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r John Everett Millais
(1829-1896)
[눈 먼 소녀]The Blind Girl,
1854-56, oil on canvas,
City Museum and Art Gallery at Birmingham, England
폭풍우가 지나가고 잘 세척된 흙냄새 가득한 시골 논두렁길에 앉아 소녀는 깊은 숨을 들이쉰다. 이렇게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쏟아져 내리는 햇빛의 질량만큼 마음이 행복해져요. 가지런히 빗겨진 머리카락과 홍시처럼 잘 익은 소녀의 볼에서 현실의 고단함같은 건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풀포기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소녀의 거친 손에서 잠시 짠해지는 마음은 무릎 위에 단정히 놓인 콘체르티나를 발견하고 안도한다. 그리고 그 안도감은 어쩐지 비겁하다. 나 혼자 다 가진 것은 아니구나하는 빛의 세계에 살고 있는 자의 가엾은 연민. 혹자는 눈에 익은 모양새로 흘러내리는 저 자주색 숄이 성모 마리아의 그것을 연상시켜 소녀의 미덕을 드러내고자 하는 밀레이의 의도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만일 밀레이에게 그러한 의도가 있었다면 그 위에 무심히 내려 앉은 나비가 오히려 더 적합하지 않을까. 어쩌면 나비는 소녀의 꽃같은 마음씨에 취해 날아들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원래 유치한 것이 더 감동적인 법이다. 게다가 저 쌍무지개가 신의 은총이고 눈 먼 소녀가 그 은총을 보지 못함으로해서 소녀의 비극적인 상황이 잘 드러난다는 말은 그럴싸하긴 하지만 오버가 아닐까. 눈 먼 소녀는 콘체르티나를 포함하여 따뜻한 색으로 그려졌고 고개를 돌려 언덕배기에 걸린 쌍무지개를 바라보고 있는 어린 소녀는 차가운 색으로 그려졌다. 그들을 둘러싼 자연의 풍성하고 따뜻한 색을 볼 수 있는 것에 대한 보상이고 댓가인 걸까.
Autumn Leaves, 1855-56
<눈 먼 소녀>는 그 모델이 밀레이의 아내 에피 그레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그림 속 이미지만을 놓고 보았을 때 그 이듬해에 그린 <낙엽>의 다른 두 모델 마틸다 프라우드풋(빗자루를 들고 있는 소녀)과 이사벨라 니콜(사과를 들고 있는 소녀)일 가능성이 더 크다. 에피 그레이의 이목구비는 너무나 단정하고 빈틈이 없어 <눈 먼 소녀>의 다소 방심한 듯한 표정에서 풍겨지는 평화로움이나 고요함을 느끼기 힘들다. 밀레이는 <낙엽>을 다분히 종교적인 의도로 그렸다고 한다. 어린 소녀들이 낙엽을 모으는 장면을 통해 시간이 흐르면 인간도 저 낙엽처럼 죽음을 맞게 된다는 뭐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낙엽>과 비슷한 주제를 드러내는 그림으로 <사과꽃 Apple Blossoms>이라는 그림이 있는데 미학적으로 언짢은 구석이 많아 그다지 권장하고 싶지는 않다. |
시간이 있을때 장미 봉오리를 모으라. (gather ye rosebuds while ye may,) 늙은 시간은 끊임 없이 날아가 (old time is still a-flying;) 오늘 미소 짓는 이 꽃도 (and this same flower that smiles today) 내일이면 죽으리라. (tomorrow will be dying.) |
ㅡ로버트 헤릭 <소녀들에게의 충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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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그레이이_ |
에피 그레이에게는 두 명의 자매가 있었는데 소피 그레이와 앨리스 그레이가 그들이다. <낙엽>에서 중앙에 낙엽을 들고 있는 소녀가 소피 그레이이고, 그림 왼편에 바구니를 들고 있는 소녀가 앨리스 그레이이다. <사과꽃>에서도 이 두 자매를 볼 수 있는데 그림 정면에 회색 드레스를 입고 무릎을 꿇고 선 소녀가 소피그레이이고 그 옆에 모로 누워 턱을 괴고 있는 소녀와 죽음의 위협아래 희생양처럼 누워있는 소녀가 앨리스 그레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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