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rles-Francis Daubigny,
France(1817 - 1878)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의 [알렉산더 대왕의 전쟁]
Albrecht ALTDORFERThe Battle of Alexander
1529, Wood, 158,4 x 120,3 cm, Alte Pinakothek, Munich
페르시아에 오래 머무는 동안,
유대인들은 새로운 종교 체제를 접하게 되었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자라투스트라(Zarathustra),
즉 조로아스터(Zoroaster)라는 위대한 종교적 스승의 제자였던 것이다.
자라투스트라는 모든 인생은
선과 악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이라고 보았다.
지혜의 주인인 오르마즈드(Ormazd)가
무지와 사악함의 주인인 아리만(Ahriman)과
영원히 싸우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생각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들은 단 하나의 주인인 여호와만을 인정했다.
일이 잘못되었거나 전쟁에서 졌을 때,
또는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그들은 언제나 이런 재난은
자신들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악한 기운이 직접 관여한 결과라고 생각한 유대인은 전혀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낙원의 뱀조차도
아담(Adam)과 이브(Eve)보다는 덜 사악했다.
아담과 이브는 하느님의 거룩한 명령을 고의로 어겼던 것이다.
자라투스트라의 영향으로,
유대인들은 여호와가 행한 모든 선한 것을 망치려 하는
악한 기운이 존재한다고 믿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를 여호와의 적,
즉 "사탄(Satan)" 이라 부르며 무서워하고 미워했다.
유대인들은 사탄이 331년에 지구로 왔다고 믿었다.
알렉산더(Alexander)라는 이름의 젊은 이교도가
니네베 평원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물리쳤을 때,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 다리우스는
자신의 지시로 닦여진 길에서 살해되었다.
유대 포로들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던
이 강력한 제국은 과거의 것이 되었다.
알렉산더와 그리스인들은 승승장구했다.
세계의 종말이 온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세계는 결코 끝나지 않으며, 언제나 "다음장"이 있다.
이제 유대인들은 매우 특이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마케도니아(Macedonia)의 알렉산더는 사실 그리스인이 아니었다.
진짜 그리스인들은 그를
"외국인"으로서의 마케도니아인이라고 보았지만,
그리스의 생활과 문명에 대한 사랑이 확고했던 그자신은
이런 견해를 거부하였다.
그는 아주 젊었을 때 그리스 대의명분의 옹호자가 되었다.
그 후에는 솔론(Solon)과 페리클레스(Pericles)의 사상을
세계만방에 알려,
모든 사람들에게 인간의 지성이 가진
고귀한 매력을 일깨워주어야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알렉산더는 336년에 자신의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13년 후,
그의 시신은 한때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의 고향이었으며
곧 새로운 제국의 중심이 될 곳에 놓여졌다.
그 동안 이 마케도니아인은
나일(Nile) 강에서 인더스(Indus) 강까지 모두 정복했고,
그리스 문명의 근본을 서아시아와 이집트(Egypt)에 퍼트렸다.
위대한 정복자의 군대가
시리아(Syria)의 평야를 침략하기 시작하자,
유대인들은 매우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다.
새로운 주인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
단지 몇 년 전이었던 345년에 그들은 시리아의 왕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Artaxerxes)의 잔혹한 행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었다.
이집트 왕 넥타베누스(Nectabenus)와
그리스 보조 군대의 도움으로 그들은 잠시 동안 지탱할 수 있었다.
이 손쉬운 승리를 보고
용기를 얻은 페니키아인들은 혁명을 일으켰으나,
결과적으로 시돈(Sidon) 시는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그 후 예루살렘도 비슷한 운명에 처해져 대부분의 가옥이 파괴되었다.
성전은 부정탄 동물들이 헌물로 바쳐짐으로써 더럽혀졌다.
많은 사람들이 포로가 되어
카스피(Caspi) 해 남쪽 연안의 히르카니아(Hyrcania)로 가게 되었고,
유대인의 독립의 꿈은 약탈당한 땅에서
피어오르던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자존심 강한 유대인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성스러운 율법을 세세하게 지켜왔다.
또한 본보기가 되는 행동으로 여호와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으므로,
여호와가 이글거리는 칼로
예루살렘을 보호해 주리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이제 겨우 아르타크세르크세스와 그의 끔찍한 용병을 쫓아냈는데,
알 수 없는 위협이 또 온 것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알렉산더는 생각할 시간을 많이 주지 않았다.
티레(Tyre)가 파괴되고 사마리아(Samaria)도
곧 정복될 것이라는 소식이 들리기 얼마 전,
유대인들은 마케도니아 왕에게 돈과 양식을 보내기 위해 소집되었다.
가자(Gaza)가 그리스에 넘어가고
바다로 가는 길이 단절되자 도망갈 희망도 사라졌다.
전설에 따르면,
알렉산더가 예루살렘을 친히 방문하였다가
유다(Judah) 백성을 관대하게 대하라는 그 유명한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정복자의 요구에 조용히 순응하여 금과 은을 보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유대인들은 박해받지 않았으며,
주변의 제국이나 왕국이 모두 먼지 아래로 파괴되는 동안
상대적으로 쉬고 있을 수 있었다.
몇 년 후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시가 나일 강 유역에 건설되어,
사라진 페니키아의 교역소를 대신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의 사업 능력이 필요했던 알렉산더는
이 도시의 북동쪽에 그들의 집을 마련해 주었다.
유대인들 중 많은 수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예루살렘을 떠나 이집트로 이주했다.
그리하여 성스러운 도시는 대부분의 시민들로부터 버림을 받아
수도로서의 특성을 천천히 잃어갔다.
모두가 존경하기는 하지만 방문하는 이는 별로 없는
유대 민족의 영적인 중심지는 이렇게 만들어져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알렉산더가 죽은 이후에도 변화된 것은 없었다.
위대한 마케도니아인의 제국은
그의 부하들에 의해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인 프틀레마이오스(Ptolemaeos)는 이집트로 갔다.
기원전320년 그는 시리아를 통치하고 있던 이전 전우에게 전쟁을 걸었는데,
당시 유다 땅은 시리아에 속해 있었다.
안식일에 예루살렘이 피습되자 유대인들은 네 번째 계명에 따라
싸우기를 거부하다가 결국 도시를 잃었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가
유대인들에게 유화 정책을 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집트로 이주했고,
한때 솔로몬(Solomon) 군대의 발소리로
활기 넘쳤던 길거리에는 잡초만 무성해 졌다.
그 후 100년 동안의 이야기는 매우 지루하다.
알렉산더의 부하였던 자들의 후손들은 쉬지 않고 싸웠고,
유파의 주인도 자주 바뀌었다.
예수가 태어나기 2세기 전 유다는 마침내
셀레우코스(Seleucos)가의 영토가 되었다.
셀레우코스 왕가의 여덟 번째 왕으로 유명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Antiochus Epiphanes)는
175년에 서아시아의 가장 큰 지역의 왕이 되었다.
지성적이지만 참을성 없었던 이 군주는
유대인이 의식적인 국민으로 성장할 수 있는 새 장을 열었다.
그가 왕위에 오르자 유다의 인구는 급속히 줄어들었다.
편안하고 매력적인 그리스의 도시 생활이
유대 문화에 충실했던 이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유대 민족 모두가
아시아와 유럽의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완벽하게 섞인,
특이한 그리스 문명에 흡수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잘 사는 사람들을
그대로 놔둘 만한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선조들이 한 일을 모두 망쳐버렸으며,
미적지근한 유대인들을 다시 열정적인 애국자로 만들어놓았다.
<출처;blog.empas.ajirih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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