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8.12~8.14
박정희 혁명정부의 정권이양 계획 발표. 1961-08-12. (조선닷컴 포토DB견본)
민간정부에 정권을 이양하라는 미국과 구정치인들의 요구는 혁명과업 수행의 걸림돌이었다. “할 일이 태산인데 정권을 내놓으라고?” 박정희 의장은 때로 고심하고 때로 동요하는 듯하면서도 이 걸림돌을 넘어 뚝심있게 앞으로 갔다.
황지선 기공식. 1961-08-12. (정부기록사진집5)
강원도 삼척지구에서 산업철도인 황지선을 착공, 태백산 일대의 지하자원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군 지프가 군사정부의 경제개발 의지를 보여준다.
박정희 의장 프로필. 44세. 사진 촬영일자가 중장 진급 후인 8월14일로 되어 있으나 소장 계급장을 달고 있어 그 이전에 촬영한 듯. 1961-08-14. (정부기록사진집5)
부산 영주터널 개통식에서 테이프 커팅을 하는 박의장. 1961-08-14. (KTV-국가기록영상관)
개통된 터널로 모여드는 부산 시민들. 부산 영주동과 대신동을 연결하는 보도와 차도를 겸한 6백40미터 길이의 터널이다. 1961-08-14. (정부기록사진집5)
“박의장은 군복차림으로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검은색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행사장에는 그를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윽고 테이프를 절단하려는 카운트다운에 들어가 하나, 둘, 셋! 하는 순간 쨍그랑! 하고 무엇인가 땅바닥에 박살이 났다.
모두들 깜짝 놀라 소리난 쪽으로 쳐다보는데 박의장은 아무 소리도 못들은 것처럼 테이프를 자르고는 그냥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경축용 비둘기와 오색종이를 가득 담은 대바구니를 매어단 대나무 막대기를 길 양옆에 세워서 테이프를 걸어두고, 귀빈들이 테이프를 끊는 순간 줄을 잡아 당겨서 그 대바구니를 터뜨리면 비둘기가 날고 오색 색종이가 흩날리며 떨어지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멍청한 친구가 대바구니 속의 비둘기가 배 고파서 날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생각했던지 대바구니 안에 비둘기 모이를 담은 큰 쟁반을 넣어 두었는데 대바구니가 터지면서 그 쟁반이 땅바닥에 그대로 박살이 난 것이란다.
어쨌든 그 조그마한 사건은 한순간의 웃음거리고 그렇게 끝이 났지만 그때 박의장의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면서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와, 간도 크다’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기야 그런 정도였으니까 생명을 건 혁명도 일으켰을 것이고…나는 지금도 어쩌다 영주동 터널을 지날때면 30여년 전 그때 우리 국력이 얼마나 보잘 것 없었으면 이 작은 터널 하나 개통하는데 국가원수가 참석했을까 싶기도 하고, 터널 개통식 때 쟁반이 박살난 그 사건을 회상하면서 깡마르고 작은 체구의 인간 박정희의 모습이 새삼 떠오른다.” (1999년 8월7일자 국제신문, 성병두의 부산시 野史)
금석지감이 현저한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도로공사. 1961-08-14. (정부기록사진집5)
“이 사진은 1960년대 재건국민운동 용인군 촉진회 사진으로 비록 춥고 배고팠던 시절이었지만 미 군용트럭 위 청장년들의 일터로 향하는 모습은 밝고 환환 모습으로 희망에 차있다.” (인터넷 동부신문)
“재건체조를 비롯해 ‘재건청년가’(유달영 작사, 형석기 작곡)와 ‘재건의 깃발아래서’, ‘태극기의 노래’, ‘새나라의 노래’(박두진 작사, 김성태 작곡) 등이 각급 학교와 재건대 교육장에서 울려퍼졌다. 혁명정부의 대과제인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경제개발의 첫 계획을 실천하던 당시 상황에서는 우리 국민의 오랜 의식과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기 위한 음악이 절실히 필요하기도 했고 생활문화면에서도 서서히 살기 좋은 마을로 만들어 가야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땀 흘려 일해야만 했다.” (인터넷 동부신문)
“1961년 6월12일 공포된 국가재건국민운동에 관한 법률 에 근거한 재건국민운동본부는 국민단합운동, 학생봉사, 계몽활동, 허례의식일소를 위한 표준의례준칙제정, 국민저축, 의생활개선, 상도덕앙양, 기일내 납세, 시간관념 고취, 가족계획, 식생활개선운동, 문고보급, 자매부락결연, 사랑의 금고설치, 재해 및 기아추방, 국제친선 및 펜팔, 기념비 건설사업 등 국민총동원운동을 전개했다. 재건국민운동본부는 모법(母法)인 1964년 7월 국가재건최고회의법의 폐지로 사단법인 재건국민운동중앙회로 바뀌었다가 1980년 공포된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에 따라 새마을운동중앙본부로 흡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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