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모음방

빈센트 반 고흐

모링가연구가 2009. 4. 12. 20:57

빈센트 반 고흐

 

-  편지로 보는그의 예술  -


아우 테오야, 나는 네가 산책을 지금보다 더 자주하고 자연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란다.

화가는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여, 평범한 사람들이 자연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1874년 1월

자신의 동생이자 예술적 후원자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편지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 고흐는 산책을 사랑했다. 아니 사랑해야 했다.

그것은 자연 안에서 무엇이든 얻어내야 했던 가난한 화가로서의 운명이자 굴레였다.

그러나 1874년, 스물 한 살의 고흐는 그때까지도 자신의 가혹한 미래를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다른 유명한 화가들과 달리 고흐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숙부 세 사람 모두 화상(畵商)인 덕분에 16세부터 유명한 미술품 가게에서 점원 노릇을 했을 따름이었다.

인류의 미술사에 길이 남을 고흐의 혼란과 우울은 스무 살이 되던 해 흠모하던 여성(제니 로이어)에게 구혼했다가 거절당한 시점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그에게는 신념이 있었다. 자연의 힘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는.
고흐의 영혼에 돌이킬 수 없는 우울이 깃든 것은 25살이 되던 해 7월이었다.

구혼을 거절 당한 이후 종교에 몰입하게 된 고흐는 직장에서 해고되어 전도사가 되기로 작정하고 탄광촌으로 터를 옮겼다.

하지만 고흐는 완고한 성격과 광적인 신앙심, 가난한 자들을 향한 지나친 연민으로 인해 다른 종교인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그리하여 사회적으로 불안하고 우울한 위치에 처하게 된 고흐는 26살 여름, 처음으로 그림을 그리기로 작정했다.

테오에게서 경제적 지원을 약속받은 뒤의 일이다.

잘 알려져 있듯 초반에 이들의 우애는 아주 두터웠다.


너와 함께 산책을 하니 예전의 감정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삶은 좋은 것이고 소중히 여겨야 할 값진 것이라는 느낌말이다.

근래 내 생활이 궁색해지면서 절망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너와 함께 걸은 덕분에 건강한 기운을 되찾았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게 되고, 자신이 무의미한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타인과 더불어 부대끼며 사랑을 느끼는 때 인 듯하다. 1879년 10월 15일

그러나 가난이란, 사람을 순식간에 초라하게 만들어버리는 마력을 지녔다.

고흐는 갈수록 볼품없어지는 자신의 외모와 사람들의 시선에 시달려야 했다.

말끔한 사회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돈을 벌 것인가 아니면 멸시 당하는 삶을 감내하며 화가의 길을 계속 걸을 것인가.

고민 끝에 그는 후자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그리고 광산으로 날마다 산책을 다니며 스케치 공부에 전념했다.

가난은 예상보다 더 혹독했고 형제간의 다정했던 우정에 서서히 잡음이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흐는 자존심이 구겨지는 것을 무릅쓰고 항상 테오를 설득했고 자신의 처지를 구구절절 설명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림 공부를 이어나가야 했다.

28살이 되던 해 고흐는 사촌(케이)에게 또 한 번 구혼을 하고 운명의 수순을 밟듯 또 거절을 당한다.

그리고 고향을 떠나 그림 스승(모베)이 있는 헤이그에 정착한다.

이곳에서 고흐는 줄곧 해안과 숲을 산책하며 자연을 탐구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본격적으로 예술성을 키우기 시작했다.


예술가는 초기엔 자연의 저항에 직면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가 자연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자연과 대립하는 대신에 차라리 끌어안아야 할 것이다.

자연에 정직한 데생화가는 하나다. 자연은 손으로 움켜쥘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린 자연을 움켜쥐어야 하며 그것도 두 손으로 힘껏 붙잡아야 한다.

나는 요즘 인물데생에 열심인데 그것은 풍경데생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제 산책길에서 버드나무를 만난다면 인물데생을 하듯 그릴 생각이다.

그 나무가 살아 숨 쉬는 경지에 이를 수 있을 때까지 나는 노력할 것이다.

1881년 10월

고흐는 생전에 단 한 점의 그림만 팔았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유화에만 국한된 이야기다.

그는 숙부의 주문을 받고 자신의 산책 풍경을 열두 장 스케치해서 20길더에 팔았다.

이 시절 헤이그의 풍경은 고흐에게 가장 큰 재산이었다.

그는 자주 바다와 숲을 마주 했으며 특히 감자밭을 산책할 때면 진지한 작품을 염두에 두고 매우 세심하게 관찰을 하며 돌아다녔다.

열정적으로 습작한 결과 스케치에 자신감이 생긴 고흐는 모델을 구해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하지만 동생에게 겨우 지원받아 생활하는 처지에 모델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그는 빈민가 무료식당이나 열차 대합실 같은 곳에 가서 스케치를 하곤 했다.

하지만 모델을 구해야한다는 신념과 갈증이 그를 점점 더 예민하게 만들었고 고삐 풀린 발길은 날이 갈수록 더 가난하고 비참한 곳으로 편중되었다.


그림에 대한 고민과 근심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힘들다.

여기에 다른 근심까지 겹치고 모델비 마저 구할 수 없다면 미쳐버릴지도 모르겠다.

네게 이 모든 비용을 부담해달라는 것은 너무 미안하지만 난 지금 성공의 기운을 느낀다.

붓에 더 힘을 갖게 되면 지금보다 더 열심히 그릴 거다.

우리가 열정을 잃지 않고 계속 노력한다면 네가 더 이상 돈을 보내줄 필요가 없게 될 날이 올 거다 분명히.

1882년 2월.

그러던 어느 날, 임신한 채 버려진 창녀 ‘시엔’이 고흐에게 발견되었다.

고흐의 멘토였던 모베는 이 불결한 상황을 견디지 못해 그를 떠나고 만다.

하지만 고흐는 이 갈 곳 없는 여성(시엔)을 돌봐주며 데생공부에 진전을 보인다.

가족들의 냉대 속에서도 시엔과 함께 미래를 꿈꿀 정도로 그녀를 향한 고흐의 애정은 남달랐다.

하지만 한 여자와 평범한 미래를 꿈꾸기엔 그의 혼이 너무 먼 곳까지 가버렸던 것일까.

시엔을 돌보며 데생공부를 하는 순간에도 사실 고흐의 머릿속엔 다시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야외로 나가야 한다.

예술은 질투가 심하다.

나는 이제부터 예술의 비위를 맞출 셈이다.

조만간 흡족할 만한 그림을 보여줄 것이라 확신한다.

목표를 이루는 건 지독하게 힘들겠지만 나는 반드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그림을 그릴 것이다. 슬픔은 그 작은 시작이다.

<메르더보르트 거리> <레이스웨이크의 목초지> <건초창고> 같은 풍경화가 그것에 해당한다. 그 그림 안에는 내 심장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슬픔이 묻어있다.

나는 풍경화나 다른 그림을 통해서 뿌리 깊은 고뇌를 표현하고 싶다.

이미 내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돼 있다. 화가의 의무는 자연에 몰두하고 온 힘을 다해 자신의 감정을 작품 속에 쏟는 것이다.

그래야 타인도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이 된다.

단지 팔기 위한 그림은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행위에 불과하다.

나는 결코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며 진지하게 작업에 임할 것이다.

1882년 7월

고흐를 감동시키는 것은 자연 안에 다 들어있었다.

그는 황야와 소나무를 보며 아련한 향수를 느꼈다.

나뭇가지를 주워 모으는 가난한 여인과 모래를 나르는 가난한 농부 그리고 그들과 대비되는 웅대한 바다 특히 스헤베닝겐의 해안을 유화로 그리면서 그는 처음으로 자유를 느꼈노라고 고백했다.

이것은 더 깊은 고통의 전주곡이었다.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한 고흐가 유화의 자유로움에 눈을 뜬 것은 고흐 형제에게 너무 힘든 일이었다.

그의 가난은 더 냉정하게 그의 영혼을 할퀴었고 점점 더 비굴해지는 편지를 받아 읽는 테오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하지만 고흐의 열정은 잔인했다.

날마다 새롭고 의미심장한 풍경이 그의 눈과 가슴에 달콤하게 안겨졌다.

예술중독에 빠진 것이다.


내 건강에 대해 걱정할 필요 없다.

그저 툭 트인 야외로 나가서 그림을 그리면 저절로 나을 병이다.

그림만 그릴 수 있다면 나는 잘 지내고 있는 것이다.

피곤할 때조차 더 좋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스퓌거리의 복권가게를 기억하니? 그 앞에 무리지어 서서 기대에 찬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스케치했다.

복권에 대한 환상을 갖는 것이 우리 눈에는 유치해 보일 수도 있지만, 얼마 안 되는 푼돈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그 불쌍한 사람들의 고통과 쓸쓸함을 상상해보렴.

나는 그러한 풍경을 놓치고 싶지 않다.

1882년 9월~ 10월 1일

건강이 악화된 고흐는 전처럼 마음껏 쏘다닐 수 없게 됐다.

그럴 때면 그는 작업실의 창을 활짝 열고 지칠 줄 모르는 강렬한 시선으로 자신이 원하는 곳을 실컷 산책했다.

테오는 형을 위해 파리의 풍경을 자주 묘사해주었고 고흐는 기력이 회복될 때마다 다른 화가들과 거리를 산책했다.

그러나 여전히 타인과 어울리는 것이 서투른 그였다.


인물화를 그리는 화가들과 산책하는 것은 별로 즐겁지 않다.

그들은 가난하고 지저분한 사람들을 헐뜯는다.

가장 진지하고 아름다운 것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는 셈이지.

 나는 그들에게 어떤 존경심도 흥미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특정 유파에 소속되고 싶지 않다.

그저 인간의 감정을 진정으로 표현하는 그림을 남기고 싶을 뿐이다.

1883년 8월

고흐는 가난하고 초라한 사람들에게 점점 더 깊이 매료되었다.

그는 자신이 극도로 날카로워지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고 그러한 사태를 감수하고서라도 화가의 길을 걸으리라 테오에게 늘 다짐하며 강조했다.

삶이 아무리 초라하고 허망해도 확신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며 진실 된 농촌그림을 그리고 말리라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결국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려냈다.

그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는 채 그림을 보며 감탄하고 좋은 작품이고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 사람의 생을 관찰해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램프 불빛 아래서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접시로 내밀고 있는 손, 자신을 닮은 바로 그 손으로 땅을 팠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려고 했다.

그 노동의 손은 정직한 식사를 암시한다.

나는 이들과 함께 하면 할수록 더 깊이 빠져들고 있다.

전 시대 그림의 등장인물이 결코 하지 않은 것, 그건 바로 노동이다.

난 그 노동의 진실 속으로 더 가깝게 걸어들어 갈 것이다.

나는 작업실 안에서 앉은 채 그려진 그림들을 비난한다.

모든 훌륭한 그림들은 더 진실한 이야기를 찾아서 야외로 나가서 그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1885년.


 

1885년 11월. 그러니까 파리로 향하기 몇 개월 전, 고흐는 거리 위로 이젤을 들고 나가 생계를 꾸릴 계획을 세웠다.

그런 이유로 고흐가 선택한 정착지는 아름다운 항구도시 앤트워프. 지금의 안트웨르펜이다. 그의 창작열이 적당(?)했더라면 그쯤에서 자리를 잡고 항구의 풍경 속에 조용히 녹아든 채 평범한 거리의 화가로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신은 기어이 그를 불멸의 화가로 만들 작정이었는지, 고흐는 알 수 없는 갈증에 끝없이 시달려야 했고 결국 테오가 있는 파리로 옮겨가 클로젤 거리에 둥지를 튼다.

클로젤 거리는 고흐에게 희망과 고통을 동시에 안겨준 곳이다.

그 거리에 있는 탕기 영감의 상점에서 고흐는 툴루즈 로트레크, 앙크탱, 베르나르, 러셀 등을 만났고 그들과 합류해 작업하면서 인상주의 회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독한 가난 속에서 오로지 그림 그리는 일만을 구원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고흐와 파리의 멋쟁이 화가들은 처음부터 궁합이 잘 맞지 않았다.

그리하여 고흐는 또 다시 사람들과 단절되는 고통을 맛봐야 했다.

몹시 쇠약해진 고흐는 한동안 좋아하는 산책마저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아 거의 유배생활이나 다름없는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그에게 정해진 예술사의 수순이었던 것일까.

그의 두 발이 무기력을 앓고 있을 때도 그의 붓놀림은 그 어느 때보다 부지런했다.

바로 그 순간 훗날 거장 고흐를 탄생시키는 강렬한 색채 탐구가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동생 테오에게 그는 이렇게 털어놓는다.


테오야, 어제 나는 성당이 보이는 곳으로 가서 약간의 습작을 하고 돌아왔다.

공원을 그리기도 했지. 하지만 성당보다는 사람의 영혼이 담긴 눈을 그리고 싶구나.

그 아무리 장엄하고 대단한 풍경도 사람의 영혼이 담고 있는 매력을 따라올 수는 없단다.

거지나 매춘부라도 그 영혼은 아름다운거야.

거리의 영혼들을 좀 더 그리고 싶지만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이 힘들다.

그림이 사람을 아주 지치게 하나보다.

하지만 나는 더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

농촌 아낙을 농촌 아낙답게 그려야 하듯 매춘부 또한 매춘부답게 표현하고 싶다.

나는 램브란트가 그린 매춘부의 초상화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마술가 중의 마술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그리는 법을 알고 싶어.

마네는 그렇게 하는 데 성공했지.

쿠르베도 그랬고.

망할 자식들! 나에게도 야망이 있어.

졸라, 도데, 공쿠르 형제, 발자크 같은 문학의 거장들이 묘사한 여인의 아름다움을 골수 깊숙한 곳에서부터 느낄 때면 그 욕망은 더 강하게 불타오른단다.
1885 12 28


고흐는 파리의 화가들에게 염증을 느끼면서도 한 편으로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있었다. 베를라는 고흐에게 야외로 나가고 싶은 욕심을 잠재우고 아주 기초적인 실력부터 쌓으라는 충고를 서슴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고흐는 이를 정중히 받아들여 한동안 스케치와 데생 공부에 공을 들였다.


내게 부족한 것은 훈련이다.

아마 지독한 습작을 50점은 더 훈련한 후에야 뭔가 얻을 수 있겠지.

요새 나는 채색 작업에 시간을 아주 많이 들인다.

살아 있는 그림을 그리기에는 나는 아직 충분히 훈련돼 있지 않아.

하지만 이런 건 시간문제일 뿐 다른 문제는 없어.

나는 더 정확한 붓질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끝없이 훈련을 할 생각이다.
1886년 초


실내에서의 정물화 작업에 심취한 고흐는 어느 순간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 호감을 갖게 되었음을 인정했다.

여전히 그들과 어울리지 못 하며 겉돌았지만 그들이 구사하는 색의 향연에는 마음을 열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드가의 누드화와 모네의 풍경화를 무척 좋아했다.

그 영향으로 고흐는 무엇보다 인물화를 집중적으로 그려보고 싶었지만 모델료 걱정 없이 실컷 그릴 수 있는 인물이라곤 그 자신의 얼굴뿐이었다.

그래서 고흐는 이 시기에 더욱 미친 듯이 자화상을 그려내며 비교적 재료값이 저렴한 꽃을 주제로 해서 습작 수업에 무게를 더 했다.

계속되는 노력에 그의 실력은 확실히 좋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카데미의 획일적인 교육형태, 전혀 나아질 기미가 없는 가난 등으로 인해 그의 마음은 여전히 고독하고 심란했다.

특히 자신을 돌봐주는 거의 유일한 존재 동생 테오의 결혼 소식에 큰 소리로 축복해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심각하게 비관했다.


가끔 나는 아주 늙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림에 이토록 매달리지 않았더라면 누군가의 연인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성공하려면 야망을 가져야 하는데 내게는 야망이 어리석게 느껴진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도 잘 모르겠다.

뭣보다 네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

열심히 그림 실력을 쌓아서 네 체면을 구기지 않고도 당당하게 내 그림들을 보여줄 수 있게 되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남부 어딘가로 내려가서 인간적으로 구역질나는 많은 화가들을 보지 않고 지낼 수 있겠지.

내 큰 그림들을 팔기 어렵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먼 훗날 사람들은 내 그림 속에서 느껴지는 야외의 신선함을 발견할 수 있을 거야.

그 그림은 시골의 멋진 집을 장식하는데 잘 어울릴 거다.

너도 결혼하면 다른 화상들처럼 시골에 집을 사서 기반을 닦겠지.

확실히 누추해 보이는 것보다는 부유해 보이는 것이 유리하니까 말이야.

자살하는 것보다 유쾌한 삶을 사는 게 더 낫듯이 말이다.
1887년 여름


1888년 2월.

고흐는 결국 파리 생활을 그만 두기로 결심하고 남쪽으로 향한다.

그 어떤 시기보다 강렬한 색채 연구에 열정을 쏟았던 파리에서의 짧은 시간. 이 시간을 더 연장시키지 못한 까닭에 대해서 후세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당시 유행했던 화풍의 영향 탓이었다거나 안식처를 찾아 쉴 새 없이 방황하는 그의 정신력이라는 등 말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런 복잡한 해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늘 자연을 경외하고 야외 작업을 사랑하는 고흐에게 파리는 너무 도시적이고 답답했을 것이다.

태양의 아들 고흐의 남쪽 행 결심은 따뜻한 엄마의 품을 찾는 작은 새의 자연스러운 여행이었다.

파리를 떠날 당시 고흐의 정신상태는 전혀 시니컬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사랑을 꿈꾸었으며 주체할 수 없는 열정만이 자신의 재산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은 그가 아를로 떠나기 직전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사랑하는 나의 여동생 윌 보렴.

공부는 사람을 둔하게 만든단다.

제발 공부하겠다는 말만은 하지 말아다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 한다.

퇴보하고 싶지 않거든 공부 따위는 하지 말아라.

그 대신에 많이 즐기고 다양한 재미를 느껴보렴.

그리고 오늘날 사람들이 예술에서 요구하는 것은 강렬한 색채와 강한 힘을 가진 살아 있는 어떤 것임을 반드시 명심해라.

나는 아직도 말도 안 되는 연애사건을 일으키곤 한단다.

대게는 창피만 당할 뿐이지만 그래도 전혀 후회하지 않아.

너도 알다시피 내가 예전에 종교에 심취했던 적이 있었잖니 지금에 와서 깨달았는데 차라리 나는 그 때에도 사랑에 빠졌어야 했다.

나는 우울증에 걸리거나 비뚤어진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마음먹는 다면 더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네가 예술가가 되고 싶다면 그렇게 하렴. 마음속에 타오르는 불과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그걸 억누를 방법은 없단다.

소망하는 것을 터뜨리기보다는 태워버리는 게 낫지 않겠니.

그림을 그리는 일은 내게 구원과 같아.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불행했을 테니까 말이야.

어머니께 깊은 사랑을 전해다오.

1887년 가을. 너를 사랑하는 오빠 고흐.


1888년 2월, 고흐는 아를로 향했다.

당시 아를은 28년만의 기록적인 혹한으로 꽁꽁 얼어있었다. 하지만 60센티가 넘는 지독한 폭설에도 아랑곳 않고 그는 다시 예전처럼 전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파리에서 야외생활을 충분히 즐기지 못했던 고흐는 그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날마다 숲과 들로 나가 풍경들을 감상하며 과일 나무 연작에 공을 들였다.


나는 다시 자연의 품에 안겨 풍경화를 그리고 있다.

아마 한 달 후에는 작품 몇 점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이곳 공기는 나에게 큰 도움이 된단다.

너도 이 공기를 마실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안타깝다.

맑은 공기 덕분에 나는 자극제를 따로 복용하지 않아도 피가 잘 돌고 신경이 아주 편하단다.

요즘의 내 그림을 받아보면 그것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그려졌는지 너도 알 수 있을 거야.

얼마 전에는 산책을 나가서 원근법적 틀을 이용한 습작을 세 점 시도하기도 하였단다.

너에게 보낼 그림을 늘 준비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라.

하지만 네가 너무 힘들다면 언제든지 말하렴. 즉시 유화를 중단하고 돈이 덜 드는 데생을 하마.
1888년 3월~4월




1888년 봄.

고흐는 줄곧 남쪽의 밀밭 풍경에 사로잡혀 있었다.

늘 정직하게 땀을 흘리면서도 한평생 고독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농부들.

고흐는 그 농부들의 삶이 자신의 인생과 흡사하다고 느꼈다.

어느덧 6월이 되어 제법 무더운 날씨가 시작 되었을 때도 고흐의 밀밭 나들이는 한결같았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풍경화를 위한 색채 탐구 그리고 지긋지긋한 돈 문제뿐이었다.



무더운 날씨가 시작되어 모든 것이 봄의 그것과 달라지겠지만 자연은 여전히 아름답구나.

이제 모든 것이 낡은 황금이나 청동, 구릿빛을 띠게 될 테고, 창백하고 뜨거운 청록색 하늘 아래 모든 것이 들라크루아의 그림에서처럼 달콤하고 조화로운 색상이 되겠지.

이 아름다운 생활에 고갱이 동참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우야, 네가 그와 내게 따로 생활비를 보낸다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다.

우리 두 사람이 생활비를 나눠쓴다면 모두에게 이득이지 않겠니.

그래서 나는 화가들의 공동체를 만들어보려고 노력중이다.

작품생활과 집안일을 함께 하는 화가들의 공동체는 참으로 이상적이야.

나는 요새 땡볕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도 무척 즐겁단다.

서른다섯 살이 아닌 스물 다섯이었을 때 이곳에 왔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니!

나는 바람이 불어도 밖으로 나가 이젤을 말뚝으로 고정시켜 작업한단다.

압도될 것 같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 완벽함 앞에서 아무리 큰 무력감을 느끼더라도 우리는 노력해야 해.
1888년 6월


가난의 고통이 여전히 따라붙긴 했지만 아를에서의 초반은 고흐에게 있어서 가장 건강한 시간이었다.

그림은 나날이 좋아졌으며 그의 작품에 호감을 보이는 사람들도 점차 늘어갔다.

하지만 좋은 시절도 잠깐이었고, 그의 엄청난 작업 속도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야기 시켰고 그것은 고흐에게 큰 시련이었다.

여리고 고지식한 고흐에게는 세간의 크고 작은 비난을 감당할 만한 융통성이 없었다.

그리하여 아를 후반, 고흐의 작품은 계속해서 좋아지고 있었지만 그의 정신 세계는 비극적 결말을 암시하는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우리를 이끌어주는 것은 우리의 감정 그리고 자연에 대한 진지한 느낌이다.

이 감정이 너무 강할 때면,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붓을 휘두르게 되지. 그럴 때는 연설이나 편지에 나오는 낱말들처럼 붓질이 연속적으로 계속된단다.

그런 찬란한 순간이 늘 오는 것은 아니야.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 답답한 날이 계속될 수도 있다는 것을 왜 모르니. 그러니까 쇠방망이를 얻으려면 쇠가 달궈졌을 때 두드려야만 한다.

내 경우에는 풍경화를 그릴 때 빨리 그린 작품이 더 나은 경우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힘든 작업을 마치고나서 긴장을 풀고 기분을 전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술 한 잔 마시거나 독한 담배를 피우면서 멍하니 취해 있는 것이다.

별로 품위 있는 행동은 아니다만 너무 힘들어서 어쩔 수 없구나..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불우하게 살았다는 건 참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삶 전체를 볼 수 있을까 아니면 죽을 때까지 삶의 한 귀퉁이밖에 알 수 없는 것일까.. 죽어서 묻혀버린 화가들은 그 다음 세대에 자신의 작품으로 말을 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그림을 그린 캔버스는 텅 비어 있는 캔버스보다 훨씬 가치가 있어.

그 이상은 아무도 주장하고 싶지 않다.

단지 그 사실이 나에게 그림을 그릴 권리를 주며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라는 걸 말하고 싶다.

 내겐 그럴 권리가 있어! 그림은 나에게 앙상한 몸뚱이만 남겨주었고 나는 박애주의자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아주 돌아버리기까지 했다.

넌 어때, 내 생활을 위해 15만 프랑 가량의 돈을 써버렸지 않니.

그런데 우리에게 남은 것은 뭐지? 아무것도 없어.

누군가 내 그림이 성의 없이 빨리 그려졌다고 비난하거든 “당신이 그림을 성의 없이 급하게 본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해주어라.

나는 그들의 말에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으련다.
1888년 6월 ~ 7월


지친 고흐는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 것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던 모양이다.

그는 테오에게 ‘늙어서 죽는다는 건 별 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편지를 쓴 후 줄곧 밤 풍경을 스케치 했다.

1888년 9월. 그러니까 고갱과의 불화로 고흐 스스로 자신의 귀를 잘라내기 3개월 전.

아를의 가을밤은 온통 고흐의 발자국으로 채색되고 있었다.


이곳의 밤은 지독하게 아름다워.

나는 그 풍경 속을 실컷 걸어 다니며 즐기고 있다.

밤 풍경이나 밤이 주는 느낌 혹은 밤 그 자체를 그 자리에서 그리는 일이 아주 흥미롭다.

오늘부터 내가 방을 얻어 살고 있는 카페풍경을 그릴 생각이다.

저녁에 가스 불빛 아래서 말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밤의 카페’라고 부르는데 밤새도록 열려있는 카페다.

돈이 없거나 너무 취해서 여관에서 받아주지 않는 ‘밤의 부랑자들’이 이곳에서 잠시 쉬어간다. 이런 모습을 스케치 하고 있노라면 내 자신이 항시 어딘가로 떠나야 하는 나그네처럼 느껴진단다.

아우야 나는 성공이 끔찍스럽다. 그래서 수도사나 은둔자처럼 편안한 생활을 포기하고 나를 지배하는 열정에 따라 살아가기로 결론을 내렸다.

이 아름다운 남프랑스의 자연을 두고 고갱은 성공을 위해 파리를 택했다.

그는 환상을 갖고 있어.

이렇게 빛나는 거리를 두고 파리로 떠난다는 것은 무척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그가 성공을 원한다면 방해하지 말아야겠지.
1888년 9월


고흐가 바라는 것은, 자연 속을 거닐며 끊임없이 그림을 그리는 것 그것 한 가지 뿐이었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난이라는 괴물과 치열하게 싸워야했고 그래서 그가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화가 공동체’는 절대로 무너져서는 안 될 그의 탈출구였다.

하지만 늘 그렇듯 고흐의 이상은 현실과의 벽이 너무 컸고 그로 인해 고갱과 자주 충돌했다.

 

그러던 12월 23일.

고갱의 산책 장소인 라마르틴 광장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정신이상 증세를 일으킨 고흐가 면도칼로 고갱을 위협한 것이다.

고갱에 대한 집착으로 고흐는 자신의 귀까지 잘라 자신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그리고 다시는 환희에 찬 산책을 경험할 수 없게 된다.

실제로 고흐가 이후에 쓴 편지에서는 파란하늘을 찬양한다거나 유황빛 태양에 감탄하며 푸른색과 노란색의 조합에 대해 열광하는 식의 언급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의 행복한 산책 생활이 사실상 막을 내린 것이다.

반 고흐의 생애에서 작품 활동이 가장 왕성했고 또 그만큼 중요한 걸작들도 많이 탄생했던 아를시기. 신이 이 풍요로운 시기를 일단락 지을 때까지 고흐가 세상에 내놓은 작품은 유화작품만 무려 1백 87점에 달했다.


                    

 




 


아름다운 땅 아를은 고흐에게 예술적 색채발견을 허락하여 그의 작품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지만 예술적 경지에 더 가까워질수록 고흐가 겪어야 하는 인간애의 좌절은 너무 혹독했다.

그래서일까. 생레미 시기에 들어서서 고흐의 발길이 택한 곳은 자연도 사람도 아닌 자신의 그림 속이었다.

자연은 더 이상 그에게 예전과 같은 구원과 안식을 주지 않았고 다만 더 좋은 그림을 위한 빛의 원천이자 형태의 소재일 따름이었다.

오로지 회화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틸 뿐이었다.

동물원 같은곳에 갇혀 미친 사람들의 생활을 보고 있자니 막연한 불안이나 공포가 사라졌다.

정신병도 기타 여러 가지 질병들과 비슷한 질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그런대로 편하구나. 어쨌든 환경을 바꾼 것은 나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몸이 좋지 않지만 그래도 정원에 나가 소재를 얻어 그림을 그리고 있단다.

이제는 삶에 대한 공포도 한결 덜해졌고 우울한 기분도 그런대로 잠잠하다.

하지만 삶의 의지나 욕망 같은 그 어떤 일상적인 희망도 느낄 수 없다.

어떤 곳으로 가도 이제는 마찬가지 일거라는 생각에 굳이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아직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만이 놀랍고도 중요한 사실이란다.

1889년 5월


아를후반에 광적인 고통에 시달렸던 고흐는 생레미 정신병원에서 오히려 안정을 찾아갔다.

점점 무채색으로 야위어 가는 삶과는 다르게 그림을 향한 그의 열정만큼은 시간을 더할수록 더 강렬하게 불타올랐기 때문이다.

매우 다행스럽게도 병원 안에서도 자연은 존재했으며 그는 날마다 정원에 나가 색채탐구를 계속했다. 그의 색채는 전보다 더 차분해졌으며 더 높은 절제의 경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수시로 그를 괴롭히는 불청객이 있었으니 그것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그의 발작질환이었다.

예고 없는 발작이 여러 차례 계속되고 있지만 네게 보낼 그림을 여러 편 완성하였다.

밀밭에 나가 그린 그림은 아마 내 그림 중 가장 밝은 작품일거야.

지금은 내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사이프러스 나무를 그리고 있어.

이것을 소재로 ‘해바라기’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

사이프러스나무를 감상하다 보면 이제껏 이걸 다룬 그림이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이 나무의 선과 균형은 너무 아름다워. 엄청난 깊이를 가진 나무의 푸른빛이 태양 가득한 풍경 속에서 하나의 점이 되는 그 순간을 내가 그릴 수 있을까.

어려운 일이다. 이곳의 자연을 그리기 위해서는 그 속에 아주 오래 머물러야 할 것 같아.

그림은 나에게 가장 훌륭한 치료책이고 나는 그것에 모든 것을 걸고 매진하고 있다.

몸이 아파 산책을 할 수 없는 날에는 창문을 통해서라도 자연의 풍경에 몰입해야 해.

우리는 고통의 끝이 과연 어디까지인지 그 정보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지 않니.

그러니 밀밭과 같은 자연을 바라보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그림 속의 것이라 할지라도.
1889년 6월~7월


극심한 발작이 반복되면서 고흐의 그림은 더 강렬해졌다.

불이 활활 타오르는 듯한 붓놀림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올리브 밭이나 들판을 그린 작품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그려진 정물화와 인물화 대부분이 비슷한 패턴이다. 특히 작품 <아이리스>는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과 더불어 생레미 시기의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고통과 사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반 고흐는 종교적 귀의를 암시하는 두 점의 걸작을 만들어내는데, 낭만주의 회화의 대가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모방한 <착한 사마리아인>과 <피에타>가 대표적이다.


고흐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들과 사람들로부터 혹독하게 거부당했다.

그래서 결국 미치고 말았다.

그림 속에 자신을 가두는 것 말고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구원의 키워드는 오직 그림뿐. 그래서 신들린 듯 엄청난 작품을 완성해냈지만 그의 생전에 판매된 유화작품은 (붉은 포도밭 - 현재 모스크바 푸쉬킨 미술관 소장) 딱 한 점뿐이었다.

그리하여 생레미 후반, 그는 마침내 찬란한 자연 속에서 죽음을 관찰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이 우울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림은 그 어느 시기보다도 강하고 화려했으며 신들린 듯 거칠어진 붓 터치는 현실의 고통을 더욱 강렬하게 표현하였다.


뙤약볕의 밀밭 풍경 속에서 나는 죽음을 보았다.

농부가 베어내는 밀이 마치 삶을 마감하는 인간 같구나.

예전에 내가 그렸던 ‘씨 뿌리는 사람’과 반대되는 이미지다.

그런데 이 죽음 속에는 슬픔이 없다. 태양이 모든 것을 순수한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찬란한 대낮에 이루어진 죽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용감하다면 고통과 죽음을 완벽하게 받아들임으로써 내 자신을 포기해야 할 그 순간을 인정해야 한다.

붓을 한 번 움직이는 것은 얼마나 신기한 일이냐! 야외로 캔버스를 들고 나간 날에는 잔뜩 몰입해서 풍경을 감상해야 해.

그것만이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 그렇게 작업을 하면 갑작스러운 변화 없이도 그림이 아주 좋아지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단다. 예전에는 알아보지 못했던 시골 풍경의 진면목도 만날 수 있고 말이야.
1889년 9월~12월


죽음을 예견하는 상황에서도 계속된 그림을 향한 몸부림.

그것은 세상과 다시 화해하고 싶은 화가의 의지이기도 했다.

고흐가 꿈꾸는 삶은 고독으로 점철된 예술가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가 그리는 행복은, 그림을 마음껏 그리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옹기종기 어울려 지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이 더 좋아질수록 그의 소박한 꿈은 더 멀리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고흐는 자신을 평가하는 세간의 관심이나 경솔함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결국, 세상과의 화해는 실패로 치닫고 있었다.

제발 부탁인데 사람들에게 더 이상 내 그림에 대한 글을 쓰지 말아달라고 전해다오.

그들은 나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전혀 원하지 않는다.

그림은 나를 지켜주고 있지만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떠드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나는 정말 노력했다.

나는 지금껏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친 적이 없어. 그런데 사람들은 어땠지?

나를 무슨 위험한 짐승이라도 되는 양 감시원을 붙이길 원하고 있어.

이건 너무 부당해. 나는 더 이상 이런 대접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1890년 4월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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