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모음방

Sir John Everett Millais

모링가연구가 2009. 3. 10. 05:40

Sir John Everett Millais
(1829-1896)

 

The Blind Girl

[눈 먼 소녀]The Blind Girl,

 1854-56, oil on canvas,

City Museum and Art Gallery at Birmingham, England

 

폭풍우가 지나가고 잘 세척된 흙냄새 가득한 시골 논두렁길에 앉아 소녀는 깊은 숨을 들이쉰다. 이렇게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쏟아져 내리는 햇빛의 질량만큼 마음이 행복해져요. 가지런히 빗겨진 머리카락과 홍시처럼 잘 익은 소녀의 볼에서 현실의 고단함같은 건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풀포기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소녀의 거친 손에서 잠시 짠해지는 마음은 무릎 위에 단정히 놓인 콘체르티나를 발견하고 안도한다. 그리고 그 안도감은 어쩐지 비겁하다. 나 혼자 다 가진 것은 아니구나하는 빛의 세계에 살고 있는 자의 가엾은 연민. 혹자는 눈에 익은 모양새로 흘러내리는 저 자주색 숄이 성모 마리아의 그것을 연상시켜 소녀의 미덕을 드러내고자 하는 밀레이의 의도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만일 밀레이에게 그러한 의도가 있었다면 그 위에 무심히 내려 앉은 나비가 오히려 더 적합하지 않을까. 어쩌면 나비는 소녀의 꽃같은 마음씨에 취해 날아들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원래 유치한 것이 더 감동적인 법이다. 게다가 저 쌍무지개가 신의 은총이고 눈 먼 소녀가 그 은총을 보지 못함으로해서 소녀의 비극적인 상황이 잘 드러난다는 말은 그럴싸하긴 하지만 오버가 아닐까. 눈 먼 소녀는 콘체르티나를 포함하여 따뜻한 색으로 그려졌고 고개를 돌려 언덕배기에 걸린 쌍무지개를 바라보고 있는 어린 소녀는 차가운 색으로 그려졌다. 그들을 둘러싼 자연의 풍성하고 따뜻한 색을 볼 수 있는 것에 대한 보상이고 댓가인 걸까.

 

Autumn Leaves

Autumn Leaves, 1855-56

 

<눈 먼 소녀>는 그 모델이 밀레이의 아내 에피 그레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그림 속 이미지만을 놓고 보았을 때 그 이듬해에 그린 <낙엽>의 다른 두 모델 마틸다 프라우드풋(빗자루를 들고 있는 소녀)과 이사벨라 니콜(사과를 들고 있는 소녀)일 가능성이 더 크다. 에피 그레이의 이목구비는 너무나 단정하고 빈틈이 없어 <눈 먼 소녀>의 다소 방심한 듯한 표정에서 풍겨지는 평화로움이나 고요함을 느끼기 힘들다.

밀레이는 <낙엽>을 다분히 종교적인 의도로 그렸다고 한다. 어린 소녀들이 낙엽을 모으는 장면을 통해 시간이 흐르면 인간도 저 낙엽처럼 죽음을 맞게 된다는 뭐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낙엽>과 비슷한 주제를 드러내는 그림으로 <사과꽃 Apple Blossoms>이라는 그림이 있는데 미학적으로 언짢은 구석이 많아 그다지 권장하고 싶지는 않다.

 

시간이 있을때 장미 봉오리를 모으라. (gather ye rosebuds while ye may,)
늙은 시간은 끊임 없이 날아가 (old time is still a-flying;)
오늘 미소 짓는 이 꽃도 (and this same flower that smiles today)
내일이면 죽으리라. (tomorrow will be dying.)
ㅡ로버트 헤릭 <소녀들에게의 충고>
 

     
___에피 그레이
소피 그레이
앨리스 그레이_

 

에피 그레이에게는 두 명의 자매가 있었는데 소피 그레이와 앨리스 그레이가 그들이다. <낙엽>에서 중앙에 낙엽을 들고 있는 소녀가 소피 그레이이고, 그림 왼편에 바구니를 들고 있는 소녀가 앨리스 그레이이다. <사과꽃>에서도 이 두 자매를 볼 수 있는데 그림 정면에 회색 드레스를 입고 무릎을 꿇고 선 소녀가 소피그레이이고 그 옆에 모로 누워 턱을 괴고 있는 소녀와 죽음의 위협아래 희생양처럼 누워있는 소녀가 앨리스 그레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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