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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향 안동
- 1.자연환경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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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을 따라 오르다가 보면 서울을 닮은 한 도시가 나온다. 주변에 낮은 산들이 흩어져 있으며 낙동강이 시가 지 남부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다. 낙동강은 동부에서 반변천을 합하고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송야 천과 합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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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 언저리에는 평야가 이루어져 경작지와 주거지로 쓰여진다. 태백산맥이 굽이쳐 흘러오다가 소백산맥으로 뻗 어 영남산이 남북으로 뻗어 동북쪽의 두 개의 산과 어울려 산간 분지를 형성하여 자리잡은 곳이 안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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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북도 중앙에 위치 한 안동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토지가 비옥하여 지리적으로 부락이 형성될 알맞은 지리적 위치를 갖춘 곳이다. 신석 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기도 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곳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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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의 기후는 내륙에 자리한 분지이므로 한서의 차가 크게 나타난다. 연평균 기온은 12.5도이며 연간 강수량은 924밀리미터 로 작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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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선 철도가 안동시의 중앙부를 남북 방향으로 뻗어 나가면서 영주에서 의성으로 이어져 있고, 멀리 충청북도의 당진과 도내 의 동편 영덕을 잇는 국도가 안동시를 중심으로 엇갈리며 방사상으로 퍼지는 지방도가 뻗어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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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더욱 전통유교문화와 관광.레져의 중심이 될 안동은 너른 땅에 불룩 불룩 솟은 골짜기마다 역사와 전통을 간직하며 빠르게 변해지는 시대에 다가오는 21세기 경북 북부 내륙에 위치하여 행정, 교육, 문화 중심지로 안동을 기점 으로 한 북부권 연계 발전 권역을 형성하고 있어 지금보다 미래를 잘 전망할 수 있는 고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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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역사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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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은 삼한 시대에는 진한에 속했으며, 삼국사에 의하면 B. C 57년 염상도사(念尙道士)가 길지를 찾아 이곳에 와 처음으로 창 녕국이라는 부족국가를 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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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때는 고타야군으로 되었다가 고구려에 인접한 관계로 한때는 고구려에 속하여 굴화현(屈火縣)으로 불리었으며, 진흥왕 때 부터는 계속 신라에 속하게 되었다. 경덕왕(757년)때 군현제도의 개혁으로 고창군으로 개칭되었다가 그후 일계군(一界郡), 지평 군(地平郡), 화산군(花山郡), 고령군(古寧郡), 고장군(古藏郡), 석릉군(石陵郡) 등으로 명칭이 변경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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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초 태조가 후백제의 견훤이 병산(甁山)에서 싸울 때 고을인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길(張吉)이 고을민을 이끌고 태조를 도와 그 공이 컸으므로 부(府)로 승격하고 안동으로 고쳤다. 이때가 태조 13년 930년이다. 그후 영가군(永嘉郡)으로 고 쳤다가, 성종 14년 서기 995년에 길주지사(길주刺事), 현종 3년 (1012)에 안무사(安無使), 9년에 지길주사(知吉州事)로 하였다가 21년에 다시 안동부(安東府)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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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종 27년(1197) 남적(南賊) 김삼(金三), 효심(孝心) 등이 주군(州郡)을 겁탈 노략하니 차사(差使)를 보내어 평정하였는데 부( 附)가 공이 있다 하여 도호부로 승격하고, 신종 7년(1204년) 동경(東京; 경주)의 야별초(夜別抄), 패좌(悖佐) 등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자 이번에도 이를 진압하는데 공이 있었으므로 대도호부(大都護附)로 승격하였다. 충렬왕 34년(1308년) 다시 복주 목(福州牧)으로 고쳤다가 공민왕 10년 (1361년)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왕이 남쪽으로 행차하여, 이 고장에 머무를 때 고을 백성 이 충성을 다해 왕을 봉공(奉公)하였으로 다시 대도호부로 승격하고 인근 17개 군현(郡縣)을 관할하게 했다. 우왕 9년 (1383년) 에는 안동도(安東道)로 개칭하고 원수(元帥)겸 부사(附使)를 두었다가 14년 부사제로(附使制)로 환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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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에는 세조때에 진(鎭)을 두고 부사로써 병마절도부사(兵馬節度副使)를 겸하게 하였다가 얼마 후 부사(副使)는 파하였 다.
- 고종 32년(1895년) 관찰부(觀察府)를 설치하여 인근 9개군을 통괄케 하다가 1년후 폐지하여 군으로 고치고, 1914년 예안군(禮 安郡)을 병합 19개 면으로 편성하고 1931년에는 안동면을 안동읍으로 승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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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에 안동읍 행정구역을 그대로 시(市)로 승격하여 명칭을 신안동시라고 하였으나, 시명에 대한 시민들의 의사에 따라 개 칭하여 1963년 1월 1일을 기하여 안동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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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에는 다시 안동시와 군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도농복합형 시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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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역사적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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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삼국의 쟁패기에 이 지역은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후백제의 세력이 강하였으나, 960년 병산 전투에서 고려가 승리함에 따라 인근 지역까지 모두 고려의 세력권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이 지역의 호족인 김선평, 권행, 장길 등 의 공이 컸는데, 이로 말미암아 세 사람은 크게 등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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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명종 27년 경상도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난 민란의 진압 과정에서 안동부가 이의 토벌에 적극 참여하여 안동 도호부로 , 신종7년에는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충렬왕 34년 복주목(福州牧)으로 개편되었다가 고려말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 10 년 왕이 이곳으로 파천 오면서 1362년 다시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고려 후기에 몽고의 침입으로 개경을 중심으로 한반도의 중서부 지역이 크게 황폐해지면서 이곳은 국가의 물적, 인적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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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지역은 고려 후기이래 수많은 인물이 배출되었으며 점차 명문 거족들이 인근 외곽 지역으로 옮겨와서 동족 마을을 이루었다 .
- 이 지역은 고려 후기이래 정치적. 학문적으로 중시되었고, 수많은 인물이 배출되었으며, 동족 마을이 많이 있어 칠성 이씨, 하회 유씨, 의성 김씨, 진양 하씨 등의 명문이 대를 이어 살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성룡. 김성일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유종개( 柳宗介) 등의 의병장 활동이 두드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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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의병투쟁에도 적극 참여하여 이 지역은 경상북도 지역 의병 투쟁의 중심지가 되었다.1919년 3.1운동 때에는 3월 16일 예 안 장날, 3월 18일 안동 장날을 기하여 수천 명의 민중이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고, 이후 각 지역의 장날에서 시위 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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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 중 항쟁----------------
- 무신 정권이 수립된 뒤 고려 사회가 동요하자 전국 가지에서 농민. 천민의 난이 일어났는데, 안동 민 고려 명종 16년 안동에서 일어난 민란으로, 란도 그 중의 하나였다. 1186년 안동수령 이광실(李廣實)이 탐학하여 백성들을 수 탈하자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래서 정부에서 이광실을 죄로 다스려 귀양보내자, 비로소 이 난이 가라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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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안동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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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근대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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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삼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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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가 위태로울 때 위로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아래로 힘을 합하여 향토를 수호하는 것이 백성된 자의 도리라 한다면 삼태사(三太師)는 이런 훌륭한 일을 이루어 길이 우리 후손들에게 산교육이 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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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말엽, 당시의 신라는 국운이 쇠약하여 곳곳에서 도적 떼가 성했고, 특히 옛 백제 땅에서는 후백제를 세우고, 옛 고구려 땅에서는 고려가 일어나 날로 세력이 강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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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7년(경애왕 4년) 견훤은 군사를 이끌고 경주까지 쳐들어와서 왕을 자살케 하고, 왕비를 능욕하여 재물을 함부로 빼앗아 그 피해가 막심하였으나, 힘이 약한 신라로서는 막을 수가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고려 태조 왕건은 군사 오 천 명을 이끌고 구원 하러 왔으나, 오히려 대구 부근의 공산(公山) 동수(桐數) 싸움에 대패하여 신숭겸, 김락 등 많은 장수와 군사를 잃은 채 겨우 목 숨을 부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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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태조 12년, 견훤은 승승장구한 여세를 몰아 의성, 풍산 등의 여러 고을을 빼앗아 안동을 공격해왔다. 십 년 전 공산 싸움에서 패한 이후 군사를 기르며 때를 기다리던 고려 태조도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안동에 서 고려와 후백제의 두 군사는 生死를 건 대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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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듬해 1월, 예안에 주둔하고 있던 고려 군은 안동 북쪽의 병산(甁山;안동시 와룡면에 있음)에 진을 치고 후백제 군도 맞은 편 의 석산(石山; 안동시 와룡면에 있음)에 진을 치고 대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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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승리를 거듭한 견훤의 군대는 병력도 많고 사기도 충천하였으나 고려 태조의 군대는 그렇지 못하였는데, 대상(大相) 홍유같은 이도 전쟁이 불리하면 후퇴할 길을 먼저 닦아야 한다고 태조에게 진언(進言) 할 정도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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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의 안동 성주였던 김선평(金宣平)과 권행(權幸), 장길(張吉) 세 분은 일신의 안전만을 위한다면 마땅히 견훤에게 항복하는 것이 옳겠으나 경애왕의 죽음에 대한 원수갚을 좋은 기회로 알고, 또 포악 무도한 견훤으로부터 이 고장을 수호하기 위하여 고 려 태조에게 귀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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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고려 태조는 크나 큰 힘을 얻게 되었고, 이 고장 지리에 밝은 세 태사 분들은 강대하고 사나운 견훤의 군사와 정면 대결 을 하여서는 승리하기 어려움을 알고 고을 민을 이끌고 고려 군대와 힘을 합하여 저수봉(猪首峰:현 안동시 뒷산)으로부터 밤중에 견훤의 군을 뒤에서 습격하였다. 때를 맞추어 고려 태조가 군사를 이끌고 정면에서 진격하니 견훤은 견디지 못하고 팔 천명의 군사를 잃은 채 패주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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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로부터 고려의 병력은 날로 강성해지고 청송을 비롯한 안동 주위의 삼십여 고을과 동해 연안의 여러 고을 등을 합하여 백여 고을이 모두 고려에 귀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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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태조는 원래 경주 김(金)씨 세 분에게 선평은 김(金), 행은 권(權), 길은 장(張)씨의 성을 내려 주고, 고창군을 안동부( 安東府)로 승격시켜 삼태사의 식읍(食邑)으로 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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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후 이 고을 군민들은 삼태사의 덕을 추모하여 사당을 짓고 해마다 봄, 가을에 제사를 받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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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②퇴계 이황
- 퇴계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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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는 1501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현 노송정 종택 태실(胎室)에서 탄생했다. 어버지는 진사 李植이고, 어머니는 의성 김씨와 천천 박씨 두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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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는 진사에 합격한 해에 퇴계를 두었으나 서당을 지어 교육을 해보려던 뜻을 펴지 못한 채 퇴계가 난지 7개월 만인 이듬 해 6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퇴계의 어머니는 전처에서 난 자녀와 친생자를 차별 않고 부도(婦道)를 지키면서 자애로이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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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가 '나에게 있어 영향을 가장 많이 준 분은 어머니'라 할만큼 어머니는 '과부의 자식은 몇 백 배 더 조신해야 한다'는 엄 한 가법(家法)을 세워 자녀를 교육하였고 농사와 양잠으로 생계를 꾸려 가며 가정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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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는 이렇듯 아버지의 사랑을 못 받고 불행하게 편모슬하에서 자라면서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아버지의 못다 이룬 교육에 대한 꿈을 가슴에 새겼고, 그의 천성이 남다르다고 '출신하여 벼슬길에 나더라도 현감 한 고을만 해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꼭 지키리라는 신조를 가지고 처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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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의 집 진성(眞城) 이씨(李氏)는 선대부터 학문을 쌓아 덕을 기르고 입신 양명하되 소나무의 굳을 절개를 본 받아 대의와 명분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가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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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의 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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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가 성장한 가정 환경은 훌륭한 교육적 배경이었으며 그를 가르친 스승은 조상이라 할 수 있다. 여섯 살 때 셋째와 넷째형 이 진주 목사로 가 있는 숙부를 따라 월아산(月牙山) 청곡사(靑谷寺)에서 공부할 때, 퇴계는 어려서 이웃에 사는 노인에게 천자 문을 배웠다. 12살 때 숙부가 병으로 휴직하고 집에 와 있을 시기에 논어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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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이 제육(學而 弟六)에서 공자가 말한 '젊은이들은 집에 들어오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이웃 사람을 공경하여 , 행동을 조심하고 신의를 지키며, 널리 여러 사람과 사귀되 어진 이와 가까이 할 것이다. 이런 일들을 행하고 남은 힘이 있으면 비로소 글을 배운다'를 익히고 나서 '사람의 자식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가 바로 여기 있구나'하고 깨달았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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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장자 편을(子張篇)을 배울 때 '理를 보고 는 "모든 사물에서 마땅히 그리해야 할 '시(是;바른 도리와 옳은 일)'를 '理 '라 합니까?"하고 물었다. 그때 숙부가 "너의 학문은 이만하면 문리가 다 깨쳤다"고 기뻐하고 형님은 돌아가셨어 도 이 아들을 두셨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고 안심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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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는 숙부에게 이렇게 논어를 배운 후 누구에게도 배운 일이 없다. 13세와 15세 때는 형과 사촌 자형을 따라 청량 산맥 사서 함께 독서할 만큼 성장하였고 16세 때는 사촌 동생 수영(壽 )과 친구 강한(姜翰), 권민의(權敏義)를 데리고 천등산 봉정사(鳳 停寺)에 들어가서 독학할 정도로 학문이 숙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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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 때는 안동부사 재임 중인 숙부가 별세하여 물을 곳도 없었을 뿐아니라 18,9세에 읊은 시, 영천(榮川)에서의 의학 강습, 2 0세 전후에 침식을 잊고 고질병이 생기도록 용수사에서 홀로 주역 공부를 한 행적들은 그가 선생없이 홀로 공부한 불행의 수학 과정을 말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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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문에 퇴계는 글자 한자도 놓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연구하게 되었고 비록 옛 성현의 글이라도 의심을 갖고 파고들어 재해 석하는 학문 방법을 개척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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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부와 평생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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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는 학문하는 목적을 입신양명해서 성현군자가 되는데 두었다. 유학 강령대로 수기치인(修己治人;자기 인격을 완성하고 남 을 교화함)에 치중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과 군자유(君子儒)를 닦았다. 그는 공자이래 성현 군자의 모든 가르침을 실험 실천하 여 생활하기에 힘썼을 뿐 아니라 불가와 도가의 공부도 몸소 경험해서 허구(虛構;이단과 사설)와 정론(正論)을 판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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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동 계(參同契) 수련과 선(禪)의 고행 및 활인심(活人心)도 연구 도입하였다. 심경(心經)의 신봉, 경의(敬義)의 견지, 알면 행하고( 知行 進), 자연 법칙과 인간 생활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사상(天人合一觀)은 그의 유학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퇴계의 학문은 실천 도학(實踐道學=實學)이며 생활 그 자체가 학문인 것이다. 성현의 가르침을 실천해 보고 얻은 결론으로 논리를 세웠고(立 言), 도덕과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敎化)을 평생 사업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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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조 건국 혁명 이래로 정변과 사화가 수없이 거듭되더니 퇴계 때에 와서 극에 달했다. 간쟁과 아첨, 불의와 모함, 탐학과 살육은 모두 탐욕 때문에 일어났으며, 남을 누르고 저만 잘 살아보겠다는 이기심 때문에 인애사상(仁愛思想)이나 위인(爲人)정신 은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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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비들은 책읽기는 뒷전이고 과거하여 벼슬에 나아가 세도를 잡기 위하여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안타 까이 여겼다. 퇴계는 병든 사회와 비뚤어진 학문관의 치료 방법으로서 성학(聖學)과 '이(理)'를 천명(闡明)했다. 국민을 게도( 啓導)하기 위하여 청렴 결백한 공직자 상을 실천해 보였고, 교육을 통하여 사회 개조의 역군을 기르는 힘겨운 사교육(私敎育)사 업도 추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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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26세 때 한평생의 사업 포부를 밝혔으며, 급제한 후로는 관직에 나아가 깨끗한 공도관(公道觀)을 가지고 행정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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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세 때에는 교의 길로 나서겠다고 선언하고, 50세 바로 전에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지방관을 그만두고 토계(土溪;안동시 예 안면 소재)로와 정착하여 다음 해에 아버지의 유업도 이룩하고 자신의 사업에 몰두하고자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세워 경향에서 모여드는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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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황의 교육과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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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교육시키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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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교육관에 대해서 정약용은 '일일이 실천을 통해서 많은 인재를 길렀으며, 누구든 어떤 부문이든 가르쳐 모두 대도(大道 )에 이르게 했다. 중도에 폐하는 사람이 없이 끝까지 가르쳤으며, 학문을 닦아 선생의 뒤를 잇게 했다. 퇴계 선생의 가르침을 읽 으면 손뼉치고 춤추고 싶으며 감격해서 눈물이 나온다. 도가 천지간에 가득 차 있으니 선생의 덕은 높고 크기만 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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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의 교육의 목표는 실천 도학과 착한 사람 만들어 인간의 도덕과 사회의 기강을 세우는 데 있었다. 사후의 시호(諡號)를 내 리려고 국왕이 행장을 짓게 했지만 교육과 철학과 생활과 공적이 워낙 크고 넓어 누구도 그 것을 다 서술 할 수 없어 그만 두었 다고 할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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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는 과거(科擧)중심에서 학문 중심으로, 지식 위주에서 생활 위주로, 공리(功利)의 위인지학(爲人之學)에서 덕행의 위기 지학(爲己之學)으로 , 개인의 이해보다 집단의 화애(和愛)로, 권위와 체면보다 예양(禮讓)과 합리성을 강조해서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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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는 폭넓고 심오한 교육 내용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에게서 수학한 제자가 많았다. 다른 선생에게 배워서 벼슬길에 오른 사 람, 지위가 높고 나이가 많은 사람이 배우러 온 것도 다 새로운 학문 세계와 이제까지 접근하지 못한 새로운 이론을 배우기 위해 서 찾아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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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는 한 때 성균관 대사성으로 사학(四學)의 유생과 교육자들에게 나라가 학교를 만들어 교육하는 목적을 지도한 일이 있었 다. 퇴폐한 공교육(公敎育)으로서는 개혁의 가망이 없자 인간 개조와 윤리 회복을 위해서 서당 교육을 펴 나갔다. 어진 옛 선배 를 받을어 섬기고, 인재도 양성하기 위해 서원을 증설하고 권장 확대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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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에게 배운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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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에게서 배운 사람들은 학문의 전문성과 관계로 나가 문달(聞達)한 사람, 도학과 교육에 현달(顯達)한 사람 등으로 정확히 분류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유성룡과 권호문과 같은 명 정치인과 문학인들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나왔으며 정확히 연대를 아는 사람만 해도 128명에 달하고 불명한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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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는 벼슬길인 공직에 나아가서 그의 철학을 실제에 옮겼다. 특히 사양과 예의 염치(禮儀廉恥)를 시범으로 보였다. 140여 직 종에 임명되었으나 일흔 아홉 번을 사퇴하였다. 30여 회는 수리되었지만 49회는 뜻에 없는 근무를 하였다. 대사성, 대제학, 판서 , 우찬성, 판부사 같은 아주 높은 지위에 올랐지만 어머니의 교훈을 지키려 애썼고, 무능하면 물러가고 직책이 없으면 서울에서 떠나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또한 실천에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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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처음부터 물러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일단 그 직책을 얻으면 책임과 소신껏 일을 했다. 문무(文武)를 겸비한 국방책, 침 범한 왜적을 용서하고 수교를 해야 한다는 외교정책을 주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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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는 왕도를 깨우친 무진 육조소, 파면을 당하면서도 궁중의 기강을 바로 세운 진언, 십도를 올려 나라의 교학(敎學)을 개혁 한 일, 군수로 나가서는 수리시설을하여 농업을 진흥시켰고, 단양에서는 팔경을 지정하여 자연을 가꾸었으며, 풍기에서는 서원에 서 하는 교육의 새 제도를 확립하였고, 우리나라 처음으로 산수를 기록하여 치산과 등산하는 법도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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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황이 후세에 끼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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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는 당시까지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분이다. 전문적 저서로는 『주자서절요』,『송계원명이학통록』,『자성록』,『계몽전 의』,『통서강해』,『사서석의』,『삼경석의』, 『심경분주』,『성학십도』,『성현도학연원』,『독서설해』,『도산십이곡』등이 있고, 일기는 이름이 전하는 것만도 11종이나 된다. 시는 제목을 아는 것이 3558수, 편지는 2964편의 문집이 전하는 등 수많은 저술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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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가 끼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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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 및 사회의 윤리기강이 회복되어 효와 충이 성행되었으며, 민풍이 순후해졌고, 공직자 공사를 분별할 수 있게 되었다. 예 의 염치를 알고 벼슬을 사양하며, 부모를 모시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성리학과 예학을 발전시켰고, 학자들이 연구에 열을 올려 저술이 급작히 왕성하여졌다. 유성룡을 통해 이단을 물리치자 중국에서도 道, 佛에서 정학(正學)쪽으로 힘을 기울였다. 문 도들이 뒤를 이어 교육에 힘쓴 결과 인물의 전성기를 이루어 놓았다. 혼례와 제례가 간소 규범화되고, 관과 민이 폐를 끼치는 일 이 줄어갔다. 퇴계 이황을 사상을 받아들여 일본은 무(武)의 정치에서 문(文)정치로 발전시켰고 남에게 폐를 안 끼치는 정좌법( 靜座法) 등으로 국민 습관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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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의 이런 높은 사상을 배우기 위해서 세계적으로 국제 퇴계 학회가 일본, 미국, 독일, 홍콩, 소련, 한국이 유치하여 개최 하고 있으며 대학에서 대학 연구소를 설립하고 퇴계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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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개인주의와 물질문명의 파탄을 구제하고 자연과 인간이 인애(仁愛)하며, 모두가 평등하고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 해서 퇴계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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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③ 서애 류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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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성룡은 중종 37년, 1542년에 나서 1607년까지 생존한 인물이다. 경상도 의성현 사촌리에서 출생한 그의 호는 서애이며 문충 (文忠)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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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16세에 향시에 들고 안동 도산(陶山)에 가서 퇴계에게 사사하였으며, 태학(太學)에 입학하고, 26 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에 관계에 나아가 이조 좌랑, 도승지, 상주 목사, 경상도 관찰사와 이. 예. 병조 판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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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홍문 관 부제학 대제학 대사간 대사헌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 시대에 그와 같이 현직을 모두 역임한 사람은 없을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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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때는 영의정으로 도체찰사가 되어 내정 외교 군사를 총괄하였다. 그는 문인이며 유학자였으며 군사에도 뛰어난 지식 을 갖고 있어서 임란 중의 청야책( 野策) 군사 훈련, 산성 수축 등의 전술은 그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 그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향 안동 하회(河回)에 돌아가 은둔생활을 하며 과거를 회고하여 본인이 찬술한 차자. 장계 등 을 정리하여 『징비록』『근폭집』『진사록』『군문등록』 등을 저술, 후에 『서애집(西厓集』으로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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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성룡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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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성룡은 1542년 에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본래 안동부 풍산현 사람이었으나 6대조 때부터 의성현의 하회촌(河回村)으로 옮 겨 살았다. 그의 집안은 고려 왕조 이래 명문으로 조부 유공작은 간성군수를 지내고 부친 류중영은 벼슬이 황해도 관찰사에 이르 렀으며, 모친은 안동 김씨 광수(光粹)의 딸이었고, 그는 그 분의 둘째 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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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살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하여 6세에 『대학』을 배우고 8세에 『맹자(孟子)』를 배웠다. 그는 어릴 때부터 몸가짐이 의젓 하고 어른스러워서 여러 아이들과 놀 때도 쓸데없는 잡담과 상스러운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고, 글공부에만 전념하여 부모나 스 승의 꾸지람을 듣지 않았다.
- 퇴계(退溪)에게 사사(師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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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시대 조정은 처음 과거를 보는 유생들 모두에게 서울의 동.중.서.남 사학(四學)에서 『중용』『대학』을 강독하게 하였다 . 류성룡은 13세에 동학에 가서 이 강독에 참여하였는데 구두(口讀)에 익술할 뿐만 아니라 글의 깊은 뜻까지도 모두 잘 알았다. 이에 시험관인 강관(講官)은 크게 감탄하고 칭찬하면서 '장차 큰 유학자가 될 것이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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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21세 되던 해 9월에 도산에 가서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찾아 그 문하에서 수개월 『근사록(近思錄)』 등을 수업하여 성현(聖賢)의 길에 큰 감명을 받았다. 이때부터 그는 성리(性理)에 관한 학문에만 전념하면서 그 실천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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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는 유성룡 을 가리켜 "이 사람은 하늘이 내린 사람으로 장차 나라에 크게 될 것이다"라고 칭찬하였고, 퇴계의 고제자인 학봉(鶴 鳳) 김성일(金誠一)은 "우리들은 퇴계 선생님을 모신 지 오래되었지만 한 말씀도 칭찬 받은 일이 없는데 公만이 이런 칭찬 을 받았다"고 말하였으며, 또 다른 사람에게 "서애는 나의 스승이다"라고 하였더니 유성룡은 "나는 학봉을 따라 갈 수 없다"고 서로 높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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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종 19년 (1564) 유성룡이 23세 되는 해에 사마시(司馬試)의 생원. 진사 양과에 합격하고 다음해에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더욱 학문을 닦았는데, 그는 성균관의 태학생(太學生) 전원이 임금께 상소를 올려 나라 일의 잘못을 고치려 할 때에 본인의 의 견과 다른 점이 있으면 끝까지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다음해 10월에 대과(大科)에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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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본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사람(士林)으로서 초야에 묻혀 마음내키는 대로 공부하려 하였으나 부친과 형의 강권에 못 이겨 억지로 과거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정을 안 퇴계는 그의 형에게 보낸 시에서 '그대의 아우 처음 급제로, 얽매이게 될 세상일에서 벗어나려 함이 가상하다'라고 하였다.
- 현직을 역임하다.
- 유성룡은 대과에 급제한 다음달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승무원 최하급 직위인 종9품 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됨으로써 관직 생활 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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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였는데, 이후 3년 사이에 그는 예문관 검열(藝文館 檢閱) 겸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 이 되고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으로 승진되었으며, 종조 좌랑을 역임하였고, 선조 2년(1569) 그가 218세 되던 해 10월에 성절 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明)나라 수도인 북경에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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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절사의 서장관은 젊고 학문과 시문에 뛰어난 인 물을 선임하였는데 그가 발탁되었는 것이다. 그는 명나라의 문물을 견문하고 그곳 학자들과 의견을 교환하였으며 태학(太學)의 학생 수백 명과 학문을 토론하였는데 모두 유성룡의 학문과 이론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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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세 되던 해 그는 고향인 낙동강의 물줄기가 휘돈다고 하회(河回)라 이름하는 곳의 서쪽 언덕(西厓)에 서당을 지으려다가 터 가 좁아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스스로 호를 '서애'라하여 그 당시의 감회와 포부를 길이 간직하고자 하였으며, 후에 이 언덕 을 상봉대(翔鳳臺)라 이름하였다. 지금도 하회마을의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바라보면 그리 높지 않은 곳에 '서애'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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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 15년에는 도승지와 대사헌이 되고, 2년뒤에는 예조판서에 뛰어 오르고, 선조 21년에는 형조판서로서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임하고 병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 같은 빠른 승진에 대해 그는 부당한 일이라고 누차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은 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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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의정으로서 이조판서까지 겸임했을 때 상소를 올려 '우리 나라가 여러 대를 내려오면서 삼공(三公 )으로 이조판서를 겸한 이는 없었는데, 훗일에 혹 조정에서 세력을 잡으려는 사람이 신으로 구실을 삼는다면 국가의 화근이 신에 게부터 시작된 것이니 신이 이러한 폐단을 직접 터놓을 수는 없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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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대해 선조는 '그대는 직무에 충실하고 사양하 지 말 것이며, 인재를 등용함에 적격자를 잘 가려 조정의 기풍을 맑게 하라'고 하였다. 그는 임란 전 해 좌의정이 되었다.
- 유성룡이 이와 같이 모든 청요직을 역임하여 빠르게 승진하여 현직을 맡게 된 것은 그의 박학과 관인(官人)으로서의 능력이 컸 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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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가로서의 유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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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란 극복의 총책임자- 유성룡은 행정과 정치에 많은 공적을 남겼으나 그 중에서도 임란 중의 업적이 가장 컸다. 임진왜란 중 에 영의정으로 도체찰사를 겸임하여 군국의 총책임자로서 내정, 외교, 전술 등 난문제를 해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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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유학자였지만 전술, 무기, 축성에 관해서도 탁월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임란 전에 여진족이 북방을 침범할 때, 조정에 서는 여진족의 근거지를 기습, 분탕하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그는 무력만으로는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하고 다음과 같은 북방오 책(北方五策)의 봉서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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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침략의 근원을 막아야 한다.
- ② 수비의 전략을 전해야 한다.
- ③ 여진족의 정세를 알아야 한다.
- ④ 군대에 군량 보급을 원활히 해야 한다.
- ⑤ 잘못된 정치를 시정해야 한다.
- 이렇게 그는 상대와 우리의 정세를 판단하고 전쟁이란 군사 행동에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치, 외교, 경제 등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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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왜군이 부산 앞바다에 침범하여 7년간의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임란 전에 왜사(倭使)가 와서 ' 가도입명(假道入明)'을 말했고, 일본의 국내 정세를 살피려고 파견된 통신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하여 조 정의 의견도 둘로 갈라졌다. 그러나 임란 1년 전부터 왜군 침공에 대비하여 전국의 성곽을 수축하고 군기를 점검하여 뛰어난 장 수 중 재질이 있는 인물은 서열에 구애받지 않고 발탁하였다. 이때 유성룡은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하여 행주대첩과 수군의 대승 리로 왜군의 침공의 기세를 꺾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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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란이 일어나자 유성룡은 특명으로 병조판서를 겸임하고 또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군무를 총괄하였다. 그는 용장으로 이 름높던 이일과 신립을 급히 파견하여 왜군을 막으려 했으나 상주와 충주 탄금대에서 패전하여 선조를 호가(扈駕)하여 서울을 떠 나 개성, 평양을 거쳐 의주(義州)에 머물게 되었다. 태평 2백년간 큰 전쟁을 모르던 조선은 백여 년간의 전구 시대에 훈련된 왜 군과 당시로서는 신무기인 조총을 당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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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임란의 책임을 지고 사면되었으나 실질적으로 군무를 맡아 평안도 도체찰사, 충청, 전라, 경상 삼도 도체찰사에 임명되었으며, 다시 영의정이 되고 훈련도감제조(訓練都監提調)를 겸임하였고 선조 28년에는 경기. 황해. 평안 .함경 4도 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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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중에 선조는 '제갈공명(諸葛孔明)도 한실(漢室)을 회복하지 못하였는데, 경의 학문과 지식이 어찌 옛 사람에게 뒤지 겠는가'라고 유성룡을 제갈 공명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는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선봉에서 구한 경륜 있는 정치가 였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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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비록』은 임진왜란 중에 일어났던 여러 일을 본인의 견문한 바에 의해 기록했기 때문에 임란 연구의 근본 사료가 되고 있 으며 이미 조선 시대 일본에 건너가 큰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그는 『징비록』 서문에서, "詩經』의 글귀 중에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懲) 뒤에 환란이 없도록 삼간다' 하였는데 이것이 『징비록』을 저술한 소의이다"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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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현직에 있을 때보다 오리려 낙향 후 도학에 전념하면서 지난날의 일들을 저술하여 마음의 평안을 갖게 되었다.
- 선조 40년(1607) 그의 나이 66세에 병석에 눕자 왕은 내의(內醫)를 보내어 치료케 하였다. 그는 빌렸던 서적을 돌리고 가족들 에게 박장(薄葬; 소박한 장례)을 하라는 유언을 하였고 최후로 임금께 올리는 유소를 초하고 5월 6일 별세하였으며 안동부 서쪽 수동리(壽洞里)에 예장(禮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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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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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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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후반에 들면서 한국은 안팎으로 격동의 시대를 맞았다. 안으로는 근대화를 지향하는 개화사상과 이에 저항하는 척사 사상이 부딪치고, 밖으로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을 맞게 되었다. 이러한 민족의 위기 상황의 극복 방법으로 1894년 의병 항쟁 이, 그리고 1900년대에 들어 계몽 운동이 전개되었고 이들은 1919년의 3.1운동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공동의 광장에 합류하였다.
- 석주 이상룡은 처음에 의병 항쟁에 간여하다가 사상을 전환하면서 계몽운동을 거쳐 구국 운동의 일선에 나섰다. 일제에 병합되 면서 만주로 망명한 그는 만주 지역 독립운동의 대표 인물이 되었고,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까지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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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주의 가계와 학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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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주는 1858년 (철종9년) 11월 24일(음)에 안동시 법흥동 20번지 소재 임청각(臨淸閣, 보물 182호)에 승목(承穆)의 3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고성(固城)이며 처음 이름은 상희(象羲), 호는 석주였고, 1911년에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 상룡 (相龍)으로 개명하였다.
- 그는 1886년 과거에 응했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고성 이씨의 종손으로 4대에 걸쳐 의성 김씨, 안동 권씨, 의성 김 씨, 진성 이씨 등과 혼반을 형성함으로써 그의 집안을 안동 중심의 경북북부지역에서 주요 가문의 하나로 자리 잡게 했다.
- 석주는 학문에서도 또한 퇴계의 학통을 계승하여 명문으로서의 위치를 갖고 있었다. 그는 퇴계에서 김성일을 거쳐 전해진 학 통을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으로부터 이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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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에서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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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주의 국내에서의 구국 활동은 두 가지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의병 항쟁을 시도했던 시기이며, 둘째는 항일 항쟁을 통해 방략상의 한계를 절감하고 투쟁방략의 전환을 위해 새로운 국제 정세의 분석에 몰두하고 아울러 신사상과 지식을 바탕으로 구국계몽운동을 전개했던 시기였다.
-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난 뒤 석주의 외삼촌인 권세연이 의병장에 추대되자, 그는 의병 활동에 도움을 주었다. 당시 김흥락 김 도화도 의병에 참여하였는데, 석주는 1896년 의병장 김도화에게 의병의 전략에 관해 건의하기도 했다. 당시에 의병에 대하 재정 적인 후원은 계속했으나 직접 의병 항쟁에 가담하지 안했는데, 그 이유는 일과성의 전투보다는 기지 건설을 주장했던 방법론의 차이에서 비롯한 것으로 알려진다.
- 1905년 을사조약 직후인 그해 겨울, 석주는 의병 항쟁을 시도하기도 했다. 직접 의병에 가담하기도 하고 신돌석. 김상태 등의 의병과 연합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8년 에 차성충이 패배하고, 신돌석이 사망했으며, 김상태가 체포됨에 따라 석주의 의병 항쟁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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