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한 그림들 가운데 서양화와는 다르게 우리 그림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정서가 따로 있습니다. 필자가 소개하는 그림을 본 독자들 가운데, 화면 가득 여러 소재들로 꽉 채워진 대부분의 서양화는 너무 답답한 느낌이 들며 어렵게 생각된다고 말씀하신 독자도 있었습니다. 이는 대부분의 우리 그림이 주는 여유와 그림을 감상하면서 펼치게 되는 자유로운 상상력, 그리고 작가의 감정을 함께 읽고 공감하게 되는 고유의 정취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신사임당의 풀벌레 자수병풍 그림에 이어, 두 번째로 우리 그림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조선 중기의 화가였던 이암(李巖, 1499-?)의 그림 가운데, 특히 잘 그렸던 동물 그림 3점을 함께 감상할 것입니다.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으나, 먼저 간략하게 살펴보고 그의 그림을 감상하겠습니다.
이암은 1499년(연산군5년)에 세종의 넷째아들인 임영대군의 증손으로 태어나 두성령에 제수된 왕족화가입니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정중(靜仲)이며, 초상 그림에도 뛰어나 1545년 중종 어진(中宗御眞)을 그릴 사람으로 이상좌와 함께 추천되기도 하였다고 《인종실록(仁宗實錄)》에 전해집니다.
이암은 특히 개나 강아지, 고양이 등 털이 난 동물 그림을 잘 그렸습니다. 개 그림을 비롯한 동물그림이나 화초(花草)그림에서 천진난만한 분위기와 한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하였으며, 그런 화풍은 후세에까지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의 명성과 그림의 대부분은 일본에도 널리 알려지고 소장되고 있어, 한 때는 일본화가로 잘못 알려지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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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미개와 강아지 그림〈모견도(母犬圖)〉, 종이에 담채, 73x42.2cm, 국립중앙미술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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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이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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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이암이 동물을 소재로하여 그린 그림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긴 꼬리를 늘어트리고 의젓하게 엎드린 채 포근한 표정과 눈빛으로 어린 강아지를 보라보는 어미개와 그 등 위에서 편안하게 잠든 강아지, 어미젖을 먹기위해 젖가슴을 파고드는 강아지의 천진스러운 모습이 정겹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다소 어미 개와 배경으로 그려진 나무의 비례가 맞지 않아 조금 어색한 감이 있으나, 어미개와 강아지 위로 드리운 나뭇가지와 잎새가 안정감을 더해주며, 주제를 돋보이게 합니다. 이암이 강아지의 얼굴에 안경을 씌운 것처럼 그려넣었으며, 음영과 먹의 농담을 이용한 몰골법으로 부드럽게 표현하여, 평온하고 한가로운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다리와 발, 특히 발가락 부분은 예리한 선으로 그려넣어, 몸통의 부드러운 털과는 대조를 이루며 매우 사실적으로 보입니다. 어미개의 목에 두른 목걸이도 요즈음에도 많이 쓰는 것과 비슷한 화려한 모양이며 붉은 색으로 조화시킴으로써 화면에 생동감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일가족으로 보이는 개와 강아지가 느긋하고 한가로이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저절로 미소가 번집니다.
꽃과 새, 강아지 그림〈화조구자도(花鳥狗子圖)〉, 종이에 채색, 86x44.9cm, 호암미술관 소장, ⓒ2005 이암
이 그림도 역시 한국적인 동물화의 세계를 펼친 이암의 유명한 작품으로, 꽃과 동물이 한데 어우러져 서정적이면서도 낭만적인 분위기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른한 오후의 어느 날, 귀여운 강아지 세 마리가 꽃 그늘 아래 앉아 있는 표정과 행동이 천진스럽게 표현되어 있으며, 암수 한 쌍으로 보이는 새 두 마리와 나비, 벌로 보이는 풀벌레의 고개짓, 날개짓이 살아있어, 그림 전체에 약동하는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강아지 세 마리 중에서 검둥이는 물끄러미 무언가를 쳐다보고 있고, 그 뒤에 있는 누렁이는 따뜻한 낮잠을 자는 듯 졸고 있으며, 앞쪽의 흰둥이는 풀벌레라도 잡았는지 입에 물고 발장난을 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꽃나무 위 가지에도 역시 한가로이 새 두 마리가 앉아 꽃향기를 맡으며 사랑을 나누는 듯 다정해보이며, 날아오는 나비 풀벌레와도 반갑게 인사나누는 듯합니다.
특히 이 그림은 강아지의 천진스러운 눈 빛이나 안정된 구도, 새와 나비, 풀벌레의 움직임을 통하여 평화롭고도 따뜻한 느낌을 주며, 전체적으로 잘 어울어져 있어 조화롭고 안정적인 느낌을 받게됩니다. 특히 강아지의 표정은 역시 먹의 농담을 이용한 몰골법으로 부드럽게 표현한 반면, 뒷 배경의 꽃나무는 구륵법을 써서 잎새와 나무줄기 하나하나를 자세히 묘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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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과 새, 고양이, 강아지 그림〈화조묘구도(花鳥猫狗圖)〉, 87×44Cm, 평양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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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이암 |
| 이 그림은 서로 대칭을 이루는 두 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폭이 서로 비슷한 정경과 구도로 되어 있습니다. 꽃과 새의 생생한 묘사로 지금도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새들은 모두 짝을 이룬 두 쌍이며, 몸짓이 너무도 다정하여 화사한 꽃송이들이 축하라도 하는 듯합니다. 꽃 그늘 아래 강아지와 고양이의 모습이 한 화면 속에 어우러져 화사한 봄 날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물씬 자아냅니다.
실물보다 과장하여 크게 그려진 붉은 꽃이 주는 환상적인 분위기와 동심어린 고양이와, 강아지, 새들이 함께 어울어진 모습이 솔직하고 천진스럽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왼쪽 그림의 고양이는 새라도 잡으려는 듯, 익살스런 표정이 재미있으며, 나무를 타고 있는 고양이가 부러운 듯, 나무 아래에서 고양이를 올려다보고 있는 강아지도 그렇고, 새라도 잡았는지 깃털 같은 무언가를 입에 물고 있는 왼 쪽 앞 강아지의 위풍당당한 표정, 그리고 무언가로 다투는 듯 휘둥그런 눈으로 서로 응시하고 있는 오른쪽 그림의 고양이와 강아지의 모습도 참 재미있습니다.
이용한 강아지와 고양이의 표정은 역시 묵의 농담을 이용한 구륵법으로 부드럽게 묘사되었으며, 뒷 배경의 꽃과 잎새, 나무줄기, 그리고 새의 표현은 연필로 하나하나 그린 것처럼 정밀하게 표현되었습니다. 꽃의 화려함과 새와 고양이, 강아지의 움직임이 살아있는 듯하여 그림을 보고 있으면 활력과 생기가 넘쳐납니다.
이와 같이, 세 그림 모두 평화롭고 정감이 넘칩니다. 강아지의 표정에 똑같은 구륵법을 사용하였으며, 꽃과 나무의 묘사도 한결같이 정밀합니다. 또한 세 강아지가 세 그림에 모두 등장하는데, 이암의 다른 그림에도 똑같이 등장하고 있어, 이암이 평소에 이 세 강아지들을 곁에 가까이 두고 애정어린 눈으로 관찰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상에 대한 작가의 세심한 관찰력을 엿볼 수 있는 면은 강아지 털의 색깔뿐 아니라 동태와 성격도 차이를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주변의 바위들도 모두 조선 초기 회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단선점준으로 처리되어 있습니다. 또한 배경의 꽃나무에는 새와 나비, 풀벌레의 표정까지 살아있는 듯 생생하고 다정하게 묘사되어 있어, 이암이 동물그림은 물론 꽃과 새그림에도 뛰어난 화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진하고 귀여운 고양이나 강아지의 모습을 통하여 작가의 정감까지 담아낸 이암의 독특한 화풍은 독자(관객)를 한적하고 여유로운 세계로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으며, 이암 그림 대부분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화면 전체적으로 볼 때는 논리성과 완벽성은 떨어질지 모르나,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의 여유와 함께 자유로운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하며, 동심어린 정취에 젖어들게 만듭니다.
이런 점은 그의 그림이 좋아지는 이유일 것이며, 우리 그림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정서이므로 더 가까이 하고 더 자주 만나야 하는 이유입니다. 서양화와는 다른 우리 그림의 고유한 멋은 그런 서정과 여유, 그리고 해학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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