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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향 안동

모링가연구가 2009. 5. 22. 19:59

예향 안동


1.자연환경개관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을 따라 오르다가 보면 서울을 닮은 한 도시가 나온다. 주변에 낮은 산들이 흩어져 있으며 낙동강이 시가 지 남부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다. 낙동강은 동부에서 반변천을 합하고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송야 천과 합류한다.
 
강 언저리에는 평야가 이루어져 경작지와 주거지로 쓰여진다. 태백산맥이 굽이쳐 흘러오다가 소백산맥으로 뻗 어 영남산이 남북으로 뻗어 동북쪽의 두 개의 산과 어울려 산간 분지를 형성하여 자리잡은 곳이 안동이다.
 
경상북도 중앙에 위치 한 안동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토지가 비옥하여 지리적으로 부락이 형성될 알맞은 지리적 위치를 갖춘 곳이다. 신석 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기도 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안동의 기후는 내륙에 자리한 분지이므로 한서의 차가 크게 나타난다. 연평균 기온은 12.5도이며 연간 강수량은 924밀리미터 로 작은 편이다.
 
중앙선 철도가 안동시의 중앙부를 남북 방향으로 뻗어 나가면서 영주에서 의성으로 이어져 있고, 멀리 충청북도의 당진과 도내 의 동편 영덕을 잇는 국도가 안동시를 중심으로 엇갈리며 방사상으로 퍼지는 지방도가 뻗어 있기도 하다.
 
중앙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더욱 전통유교문화와 관광.레져의 중심이 될 안동은 너른 땅에 불룩 불룩 솟은 골짜기마다 역사와 전통을 간직하며 빠르게 변해지는 시대에 다가오는 21세기 경북 북부 내륙에 위치하여 행정, 교육, 문화 중심지로 안동을 기점 으로 한 북부권 연계 발전 권역을 형성하고 있어 지금보다 미래를 잘 전망할 수 있는 고장이다.
 
 
2.역사 연혁
 
안동은 삼한 시대에는 진한에 속했으며, 삼국사에 의하면 B. C 57년 염상도사(念尙道士)가 길지를 찾아 이곳에 와 처음으로 창 녕국이라는 부족국가를 세웠다고 한다.
 
신라 때는 고타야군으로 되었다가 고구려에 인접한 관계로 한때는 고구려에 속하여 굴화현(屈火縣)으로 불리었으며, 진흥왕 때 부터는 계속 신라에 속하게 되었다. 경덕왕(757년)때 군현제도의 개혁으로 고창군으로 개칭되었다가 그후 일계군(一界郡), 지평 군(地平郡), 화산군(花山郡), 고령군(古寧郡), 고장군(古藏郡), 석릉군(石陵郡) 등으로 명칭이 변경되기도 했다.
 
고려 초 태조가 후백제의 견훤이 병산(甁山)에서 싸울 때 고을인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길(張吉)이 고을민을 이끌고 태조를 도와 그 공이 컸으므로 부(府)로 승격하고 안동으로 고쳤다. 이때가 태조 13년 930년이다. 그후 영가군(永嘉郡)으로 고 쳤다가, 성종 14년 서기 995년에 길주지사(길주刺事), 현종 3년 (1012)에 안무사(安無使), 9년에 지길주사(知吉州事)로 하였다가 21년에 다시 안동부(安東府)로 하였다.
 
명종 27년(1197) 남적(南賊) 김삼(金三), 효심(孝心) 등이 주군(州郡)을 겁탈 노략하니 차사(差使)를 보내어 평정하였는데 부( 附)가 공이 있다 하여 도호부로 승격하고, 신종 7년(1204년) 동경(東京; 경주)의 야별초(夜別抄), 패좌(悖佐) 등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자 이번에도 이를 진압하는데 공이 있었으므로 대도호부(大都護附)로 승격하였다. 충렬왕 34년(1308년) 다시 복주 목(福州牧)으로 고쳤다가 공민왕 10년 (1361년)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왕이 남쪽으로 행차하여, 이 고장에 머무를 때 고을 백성 이 충성을 다해 왕을 봉공(奉公)하였으로 다시 대도호부로 승격하고 인근 17개 군현(郡縣)을 관할하게 했다. 우왕 9년 (1383년) 에는 안동도(安東道)로 개칭하고 원수(元帥)겸 부사(附使)를 두었다가 14년 부사제로(附使制)로 환원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세조때에 진(鎭)을 두고 부사로써 병마절도부사(兵馬節度副使)를 겸하게 하였다가 얼마 후 부사(副使)는 파하였 다.
고종 32년(1895년) 관찰부(觀察府)를 설치하여 인근 9개군을 통괄케 하다가 1년후 폐지하여 군으로 고치고, 1914년 예안군(禮 安郡)을 병합 19개 면으로 편성하고 1931년에는 안동면을 안동읍으로 승격하였다.
 
1962년에 안동읍 행정구역을 그대로 시(市)로 승격하여 명칭을 신안동시라고 하였으나, 시명에 대한 시민들의 의사에 따라 개 칭하여 1963년 1월 1일을 기하여 안동시가 되었다.
 
1995년에는 다시 안동시와 군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도농복합형 시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3.역사적 사건
 
후삼국의 쟁패기에 이 지역은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후백제의 세력이 강하였으나, 960년 병산 전투에서 고려가 승리함에 따라 인근 지역까지 모두 고려의 세력권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이 지역의 호족인 김선평, 권행, 장길 등 의 공이 컸는데, 이로 말미암아 세 사람은 크게 등용되었다.
 
고려 명종 27년 경상도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난 민란의 진압 과정에서 안동부가 이의 토벌에 적극 참여하여 안동 도호부로 , 신종7년에는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충렬왕 34년 복주목(福州牧)으로 개편되었다가 고려말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 10 년 왕이 이곳으로 파천 오면서 1362년 다시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고려 후기에 몽고의 침입으로 개경을 중심으로 한반도의 중서부 지역이 크게 황폐해지면서 이곳은 국가의 물적, 인적 기반이 되었다.
 
이 지역은 고려 후기이래 수많은 인물이 배출되었으며 점차 명문 거족들이 인근 외곽 지역으로 옮겨와서 동족 마을을 이루었다 .
이 지역은 고려 후기이래 정치적. 학문적으로 중시되었고, 수많은 인물이 배출되었으며, 동족 마을이 많이 있어 칠성 이씨, 하회 유씨, 의성 김씨, 진양 하씨 등의 명문이 대를 이어 살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성룡. 김성일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유종개( 柳宗介) 등의 의병장 활동이 두드러졌다.
 
항일의병투쟁에도 적극 참여하여 이 지역은 경상북도 지역 의병 투쟁의 중심지가 되었다.1919년 3.1운동 때에는 3월 16일 예 안 장날, 3월 18일 안동 장날을 기하여 수천 명의 민중이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고, 이후 각 지역의 장날에서 시위 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 민 중 항쟁----------------
무신 정권이 수립된 뒤 고려 사회가 동요하자 전국 가지에서 농민. 천민의 난이 일어났는데, 안동 민 고려 명종 16년 안동에서 일어난 민란으로, 란도 그 중의 하나였다. 1186년 안동수령 이광실(李廣實)이 탐학하여 백성들을 수 탈하자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래서 정부에서 이광실을 죄로 다스려 귀양보내자, 비로소 이 난이 가라 앉았다.
 
 
4.안동의 인물
 
 
전근대적 인물
 
①삼태사
 
나라가 위태로울 때 위로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아래로 힘을 합하여 향토를 수호하는 것이 백성된 자의 도리라 한다면 삼태사(三太師)는 이런 훌륭한 일을 이루어 길이 우리 후손들에게 산교육이 되는 인물이다.
 
신라 말엽, 당시의 신라는 국운이 쇠약하여 곳곳에서 도적 떼가 성했고, 특히 옛 백제 땅에서는 후백제를 세우고, 옛 고구려 땅에서는 고려가 일어나 날로 세력이 강성해졌다.
 
927년(경애왕 4년) 견훤은 군사를 이끌고 경주까지 쳐들어와서 왕을 자살케 하고, 왕비를 능욕하여 재물을 함부로 빼앗아 그 피해가 막심하였으나, 힘이 약한 신라로서는 막을 수가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고려 태조 왕건은 군사 오 천 명을 이끌고 구원 하러 왔으나, 오히려 대구 부근의 공산(公山) 동수(桐數) 싸움에 대패하여 신숭겸, 김락 등 많은 장수와 군사를 잃은 채 겨우 목 숨을 부지하였다.
 
고려 태조 12년, 견훤은 승승장구한 여세를 몰아 의성, 풍산 등의 여러 고을을 빼앗아 안동을 공격해왔다. 십 년 전 공산 싸움에서 패한 이후 군사를 기르며 때를 기다리던 고려 태조도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안동에 서 고려와 후백제의 두 군사는 生死를 건 대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이듬해 1월, 예안에 주둔하고 있던 고려 군은 안동 북쪽의 병산(甁山;안동시 와룡면에 있음)에 진을 치고 후백제 군도 맞은 편 의 석산(石山; 안동시 와룡면에 있음)에 진을 치고 대치하였다.
 
지금까지 승리를 거듭한 견훤의 군대는 병력도 많고 사기도 충천하였으나 고려 태조의 군대는 그렇지 못하였는데, 대상(大相) 홍유같은 이도 전쟁이 불리하면 후퇴할 길을 먼저 닦아야 한다고 태조에게 진언(進言) 할 정도 였다.
 
당시의 안동 성주였던 김선평(金宣平)과 권행(權幸), 장길(張吉) 세 분은 일신의 안전만을 위한다면 마땅히 견훤에게 항복하는 것이 옳겠으나 경애왕의 죽음에 대한 원수갚을 좋은 기회로 알고, 또 포악 무도한 견훤으로부터 이 고장을 수호하기 위하여 고 려 태조에게 귀순하였다.
 
이에 고려 태조는 크나 큰 힘을 얻게 되었고, 이 고장 지리에 밝은 세 태사 분들은 강대하고 사나운 견훤의 군사와 정면 대결 을 하여서는 승리하기 어려움을 알고 고을 민을 이끌고 고려 군대와 힘을 합하여 저수봉(猪首峰:현 안동시 뒷산)으로부터 밤중에 견훤의 군을 뒤에서 습격하였다. 때를 맞추어 고려 태조가 군사를 이끌고 정면에서 진격하니 견훤은 견디지 못하고 팔 천명의 군사를 잃은 채 패주하고 말았다.
 
이로부터 고려의 병력은 날로 강성해지고 청송을 비롯한 안동 주위의 삼십여 고을과 동해 연안의 여러 고을 등을 합하여 백여 고을이 모두 고려에 귀순하였다.
 
고려 태조는 원래 경주 김(金)씨 세 분에게 선평은 김(金), 행은 권(權), 길은 장(張)씨의 성을 내려 주고, 고창군을 안동부( 安東府)로 승격시켜 삼태사의 식읍(食邑)으로 삼게 되었다.
 
그후 이 고을 군민들은 삼태사의 덕을 추모하여 사당을 짓고 해마다 봄, 가을에 제사를 받들었다.
 
②퇴계 이황
퇴계의 생애;
 
퇴계는 1501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현 노송정 종택 태실(胎室)에서 탄생했다. 어버지는 진사 李植이고, 어머니는 의성 김씨와 천천 박씨 두 분이다.
 
아버지는 진사에 합격한 해에 퇴계를 두었으나 서당을 지어 교육을 해보려던 뜻을 펴지 못한 채 퇴계가 난지 7개월 만인 이듬 해 6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퇴계의 어머니는 전처에서 난 자녀와 친생자를 차별 않고 부도(婦道)를 지키면서 자애로이 길렀다.
 
퇴계가 '나에게 있어 영향을 가장 많이 준 분은 어머니'라 할만큼 어머니는 '과부의 자식은 몇 백 배 더 조신해야 한다'는 엄 한 가법(家法)을 세워 자녀를 교육하였고 농사와 양잠으로 생계를 꾸려 가며 가정을 일으켰다.
 
퇴계는 이렇듯 아버지의 사랑을 못 받고 불행하게 편모슬하에서 자라면서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아버지의 못다 이룬 교육에 대한 꿈을 가슴에 새겼고, 그의 천성이 남다르다고 '출신하여 벼슬길에 나더라도 현감 한 고을만 해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꼭 지키리라는 신조를 가지고 처신하였다.
 
퇴계의 집 진성(眞城) 이씨(李氏)는 선대부터 학문을 쌓아 덕을 기르고 입신 양명하되 소나무의 굳을 절개를 본 받아 대의와 명분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가교가 있었다.
 
퇴계의 배움:
 
퇴계가 성장한 가정 환경은 훌륭한 교육적 배경이었으며 그를 가르친 스승은 조상이라 할 수 있다. 여섯 살 때 셋째와 넷째형 이 진주 목사로 가 있는 숙부를 따라 월아산(月牙山) 청곡사(靑谷寺)에서 공부할 때, 퇴계는 어려서 이웃에 사는 노인에게 천자 문을 배웠다. 12살 때 숙부가 병으로 휴직하고 집에 와 있을 시기에 논어를 배웠다.
 
학이 제육(學而 弟六)에서 공자가 말한 '젊은이들은 집에 들어오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이웃 사람을 공경하여 , 행동을 조심하고 신의를 지키며, 널리 여러 사람과 사귀되 어진 이와 가까이 할 것이다. 이런 일들을 행하고 남은 힘이 있으면 비로소 글을 배운다'를 익히고 나서 '사람의 자식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가 바로 여기 있구나'하고 깨달았다 한다.
 
또 장자 편을(子張篇)을 배울 때 '理를 보고 는 "모든 사물에서 마땅히 그리해야 할 '시(是;바른 도리와 옳은 일)'를 '理 '라 합니까?"하고 물었다. 그때 숙부가 "너의 학문은 이만하면 문리가 다 깨쳤다"고 기뻐하고 형님은 돌아가셨어 도 이 아들을 두셨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고 안심하였다 한다.
 
퇴계는 숙부에게 이렇게 논어를 배운 후 누구에게도 배운 일이 없다. 13세와 15세 때는 형과 사촌 자형을 따라 청량 산맥 사서 함께 독서할 만큼 성장하였고 16세 때는 사촌 동생 수영(壽 )과 친구 강한(姜翰), 권민의(權敏義)를 데리고 천등산 봉정사(鳳 停寺)에 들어가서 독학할 정도로 학문이 숙달하였다.
 
17세 때는 안동부사 재임 중인 숙부가 별세하여 물을 곳도 없었을 뿐아니라 18,9세에 읊은 시, 영천(榮川)에서의 의학 강습, 2 0세 전후에 침식을 잊고 고질병이 생기도록 용수사에서 홀로 주역 공부를 한 행적들은 그가 선생없이 홀로 공부한 불행의 수학 과정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 때문에 퇴계는 글자 한자도 놓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연구하게 되었고 비록 옛 성현의 글이라도 의심을 갖고 파고들어 재해 석하는 학문 방법을 개척하게 되었다.
 
포부와 평생사업 
 
퇴계는 학문하는 목적을 입신양명해서 성현군자가 되는데 두었다. 유학 강령대로 수기치인(修己治人;자기 인격을 완성하고 남 을 교화함)에 치중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과 군자유(君子儒)를 닦았다. 그는 공자이래 성현 군자의 모든 가르침을 실험 실천하 여 생활하기에 힘썼을 뿐 아니라 불가와 도가의 공부도 몸소 경험해서 허구(虛構;이단과 사설)와 정론(正論)을 판단하였다.
 
참동 계(參同契) 수련과 선(禪)의 고행 및 활인심(活人心)도 연구 도입하였다. 심경(心經)의 신봉, 경의(敬義)의 견지, 알면 행하고( 知行 進), 자연 법칙과 인간 생활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사상(天人合一觀)은 그의 유학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퇴계의 학문은 실천 도학(實踐道學=實學)이며 생활 그 자체가 학문인 것이다. 성현의 가르침을 실천해 보고 얻은 결론으로 논리를 세웠고(立 言), 도덕과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敎化)을 평생 사업으로 삼았다.
 
조선 조 건국 혁명 이래로 정변과 사화가 수없이 거듭되더니 퇴계 때에 와서 극에 달했다. 간쟁과 아첨, 불의와 모함, 탐학과 살육은 모두 탐욕 때문에 일어났으며, 남을 누르고 저만 잘 살아보겠다는 이기심 때문에 인애사상(仁愛思想)이나 위인(爲人)정신 은 사라져 버렸다.
 
선비들은 책읽기는 뒷전이고 과거하여 벼슬에 나아가 세도를 잡기 위하여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안타 까이 여겼다. 퇴계는 병든 사회와 비뚤어진 학문관의 치료 방법으로서 성학(聖學)과 '이(理)'를 천명(闡明)했다. 국민을 게도( 啓導)하기 위하여 청렴 결백한 공직자 상을 실천해 보였고, 교육을 통하여 사회 개조의 역군을 기르는 힘겨운 사교육(私敎育)사 업도 추진하였다.
 
그는 26세 때 한평생의 사업 포부를 밝혔으며, 급제한 후로는 관직에 나아가 깨끗한 공도관(公道觀)을 가지고 행정에 참여하였다.
 
46세 때에는 교의 길로 나서겠다고 선언하고, 50세 바로 전에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지방관을 그만두고 토계(土溪;안동시 예 안면 소재)로와 정착하여 다음 해에 아버지의 유업도 이룩하고 자신의 사업에 몰두하고자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세워 경향에서 모여드는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황의 교육과 철학.
 
어떻게 교육시키는가
 
퇴계의 교육관에 대해서 정약용은 '일일이 실천을 통해서 많은 인재를 길렀으며, 누구든 어떤 부문이든 가르쳐 모두 대도(大道 )에 이르게 했다. 중도에 폐하는 사람이 없이 끝까지 가르쳤으며, 학문을 닦아 선생의 뒤를 잇게 했다. 퇴계 선생의 가르침을 읽 으면 손뼉치고 춤추고 싶으며 감격해서 눈물이 나온다. 도가 천지간에 가득 차 있으니 선생의 덕은 높고 크기만 하다'고 했다.
 
퇴계의 교육의 목표는 실천 도학과 착한 사람 만들어 인간의 도덕과 사회의 기강을 세우는 데 있었다. 사후의 시호(諡號)를 내 리려고 국왕이 행장을 짓게 했지만 교육과 철학과 생활과 공적이 워낙 크고 넓어 누구도 그 것을 다 서술 할 수 없어 그만 두었 다고 할 정도이다.
 
퇴계는 과거(科擧)중심에서 학문 중심으로, 지식 위주에서 생활 위주로, 공리(功利)의 위인지학(爲人之學)에서 덕행의 위기 지학(爲己之學)으로 , 개인의 이해보다 집단의 화애(和愛)로, 권위와 체면보다 예양(禮讓)과 합리성을 강조해서 가르쳤다.
 
퇴계는 폭넓고 심오한 교육 내용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에게서 수학한 제자가 많았다. 다른 선생에게 배워서 벼슬길에 오른 사 람, 지위가 높고 나이가 많은 사람이 배우러 온 것도 다 새로운 학문 세계와 이제까지 접근하지 못한 새로운 이론을 배우기 위해 서 찾아왔던 것이다.
 
퇴계는 한 때 성균관 대사성으로 사학(四學)의 유생과 교육자들에게 나라가 학교를 만들어 교육하는 목적을 지도한 일이 있었 다. 퇴폐한 공교육(公敎育)으로서는 개혁의 가망이 없자 인간 개조와 윤리 회복을 위해서 서당 교육을 펴 나갔다. 어진 옛 선배 를 받을어 섬기고, 인재도 양성하기 위해 서원을 증설하고 권장 확대해 나갔다.
 
선생에게 배운 사람들 .
 
퇴계에게서 배운 사람들은 학문의 전문성과 관계로 나가 문달(聞達)한 사람, 도학과 교육에 현달(顯達)한 사람 등으로 정확히 분류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유성룡과 권호문과 같은 명 정치인과 문학인들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나왔으며 정확히 연대를 아는 사람만 해도 128명에 달하고 불명한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퇴계는 벼슬길인 공직에 나아가서 그의 철학을 실제에 옮겼다. 특히 사양과 예의 염치(禮儀廉恥)를 시범으로 보였다. 140여 직 종에 임명되었으나 일흔 아홉 번을 사퇴하였다. 30여 회는 수리되었지만 49회는 뜻에 없는 근무를 하였다. 대사성, 대제학, 판서 , 우찬성, 판부사 같은 아주 높은 지위에 올랐지만 어머니의 교훈을 지키려 애썼고, 무능하면 물러가고 직책이 없으면 서울에서 떠나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또한 실천에 옮겼다.
 
그는 처음부터 물러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일단 그 직책을 얻으면 책임과 소신껏 일을 했다. 문무(文武)를 겸비한 국방책, 침 범한 왜적을 용서하고 수교를 해야 한다는 외교정책을 주장하기도 한다.
 
퇴계는 왕도를 깨우친 무진 육조소, 파면을 당하면서도 궁중의 기강을 바로 세운 진언, 십도를 올려 나라의 교학(敎學)을 개혁 한 일, 군수로 나가서는 수리시설을하여 농업을 진흥시켰고, 단양에서는 팔경을 지정하여 자연을 가꾸었으며, 풍기에서는 서원에 서 하는 교육의 새 제도를 확립하였고, 우리나라 처음으로 산수를 기록하여 치산과 등산하는 법도를 남겼다.
 
이황이 후세에 끼친 영향.
 
퇴계는 당시까지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분이다. 전문적 저서로는 『주자서절요』,『송계원명이학통록』,『자성록』,『계몽전 의』,『통서강해』,『사서석의』,『삼경석의』, 『심경분주』,『성학십도』,『성현도학연원』,『독서설해』,『도산십이곡』등이 있고, 일기는 이름이 전하는 것만도 11종이나 된다. 시는 제목을 아는 것이 3558수, 편지는 2964편의 문집이 전하는 등 수많은 저술을 남기고 있다.
 
퇴계가 끼친 영향
 
가정 및 사회의 윤리기강이 회복되어 효와 충이 성행되었으며, 민풍이 순후해졌고, 공직자 공사를 분별할 수 있게 되었다. 예 의 염치를 알고 벼슬을 사양하며, 부모를 모시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성리학과 예학을 발전시켰고, 학자들이 연구에 열을 올려 저술이 급작히 왕성하여졌다. 유성룡을 통해 이단을 물리치자 중국에서도 道, 佛에서 정학(正學)쪽으로 힘을 기울였다. 문 도들이 뒤를 이어 교육에 힘쓴 결과 인물의 전성기를 이루어 놓았다. 혼례와 제례가 간소 규범화되고, 관과 민이 폐를 끼치는 일 이 줄어갔다. 퇴계 이황을 사상을 받아들여 일본은 무(武)의 정치에서 문(文)정치로 발전시켰고 남에게 폐를 안 끼치는 정좌법( 靜座法) 등으로 국민 습관을 바꾸었다.
 
퇴계의 이런 높은 사상을 배우기 위해서 세계적으로 국제 퇴계 학회가 일본, 미국, 독일, 홍콩, 소련, 한국이 유치하여 개최 하고 있으며 대학에서 대학 연구소를 설립하고 퇴계를 연구하고 있다.
 
오늘날 개인주의와 물질문명의 파탄을 구제하고 자연과 인간이 인애(仁愛)하며, 모두가 평등하고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 해서 퇴계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서애 류성룡..
 
유성룡은 중종 37년, 1542년에 나서 1607년까지 생존한 인물이다. 경상도 의성현 사촌리에서 출생한 그의 호는 서애이며 문충 (文忠)의 시호를 받았다.
 
그는 16세에 향시에 들고 안동 도산(陶山)에 가서 퇴계에게 사사하였으며, 태학(太學)에 입학하고, 26 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에 관계에 나아가 이조 좌랑, 도승지, 상주 목사, 경상도 관찰사와 이. 예. 병조 판서를 지냈다.
 
또 홍문 관 부제학 대제학 대사간 대사헌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 시대에 그와 같이 현직을 모두 역임한 사람은 없을 것이 다.
 
임진왜란 때는 영의정으로 도체찰사가 되어 내정 외교 군사를 총괄하였다. 그는 문인이며 유학자였으며 군사에도 뛰어난 지식 을 갖고 있어서 임란 중의 청야책( 野策) 군사 훈련, 산성 수축 등의 전술은 그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향 안동 하회(河回)에 돌아가 은둔생활을 하며 과거를 회고하여 본인이 찬술한 차자. 장계 등 을 정리하여 『징비록』『근폭집』『진사록』『군문등록』 등을 저술, 후에 『서애집(西厓集』으로 간행되었다.
 
유성룡은 누구인가.
 
유성룡은 1542년 에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본래 안동부 풍산현 사람이었으나 6대조 때부터 의성현의 하회촌(河回村)으로 옮 겨 살았다. 그의 집안은 고려 왕조 이래 명문으로 조부 유공작은 간성군수를 지내고 부친 류중영은 벼슬이 황해도 관찰사에 이르 렀으며, 모친은 안동 김씨 광수(光粹)의 딸이었고, 그는 그 분의 둘째 아들이었다.
 
네 살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하여 6세에 『대학』을 배우고 8세에 『맹자(孟子)』를 배웠다. 그는 어릴 때부터 몸가짐이 의젓 하고 어른스러워서 여러 아이들과 놀 때도 쓸데없는 잡담과 상스러운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고, 글공부에만 전념하여 부모나 스 승의 꾸지람을 듣지 않았다.

 
퇴계(退溪)에게 사사(師事)하다.
 
조선 시대 조정은 처음 과거를 보는 유생들 모두에게 서울의 동.중.서.남 사학(四學)에서 『중용』『대학』을 강독하게 하였다 . 류성룡은 13세에 동학에 가서 이 강독에 참여하였는데 구두(口讀)에 익술할 뿐만 아니라 글의 깊은 뜻까지도 모두 잘 알았다. 이에 시험관인 강관(講官)은 크게 감탄하고 칭찬하면서 '장차 큰 유학자가 될 것이다'라 하였다.
 
그는 21세 되던 해 9월에 도산에 가서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찾아 그 문하에서 수개월 『근사록(近思錄)』 등을 수업하여 성현(聖賢)의 길에 큰 감명을 받았다. 이때부터 그는 성리(性理)에 관한 학문에만 전념하면서 그 실천에 힘썼다.
 
퇴계는 유성룡 을 가리켜 "이 사람은 하늘이 내린 사람으로 장차 나라에 크게 될 것이다"라고 칭찬하였고, 퇴계의 고제자인 학봉(鶴 鳳) 김성일(金誠一)은 "우리들은 퇴계 선생님을 모신 지 오래되었지만 한 말씀도 칭찬 받은 일이 없는데 公만이 이런 칭찬 을 받았다"고 말하였으며, 또 다른 사람에게 "서애는 나의 스승이다"라고 하였더니 유성룡은 "나는 학봉을 따라 갈 수 없다"고 서로 높여 주었다.
 
명종 19년 (1564) 유성룡이 23세 되는 해에 사마시(司馬試)의 생원. 진사 양과에 합격하고 다음해에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더욱 학문을 닦았는데, 그는 성균관의 태학생(太學生) 전원이 임금께 상소를 올려 나라 일의 잘못을 고치려 할 때에 본인의 의 견과 다른 점이 있으면 끝까지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다음해 10월에 대과(大科)에 합격했다.
 
그는 본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사람(士林)으로서 초야에 묻혀 마음내키는 대로 공부하려 하였으나 부친과 형의 강권에 못 이겨 억지로 과거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정을 안 퇴계는 그의 형에게 보낸 시에서 '그대의 아우 처음 급제로, 얽매이게 될 세상일에서 벗어나려 함이 가상하다'라고 하였다.

 
현직을 역임하다.
유성룡은 대과에 급제한 다음달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승무원 최하급 직위인 종9품 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됨으로써 관직 생활 을 시작하였다.
 
이해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였는데, 이후 3년 사이에 그는 예문관 검열(藝文館 檢閱) 겸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 이 되고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으로 승진되었으며, 종조 좌랑을 역임하였고, 선조 2년(1569) 그가 218세 되던 해 10월에 성절 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明)나라 수도인 북경에 가게 되었다.
 
성절사의 서장관은 젊고 학문과 시문에 뛰어난 인 물을 선임하였는데 그가 발탁되었는 것이다. 그는 명나라의 문물을 견문하고 그곳 학자들과 의견을 교환하였으며 태학(太學)의 학생 수백 명과 학문을 토론하였는데 모두 유성룡의 학문과 이론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30세 되던 해 그는 고향인 낙동강의 물줄기가 휘돈다고 하회(河回)라 이름하는 곳의 서쪽 언덕(西厓)에 서당을 지으려다가 터 가 좁아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스스로 호를 '서애'라하여 그 당시의 감회와 포부를 길이 간직하고자 하였으며, 후에 이 언덕 을 상봉대(翔鳳臺)라 이름하였다. 지금도 하회마을의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바라보면 그리 높지 않은 곳에 '서애'가 보인다.
 
선조 15년에는 도승지와 대사헌이 되고, 2년뒤에는 예조판서에 뛰어 오르고, 선조 21년에는 형조판서로서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임하고 병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 같은 빠른 승진에 대해 그는 부당한 일이라고 누차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은 일도 있다.
 
우의정으로서 이조판서까지 겸임했을 때 상소를 올려 '우리 나라가 여러 대를 내려오면서 삼공(三公 )으로 이조판서를 겸한 이는 없었는데, 훗일에 혹 조정에서 세력을 잡으려는 사람이 신으로 구실을 삼는다면 국가의 화근이 신에 게부터 시작된 것이니 신이 이러한 폐단을 직접 터놓을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선조는 '그대는 직무에 충실하고 사양하 지 말 것이며, 인재를 등용함에 적격자를 잘 가려 조정의 기풍을 맑게 하라'고 하였다. 그는 임란 전 해 좌의정이 되었다.
유성룡이 이와 같이 모든 청요직을 역임하여 빠르게 승진하여 현직을 맡게 된 것은 그의 박학과 관인(官人)으로서의 능력이 컸 기 때문이다.
 
정치가로서의 유성룡..
 
임란 극복의 총책임자- 유성룡은 행정과 정치에 많은 공적을 남겼으나 그 중에서도 임란 중의 업적이 가장 컸다. 임진왜란 중 에 영의정으로 도체찰사를 겸임하여 군국의 총책임자로서 내정, 외교, 전술 등 난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는 유학자였지만 전술, 무기, 축성에 관해서도 탁월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임란 전에 여진족이 북방을 침범할 때, 조정에 서는 여진족의 근거지를 기습, 분탕하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그는 무력만으로는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하고 다음과 같은 북방오 책(北方五策)의 봉서를 올렸다.
 
① 침략의 근원을 막아야 한다.
② 수비의 전략을 전해야 한다.
③ 여진족의 정세를 알아야 한다.
④ 군대에 군량 보급을 원활히 해야 한다.
⑤ 잘못된 정치를 시정해야 한다.
이렇게 그는 상대와 우리의 정세를 판단하고 전쟁이란 군사 행동에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치, 외교, 경제 등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왜군이 부산 앞바다에 침범하여 7년간의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임란 전에 왜사(倭使)가 와서 ' 가도입명(假道入明)'을 말했고, 일본의 국내 정세를 살피려고 파견된 통신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하여 조 정의 의견도 둘로 갈라졌다. 그러나 임란 1년 전부터 왜군 침공에 대비하여 전국의 성곽을 수축하고 군기를 점검하여 뛰어난 장 수 중 재질이 있는 인물은 서열에 구애받지 않고 발탁하였다. 이때 유성룡은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하여 행주대첩과 수군의 대승 리로 왜군의 침공의 기세를 꺾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임란이 일어나자 유성룡은 특명으로 병조판서를 겸임하고 또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군무를 총괄하였다. 그는 용장으로 이 름높던 이일과 신립을 급히 파견하여 왜군을 막으려 했으나 상주와 충주 탄금대에서 패전하여 선조를 호가(扈駕)하여 서울을 떠 나 개성, 평양을 거쳐 의주(義州)에 머물게 되었다. 태평 2백년간 큰 전쟁을 모르던 조선은 백여 년간의 전구 시대에 훈련된 왜 군과 당시로서는 신무기인 조총을 당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임란의 책임을 지고 사면되었으나 실질적으로 군무를 맡아 평안도 도체찰사, 충청, 전라, 경상 삼도 도체찰사에 임명되었으며, 다시 영의정이 되고 훈련도감제조(訓練都監提調)를 겸임하였고 선조 28년에는 경기. 황해. 평안 .함경 4도 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중에 선조는 '제갈공명(諸葛孔明)도 한실(漢室)을 회복하지 못하였는데, 경의 학문과 지식이 어찌 옛 사람에게 뒤지 겠는가'라고 유성룡을 제갈 공명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는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선봉에서 구한 경륜 있는 정치가 였던 것이다 .
 
『징비록』은 임진왜란 중에 일어났던 여러 일을 본인의 견문한 바에 의해 기록했기 때문에 임란 연구의 근본 사료가 되고 있 으며 이미 조선 시대 일본에 건너가 큰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그는 『징비록』 서문에서, "詩經』의 글귀 중에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懲) 뒤에 환란이 없도록 삼간다' 하였는데 이것이 『징비록』을 저술한 소의이다"라고 적고 있다.
 
그는 현직에 있을 때보다 오리려 낙향 후 도학에 전념하면서 지난날의 일들을 저술하여 마음의 평안을 갖게 되었다.
선조 40년(1607) 그의 나이 66세에 병석에 눕자 왕은 내의(內醫)를 보내어 치료케 하였다. 그는 빌렸던 서적을 돌리고 가족들 에게 박장(薄葬; 소박한 장례)을 하라는 유언을 하였고 최후로 임금께 올리는 유소를 초하고 5월 6일 별세하였으며 안동부 서쪽 수동리(壽洞里)에 예장(禮葬)되었다.
 
 
독립 운동가
 
①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
 
19세기 후반에 들면서 한국은 안팎으로 격동의 시대를 맞았다. 안으로는 근대화를 지향하는 개화사상과 이에 저항하는 척사 사상이 부딪치고, 밖으로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을 맞게 되었다. 이러한 민족의 위기 상황의 극복 방법으로 1894년 의병 항쟁 이, 그리고 1900년대에 들어 계몽 운동이 전개되었고 이들은 1919년의 3.1운동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공동의 광장에 합류하였다.
석주 이상룡은 처음에 의병 항쟁에 간여하다가 사상을 전환하면서 계몽운동을 거쳐 구국 운동의 일선에 나섰다. 일제에 병합되 면서 만주로 망명한 그는 만주 지역 독립운동의 대표 인물이 되었고,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까지 역임했다.
 
석주의 가계와 학통
 
석주는 1858년 (철종9년) 11월 24일(음)에 안동시 법흥동 20번지 소재 임청각(臨淸閣, 보물 182호)에 승목(承穆)의 3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고성(固城)이며 처음 이름은 상희(象羲), 호는 석주였고, 1911년에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 상룡 (相龍)으로 개명하였다.
그는 1886년 과거에 응했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고성 이씨의 종손으로 4대에 걸쳐 의성 김씨, 안동 권씨, 의성 김 씨, 진성 이씨 등과 혼반을 형성함으로써 그의 집안을 안동 중심의 경북북부지역에서 주요 가문의 하나로 자리 잡게 했다.
석주는 학문에서도 또한 퇴계의 학통을 계승하여 명문으로서의 위치를 갖고 있었다. 그는 퇴계에서 김성일을 거쳐 전해진 학 통을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으로부터 이어 받았다.
 
국내에서의 활동
 
석주의 국내에서의 구국 활동은 두 가지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의병 항쟁을 시도했던 시기이며, 둘째는 항일 항쟁을 통해 방략상의 한계를 절감하고 투쟁방략의 전환을 위해 새로운 국제 정세의 분석에 몰두하고 아울러 신사상과 지식을 바탕으로 구국계몽운동을 전개했던 시기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난 뒤 석주의 외삼촌인 권세연이 의병장에 추대되자, 그는 의병 활동에 도움을 주었다. 당시 김흥락 김 도화도 의병에 참여하였는데, 석주는 1896년 의병장 김도화에게 의병의 전략에 관해 건의하기도 했다. 당시에 의병에 대하 재정 적인 후원은 계속했으나 직접 의병 항쟁에 가담하지 안했는데, 그 이유는 일과성의 전투보다는 기지 건설을 주장했던 방법론의 차이에서 비롯한 것으로 알려진다.
1905년 을사조약 직후인 그해 겨울, 석주는 의병 항쟁을 시도하기도 했다. 직접 의병에 가담하기도 하고 신돌석. 김상태 등의 의병과 연합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8년 에 차성충이 패배하고, 신돌석이 사망했으며, 김상태가 체포됨에 따라 석주의 의병 항쟁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구국계몽운
 
석주는 의병 항쟁의 한계를 깊이 인식하고 , 전근대적인 무기와 군사 훈련으로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방략을 모색하기 위해 신서적을 독파했다.
또한 석주는 류인식, 김동삼, 김후병, 하중환, 김기수, 이관직, 류상태등과 안동의 각 문중과 연합하여 협동학교를 설립하고 중등학교 이상 수준을 교육하였다. 그 외 여러 사립학교 설립을 추진했는데, 이것은 식민교육화 현상에 항거하는 투쟁이기도 했다.
만주 망명.
석주는 53세 되던 1911년 음력 1월에 만주로 망명했다. 그의 망명은 신민회와의 연계로 이루어졌다. 신민회는 당초(1907년) 구국계몽단체로서 비밀 지하조직을 펴다가 1909년 봄부터 해외 독립군 기지 개척을 계획하여 독립전쟁방략을 추진하였다. 이와 같이 구국계몽운동 단체가 신민회 독립전쟁 단체로 전환을 시도한 것은 지금까지 별개의 것으로 추진해 왔던 의병 항쟁과 구국 계몽 운동의 반성적 접근이었고,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민족운동 논리의 발전이었다. 이 방향 설정은 석주가 의병 항쟁을 추진 했고 또 대한협회 안동 지회와 협동학교를 통한 구국계몽운동을 추진하면서도 단련제를 시도하여 의병항쟁을 아울러 추구했던 활 동과 그 성격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석주는 망명 계획을 그의 처남이자 동지인 천전동의 백하(白下) 김대락과 함께 계획하였다. 석주를 중심으로 한 안동 유림의 집단 망명에는 두 가지의 특성이 있었다. 그 하나는 전통적인 위정척사의 사상을 기저로 한 것이 아니라 신민회와 결속한 구국계 몽주의적 독립군 기지 개척을 위한 것이었다.
석주 일가는 1911년 1월 5일에 법흥동을 출발하여 망명길에 올랐다. 석주는 만주가 고구려 발해의 옛땅으로 국토의 연장선상으 로 또 독립 전쟁이 용이하다고 파악하고 망명을 서둘렀던 것이다.
 
국외에서의 활동
 
석주는 한국 동포에게서 정신적 기반 조성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믿고 민족사관의 재인식 문제와 광복운동의 정신적 기반조 성, 그리고 반제항일투쟁을 위한 여러 가지 방략을 세계사 속에서 찾아 제시하고, 한민족도 구국 투쟁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게 되 면 기필코 승리할 수 있다는 사례를 들어 독립전쟁을 담당할 동포에게 확실 갖게 하였다.
석주는 회인현 영춘원(永春源)에 정착지를 정하고 이후 서간도 전역을 옮겨 다니면서 한국인의 자치와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는 이시영. 이동녕 등의 독립지사들과 더불어 신흥학교를 건립했다. 이 학교 설립의 목적은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수행할 무 관 학교와 민족운동의 전위가 될 광복 인재의 양성이었다. 그 결과 3.1 운동 직후까지 이곳에 배출돼 인재가 1천명 가까이 헤아 리게 되었고, 이들은 3.1운동 이후 남북 만주와 중국 대륙에서의 항일 운동의 전위가 되었다. 석주는 1914년에 경학사를 부민단( 扶民團)으로 발전시켰고, 길남사(吉南社)라는 청년연무 단체의 경영에 노력했다. 1919년 4월 만주 지역 한족회를 바탕으로 서간 도 한족대표를 모아 항일독립전쟁을 주도할 군정부를 건립하였다. 이 군정부는 신흥학교를 신흥무관학교로 확장하여 국내에서 3 .1운동 이후 계속 망명해 오는 청년들을 모집하여 속성과를 두어 독립군 간부를 양성했고 나아가 독립군의 편성과 훈련에 주력 하였다. 이에 1920년 말까지 군사교육을 받은 독립군수가 2천여 명에 달했다.
1919년 4월에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석주를 비롯한 지도자들은 정부 조직을 이중으로 둘 수 없다고 하여 11월에 군정부 를 서로군정서로 개편하고 임시정부의 산하 조직으로 편제하였다.
1925년 임시정부가 헌법을 고쳐 대통령 중심 체제로 전환되자 석주는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무령에 선임되었다. 석주는 동지 들과 협의하여 임시정부의 분열을 조정하고 활발한 독립 투쟁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상해로 가서 1925년 9월 24일 68세의 나이 로 국무령에 취임했다.
1932년 3월에 일제에 의해 만주가 점령되고 일제의 계략대로 만주국이 수립됨에 따라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은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고, 독립 지사들은 중국 본토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은 석주는 병을 얻었다. 그해 5월 12일 장남 준형에게 '국토를 다시 찾기 전에는 내 해골을 조국에 싣고 가지 말라'는 말을 끝으로 서거했으니, 그의 나이 75세였다.
석주의 사상의 근간 물론 유학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근대적인 사상을 접하고 그것을 적극 수용코자 했다 석주의 학문 중 주목할 것은 만주 망명 직후부터 관심을 기울이 '고대 민족 발달사'에 관한 연구였다. 그것은 한국사에 대한 신채호 박은식 등과 같은 역사적 민족주의의 자세를 갖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는 부여. 고구려. 발해사는 무론이요 숙신사 백제.신라사까지 민족 사관의 입장에서 재인식하고자 했다.
석주는 안동이 낳은 혁신 유학자요, 민족운동의 지도자이다. 세계 열강의 침략에 직면한 시기에 위정척사 구국계몽운동 등으로 전개된 그의 정신은 안동의 정신인 것이다.
 
②일송 김동삼
 
김동삼(金東三)선생은 호는 일송(一松)이며 본관은 의성이며 임하면 천전동에서 태어났다.
1907년 유인식, 김후병과 함께 향리에 협동중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였다.
1911년 만주 통화현(通化懸)에서 이시영, 이동영(李東寧) 동지와 만나 교육 문제를 협의하고 1913년 여준 이 탁 김창무 등과 같이 군인(軍人)을 둔전제(屯田制)로 훈련하기 위하여 백서농장(白西農場)을 개설하였다.
1919년 남만(南滿)에 한족회(韓族會)를 결성하고 이상룡 등과 같이 서로군정서를 조직하여 군사에 관한 대대적인 활동을 전개 하더니 같은 해 여름 상해의 민족대표대회에 한민족 대표로 의사는 출석하였고 1920년 겨울 이청천과 함께 군정사를 안동현으로 이사하고 홍범도군과 합세하였다.
1923년 흥경현에 남만의 자치군사기관으로 통의부를 조직하고 의사는 총장으로 추대되었다.
1925년 정의부를 조직하고 행정 위원이 되었으며 1929년 한.중합작으로 국제적 운동을 추진코자 양측 대표자 대회를 소집하였 는데 그 의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1931년 소위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하얼빈에 연락차 갔다가 동년 10월 정인호(鄭寅浩)의 집에서 동지 이원일과 함께 왜경에게 체포, 경성옥(京城獄)에 이감되어 1 0년형을 복역 중 1937년 3월 3일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서거하였다.
 
③동산 류인식
 
19세기말부터 시작된 일본과 서구 열강들의 조선에 대한 침략은 조선인의 심한 민족 저항에 부딪칠 즈음 거기에 대처하는 방법 은 일제에 적극 대결하는 방안과 계몽 활동을 펼치는 것이었다. 동산은 일제와 더불어 싸우는 한편 개화 운동에 최선을 다한 민중의 선각자였다.
동산은 이름이 인식이고 자는 성래이며 성은 류씨였다. 동산은 그의 호가 된다. 구한말 격변기인 1865년 안동시 예안면 삼산 리에서 아버지 류필영과 청주 정씨인 어머니의 장남으로 태어나 종숙인 기영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동산의 선조들은 유교적 전통을 지킨 선비들로서 학행을 숭상하여 도학, 예학의 대가를 내어 영남 가문에서도 명문이었다.
동산이 이러한 가통을 이어 받아 태어났으면서 개화의 선도가 되었음을 볼 때 그의 진보적인 근대적 사상을 높이 평가해야 한 다. 또한 이러한 환경으로 인하여 동산은 유교의 범주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다.
그는 어려서 글재주가 뛰어났으며 커서 29세에 과거에 응시하러 서울로 갔다가 과거제도의 문란과 조정의 부패를 직시하고 바 로 귀향했다. 청년 유학도로서 조국에 대한 자아의식을 지니게 되었다.
그후 을미사변 때에 청량산에서 기암, 석주 등과 같이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관군에 패한 후 10년 동안 피신하면서 국내 산 천의 험천을 두루 살피고 동지들과 목절 달성을 위한 훗일을 기하였다.
동산이 유교적 사상으로부터 벗어나 개화 사상가로서 행동하고 사회교육 활동과 민중 지도자로서 활동한 시기이다. 이 때가 대동사란 역사서를 저술한 때이다.
특히 1903년은 동산의 생애에 있어 개화주의자로 변신하게 되는 중요한 해라고 할 수 있다. 서울로 가서 단재 신채호와 교류 하였는데 그의 권유로 개화 서적을 접하게 되어 탐독함으로써 유신의 뜻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후 민족 의 약소함을 보면서 오늘의 급무는 오직 교육에 있으니 민권을 진척시키고 민지를 개발한 후에야 국세를 만회하고 민족을 보존 할 수 있다고 외치면서 개화 운동에 투신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대한협회를 창설하고 협동학교를 설립하여 스스로 삭발양장하고 노비해방, 적서차별타파 등을 했다.
1910년 이후 동산은 개인의 불행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사회교육을 통한 민중 계몽을 위해 헌신하였다. 당시 동산이 서거하자 경향 각지에서 조객이 운집했고 사회장으로 엄수하였다.
동산은 계몽 사상가로서 일평생을 보냈다. 그는 전통적인 안동 유림 출신으로 개화 운동에 투신하여 유림을 개화시킨 재야 학 자이다. 그는 대동사란 통사류의 역사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성장한 유림의 부패상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고 먼저 유림을 개화한 후에야 이들이 민중계몽에 나서기를 바랐다.
그는 교육 활동을 통해 국권 회복을 염원했고, 그 결과 협동학교를 설립했다. 협동학교는 사회 교육적 활동의 성격이 강했다. 또 그는 지방과 중앙을 왕래하면서 교육을 상호 연결시켰으며 중앙의 교육 인사들과 교류하는 가운데 국내외 정세에 민감했다 .
그가 지방 유림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뜻을 굽히지 않은 것은 동산의 교육에 대한 의지와 열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④추강 김지섭
 
풍산 출신 독립운동가 김지섭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 많은 지사 중에서 의열단원으로 독립운동에 참가하였고, 특히 192 3년에 발생한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에 의해 자행된 한국인에 대한 만행 참상을 듣고 이를 응징하기 위하여 현해탄을 건너 폭탄 을 투척하여 일본 왕을 살해하려다 실패한 인물이다.
김지섭은 개항과 개혁을 추진하던 갑신정변이 일어나던 1884년 그해 안동시 풍산면 오미동에서 김병규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 는 위경(衛卿)이며, 호는 추강(秋岡)이라 했다.
추강은 어려서 족숙인 운재 김병황 (雲齋 金秉璜)문하에서 수학하게 되었다. 사서삼경에 능통하고 총명함을 보였고,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성장하였다. 그는 선학들처럼 학문의 도를 깨우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혼란한 시대를 바르게 살고자 하는 자 세를 가다듬기 위한 방법으로 공부를 하였다. 21세가 되던 해인 1905년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일본의 선진 문화를 제대로 파악하고, 일본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들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일본 어를 공부한 것이 독립운동과 군자금 모집에 많은 도움을 주게 되었다. 일본어를 습득한 상주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법 률, 과학 등 신학문을 두루 섭렵하였다.
추강은 1922년 1월에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회의'에 다수의 동지들과 참가하였다. 여기서 추강 김지섭은 그의 사 상과 활동력을 변화시킨 인물인 장건상을 만났다. 장건상은 고려공산당원이었으며 의열단원이었다. 추강이 1922년 의열단에 가입 한 것은 장건상의 소개 때문이었다.
의열단에 가입한 후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는 활동 자금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해 경성으로 잠입하여 유석현 윤병구와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준비하였다. 12월 23일 오전 9시 30분경 경성부 무교정 조선총독부 판사였던 백윤화( 白允和)를 찾아가 '우리는 민족 혁명을 위해 재산을 희생하고 온 사람'이라는 내용을 기재한 서면과 독립운동 자금 5만원을 요 청했으나 백윤화는 거절하였다. 다음 날인 12월 24일 추강은 허경석이라는 명의 최후 통첩을 하였다. 사후 처리를 동지들에게 맡겼으나, 백윤화와 백운영의 밀고로 12월 25일 윤병구가 체포됨으로써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추강이 본격적으로 총과 폭탄을 들고 의열투쟁에 참가하기 시작한 것은 1923년부터이다. 국민대표자대회에서 커다란 충격을 받 은 그는 의열투쟁만이 우리의 한맺힘을 풀 수 있는 길이라고 인식하고, 이를 위해서는 국내에서부터 점차 의열투쟁을 확산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1923년 3월에는 국내의 적 기관 파괴 공작을 실천하기 위해 폭탄 36개를 상해로부터 천진으로 수송하여 이를 국내로 가져오기 위해 안동현에 중계소까지 설치하여 김시현 유석현 황옥 등으로 하여금 서울로 반입하도록 하였다.
그 해 3월 15일 총독부 경찰서 재판소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등을 파괴하려 하다가 사전에 일경에게 탐지되어 김시현 등 13명이 검거됨으로써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에 추강은 경성까지 잠입하였다가 구사일생으로 체포를 면하고 상해 로 피신하였다.
실패를 경험한 추강은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던 중 일본에서 비극적인 관동 대지진이 1923년 9월 1일 일어나고 이를 계기로 일본인이 한국인을 학살하는 것을 보고 치를 떨었다.
1923년 12월 21일 추강은 폭탄 세 개를 가슴에 품고 일본을 향해 출발했다. 대동강을 거쳐 출발한 지 10일 후인 12월 31일 일 본 복강현 팔번제철소 앞 해안에 도착하였고, 1924년 1월 3일 오후 7시경에 지광역에서 열차표를 구입하여, 1월 4일 동경행 열 차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뜻밖에 의회가 휴회되었고, 다시 개최된다는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하자 일본 왕궁에 폭탄을 투척하 기로 계획을 수정하였다.
1924년 1월 5일 하오 7시 관동 대지진으로 학살당한 조선인의 분노와 식민지 민족의 한풀이가 동경 중심부인 일본 왕궁으로 통 하는 이중교에서 추강에 의해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일본 왕궁에 폭탄을 투척하고자 했으나 발각되어 실패하자, 이중교 한 복판 에 투척하였으나 불발되었다. 일경에 체포된 추강은 1925년 5월 13일까지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언도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시곡형무소와 천엽형무소에 옥고를 치루었다.
 
예술
 
문학:
 
①. 이육사
 
  생애
 
이육사는 안동이 낳은 독립운동가요 시인이다. 그는 나라의 기운이 이미 기운 대한 제국 말년 1904년 양력 4월초4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882번지에서 났다. 그의 처음 이름은 원록(原祿)이었으나 후에 스스로 활(活)이라고 썼다. 호는 그의 독 립운동 중의 수형생활시의 수인(囚人)번호인 64를 따서 육사(陸史)라고 했다. 그의 형제 중에 이원록은 또한 문학가로 이름이 나 있다.
본관은 진성, 퇴계 이황 선생의 14대 손이다.
육사의 조부 치헌(痴軒)공은 경술국치에 임해서 거느린 비복들을 풀어 준 다음 그 문서를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향리에서 얼 마 떨어지지 않은 예안에 신교육 기관인 보문의숙(普文義塾)을 세우는데 힘이 되었고 초대 숙장에 추대되었다. 그후 육사는 신학 문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였으며 1923년에는 일본에 잠시 다녀왔는데 '일본대학'을 다닌 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 다-『조선 독립운동 (민족운동사』권2.
1932년 10월 22일 의열단의 김원봉이 교장으로 있던 북경 조선군관학교 국민 정부 군사위원회 간부 훈련 반에 입교하여 그 다 음해 4월 22일 동교 제1기생으로 졸업하였다. 이때 군사교육에서 육사는 권총의 명수였다고 전한다.
육사는 항상 요시찰 인물로 분류되어 있어 국내에서는 조그만 일이라도 발생되면 왜경의 예비검속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집안 에서는 그의 검속 투옥이 스무 번도 넘을 것이라 하지만, 기실 확실한 횟수는 잘 모르고 기억으로 17회쯤 된다고 주위는 회고한 다. 1936년 음력 10월 5일 모부인의 회갑을 지낸 후 육사는 건강이 매우 좋지 못했다. 이리하여 국내에서 요양하면서 <중외 일보(中外日報)와 조광사와 인문사 등에서 일을 하였고 많은 작품들이 이 때 써진 것이다.
1941년 부친상과 모부인과 백형이 연한 상을 당하고 집안 흩어지는 가운데 그는 1943년 북경에 갔다가 7월 백형의 소상(小祥) 귀국하여 참석하였고, 이때 그의 발걸음은 매우 쪼기는 듯하면서 조금만 더 참고 견디라는 말을 족친들에게 하였다. 그리고 서울 에서도 머물 여가가 별로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총총히 떠나면서도 안동 풍산에서 일박을 하였다고 한다.
 
서울에 올라간 육사는 얼마 안되어 헌병대에 의하여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이것이 마지막 길로서 그 이듬해 즉 1944 년 양력 1월 16일 새벽 5시에 생을 마감했다.
육사는 요시찰인이면서도 신분증을 여러 가지는 위장술이 뛰어났다. 그러나 그는 이런 것을 철저한 비밀로 해서 후세 사람들 이 다시 그를 葁아가는데 어려움을 주고 있다.
 
문학 활동
 
육사는 어떤 문학 활동 조직에 가입한 바가 없다. 이미 이원조의 이름이 더 나 있던 것이나 그가 그렇게 너른 활동을 문단에 드러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육사는 누구에게나 좀처럼 마음을 허락하는 성격이 아니면서 만약 사귀고 보면 생사를 같이할 만큼 신의와 의리를 지켰으며, 그처럼 쫓기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일로서 남에게 누가 된 일을 하지 않았다.
육사의 문단인들과의 교우가 넓은 것은 아니었지만 존경을 받았다. 김기림은 모지(某誌)에 자기의 시를 두세편 발표한 것을 일고 평을 구한다는 뜻의 편지를 보냈으며 회월 박영희도 회월시집에 제자를 써서 보내 왔다. 특히 이병각과 신석초는 육사와 형 제와 다름없는 사이였다. 그 외 윤곤강 최정희 김광균 오장환과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육사의 시를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그의 유작인 광야(曠野)를 뺄 수가 없다 이 작품에는 그가 생을 걸어 시도한 항일 저항의 정 신 자세가 매우 기능적인 언어로 읊조리고 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 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가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여기서 그는 불의와 무법을 표상하여 '눈'이라하고 그것에 맞서려는 화자는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린다고 했다. "백마 타고 오는 초인"에 대한 기대로 얻으려 한다. 일제강점기인 이 시기 그는 '매화 향기'로 다가오는 역사의 봄을 맞이하고자 한다.
그는 유학을 다녀오기 전까지 줄곧 한학을 해 왔다. 민족의 자유. 해방은 일각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그가 독립 투쟁을 굽 히지 않았던 것은 오랜 유학과 선비 정신의 훈련 과정을 충실하게 보냈기 때문인 것이다.
 
②음악: 권태호
 
우리나라 현대음악의 선구자 권태호(權泰浩)선생은 1903년 9월 16일 안동시 율세동 17에서 이 지방 초창기 기독교인이자 나중 평양신학교를 거쳐 목사가 된 권중한(權重漢)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지금의 안동교회 예배당의 풍금 소리에 매료되어 8세 때부터 선교사 부인으로부터 풍금을 배우게 되었다. 안동보통학교를 졸업 하고 안동우편국에서 통신수(通信手)로 일하면서 15세 때는 안동교회 성가대의 지휘도 아울러 맡아보고 특별 예배 때는 독창도 불렀다.
어린 시절에 싹튼 음악에의 정열은 22세가 되자 본격적인 음악 공부를 위해 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게 했다. 동경의 일본 고 등학교 성악과의 입학시험에 합격, 재학하는 동안 학비는 주로 신문 배달로 마련하였다. 이 학교에서는 뒷날 우리의 애국가를 작 곡한 안익태(安益泰) 선생이 동기였다.
재학중 이미 풍부한 성량(聲量)으로 첫 손 꼽힌 그는 동경에서 개최된 '베에토벤 1백년 기념 대음악회'에 테너 가수단의 일원 으로 뽑혔다. 여기서 용기와 자신을 얻은 그는 졸업한 후 세계의 대가들이 밟고 가는 동경청년회관에서 제 1회 독창회를 열어 일 본 악단에서 이례적인 대호평을 받았다. 이어서 와세다 홀로 시고꾸 회관등 동경에서 제 3회의 독창회를 가졌으며, 그후 요꼬하 마, 고오베, 쿄오토오, 오오사까 등지에서 독일 가곡의 하이테너로 명성을 떨쳤다.
1931년 28세 때 평양 숭실전문 교수로 취임했으며 1940년 그는 모교인 일본고등음악학교의 교수로, 초빙 받아 동경으로 건너가 서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일본 음악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해방 후 귀국한 그는 대구에서 음악학원을 설립, 후진 양성에 뜻을 두었으나 경영난으로 허덕이나 6. 25중 건물이 미군에 징발 되어 영영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음악활동은 성악과 연주에 국한되지 않았고 작곡 부분에서도 눈부신 것이 있었다. 일찍이 음악학교 시절에 '봄나 들이' '꽃피는 삼천리' 등의 동요를 작곡했고, 베를린 올림픽 대표였던 손기정 남승룡 선수의 개선가(凱旋歌)를 작곡, 일경의 경 고를 무시하고 이를 스스로 발표 연주함으로써 일경에 연행되어 욕을 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해방의 노래' '대한아들 행진곡' ' 농부가' 등과 그가 향토를 위해서 '대구시민가' 외 수많은 교가와 지역 시민의 노래를 작곡했다.
한편 대구국민가요 합창단을 조직, 방송과 공연을 통하여 건전한 노래를 보급하는데도 노력하였으며, 경북문화상 1회 수상자가 되기도 했다.
그러던 그는 1972년 지금은 수몰된 예안면 선양리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는 향토음악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음은 물론이요 피압박 민족의 설움을 안고서도 그 시절 한국성악사(韓國聲樂史)의 삭을 마련했다는 점만으로도 오늘의 동양인들은 자랑을 가 지고 그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③무용:김상규
 
 
현대의 물리학의 석학- 김호길
 
김호길 박사는 1933년 안동시 임동면 지례리에서 나서 지례간이학교를 거쳐 도산국민학교 3학년에 편입하고 다시 안동중학교 안동사범학교를 마치고 서울대 물리학과를 진학했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공군사관하교 물리학 교관을 지낸 그는 다시 제대후 원 자력연구소에 근무도중 영국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갔다.
김호길 박사(金浩吉 博士)는 영국 Birmingham 대학에서 1964년 이학 박사 학위를 바도 1966년부터 1978년까지 미국의 메릴랜드 대학의 전기공학과 및 물리학 교수로 그후 제6대 재미 한국과학기술협회 회장을 역임하여 재미 과학자들이 모국에 공헌하는데 큰 공적을 세웠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85년 4월에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아 바 있다.
귀국 후에는 연암공업전문대학을 창설하여 초대 학장을 역임하고 1985년 8월 포항공과대학에 초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국내 최초의 연구 중심 대학으로 만들어 해외에 있는 중진 학자들을 다수 초빙하여 신설 대학을 수년 내 세계 유수 대학으로 육성하였다.
그래서 포항공대에 우수 인력을 뽑아 대학원 중심으로 운영하고, 교수 채용에 있어 일체의 외부 압력을 배제하였고, 교수업적 평가에 기준한 승진제도를 정착시켰다. 그리고 박사 학위 논문을 반드시 국제 학술지에 게재하는 것을 의무화시켰다. 또한 교수 초빙에 있어서도 중진 교수를 먼저 학과 주임교수로 초빙하고 그의 추천에 따라 교수를 충원하였다.
그 외 1400여 억원의 공사비를 정부와 포항 제철을 통해 확보하고 방사광 가속기를 포항에 건설했다.
그는 물리학 뿐만 아니라 항상 퇴계선생의 문집을 책상머리에 둘 정도로 실천유학에 밝고 또한 그 것을 신념으로 교육에 몰입 했다. 그래서 지방에 명문대학을 건설하는데 주력했으며 그의 교육철학은 곧 이황의 그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처럼 물리학 분야의 석학으로 이름난 그는 방사광 가속기의 건설 완공을 눈앞에 두고 타계해 많은 사람들을 슬프게 했다 . 그는 몇 해 전 한국일보사가 뽑은 세계적 인물의 하나로 뽑히기도 했다.
 
 
5. 안동의 교육, 문화
 
안동은 '영남 사림파 의식'과 '을미 사변과 안동의 병의 태동' '육사 시의 해석의 가능성' 등을 연구하는 국학 연구자들과 안 동대 민속학과 임재해 교수를 비롯한 대학교수 등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연구되고 있다. 안동은 전통유교문화와 함께 중요 유. 무형문화재가 보존되고 있으며 또한 21세기 정신적 기반을 제공해 주는 고장으로 세계적 석학들이 한국학 연구의 메카로 삼고 있 는 곳이다.
안동은 유학 정신에 입각한 조선 시대의 관학인 안동 향교와 예안 향교, 그리고 성리학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도산 서원에서 보듯이 안동에서 교육받은 많은 선비들은 충실 열사들이었으며, 교육에 관한 역사와 전통은 뚜렷하다. 안동의 교육은 안동의 정 신을 길러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독립운동과 계몽운동 그리고 문화 예술계에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전통적인 교육 명소인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역동서원을 비롯한 유교 교육의 대를 이어서 지금도 1개의 종합대학교와 3개의 전문대학이 위치하고 있으며 십여 중고등학교가 있어 전통 교육과 첨단 교육을 이어가고 있다.
문학 부분은 전국 어느 도시보다도 많은 활동과 문인을 배출하고 있으며 음악 미술 연극 등 공연 전시회가 연간 140여 회나 열 리고 있다.
한편 안동대학교에서는 우리나라의 유일의 국학부를 개설하고 문학과 역사, 철학, 문화 등을 포괄적으로 연구하는 학부를 개 설하고 있다. 안동 지역의 문화적 역사적 전통을 염두에 둔다면, 안동대학 국학부는 국학에 관한 한 경쟁력을 확보했다고 자부 하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유학의 총 본산인 안동은 국학 연구의 최적지로 꼽히고 있다. 안동은 도산 서원을 비롯하여 총 45개의 도산 서 원과 차전놀이 놋다리밟기 등의 민속 문화재가 전승되고 있으며 특히 하회별신굿 탈놀이가 하회 마을에 고스란히 남아 전하고 있 을 뿐만 아니라 전국 유일의 민속학 전공을 설치한 안동대학교는, 지정문화재 최다 보유지역이며 퇴계학 등의 안동의 학문적 전 통을 이어 향후 21세기 세계정신의 메카로 성장할 수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또한 면학과 연구에 여건 확충을 하기위해 국내 유 수기업과의 연구프로젝트계약 체결하고 있다. 이와 함께 시민과 함께하는 장을 마련하기 위하여 명예학생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6.안동의 무형문화재
 
① 하회별신굿 탈놀이
 
중요 무형문화재 제 69호인 하회별신굿 탈놀이는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서 전해 내려온 것으로 예로부터 정오에 부락제를 지 낸 후 탈춤 놀이를 하여 하회별신굿이라 불러왔다. 이 굿놀이에서 쓰던 탈의 제작 시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12세기경에 허도령이 신의 계시로 제작하였다고 전한다.

 
  ② 차전놀이
 
1천 여 년 전 고려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전쟁이 안동에서 끝나게 되자 지역 주민들이 평화를 찾은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 동 .서부팀으로 나눠 동채 위에 대장이 올라타고 편을 지휘하면서 즐기던 민속놀이다. 차전놀이 중요 무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동채를 만드는 과정이 신중하고 엄격하여 옛날에는 원님이 직접 나와 지휘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동채의 크기나 견고성이 싸움 의 승패를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③ 놋다리밟기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공주 및 궁녀를 데리고 안동까지 피난하였다. 그때 예천을 지나 안동으로 행차 도중에 다 리가 없는 내를 건너야 했다. 공주가 어떻게 건너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인근 마을의 부녀자들이 엎드려 등을 연결하여 다리를 만들어 공주가 그 위를 걸어 내를 건너게 하였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민속놀이 이다. 무형문화제 제7호로 널리 학생들의 행사에 재현되고 있다.
 
④ 화상놀이
 
서후면 저전리에 전승되는 놀이로 단오날 전날 밤에 횃불을 돌리며 힘을 겨룬다.
썩은 고목 나무뿌리에 줄을 달아 불을 붙여 화상을 만들고, 이것을 빙빙 돌려 상대방의 화상에 걸어 빼앗는다.
 
⑤ 화전놀이
 
안동에는 옛부터 청명절(淸明節, 음력 4월 4.5일경)을 전후하여 부녀자들이 중심이 되어 베풀어지는 화전놀이가 유명하다. 이 놀이는 신라때부터 전래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으나 그 유래는 확실치 않으며, 조선조 후기의 문헌에 화전놀이에 대한 기록 이 나타난다.
이러한 화전놀이는 사전 준비단계를 거쳐서 행해지는데 그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청명절을 전후하여 마을의 부녀 잗르이 한 곳에 모여 놀이 가기에 뜻을 모으고 유사 등을 정한다. 유사는 마을 부녀자 들의 동의를 얻어 일을 진행한다. 보통 중년층의 부녀자들이 중심이 되어, 상(喪)중이거나 특별히 큰일을 앞둔 사람들葁 외에는 모두 참가한다. 이때는 시어른들이나 남 편들도 이 놀이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협력한다.
이와 같은 화전놀이를 가는 날은 전통사회의 엄격한 유교윤리에 얽매여 집안살림에만 급급하여 바깥 세상과 동떨어진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부녀자들이 단조롭고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날이다. 봄을 맞아 싱그럽게 움터오르는 자연의 완상과 거림 낌 없는 어울림을 통해 지나간 삶을 회고하고 새롭게 전개될 삶을 다짐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7. 관광.레져
 
① 하회마을
하회마을은 근래 한국 최고의 가면극이며 중요무형문화제 제 69호인 '하회별신굿'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 특히 이 마을은 신라 때부터 조선조까지의 2천년 한국민속문화사를 한 눈에 볼 수 잇는 '민속 보존장'이기도 하다. 또한 풍산 류(柳)씨의 유성룡(柳誠龍) 형제가 남겨 놓은 갖가지 유물. 유적들이 남아 있어 하회 마을의 명성을 높이고 잇다. 문화부는 마을 내의 건물 주변 풍경지를 포함한 150만평에 이르는 하회 마을 전체를 중요 민속자료 제122호로 지정했다. 민속 연희로는 하회별신굿 탈놀이와 각 성(姓)중심의 당제.풍굿.토족 중심의 줄불놀이 등이 꼽힌다.
하회 가면극은 500여 년 전부터 전승돼 오는 파계승과 양반에 대한 풍자,모욕,상민들의 빈궁함 등을 그린 민중극이다.   음력 섣달 보름부터 정월 보름까지 이어지는 부락제 후의 이 가면극에 사용되는 '하회탈' 세계적인 가면으로 자부되고 있다. 현재 하회마을에는 국보로 지정된 하회탈, 징비록과 보물인 충효당.양진당. 서적 2종, 중요 민속자료인 가옥 8점이 보존되어 잇다. 하회마을은 사회적으로 씨족 집단이 모여 살아오는 전형적인 동성 촌락이다. 따라서 하회마을은 성리학적 가치 관념의 '선비 문화'를 비롯한 조선 시대의 문물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전형적 전통 씨족 부락이다.
 
② 법흥동 7층 전탑
 
이 탑은 법흥동 군자정 부근에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 가장 큰 벽돌로 쌓은 탑이다. 통일신라 시대 작품이다. 기단에 네모꼴 8주 중상(衆像)과 사천왕 상을 양각한 판석을 세워 축조하였으며 탑신부는 진회색의 무문전을 어긋나게 쌓아 올렸다. 현 재의 높이는 17m이고 기단 폭은 7.5m이다.
 
③ 안동댐
 
낙동강 상류에 건설한 다목적 댐으로 76년 10월에 준공되었다. 높이 83M의 토석댐으로 만수 면적은 51.5제곱킬로미터의 전력을 생산하는 역조정 발전소가 잇다. 전기의 발전과 함께 낙동강 하류 지방에 물을 공급하고 하류 지역의 홍수를 예방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댐에는 민속경관지내에 있는 민속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에는 안동 지방의 고유한 생활상 가운데 통과의례, 의식주 생 활, 교육, 민간신앙 등 유교문화를 다시 볼 수 있는 민속자료 3,7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안동이 낳은 저항시인 이육사의 시비 또한 이곳에 있다.
 
④ 임하댐
 
낙동강 지류에 건설한 다목적 댐인 임하댐은 92년 6월에 준공된 폭이 73m, 길이 513m의 사력 댐이다. 5만 KWH의 전력을 생산하 고 낙동강 하류 지역의 홍수를 예방하여 맑은 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⑤도산서원.
 
사적 제 170호인 도산서원 시중심지에서 북쪽을 25KM 지점인 도산면 토계리에 있다. 퇴계 이황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제자들 과 유림이 선생의 높은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선생께서 직접 지어 유생들을 가르치며 연구하시던 도산서당 뒤편에 세웠다. 선조 께서 한석봉에게 "陶山書院"이란 현판을 쓰게 하여 하사하셨다. 이후 도산 서원은 영남 유림의 구심점이 되었다. 서원 내의 광명실에는 5천여 권의 장서가 있고 유물 전시관에는 청려장, 매화벼루, 투호, 혼천의, 성학십도, 도산십이곡 등 많은 서 책과 유품이 전시되어있다.

 
 

 

      

 

 

    

  ⑥ 봉정사

 
서후면 태장리 있는 이 절은 우리나라 목조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국보 제15호 극락전, 조선 초기 건물로 가히 대표적이라 할 수 잇는 보물 제55호 대웅전, 화엄강당외 고금당, 3층 석탑 등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각 건조물들이 상호간에 보여주는 균형미가 아주 빼어나다.
 
 
⑦ 지례예술촌
 
임동면 지례리에 위치하고 있다. 임하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있던 고 건물들을 이곳에 이건 복원하여 조성하였다. 이곳은 예술 인들의 창작 활동 및 회의 장소, 전통 생활 학습장, 유교 연수원 등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문화재 자료 3점이 있다.
 
⑧ 용계 은행나무
 
이 거대한 은행나무는 길안면 용계리에 있다. 이 나무는 높이가 37m, 뿌리 부분의 둘레가 16m로서 우리나라 최대의 거목이며 수령이 약 700여 년으로 추정되고 천연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임하댐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을 성토 상식 공사를 하여 제 자리에서 15m위로 들어 올려 보존하게 되었다. 지금은 관광 명소로 주목을 받고 있는 곳이다.
 
 
 
 
 
⑨ 암산보트장
 
남후면 광음 1리에 위치한 암산보트장은 교통이 편리하고, 절벽과 물이 있어 경치가 빼어나며 인근에는 고산 서원이 있다. 또한 겨울에는 빙질이 좋기로 이름난 천연 스케이트장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또한 그 옆 산에는 측백나무가 자생하고 있으며 인 공과 자연이 어우러진 터널이 구안 국도에 있어 운치가 넘치는 곳이다.
 
 
8.특산품
 
①안동포
 
안동포는 올이 가늘고 빛이 노란 삼배로 안동 지방의 오랜 특산물이다. 조선 중기에 궁중 진상품으로 지정된 이루로 지금까지 명산물로 각광을 받아 오고 있다.
 
②하회탈.
 
하회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탈로서 12세기경에 허도령이 신의 계시로 제작한 것이라 한다. 원래 12개 탈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부네, 중, 백정, 선비, 각시, 이매, 초랭이, 양반, 할미 등 9개가 남아 있다.
 
 
 
 
③안동소주.
 
안동소주는 예로부터 안동 지방의 특산물로 알려진 술로서 가문마다 독특한 재료와 방법을 가지고 만든 청주를 불에 고아 만 든 순곡주이다. 솥에 물을 넣고 끓이다가 멥쌀로 만든 술의 원액을 넣은 후에 그 위에 시루를 올려놓고 끓이면서 찬물을 번갈아 섞어 주정을 물방울이 되게 하여 소주를 받아 내는데, 도수는 45도 정도 된다. 쌀로 3번 빚은 소주인 만큼 은은한 향취에다 감칠맛이 특유한 증류식 소주이다.
 
④ 안동산약.
 
전국 재배 면적의 70%를 차지하는 안동 산약은 내장 기능의 보호에 좋으며 특히 위장, 폐, 당뇨, 변비에 효과가 있다.
 
⑤ 안동고추.
 
햇빛에 말려 빛깔이 곱고 영양가가 높아 최고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9. 민속과 문화행사
 
안동에는 안동만의 독특한 민속 문화를 가지고 있다.
위에서 열거한 수많은 문화재의 관광과 무형문화제의 공연을 볼 수 있는 때는 안동민속문화제가 열릴 때이다. 이때는 거리의 상가나 각 가정의 대문에는 청사 초롱을 달고, 며칠 전부터 고을 축제로서 시민들의 단합을 나타내는 행사들을 준비한다.
 
행사에는 민속놀이들과 가장행렬, 백일장, 미술실기대회, 서예전, 각종전시회, 농악대회, 국창대회 등 전통문화 전반에 걸친 연중행사이다. 전야제까지 3일에 걸쳐 열리는데 시민과 각급 학교 학생들이 모두 참여하여, 농악대회, 장사 씨름대회는 전국적인 규모로 열리고 있다.
 
옛날 안동 주변의 여러 곳에서는 '별신'이란 행사가 있었다. 원래의 행사의 목적은 서낭신에 대한 안녕 질서를 기원하는 것이 었으나, 그것이 차츰 확대 변화하여 시장 번영을 위한 목적성으로 바뀌어지고 나아가 고을의 성대한 축제로 변모하여 왔다.
 
안동민속축제는 조상의 얼을 되새겨 오늘에 되새기고, 나아가 정신적 문화의 창달을 위하여 1년에 한 번식 개최되는 민간 주도 의 큰 잔치로서 이른바 '별신'이라 할 수 있다.

 
 
10.안동사람의 마음, 그리고 미래
 
안동은 예로부터 '근검한 풍속과 충의 열열함은 남쪽지방에서 으뜸'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예로부터 문학하는 선비가 많 고 무엇보다 예절을 지키며 살아가는 전통을 간직한 안동은 이제 다가오는 21세기 정신문화의 산실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한 이후 편안한 곳으로 불리어진 안동은 그 나름의 정신적 지주를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안동 사람 일개인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안동 사람의 마음이다.
 
그 마음에는 이미 역사가 검증한 것처럼 안동에는 국가 위기 상황마다 모든 안동사람이 나아가 국난을 극복한 것은 한 두 번의 일이 아니었으며 앞에서 살펴본 퇴계,유성룡 등의 인물들만으로도 충분히 공감하고 남을 것이다.
 
안동사람은 인사를 할 때 '누구의 자손이요'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단순히 조상의 덕으로 나도 거들먹거려보겠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훌륭한 조상님에게 욕되는 짓을 하지 않겠다는 그런 숭고한 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또한 풍부한 불교유적들은 그 자체로 역사와 종교연구의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으며 또한 산공부를 할 수 있는 학습장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 안동에는 역동우탁, 퇴계 이황, 서애 유성룡 등의 성현이 남긴 유교 성리학의 전통문화와 차전놀이, 화상놀이, 하회탈춤 등의 민중문화가 공존하고 있어서 국내는 물론 세계적 국학 연구자들이 안동을 지나지 않고는 한국을 공부했다고 할 수 없는 그 런 위치에 이르렀다.
 
그래서 안동대학교를 위시한 범 시민적인 성원에 힘입어 한국국학진흥원을 설립하고 체계적 연구와 사료정 리를 위해 온 시민과 연구자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국학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
 
안동사람은 선조들의 뜨거운 조국사랑 정신을 이어가면서 다가오는 최첨단 시대에 좀 더 활기찬 지역개발을 서두르면서 경북북 부의 중심지로서, 그리고 선비정신을 이어 새시대의 주역으로 부상하려는 몸짓을 멈추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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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석문화을 꽃피운 안동 동쪽의 진산인 와룡산 일조경과 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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