회 공간으로 사용한 곳으로 동서양의 건축양식이 결합된 정관헌. 언뜻 보면 서양식 건물 같지만 자세히 보면 우리의 전통 문양이나 건축 양식을 찾아볼 수 있다.
2
경운궁의 정전인 중화전. 화재로 소실된 후 어려운 시대 상황과 궁핍한 황실 재정 등으로 중층이 아닌 단층으로 중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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