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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18일 목요일, 오후 17시 29분 55초 +0900 | ||
제목 |
[스크랩] ☆ CEO 박정희의 10가지 성공 조건 !! |
- 보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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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06-18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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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 18 Jun 2009 17:29:55 +0900 (KS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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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EO 박정희의 10가지 성공 조건 !!
글쓴이: Ochard 번호 : 172523조회수 : 62007.09.18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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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박정희의 10가지 성공조건.............. 『명령은 5%, 확인과 감독이 95%』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하라 ●조직운영을 탄력적으로 ●검증된 사람을 골라 오래 써라 ●자신감을 부하들에게 전염시켜라 ●철저히 확인하라 ●현장과 실무자를 중시하라 ●우선 순위를 정해 집중 투자하라 ●심사숙고 끝의 결정을 과감하게 집행 ●시간이 최고 자원 ●私心을 버려라 자기비하 時代 종식시키고 「한국경제주식회사」 도전 언제부터인가 「국가경영」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우리 곁에 다가 오기 시작했다. 국가는 爲政者(위정자)에 의해 「통치」되 는 것이 아니라, 「경영」되는 것이라는 개 념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일지 도 모른다. 「통치」(혹은 「행정」) 나 「 경영」 모두 「한정된 人的·物的 자원을 효과적으로 동원하여 이익을 생산해 내는 과정을 관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공통 되기 때문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기업」 의 「경영」은 「금전적」 이익을 목표로 하는 데 비해, 「국가」의 「경영」은 국가 의 안전보장·國富(국부)의 증대·국민의 행복처럼 보다 범위가 넓고 公的인 목표를 지향한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국가의 정치, 혹은 행정에 대해 「경영」이 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대통령이나 총리와 같은 국가 지도자들에 대해「CEO(Chief Executive Officer)」, 즉 「최고 경영자」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여기 한 사람의 CEO가 있다. 그가 CEO로 취 임했을 때 회사의 형편은 최악이었다. 회사 의 收入은 支出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회 사의 재정도 엉망이었다. 자체 수입만으로 는 회사 재정을 충당할 수 없어 회사 재정 의 43%를 남의 도움에 기대야 했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도움」이었다. 그 회사의 信用(신용)으로는 남으로부터 돈을 꿔 온다 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직원들의 소득은 다른 회사 직원들과 비교할 때 최하위권이었고, 그 수입으로는 끼니를 제대로 잇기도 어려웠다. 당연히 직원들의 사기도 말이 아니었다. 직원들은 「엽전이 별 수 있나」 「짚신 주제에 뭘 한다고…」라며 스스로를 비하했다. 그러나 그가 CEO를 그만 둘 무렵 그 회사의 모습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賣出은 445배 가 늘었다. 賣出규모면에서 보면 그의 회사 는 그가 취임할 당시 업계 순위 72위였던 것이 그가 CEO를 그만 둘 즈음에는 17위로 올라섰다. 회사는 아직 赤字(적자)에서 벗 어나지 못하고 있었지만, 머지 않아 黑字를 낼 수 있는 기반은 다져졌다. 직원들의 수 입은 20배 이상 늘었다. 회사의 재정은 튼 튼해졌고, 외부로부터 필요한 자금을 빌릴 때에도 별 어려움을 겪지 않을 만큼 信用 상태도 양호해졌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 은 직원들이 오랜 패배의식에서 벗어나 「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 CEO의 이름은 朴正熙(박정희)였고, 그가 이끌었던 회사의 이름은 「한국경제주식회 사」였다. 「CEO 朴正熙」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1.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하라 <이 세대에 이 나라 국민으로 태어나서 평 생에 소원이 있다면 우리들 세대에 우리의 조국을 近代化(근대화)해서 先進列强(선진 열강)과 같이 「잘 사는 나라」를 한번 만 들어 보자는 것이다. -1963년 8월3일 국방대학원 졸업식> <3800만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수출은 100억 달러 해보자, 소득도 1000달러로 올려보자 는 것이다. 이것을 달성하고 그 후 5년마다 국민총생산을 倍增(배증)해 가자. …뚜렷 한 목표를 설정하고 단결해서 성취해 나가 는 민족은 위대한 민족이다. 이것은 민족적 인 지상과제이다. -1972년 12월28일 수출진흥확대회의 지시> 朴正熙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제시한 「비전 」은 「조국근대화」와 「우리도 한번 남들 처럼 잘 살아 보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朴正熙 대통령 한 사람만의 소망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이들의 소망이기도 했다. 그러나 「조국근대화」라든가,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자」는 것은 자칫 구호에 그 치기 쉽다. 朴正熙 대통령은 그런 위험을 막기 위해 「구체적」인 목표들을 제시하곤 했다. 그러한 목표들은 경제개발5개년계획 상의 예상 경제성장률이나 1인당 국민소득 , 혹은 수출목표의 형태로 나타나곤 했다. 일례로 1964년의 수출 목표는 사상 처음으 로 1억 달러를 넘어 선 1억2000만 달러였다 . 그 후 1970년까지 10억 달러 수출 목표가 , 1970년代에 들어와서는 1980년代 초까지 100억 달러 수출 목표가 제시되었다. 朴正熙 대통령은 매달 청와대에서 관계 부처 공 무원·수출업자 등이 참석하는 「수출진흥 확대회의」를 개최하는 등 목표 달성을 위 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계획한 목표가 달성되면, 그 과정에서 얻어진 자신 감을 바탕으로 다음 목표를 제시하고, 다시 목표 달성을 독려했다. 미국 GE社 회장 잭 웰치는 기업 성과의 척 도로 「시장 점유율」을 매우 중시한다고 한다. 시장점유율이 기업성과를 재는 절대 적인 지표는 아니라는 인식이 팽배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잭 웰치가 시장점유율을 중시하는 것은 「시장 점유율」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지표이며, 사업의 승 패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朴正熙 대통령은 「조국 근대화 」라는 거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한편, 「조 국 근대화」가 진척되어 가는 정도를 보여 주는 지표로 1인당 GNP나, 수출 목표액을 제시했던 것이다. 경영컨설턴트 尹恩基(5 0·BIS컨설팅그룹 회장)박사는 朴正熙 대통 령을 「목표관리의 鬼才(귀재)」로 평가했다. 2. 조직운영은 탄력적으로 朴正熙 대통령은 「조국 근대화」라는 비전 을 달성하기 위한 정책들을 추진하기 위한 도구로 많은 기구들을 만들었다. 경제개발 을 위해 기획기능과 예산기능을 함께 담당 하는 경제기획원을 만들고, 경제기획원 장 관으로 하여금 부총리를 겸임하게 한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긴요한 특정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필 요하다고 생각할 때에는 대통령 직속으로 자리를 마련했다. 예컨대 外資도입 부실기 업들을 정리할 필요가 생기면 외채관리수석 비서관(張德鎭·1969.11∼1970.12)을 두었 고, 관광산업진흥을 위해서 경제 제3수석비 서관(양윤세·1972∼1974.2)을 두기도 했다 .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건설을 위해서는 경제 제2수석비서관(吳源哲·1971.11∼197 9.12)을 두었다. 그러나 朴正熙 대통령은 이러한 기구들이 영속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朴正熙대통령은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설치된 이들 기구들이 그 기능을 다했을 때에는 주 저 않고 그 자리를 폐지하곤 했다. 청와대 기구를 태스크 포스(Task Force·특수한 임무 수행을 위해 만드는 임시행정조직)式 으로 운영한 것이다 . 이렇게 함으로써 朴正熙 대통령은 단시간 내에 조직이 그 설치 목적을 수행해 내도록 하는 한편, 기능을 다한 쓸데없는 조직이 세금만 축내며 방치되는 것을 막았다. 아 울러 朴正熙 대통령은 필요할 때에는 관료 제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해당 부서의 局· 課長을 불러 懸案(현안)에 대해 직접 물어 보곤 했다. 軍출신인 朴正熙 대통령이 그처럼 융통성 있게 조직을 운영할 수 있었던 바탕은 무엇 일까? 金正濂 前 비서실장은 『朴正熙 대통 령이 歷史書를 많이 읽으면서 깊이 있게 생 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키우게 되었을 것 』이라고 말했다. 柳陽洙(유양수·74·예비역 육군 소장) 前 동력자원부 장관은 『朴대통령이 풍부한 인 생경험을 쌓은 것이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 지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 柳 前 장관의 말이다. 『朴대통령은 교사 생활을 하면서 민간인으 로서의 경험을 쌓았고, 滿軍복무 등을 통해 대륙의 호방한 기질을 은연중 몸에 익혔을 것입니다. 그리고 해방에서 건국에 이르는 3년 간 朴憲永(박헌영)의 南勞黨(남로당) , 呂運亨(여운형)의 中道左派, 親美的인 韓民黨 등 다양한 정치 세력이 공존할 수 있 었던 환경 속에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라는 것을 체득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다양한 경험들이 朴대통 령이 군인답지 않은 유연한 思考를 가지고 , 융통성 있는 조직운영을 할 수 있는 바탕 이 되었을 것입니다』 3. 검증된 사람을 골라 오래 써라 <貫祿(관록)보다는 의욕과 능력을, 經歷(경 력)보다는 창의와 실천력을 더욱 존중하는 행정의 시대가 왔다-1966년3월30일 전국 지방장관회의> 朴正熙 대통령에 대한 인물평 가운데 『淸濁(청탁)을 두루 마실 수 있는 사람』이라 는 것이 있다. 朴正熙 대통령의 이런 면모 는 人事(인사)에 있어서도 잘 나타난다. 朴正熙 대통령 시절 활동한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는 金正濂(김정렴) 前 대통령 비서 실장처럼 모범생型의 인물이 있는가 하면, 金炯旭(김형욱) 前중앙정보부장처럼 거친 인물, 李厚洛(이후락) 前중앙정보부장 같 은 謀士型(모사형)의 인물도 있었다. 朴正熙 대통령은 인사를 하는 데 있어 사람의 淸濁을 보기보다는 그가 「그 자리에 맞는 인물인가」를 먼저 따졌던 것이다. 때로는 濁한 인물을 쓰면서도 朴正熙 대통 령이 거기에 오염되지 않았던 이유는 어디 있을까? 그것은 朴正熙 대통령이 淸濁을 다 소화해낼 수 있는 주체성을 가진 사람이 었기 때문일 것이다. 적재적소의 인물을 쓰기 위해 우선 朴正熙 대통령은 地緣(지연), 學緣(학연)을 넘어 널리 인재를 구했다. 申鉉碻(신현확)·太完善(태완선)·金永善(김영선) 같은 자유당 ·민주당 시절의 각료나, 李翰林(이한림)처 럼 5·16혁명에 비판적이었던 인물도 기용 됐다. 金正濂 前 대통령 비서실장은 자신의 발탁 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충남에서 강경商高 나오 고, 일본에서 오이타 상업학교를 나온 저는 5·16 주체들과는 아무런 學緣도, 地緣도 없습니다. 다만 제2차 통화개혁 당시 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통화개혁에 대해 보고하면서 제 소신을 논리적으로 당 당하게 피력한 것이 발탁의 계기가 되었다 고 생각합니다』 李明博(이명박·60) 前현대건설회장은 『朴正熙 대통령 시절에는 나라 전체로 봐서 인 재는 그리 많지 않았어도 사방에서 인재를 발굴해서 썼는데, 金泳三·金大中 대통령 은 자기 주변에서만 인재를 찾다 보니 있는 인재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듯한 느낌 이 든다』고 했다. 朴正熙 대통령은 사람을 쓰는 데 있어 철저 히 「검증된 사람」만을 기용했다. 金正濂 前 대통령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초도 순 시나 수출진흥확대회의 같은 각종 회의 등 은 관료들의 능력을 검증하는 場으로 할용 되곤 했다』고 말했다. 金正濂 前실장에 의하면 朴正熙 대통령은 장관에게 차관급 이하의 인사권을 일임했다 고 한다. 이는 해당 장관을 신임한다는 뜻 을 보이는 것이자, 장관이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기도 했다. 朴正熙 대통령 시절에는 문교부·통일원 등 일부 부처를 제외하면 대학교수를 바로 각 료로 기용하는 일이 없었다. 그 대신 朴正熙 대통령은 대학교수들을 대통령특별보좌 관이나 경제과학심의회 위원 등으로 활용하 면서, 여기서 능력이 검증되면 그때 비로소 각료로 발탁했다. 서강大 교수 출신으로 재무부·경제기획원 장관을 역임한 南悳祐 (남덕우·77) 前 국무총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朴正熙 대통령은 일단 능력이 검증되어 한 번 기용한 인물이면 오랫 동안 일을 맡겼 다. 崔亨燮(최형섭) 前 과학기술처장관은 7년6개월, 金正濂 前 대통령비서실장은 9년 2개월, 吳源哲 前 경제제2수석비서관은 8년 1개월 동안 자리를 지켰다. 朴基錫(박기석·73) 前건설부 장관은 『사 람에게 열 가지 일을 맡기면 그 중 하나 둘 은 잘못하는 일도 나올 수가 있다. 잘한 것 은 제쳐 두고 한 두 가지 잘못된 일을 가지 고 사람을 갈기 시작하면 배겨날 사람이 누 가 있겠느냐』면서 『朴대통령은 사람을 한 번 신임하면 오랫동안 썼고, 그렇게 신임을 받은 사람은 보람을 느끼며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곤 했다』고 회상했다. 金正濂 前실장도 『朴대통령 시절 그 밑에 서 일했던 사람들이 물불 가리지 않고 일했 던 것은 자신이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으 며, 자신이 만든 정책이 대통령을 통해 실 행에 옮겨져 나라에 보탬이 되고 있다는 보 람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朴正熙 대통령은 물러나는 사람에게도 충분 한 예우를 갖추곤 했다. 각료나 軍고위 장 성들은 물론 전용 헬기 조종사가 퇴임할 때 에도 朴대통령은 친서를 보내 그간의 공적 을 치하하고, 장래의 행운을 기원했다. 朴基錫 前 건설부장관은 『朴대통령이 청렴강 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위에 사람이 모 여든 것은 朴대통령이 「人情」을 잃지 않 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4. 자신감을 부하들에게 전염시켜라 <우리가 체험으로 배운 유일한 교훈이 있다 면 그것은 한 마디로 「하면 된다」 「우리 도 할 수 있는 실력을 쌓았다」는 우리 자 신에 대한 자신감이라 하겠다-1969년 2월 26일 서울대학교 졸업식 致辭> 1961년 5월16일 새벽, 해병제1여단을 주축 막?한 혁명군은 한강 다리에서 헌병대의 저지를 받았다. 月刊朝鮮 연재 「내 무덤 에 침을 뱉어라 (278회)」를 보면 이 때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헌병대의 총탄이 쏟아지고, 해병들이 엎드 려 응사를 하는 와중에서 朴正熙 少將은 상 체도 숙이지 않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카빈 소총을 든 李錫濟(이석제) 중령이 따랐다 . 두 사람이 꼿꼿하게 걸어가는데 총알이 옆으로 쌩쌩거리며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金潤根(김윤근) 준장이 朴正熙 少將에게 뛰 어왔다. 『또 다른 저지선이 있습니다. 앞으로 저지 선이 몇 개나 더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날 이 새기 전에 목표 점령은 어려울 것 같습 니다』 『그대로 밀어버리시오』 朴正熙 少將의 침착하고 단호한 태도에 金潤根 准將도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朴正熙 少將은 해병대가 작전하는 것을 바 라보면서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이 순간 朴正熙 少將의 결연한 태도가 흔들 리는 장교들의 마음을 다잡아 주었다는 증 언은 많다. 예기치 않은 저항을 받은 혁명 군 장교들 모두가 朴正熙를 주시하고 있었 고 朴正熙는 그들에게 용기와 확신을 심어 주는 행동을 보였다> 이러한 장면은 이후 朴正熙 대통령 18년 동 안 여러 번 되풀이 된다. 1억 달러-10억 달 러-100억 달러 수출 목표가 제시되었을 때 , 경부고속도로나 포항제철 건설을 추진할 때, 방위산업 육성을 추진할 때, 朴正熙 대통령은 번번이 격렬한 반대나 회의적인 반응에 부딪히곤 했다. 그러나 朴正熙 대통 령은 자신감을 가지고 당초의 목표를 밀어 붙였고, 그의 자신감은 각료나 청와대 비서 진들, 그리고 현장의 실무담당자들에게 「 전염」되어 결국 목표를 성취하고야 말았다. 5. 철저히 확인하라 <나는 일하는 대통령이 될 것을 국민 앞에 약속한다. 도시 건설도 내가 직접 살필 것 이며, 농촌의 耕地(경지)정리도 내가 직접 나가서 할 것이다. 山間의 造林에도 내가 앞장설 것이며, 全天候(전천후) 농토 조성 에도 내 힘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어업전 진기지나 공장 건설에도 더욱 부지런히 찾 아다녀 그 진도를 격려할 것이며, 기공·준 공식에도 쉬지 않고 참석할 것이다. 그리하 여 「민족자립」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착수하여 자립의 길을 단축 시켜 나갈 것이다. -1967년 4월15일 제6대 대통령 선거 방송연설> 朴正熙 대통령은 「현장을 누비는 대통령이 되겠다」던 위의 약속을 집권 18년 동안 충실하게 지켰다. 경부고속도로, 창원공단 등을 건설할 때 그는 반드시 현장을 둘러 본 뒤에 계획을 확정지었다. 이 때문에 「 확인 행정」은 朴正熙 대통령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되어 버렸다. 朴正熙 대통령은 軍시절부터 「확인 행정」 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오정석 예비역 육군 준장에 의하면 3군단 포병단장 시절 朴正熙 대령은 『군단에서 지시가 내려가면 말단 부대의 소대장에게 전달된다. 그 후 사병들이 일을 하게 된다. 일이 어떻게 되 어 가는지 물어보면 소대장은 현장에 가 보 지도 않고 전화로 중대장에게 「예, 명령 하달했습니다. 잘 되어 갑니다」라고 보고 한다. 중대장은 다시 대대장에게, 대대장은 연대장에게, 연대장은 사단장에게, 사단장 은 군단장에게 이런 식으로 보고한다. 이래 가지고는 일이 안 된다. 귀와 입으로 일하 면 아무 것도 되는 것이 없다. 다리와 눈으 로 일하라』고 강조하면서 『명령은 5%이고 확인과 감독이 95%』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李明博 前 회장은 『경부고속도로를 만드는 데 있어서 朴正熙 대통령이 고속도로건설 을 제창하고 나섰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 지 않다』면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 통령이 고속도로 건설 과정을 철저하게 점 검한 결과, 工期(공기)와 비용을 거의 근접 하게 맞추었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때 사업비는 당초 책 정된 330억원에서 430억원으로 늘었지만, 이는 물가인상 등을 감안하면 당초 계획에 서 크게 벗어난 것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 工期도 당초 계획에서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초 5조8000억원을 들여 1998년 1 2월까지 완공하기로 되어 있던 경부고속전 철은 계획이 수정을 거듭하던 끝에 사업비 는 17조6294억원으로 늘어나고, 개통시기는 2005년 11월로 늦춰지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 만일 민간기업체에서 추진하는 주요 사업 의 비용과 공기가 이처럼 어긋나 버렸다면 , 그 회사는 破産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 런 차이가 생긴 것은 國力을 기울이는 大공 사에 국가의 최고경영자인 대통령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철저히 챙겼느냐 여부에 의 한 것입니다』 대통령이 앞장서서 현장을 점검하거나 사업 의 진척상황을 확인하는 것은 관련 분야 종 사자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1972년 7월 국방과학연구소(ADD)에서 분대 용 무선전화기 KPRC-6를 개발했을 때의 일 이다. 청와대의 吳源哲 경제제2수석비서관 에게 試製品(시제품)을 보낸 徐廷旭(서정욱 ·67·現과학기술부 장관) ADD통신전자실장 은 吳수석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사무실에 서 대기하고 있었다. 갑자기 무전기에서 『 여기는 청와대, 徐박사 대답해라, 오버』라 는 소리가 나왔다. 徐실장은 처음에는 상대 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徐실장 나왔음. 응 답하라, 오버!』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徐박사! 나 대통령이야. 소리가 깨끗하게 들리는구만. 그간 수고 많이 했어. 오버!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제서야 대통령 과 직접 통화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徐실 장은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徐실장은 이 때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격적인 순 간이었다고 회상한다. 6. 현장과 실무자를 중시하라 朴正熙 대통령의 확인행정의 정신은 자연스 럽게 현장과 실무자를 중시하는 것으로 이 어졌다. 1975년 4월17일 朴正熙 대통령은 迎日(영일 ) 砂防(사방)사업 현장을 시찰했다. 헬기가 뜨지 못할 정도로 비바람이 거세게 불어 朴正熙 대통령 일행은 지프차를 타고 路幅 (노폭) 3m밖에 안 되는 非포장 險路(험로) 를 달려 현장까지 가야했다. 현장으로 가는 도중 중간 지점쯤 이르렀을 때 朴대통령은 그곳에서 보고를 받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朴商鉉(박상 현) 慶北道 산림국장은 보다 상세한 보고와 현장 종사자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대통령 에게 보여 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현장까지 갈 것을 청했다. 朴대통령도 朴국장의 뜻 을 흔쾌히 받아 들였다. 브리핑 차트板을 두 사람이 옆에서 잡고 있 어야 했고, 비바람에 브리핑 차트 종이가 찢겨 나가, 口頭(구두)로 보고해야 했지만 , 그런 惡天候(악천후) 속에서 대통령이 현 장을 찾아 주었다는 생각에 朴국장과 현장 종사자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柳陽洙(유양수) 前 동력자원부 장관은 『朴正熙 대통령은 최고회의 시절에도 어떤 결 정을 내릴 때는 실무자를 옆에 불러다 놓고 사실관계를 확인해 가면서 결정을 내렸다 . 나에게 지시를 내릴 때도 「이 문제는 아 무개 국장(과장)이 잘 알고 있으니, 그의 의견을 꼭 들어 보도록 하라」는 얘기를 덧 붙이곤 했다』고 회고했다. 朴正熙 대통령은 현장 시찰을 하면서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업의 진척 상황을 보고 받는 데 그치지 않았다. 현장의 목소 리를 듣고 즉석에서 현장의 고충을 해결해 주기도 했던 것이다. 1961년 8월5일, 불시에 부산세관을 시찰한 朴正熙 최고회의 의장은 崔炳革(최병혁) 세관장에게 수출품 검사 등 세관 업무에 대 해 물었다.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세관 업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崔세관 장은 급히 세관 업무에 정통한 것으로 알 려져 있던 宋炳循(송병순·前은행감독원장 ) 주사를 찾았다. 宋주사가 수출품 검사에 대해 『工産品의 경우 감정 장비만 도입했을 뿐, 운영 인력 이 없어 開店休業 상태』라고 보고했다. 보 고를 들은 뒤 분석실에 들려 감정 장비에 대해 설명을 들은 朴의장은 그 자리에서 감 정직 공무원의 충당을 지시했다. 이 지시에 따라 35명의 理工系 대학 졸업생들이 감정 직 공무원으로 채용되고, 세관의 수출품 검 사·분석 업무는 서서히 궤도에 오르기 시 작했다. 브리티시 항공 회장 콜린 마샬은 『조직의 계층 구조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항상 직원들이 있는 곳에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곧 혼자 고립되고 말 것이다』라고 말했다. 朴正熙 대통령이야 말로 「직원들이 있는 곳에 가까이 다가가 는」 CEO였다. 朴正熙 대통령이 현장을 누비는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당시 그의 나이가 40대 중반∼50대 후반으로 한참 年富力强 (연부역강)할 때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 만 무엇보다도 그를 현장으로 이끈 것은 자 신이 제시한 비전에 대한 투철한 책임감이 었다. 7. 우선 순위를 정해 집중 투자하라 <「새마을 운동」이란 한 마디로 앞으로 정 부가 농어촌에 투자하는 데 있어 주민들의 自助정신, 협동심, 단결심, 근로정신이 왕 성한 지역에 우선적으로 투자해서 이런 부 락부터 빨리 일으켜 점차 다른 지역에도 확 대토록 하자는 말하자면 경제개발과 정신啓發(계발)의 竝行(병행)운동으로서 국가발전 의 기본개념인 것이다. -1971년 9월17일 전 국 市長·郡守 비교행정회의 諭示> 경제건설 과정에서 朴正熙 대통령이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나 정책 수단들은 한정되어 있었다. 모든 부분에 동시에 투자하는 것 은 불가능했다. 이때 자원을 배분하는 기준 은 1차적인 기준은 경제성·효율성이었다. 吳源哲 前 경제제2수석비서관은 『우리나라 는 자본과 자원이 빈약한 개방경제체제이다 . 국가나 공장이나 이윤이 나야 한다. 손해 보는 일은 할 수 없다. 국가에 이익이 없다 면 그 공업은 육성할 필요가 없다』면서 『 그 시기에 가장 중요하고 파급효과가 큰 산 업분야에 우선적으로 집중 투자했다』고 강 조했다. 朴正熙 대통령이 새마을 운동을 추진하면서 自助정신이 왕성한 마을부터 우선적으로 투자한 것도 투자의 효율성을 생각했기 때 문이었다. 朴正熙 대통령은 衡平性(형평성 )의 논리에 굴복해 얼마 안 되는 예산이나 자원을 「나눠먹기」式으로 배분하는 것을 거부했다. 8. 심사숙고 끝의 결정을 과감하게 집행 金正濂 前비서실장은 『朴正熙 대통령은 회의 때 자신이 먼저 지침을 이야기하지 않았 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먼저 자신이 생각 하는 바를 말하면 아랫 사람들이 거기에 구 속되기 때문이었다. 대신 朴正熙 대통령은 회의 참석자들이 말하는 것을 받아 적고, 토론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것을 지켜 보면 서 자신이 모르는 것을 배우는 기회로 활용 했다고 한다. 金 前실장은 朴正熙 대통령이 그처럼 겸허 하게 배우는 자세를 보일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朴正熙 대통령은 軍政 초기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재건국민운동·농어촌 高利債(고 리채) 정리·통화 개혁 등이 실패한 후, 국 정운영은 의욕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는 것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軍政 초기의 실수들로부터 이러한 사실들을 「배운」 이후 朴正熙 대통령은 어떤 아이디어가 있 다고 해서 그것을 덥썩 덥썩 받아들이지 않 았습니다. 말을 앞세우지도 않았습니다. 대 신 실무자·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으며 심사 숙고해서 정책을 결정하되 일단 정책이 결 정된 후에는 강력하게 밀어 붙였습니다』朴正熙 대통령이 懸案(현안)에 관해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局·課長들을 직접 불러 들 여 질문을 하거나, 대통령 특별보좌관제, 평가교수단제도 등을 두어 활용한 것은 대 통령이 되어서까지 배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던 그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9. 시간이 가장 소중한 자원이다. <세계의 경쟁 속에서 우리는 남이 쉴 때도 일해야 되겠고, 남이 걸을 때에도 달려야 한다. -1969년 11월25일 1970년도 예산案 제출에 즈음한 施政연설> 刀帥?대통령 시절의 경제성장은 흔히 「 압축 성장」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남들이 100년, 200년에 걸쳐 이룩한 근대화를 불 과 20년 만에 이루려다 보니 「빨리 빨리」 라는 말이 그 시대를 대표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980년代 후반 이후 「빨리 빨리」는 경제성장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 점들, 즉 韓國病(한국병)의 원인으로 지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情報化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빨리 빨리」의 가치는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제프리 존스 주한 美 상공회의소장은 『온 갖 韓國病의 원천으로 지탄받는 이른바 「 빨리 빨리」가 한국의 정보화를 앞당기고 있다. 모든 정보가 빛의 속도로 날아다니는 인터넷 세상에서는 5분만 앞서가도 50년을 먼저 갈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 경영 컨설턴트 尹恩基박사도 『朴正熙 대 통령의 경영 리더십 가운데 21세기 경제환 경 속에서 계속 각광받을 것이 있다면 그것 은 「빨리 빨리」정신일 것』이라고 단언한다. 10. 私心을 버려라. < 토지가 국민이라면, 지도자란 비료에 지 나지 않는다. 여기서 種子(종자)는 민족의 이상이 될 것이다. -朴正熙 지음 「민족의 底力」에서> <나는 물론 인간인 이상 나라를 다스리는 데 시행착오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當代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일을 하지 않았 고, 후세 史家 들이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를 항상 염두에 두고 일해 왔다. 그리고 「 어떻게 하면 우리도 다른 나라 부럽지 않게 떳떳이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 리에서 떠난 일이 없다. -1977년 봄 기자들 과의 환담에서> 朴正熙 대통령이 구멍이 뚫린 런닝셔츠를 입고 있었다든가, 허리띠 구멍에 연필이 들 어갈 정도로 낡은 허리띠를 사용했다든지, 한 여름에도 에어컨을 틀지 않았다는 이야 기는 유명하다. 姜勝一(강승일·61) 대한商議 상무는 『朴正熙 대통령과 오늘날 우리나라의 CEO들 사 이에 가장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朴正熙 대통령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챙기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라고 말했다. 『朴正熙 대통령은 그 청렴함 때문에 5·1 6 군사혁명의 지도자로 옹립될 수 있었다』 (朴基錫 前건설부 장관). 대통령이 된 후에도 朴正熙 대통령은 자기 자신을 위한 일체의 이익이나 명예를 추구 하지 않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朴正熙 대통령을 모시고 일했던 사람들이 『훌륭한 대통령을 만나 원없이 일할 수 있 었던 것은 사내로 태어나 가장 큰 보람이었 다』 (金正濂 前대통령 비서실장)고 말할 정도로 부하들의 헌신을 이끌어내는 動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朴正熙 대통령은 1966년 11월30일 「수출의 날」 致辭에서 『수출은 원대한 眼目을 가 지고 착실히 계획하고, 줄기차게 실천해야 한다. 目前의 조그만 이익보다는 내일에 얻을 수 있는 큰 이익을 생각하고, 나 한 사람이나 우리 회사의 이익보다는 국가와 민족 전체의 이익을 앞세울 줄 아는 참다운 기업가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 그러나 이러한 주문이 일방적인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바로 朴正熙 대통령 자신이 그런 마음가짐으로 18년 동안 「한 국경제주식회사」를 이끈 「참된 CEO」였기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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