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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태백산 부석사(浮石寺)

모링가연구가 2009. 4. 17. 05:33

영주 태백산 부석사(浮石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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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초입입니다.

어머니와 강민이... 강민맘과 함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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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보이는 건물이 안양루 이고

뒷쪽으로 보이는 것이 무량수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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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

 

종목 : 국보 제18호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불전
수량 : 1동
지정일 : 1962.12.20
소재지 :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시대 : 고려시대
소유자 : 부석사
관리자 : 부석사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짓고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이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날아 와 줄곧 의상을 보호하면서 이곳에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아직도 무량수전 뒤에는 선묘용이 변화했던 바위로 전하는 ‘부석’을 볼 수 있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였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간결한 형태로 짜올린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세부 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 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 건물 안쪽은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량수전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 되고 있다.

<출처 : 네이버 지식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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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浮石)

신라 문무왕 1년(661)에 의상스님이 화엄학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에 갔을 때 의상스님을 연모한 '선묘'라는 낭자가 있었다. 의상 스님이 장안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삼장 문하에서 10년간의 수학을 마치고 심오한 경지에 이른 후 귀국 뱃길에 오르자,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가 선창으로 달려갔으나 의상스님이 탄 배는 벌써 수평선 뒤를 사라지고 없자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신하여 의상스님이 탄 배를 호위 무사히 귀국하게 하였다 한다.

 

그 후 의상스님이 화엄학을 펴기 위하여 왕명으로 이곳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지으려고 할 때, 이곳에 살고있던 많은 이교도들이 방해하자 선묘신룡이 나타나 조화를 부려 이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올려 물리쳤다 하여 '부석'이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 숙종 때 이중환의 탤리지 기록에 의하면 " 아래윗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실을 넣어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뜬돌임을 알 수 있다." 라고 적혀 있다. 이리하여 절 이름을 '부석사'라 불렀으며, 그 후 선묘신룡이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으로 변신하여 무량수전 뜰 아래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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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당

 

저기 끝에 보이는 것이 의상대사 지팡이라고 합니다.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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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http://blog.daum.net/icekegi/3130656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 기둥

 

 

김영택화백의 펜화-부석사 무량수전

 

 

“더하고 뺄 것 하나 없는 완벽함,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천년이 살아 숨 쉬는 상쾌한 균형과 절제”

 

이 말들은 경북 영주에 있는 국보 제18호 부석사 무량수전(고려 13세기)에 대한 예찬입니다.

그런데 그런 찬사를 들은 까닭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배흘림 기둥입니다.

배흘림 기둥이란 가운데 부분을 약간 튀어나오게 한 기둥을 말합니다.

이렇게 가운데를 볼록하게 하면 기둥의 머리 부분이 넓어 보이는 착시현상을 막아주며, 건축물의 무게가 기둥의 중간에 집중되는 것을 고려하여 건축물을 견고하게 하고 안전을 배려한 것입니다.

 

 기둥의 종류에는 배흘림 기둥 외에 위로 올라가면서 지름이 조금씩 좁아지는
‘민흘림 기둥’, 위아래 지름이 일정한 원통형 기둥이 있습니다.

 

배흘림 기둥과 함께 무량수전은 안허리곡, 안쏠림, 귀솟음이란 훌륭함도 있습니다.

 

 

 

 

 

귀솟음과 안쏠림

 

우리나라 전통목조건축의 기둥세우기 기법에는 솟음기법(귀솟음)과 오금기법(안쏠림)이 있다.

이들 기법은 모두 착시를 교정해주기 위한 의장적 효과 때문에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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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솟음                                                안쏠림

            

1) 귀솟음(솟음기법)은 건물을 입면상에 바라볼때 기둥의 높이가 가운데 기둥이 제일 낮고 양쪽 추녀 쪽으로 갈수록 약간씩 높여주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기둥이 귀로 갈수록 솟았다 하여 귀솟음이라고 한다.

 

귀솟음의 정도는 건물의 규모에 따라 차이가 있으며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이다. 그러나 귀솟음을 주지 않았을 경우에는 착시현상에 의해 건물의 양쪽어깨가 쳐진 것처럼 보인다.

이 기법은 부석사 무량수전을 비롯해 조선말기까지 이어지고 있는 기법으로 흔히 쓰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2) 안쏠림은 오금법이라고도 하는데 기둥머리를 건물 안쪽으로 약간씩 기울여 주는 것을 말한다.

전체적으로 사다리꼴 형태로 기둥이 안쪽으로 쏠렸다고 해서 안쏠림이라 한다.

 

이 기법을 쓰지 않으면 양끝 기둥의 윗부분이 착시현상에 의해 건물 바깥쪽으로 벌어진것 같은 느낌을 주어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

이 기법은 비단 목조건축뿐만 아니라 석탑에서도 사용되었다.(彌勒寺址석탑, 義城塔里오층석탑)

 

3) 안허리곡은 건물 가운데보다 처마 끝을 좀더 튀어나오도록 처리한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하면 위에서나 옆에서 보았을 때 지붕의 선이 곡선을 그리게 되어더욱 우아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 귀솟음과 안쏠림에 대한 기법을 기록한 것은 북송말(北宋末1085~1125년)에 중국인 이명중(李明仲)이 칙명에 의하여 편수한 건축전문서인 '李明仲 營造法式'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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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도 감탄한 ‘단순한 아름 다움’

무량수전은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 건물로, 단순하기 짝이 없습니다.
문에는 꽃살창 하나 없이 단순한 정자살 창호이고 벽면에는 벽화도 없습니다.
지금은 단청도 씻겨나가 나무 맨살 그대로입니다.

 

부석사(浮石寺)는 산속 아늑한 분지에 있는 여느 절과 달리 산비탈 언덕에 자리잡고 있어 풀 먹인 삼베옷처럼 뻣뻣한 듯하면서도 구석구석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1376년 중수된 무량수전(無量壽殿)은 나라 안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서 부석사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그동안 많은 분이 언급을 하였기에 몇 가지 특징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건물의 특성 중 하나가 보는 사람 위주로 지어졌다는 점입니다.

즉 건물의 정면에서 건물 높이의 2배쯤 떨어진 곳에서 보면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큰 법당으로 우리 건축의 특성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지붕 용마루의 가운데가 낮고 좌우로 가면서 높아집니다. 용마루를 수평으로 만들면 지붕이 좌우로 처져 보이는 것을 보완한 것입니다.

 

중국과 일본의 일반 가옥은 용마루가 수평입니다만 우리는 가옥에도 곡선을 이용했습니다. 같은 이유로 무량수전의 가운데 기둥은 낮고 귀퉁이로 갈수록 높아집니다. 그래서 문 위의 창방이 좌우로 가면서 약간씩 올라갑니다. 워낙 자연스러워서 알고 보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귀솟음’이라고 합니다.

 

무량수전의 ‘배흘림’ 기둥이 유명한 이유는 선이 곱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둥이 모두 수직이 아니라 건물 안쪽으로 기울게 세워진 것을 아시는 분은 적습니다. ‘안쏠림’이라 하는데 건물이 튼튼하고 안정적으로 보이게 합니다. 귀퉁이 쪽의 처마를 더 길게 하여 처마선을 곡선으로 만든 것은 ‘안허리곡’이라고 하고요.

이러한 수법들은 집을 지을 때 까다롭고 힘들게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조상들은 왜 힘든 방법을 택하였을까요. 답은 ‘자연과 가장 잘 어울리는 건물을 짓고 그 속에서 마음 편하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무량수전은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 건물로 단순하기 짝이 없습니다. 문에는 꽃살창 하나 없이 단순한 정자살 창호이고 벽면에는 벽화도 없습니다. 지금은 단청도 씻겨나가 나무 맨살 그대로입니다.

이런 무량수전을 한국 건축의 백미로 꼽는 것은 ‘단순명료한 아름다움’이 ‘화려한 아름다움’보다 훨씬 윗길이기 때문이지요. 일본 공예의 아름다움과 한국 공예의 아름다움을 비교하여 ‘게이샤의 아름다움’과 ‘맏며느리의 아름다움’으로 구분짓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큰 인물 나는 곳” 일제가 철거

 

법당 안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 한 분이 협시보살도 없이 혼자 계십니다. 흙으로 만든 소조불(塑造佛)로 금을 입혔고 나무로 만든 광배의 불꽃 조각이 사실적이면서도 화려하여 법당 안에 금빛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흔하게 듣는 ‘나무아미타불’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아미타’란 ‘무한한 수명과 자비와 지혜를 가진 자’라는 말이며 ‘나무(南無)’는 ‘돌아가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나무아미타불은 ‘무한한 생명과 지혜를 지닌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무한한 수명을 지닌 아미타부처님을 모셨기 때문에 법당 이름을 ‘무량수전’이라고 붙인 것이지요.

 

무량수전은 국보 제18호이고 아미타여래좌상은 국보 제45호입니다. 무량수전 앞에 있는 아름다운 석등도 국보 제17호입니다. 석등 앞에 안양루가 소백산맥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크고 작은 연봉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어 해질녘 안양루(安養樓)에서 보는 낙조는 일품입니다.

 

소백산의 연봉들이 머리 숙여 절을 하는 새들의 모습과 같다고 하여 무량수전 터를 군조조봉형(群鳥朝奉形)이라고 합니다. 또한 봉황이 알을 품은 자리라 하여 봉황포란형(鳳凰抱卵形)이라고도 부르며 자손만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자리이며 창고 문이 열려있어 재물이 풍성한 자리랍니다.

그래서인지 부석사는 재산이 넉넉하답니다. 근래에 무량수전 서쪽 비탈에 화강석으로 만든 알 3개를 배치해 놓았기에 스님께 물어보았더니 모 대학 교수가 “봉황의 알이 있어야 되는 곳”이라며 자비로 만들어 놓았답니다.

 

무량수전 동쪽 뒤편에 부석사를 세운 의상(義湘) 스님을 짝사랑하다 죽어서 용이 되어 대사를 위하여 활약을 하였다는 선묘(善妙) 낭자를 모신 선묘각이 있습니다. 뒷산에는 조사당(祖師堂), 응진전(應眞殿), 자인당(慈忍堂), 단하각(丹霞閣) 등 작은 건물 여러 채가 있습니다.

 

조사당은 국보 제19호로 의상 대사가 수도하던 건물로, 1366년 원응국사가 중건하였고 성종 21년(1490)에 중수하여 무량수전과 나이가 같습니다. 조사당 벽화는 일본인들이 벽째 들어내 일본으로 반출하려다가 해방이 되는 바람에 부산에서 되찾아온 귀중한 유산입니다. 유물 전시각에 전시해놓았는데 국보 제4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물 전시각에는 무량수전 부처님의 머리 위 닫집에서 부처님을 수호하던 용이 오랜 임무를 끝내고 전시되어 있는데 보기드문 걸작입니다. 한 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서 몸을 이리저리 휘감고 머리를 쑥 내민 모양을 4장의 판목을 꺽쇠로 붙여서 만들었습니다. 머리 부분과 구름 등은 별도로 만들어 붙여놓아 입체적인데 조각 솜씨가 뛰어나고 조형미가 매우 우수합니다.

 

 

 

조사당 옆 취현암(醉玄菴)은 사명대사가 수도하던 곳으로 큰 인물이 많이 나는 곳이라 하여 1916년 일제가 무량수전을 보수하여 주는 조건으로 철거하였는데 1999년 다시 지어 선원에서 사용한답니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명산의 혈에 쇠말뚝을 박고 지맥을 잘라서 조선의 정기를 죽이려 하였던 것은 영원토록 조선을 자기들의 땅으로 만들어 놓아 지진으로 일본이 물에 가라앉아도 국가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한 것이랍니다. 꿈도 참 야무졌지요.

 

 

부석사에서 눈여겨 볼 것 중 하나가 돌로 쌓은 석축입니다.

돌 모양에 맞추어 치밀하게 쌓은 솜씨는 나라 안에서 최고로 천 년 이상을 버텨온 비결입니다. 요즈음 쌓은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분명 보고 쌓았는데도 따라갈 솜씨가 없나봅니다.

 

특이한 것은 9줄의 석축이 나란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지형에 맞추어 쌓았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인위적 요소를 최소화하고자 하던 조상의 지혜입니다.

 

부석사에는 국보 5점과 보물 4점이 있어 나라 안에서 두 번째로 중요문화재가 많은 절입니다. 가까운 소수서원과 성혈사도 일정에 포함시키면 알찬 답사여행이 됩니다. 성혈사 나한전에는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살창이 있습니다.

 

 

***************그림ㆍ글ㆍ사진=김영택 펜화가(honginart@hanmail.net)

 

 

 

관련 자료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27657

 

 

부석사,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렌다
[오마이 추천 '주말가족여행'] 천년의 세월을 견뎌오다
  이종원(ljhkhs44) 기자   
▲ 부석사 일주문. 소백산이 아니라 태백산 부석사다.
ⓒ 이종원
부석사….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이는 곳이다.

신경숙님의 소설 <부석사>를 읽은 적이 있다. 소설은 과연 돌이 붕 떠 있는지 그걸 확인하고자 실을 챙기고 무작정 서울은 벗어나면서 시작된다. 마음 속에 심한 상처를 받은 두 젊은이는 도피처로서 부석사를 삼은 것이다. 그러나 입구에도 가지 못하고 폭설에 가로막혀 마애불 근처를 헤매다가 소설은 끝을 맺는다. 제목은 <부석사>지만 부석사에 관한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소설가의 눈을 빌려 부석사의 아름다움을 느끼고자 했던 나는 무척이나 실망했었다.

몇 년이 지난 후 다시 부석사를 찾아갔을 때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눈으로는 극락을 확인하지 못하지만 분명 마음 속으로는 천상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런 내면의 마음을 인간의 손을 빌려 천상세계를 구현한 것이 부석사다.

부석사의 창건

부석사는 신라가 삼국통일하던 문무왕 1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화엄종의 종풍을 날린 곳이다.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중요한 정치 이데올로기인 화엄종의 요체는 무엇인가?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다시 하나가 된다'라는 '원융사상'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백성들을 하나로 묶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이런 원융사상은 시대를 이끌 유일한 대안이며, 당시 국가경영에서 절실히 필요한 사상일게다.

그 출발점이 바로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절묘하게 나누어지는 이곳에 사상적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 만큼 이곳이 군사적, 전략적 요충지임을 말해준다.

태백산 부석사

일주문엔 '소백산 부석사'가 아니라 '태백산 부석사'란 현판을 달고 있다. 부석사를 보듬고 있는 산인 봉황산은 태백산 서쪽 100여리 떨어져 있으며, 태맥에서 이어진 맥이 봉황산에 닿고 있기 때문이다. 태백의 가지가 남서쪽으로 이어져 봉황산에서 꽃을 만발하고 있는 형국이다.

▲ 부석사 당간지주
ⓒ 이종원
부석사 당간지주

돌이끼가 세월을 말해준다. 천년의 세월을 한눈 파지 않고 거뜬히 견디어온 돌의 우직함이 그저 고맙다. 그 우직함에 세련미까지 갖추고 있다. 위로 갈수록 좁아지다가 끝을 반원으로 다듬었다. 머리에 동백기름을 바르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우리네 어머님의 모습같다.

구도를 찾아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수백리 길을 거닐다가 깃발이 휘날리는 것을 보았을때 순례자들은 무슨 심정이었을까? 어쩌면 당간지주는 절의 간판이며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상징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간지주를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폐사지에 우뚝 솟은 돌의 향연에 묘한 감흥이 일어난다. 비록 절은 없어졌을 망정 그 기개만은 살아 있기 때문이다.

▲ 부석사 석축. 은근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 이종원
석축

부석사에서 표 내지 않고 은근한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것이 바로 석축과 계단이다. 부석사는 터가 좁고 길기 때문에 평지를 만들기 위해 이렇게 석축을 쌓았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극락에 이를 수 있는 마지막 세 방법인 '구품 만다라'를 구현한 것이다. 대석단 3개를 지나면 극락에 이르는 안양문을 지나게 된다. 하늘에서 보면 건물 배치도 빛날 '華'의 모습을 하고 있어 화엄종찰임을 말해준다.

▲ 범종루에서 바라본 무량수전과 안양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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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루

이름은 범종루인데 막상 이곳엔 범종이 없다. 종은 종각에 자리잡고 있고 이곳엔 법고, 운판, 목어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범종루에서 유심히 봐야 할 부분이 있다. 특이한 지붕모양이다. 정면은 팔작 지붕인데 뒤는 맛배지붕을 하고 있다. 정면은 아스라한 소백의 연봉들과 조화를 이루고, 후면은 팔작지붕의 무량수전과 같은 느낌을 이어간다. 만약 범종루 계단을 오르면서 처마가 있다면 산과 하늘 그리고 무량수전을 바라보는 시야를 방해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안양루와 부석사를 바라보라.

삼층석탑 2기가 양편에 자리잡고 있다. 물론 사찰양식에 어긋나는 것을 볼 때 이곳에 원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근 골짜기 절터에서 이곳에 옮겨온 것이란다.

▲ 안양루. 축선이 꺾여 있다.
ⓒ 이종원
안양루

부석사 가람 배치 중에서 가장 인상깊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중심 축선이 일직선으로만 뻗어 오르다가 안양루를 앞에 두고 축선이 살짝 꺽인다. 만약 직선이었으면 얼마나 단조로울까? 이렇게 변화를 주어 꿈틀거리는 생명력을 심어준다. 딱딱한 작대기가 아니라 꿈틀거리는 뱀의 생명력이랄까?

또한 방향의 전환은 숨을 틔워 엄격한 대칭이나 계층이 주는 위압감을 줄이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란다. 그렇다. 완벽에서 벗어난 여유 그리고 자연스런 비대칭이 우리 문화의 구수한 맛이다.

▲ 안양루 계단에서 바라본 무량수전, 석등에 그려진 공양보살상, 공민왕이 썼다는 현판
ⓒ 이종원
마지막 관문, 안양문이다. 안양은 극락의 다른 이름이다. 이곳을 지나면 바로 극락세계가 나오는 것이다. 빨려 들어가듯 숨가쁘게 계단을 오른다. 석등이 나온다. 한가운데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살짝 비켜 있다.

왼쪽 여백의 공간을 보며 속세의 때를 씻고 지난날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 본다. 그리고 그 모든 해탈에서 벗어나 극락의 문으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안양문이 바로 극락문이며, 가톨릭의 천국의 문인 것이다. 성경에서는 베드로가 천국의 열쇠를 들고 있지만 부석사는 공양보살상이 천국에 들어온 것을 기뻐하고 있다.

극락(무량수전)에 진입하는 클라이막스가 바로 이 장면이다. 안양루 누각 밑 계단을 오르면서 극락의 모습을 살짝 보여준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석등 지붕돌이다. 그러나 석등은 살짝 비켜 있다. 절대자 예수님의 도래를 예언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랄까? 석등은 절대자 무량수전을 위해 자신의 미를 양보한다. 석공은 이렇게 무량수전에 극대화된 감동을 주기 위해 인위적으로 석등을 비켜 세운 것이다.

석등

탑도 없이 석등(국보 17호)만이 무량수전 앞마당을 홀로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등이다. 세련되고 깔끔한 조형미가 철철 넘친다. 각 면에는 아름다운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살짝 고개를 돌리고 수줍은 듯한 미소가 탐승객의 가슴을 빼앗는다.

▲ 극락세계를 구현한 무량수전
ⓒ 이종원
부석사 무량수전

극락이며 천국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목조건물이면서도 미적인 감동을 지닌 곳.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운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온 목조건물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이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으로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 봐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아마 '배흘림 기둥'이란 말을 가장 많이 들었을 것이다. 이는 기둥의 아래쪽 1/3쯤이 가장 볼록하게 배가 불러 보이게 한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귀솟음기법'이 건물에 도입되었는데, 이는 건물 모서리 기둥을 중앙보다 좀 더 높인 것을 말한다.

이 두 가지는 사람들의 착시를 교정하고 시각적인 안정감을 줄려는 것이다. 처마선이 새의 날개처럼 하늘로 치솟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적 아름다운 곡선미가 아닐까? 고려의 건물을 오늘날까지 볼 수 있다는 것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무량수전 현판은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머물 때 쓴 글씨란다.

벽에도 벽화가 없고 노란색으로 둘러져 있다. 천국에 무슨 외향적 치장이 필요하겠는가? 이런한 담백함이 더욱 순례자의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한참을 넋 나간 사람처럼 건물의 미에 빠져본다.

무량수전에 모신 불상은 진흙으로 만들어졌다. 높이가 2.78m로 거대한 불상이다. 그런데 부처가 가운데 앉아 계신 것이 아니라 서쪽에 앉아서 동쪽을 바라 보고 있어 여러 상상력을 자극한다.

▲ 바위가 떠 있다는 부석.
ⓒ 이종원
처음 절을 세울려고 했을때 이교도들이 반대를 했다. 선묘의 힘을 빌어 바위가 공중에 세 번 떠오른 것이다. 놀란 이교도들은 겁을 먹고 도주했다고 한다. 그 바위가 바로 부석이다. 옆에는 인근에서 옮긴 불상 세 분을 모시고 있다.

▲ 고려건물인 조사당
ⓒ 이종원
조사당

삼층석탑을 돌아 산길을 따라 오르면 조사당(국보 19호)에 이르게 된다. 그 절의 조사스님을 기리는 전각이다. 물론 창건주인 의상을 모신 곳이다. 내부에는 의상대사를 모신 조각물이 있으며 한편엔 선묘낭자가 애타게 의상대사를 바라보고 있다.

맞배지붕의 주심포건물이다. 작은 집이지만 단정하고 조용한 느낌을 갖는다. 우리나라에 고려시대 건물이 6개밖에 남지 않았는데 부석사에만 2개나 간직하고 있으니 이 곳에 절을 세운 의상대사에게 그저 감사함을 느낀다.

한 옆엔 낚시 그물처럼 잘게 엮어진 철조망으로 둘러져 있다. 그 안엔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다름 아닌 선비화(仙扉花)다. 의상대사가 지팡이를 꽂아 놓았는데 나무로 자란 것이다. 저 잎을 따다 다려먹으면 아들 낳는다는 낭설 때문에 이렇게 교도소 면회소 같은 곳에서 보관되어 있다. 21세기 무지와 욕심 때문에 이런 씁쓸한 모습을 봐야 한다.

부석사 3층 석탑

조사당을 보고 삼층석탑을 둘러본다. 불당앞에 놓였어야 할 탑이 한쪽에 있으니 의아스럽다.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아미타불과 마주하는 자리가 동쪽 끝이기에 여기에 잡았다는 설과 그리고 무량수전 마당이 협소하여 탑이 놓일 자리가 없기에 이곳에 세웠다는 설이 있다. 지난번 경주에서 보았던 황복사지 탑과 규모나 형태가 비슷하다. 의상대사는 황복사지에서 수행했다고 하던데..무슨 연관이 있지 않을까?

소백의 연봉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탑이 놓여 있는 자리다. 측면의 무량수전이 한 눈에 들어오고, 그리고 태백과 소백의 준령이 아스라이 펼처진다. 선경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은 아닐거다. 넓은 바다를 바라보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3층석탑은 바다를 비추는 등대겠지. 그 옆엔 화사석을 잃어버린 석등도 외롭게 소백을 바라보고 있다.

▲ 삼층석탑에서 바라본 소백의 연봉들과 동부도밭.
ⓒ 이종원
부도밭

범종루에서 동쪽으로 올라가면 작은 오솔길이 나온다. '출입금지' 란 푯말이 가로막았지만 살며시 들어갔다. 살짝 고개를 돌리고 있는 원융국사비의 거북 얼굴이 생동감 넘친다. 조금 더 가면 부도밭이 나온다. 푸른 사과밭이 드넓게 펼쳐진다. 이곳에서 바라본 시원한 눈 맛을 어찌 잊겠는가?

부석사를 떠나며

여러 번 봐도 싫증이 나지 않은 절이 몇 군데 있다. 부석사가 그렇다. 다음엔 해질녁에 와서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며 대종소리를 들어야겠다. 홀로 올라가서 마음껏 사무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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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45호 부석사소조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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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18호 부석사 무량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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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당간지주 보물 255호 경북 영주시 통일신라 절에 행사가 있을때 절의 입구에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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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삼층석탑 보물 249호 경북 영주시 통일신라 부석사 무량수전 동쪽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에는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