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인도_ 옛 그림 속에 나타난 한국의 여성
예술품에 먼저 나타난 여성
인류가 남긴 미술품에 등장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남성보다 여성이 앞선다.
현존하는 구석기시대 조각으로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비롯하여
세계 도처에서 발견되는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선사시대 풍만한 여인상은 이를 증명한다.
우리나라 역시 남북한 모두에서 이 범주의 조각들이 발굴되어 예외는 아니다.
우리의 옛 그림에 있어서 여성은 생동감 넘치는 고구려 고분벽화를 필두로 화려 섬세한 고려불화, 수묵담채가 중심이 된 조선시대 일반 감상화와 채색이 짙게 입혀진 기록화 성격의 의궤도 등에서 두루 찾아볼 수 있다.
한자 문화권에 있어서는 경국지색의 이름난 미녀 등 왕궁에 사는 화려한 복색의 여인을 그린 사녀도(仕女圖)가 오랜 세월 지속하여 그려졌다.
[전모 쓴 여인].
신윤복.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안악3호분 부인상].
고구려시대.
황해남도 안악군 소재.
여성이 등장하는 우리의 전통 회화는 몇 가지로 나뉘어진다.
첫째, 초상화에 있어서 357년 제작된 안악3호분 내의 부인상과, 오늘날 현존 예가 드물고 후대에 다시 그린 그림이지만 일본 천리대학교 도서관 소장의 하연(河演, 1376-1453)부인상,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조반( , 1341~1401)부인상 등 상류계층 부녀자들의 그림이 전해온다.
둘째는 풍속화로, 고구려 고분벽화 내에도 생활 장면을 그린 디딜방아, 인물, 음식나르기 등의 내용을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에 크게 유행한 풍속화 중에는 김매기, 나물캐기, 우물가, 빨래터, 길쌈, 부엌, 행상 등 각종 가사 장면을 그린 여염집 여인들과, 그네뛰기, 쌍육, 악기연주와 같은 놀이장면에 여인이 등장한다.
셋째는 미인도의 범주로 여인 그림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신윤복(1758?~1813 이후)이 남긴 〈미인도〉를 비롯해 그의 영향이 보여지는 그림들이 있으며,
넷째, 도석인물화 중에 천도(天桃)가 열리자 주목왕을 초대하여 잔치를 여는 서왕모나 마고, 남채화와 같은 여자 신선 등, 그리고 끝으로 불화 및 무속화에 등장하는 여인들이 있다.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 부분.
김홍도.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 부분.
김홍도.
일터에서
풍속화가로 잘 알려진 김홍도의 그림 중 이 분야의 걸작으로는 단연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를 꼽게 된다. 이 그림은 작가가 완숙한 필력을 구사한 57세(1801년)때 그린 것으로 대작이다.
중국의 옛 명문(仲長統의 樂志論)을 주제로 했지만 중국의 풍광이 아닌 조선의 산천을 담고 있으며 고래등 같은 한옥과 그 안에 전개된 생활상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전원생활의 한가롭고 평화로운 즐거움에 취해 삼공의 높은 벼슬을 주어도 조정에 나가지 않는 선비의 삶을 묘사한 것이다.
이 그림 속의 남자들은 독서 중이거나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며 한가로이 쉬는 모습이나 여인은 열심히 실을 뽑아 옷감을 짜고 있다. 이처럼 조선 풍속화에는 여인의 경우 일하는 모습이 주류를 이룬다.
조선후기 풍속화에 첫 발을 내딛은 문인화가 윤두서(1668 ~1715)나 조영석(1686~1761)의 그림 속에는 일하는 여인들이 잘 드러나 있다. 아름다운 옷을 입은 궁중 여인이 아닌 땀내와 인간의 체취가 느껴지는 이들 낮은 신분의 여인들이 그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달라진 세상임을 짐작케 한다.
갓 돋아난 산나물을 찾는 두 여인을 그린 윤두서의 〈나물캐기〉, 조씨 문중에서 최근에 공개된 미완성 풍속화첩에 속한 조영석의 〈새참〉, 〈바느질〉과 간송미술관 소장의 〈절구질〉, 그리고 윤두서의 손자인 윤용(1708~1770)이 그린 옆구리에 망태기를 끼고 호미를 든 튼튼한 다리의 부녀자의 뒷모습을 나타낸 〈나물캐기〉 등은 비교적 이른 시기 문인들이 그린 본격적인 풍속화이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김홍도와 신윤복은 각기 우물가, 빨래터, 주막, 부엌, 음식나르기, 옷감짜기, 행상 등 일하는 여인들을 즐겨 그렸다. 머리에 광주리를 얹은 여인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 그림에서 여인들은 노동의 중압감에 찌든 고달픈 모습이 아닌, 삶의 활기가 느껴지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울러 기녀들은 조선시대에 있어 천인이긴 하지만 오늘날 예술가에 비견되는 자유로운 연애, 외출의 자유, 각종 장신구의 패용이 가능했던 연애인들이었다.
거문고나 가야금 등 악기를 연주하거나 술시중을 들고 춤을 추는 등 유희장면처럼 보이나 이들의 생활상을 다룬 풍속화 또한 넓은 의미로 일하는 여인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계열의 그림에서는 남성들은 조연이고 여성이 주인공인 양 묘사된다. 이 계층의 여인들은 양반들 틈에서도 자못 당당하다.
[점심] 풍속도첩 중.
김홍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자모육아].
신한평.
간송미술관 소장.
아기와 함께
서양에서 성모마리아와 아기예수가 즐겨 그려진 주제이듯 조선시대 여인 그림 중에는 아기를 업거나 감싸안고 젖을 물린 여인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서양 성화의 경우 인간에 의해 보호받는 구세주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아이러니와 진한 모성애가 어우러져 감동을 자아낸다.
우리의 옛 그림 중에도 이에 뒤지지 않는 그림들이 있다. 예를 들어 조선초 문인화가 이암이 그린 〈모견도〉는 주인공이 사람이 아닌 어미개와 강아지들이지만 감동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 보물 527호로 지정된 김홍도(1745~1806이후)의 풍속도첩 중 〈점심〉이나 호암미술관 소장의 8폭으로 된 김득신(1754~1822)의 행려풍속도 병풍 중의 〈점심〉, 1852년 마군후가 그린 〈촌녀채종(村女採種)〉, 그리고 신한평(1735~19809이후)의 〈자모육아(慈母育兒)〉등에는 아기에게 젖을 물린 여인들이 등장한다. 이들 그림에 나타난 여인은 광주리에 담은 점심을 일터로 가져와 내려놓은 뒤 아기에게 수유하는 것으로 젖무덤을 훤히 드러내고 있으나 전혀 천박하다거나 외설과는 거리가 멀다.
신윤복의 아버지인 신한평의 〈자모육아〉는 배경의 묘사 없이 여인과 세 자녀만을 등장시킨 사뭇 조촐한 그림이다. 아버지를 상징하듯 왼쪽 상단에 비교적 크게 나타낸 작가의 관서 등 신윤복 일가족의 자화상으로 생각된다. 남동생에게 사랑을 빼앗긴 사내녀석(신윤복)은 무언가 불편한 심정을 드러내고 있으나 누이는 복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혼자 놀 줄 안다. 시선을 아기의 얼굴에 둔 푸근한 눈매에 후덕한 얼굴의 어머니는 오른손으로 아이를 감싸안고 왼손으로 아기 발을 다독거리며 젖을 물리고 있다. 열심히 젖을 빠는 아기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젖꼭지를 잡고 있다. 자세히 보면 볼수록 따듯한 정이 느껴지는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이 밖에도 아기를 업은 여인만을 주인공으로 한 신윤복의 그림을 비롯해 조선 후기 풍속화에 아기를 업은 여인들은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 경우 아이를 업은 사람은 어머니만이 아닌 할머니 또는 누이이기도 하다.
[책 읽는 여인].
윤덕희.
서울대박물관 소장.
상류층 여인들
조선시대의 미인도를 살필 때 조선 후기에 유행한 우리 복색의 미인도 외에 중국풍의 그림들 또한 다른 계열로 조선 말까지 이어졌다.
김홍도의 경우 중국풍의 사녀도를 남기고 있고, 이재관(1783~ 1837)이 그린 6폭의 도석인물화 중 4폭은 악기를 연주하거나 그림을 그리고 말을 타는 등 여인의 고사를 주제로 하고 있다.
신명연(1809~1892)이나 백은배 등 말기 화단의 그림에서도 화본에서 비롯한 중국풍의 미인도들이 발견된다.
윤두서의 전래작 중 중국 복색의 여인이 독서하는 그림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아들 윤덕희(1685~1766) 또한 같은 주제의 그림이 있는데 이 둘은 사뭇 대조적이어서 흥미를 끈다.
윤두서의 그림은 하인을 거느린 화려한 중국 복식의 여인이 도자기로 된 의자인 돈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인데 반해, 아들 그림인 〈책 읽는 여인〉은 더욱 간략해진 구도로, 아이와 그 누이를 그린 듯 한 〈오누이〉와 쌍을 이룬다.
윤덕희의 그림에 나타난 여인은 전형적인 한복 차림으로 홀로 나무 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다. 부자의 그림은 둘 다 배경에 파초가 등장하며 병풍이 드리워진 옥외의 정경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있어 이와 같은 주제의 그림은 드문 예에 속한다.
이상에서 간략히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 그림에 여인이 등장한 것은 그 역사가 오래다. 화면 내에서 그들은 처한 위치나 신분 및 환경을 막론하고 차분하며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이들은 바로 우리의 누이이며 어머니 상이다. 전통 회화에서 첫번째 위치를 점하는 산수인물화에 등장하는 여성의 빈도는 남성에 미치지 못하나, 풍속화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 비록 그림 속에서 남녀의 역할에 구별이 보이나 주인공으로서의 의연한 모습은 우리 옛 여성들의 당당함을 드러내는 듯 하다.
글_이원복, 국립광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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