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에 왕국을 세운 역사인물 李正己, 그는 누구인가?
지난 토요일(6월 30일) KBS TV에서는 "대륙 속의 고구려왕국 제왕 이정기" 라는 제목의 '韓國史傳'을 방영했다. '고구려왕국'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고구려유민을 주축으로하여 황하류역의 비옥한 땅 15개주를 장악하고 아들, 손자 대에 이르기까지 55년간을 군림하였으며 가장 강성했을 대는 疆域과 人口가 통일신라를 능가하였다고 한다.(강역; 신라 13만m2, 淄靑 18만m2. 인구; 신라 450만, 치청 540만) 이러한 대업을 이룩했던 인물이면서도 우리 역사속에 그리 익숙하지 않은 이름 李正己, 그는 과연 누구인가?
이정기(732~781)의 본명은 李懷玉이고 고구려유민의 후예이다. 732년(고구려 패망후 64년)에 지금의 遼寧省 朝陽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나라 군인이 되어 26세에 장군이 되고 30세에 兵馬使(지방장관격인 節度使의 다음 직위)가 되었다. 패망한 나라의 유민으로서 뜻을 펼칠 수 있는 길은 오직 군인이 되어 무공을 세우는 것이었다. 고구려 유민 高仙芝가 그러했고, 백제 유민 黑齒常之가 그러했다.
당시 당나라의 정세는 '安史의 亂(安祿山, 史思明이 일으킨 반란, 755~763)'으로 수도 長安이 유린되고 도처에서 도적이 일어나 황제가 통제력을 잃고 변방의 절도사들이 권력을 휘두르던 시대였다. 營州지방(지금의 요녕성)의 平盧節度使 侯希逸을 도와 산동지방에서 일어난 史朝義의 亂을 진압하고 그 일대의 9개주를 병합하였다.
그러나 절도사 후희일은 승승장구하는 자기 부장 병마사 이정기가 두려웠다. 백전백승하면서도 항상 침착하고 의연하여 민심이 그에게 쓰리고 있었다.(正己沈毅得衆心--資治通鑑). 황제의 영이 서지 않고 힘에 의하여 권력이 이동하던 시기였으니 위협을 느끼는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였을까? 모반했다는 누명을 씨워 그를 옥에 가두고 장차 죽이려했지만 "회옥(이정기의 본명)은 반항하지 않고 그대로 순종했다."고 한다.(懷玉拘寃無訴)
그런데 그를 따르던 장병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절도사 후희일을 죽이고 이정기를 절도사로 추대한 것이다. 765년 이정기 34세의 일이다. 무력했던 황실도 이정기를 두려워하여 平盧와 淄靑을 아우르는 平盧淄靑節度使에다가 海運押新羅渤海兩蕃等使 檢校工部尙書 兼 御史大夫 靑州刺史라는 막대한 권력과 지위를 그에게 부여하였다.
이로부터 이정기왕국이 수립된 셈이다. 명목상으로는 당나라황제의 신하였지만 명령을 받지도 않고 납세를 하지도 않는 독자왕국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신라와 발해와 왜를 오가는 해상 육상의 무역을 모두 관장하고, 중국전체 생산량의 50%를 차지하던 산동반도의 염전을 운영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법령을 정비하고 세금은 감면해 주면서도 군비를 강화하여 주변이 모두 두려워 하는 동방의 강자가 되었다. (法令齊一 賦稅均減 最稱强大 勇兵十萬 雄據東方 嶺藩畏之)
六堂 崔南善선생이 쓴 國民朝鮮歷史 新, 舊唐書를 비롯한 중국의 史書들
이러한 사실들이 중국에는 舊唐書, 新唐書, 資治通鑑, 冊府元誌, 文獻通考 등 다수의 사서에 전하고 있건만 우리역사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물론, 어느 사서에도 언급된 바가 없었고 다만 육당 최남선선생이 쓴 '국민조서역사'에만 서술되었을 뿐이라고 한다. 아마도 과거에는 '치청왕국'을 고구려유민이 세운 나라로 보지 않았지만 육당선생은 이를 고구려유민의 나라로 보고, 일재강점기에 나라를 잃고 방황하던 국민에게 민족정기를 고취하려 하였을 것이다.
이정기가 도읍했던 靑州城 청주성박물관의 이정기에 관한 기록
775년에는 魏博節度使 田承嗣의 군대를 물리치고 德州를 비롯한 6개주를 다시 손에 넣음으로서 강역은 15개주로 확장되었다. 국력이 신장됨에 따라 장차 洛陽을 도모하고자 도읍을 靑州에서 運州로 옮기었고, 781년에는 군사를 낙양 가까이 濟陰으로 옮기어 밤낮으로 훈련하며 준비하니 하남이 소연하고 천하가 떨었다고 한다.(移兵屯濟陰 晝夜敎習爲備 河南騷然 天下爲憂)
당시 낙양으로 들어가는 물자는 양자강과 황하를 잇는 大運河를 거처 황하상류로 거슬러 올라 갔고 그 길목에 埇橋(지금의 宿州)가 있었다. 이곳을 막으면 낙양과 장안에는 물자가 고갈되어 곤경에 처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동시대의 당나라 시인 白居易의 별장이 그곳에 있었고 그가 그린 '埇橋別業圖'에는 무수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용교의 水運실상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고 한다.
한 건물에 '埇橋樓'와 '宿州商場'이라는 간판이 함께 걸려 있어서 오늘의 숙주가 예전의 용교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오른 쪽은 숙주거리에 세워진 백거이의 상
중국의 역사는 "이정기가 반란을 일으켜 강회의 물길을 끊으려고 군사를 풀어 용교의 입구를 지키니 운송로가 모두 끊겨 인심이 진동하고 두려워했다.(李正己反 將斷江淮路 令兵守埇橋渦口條 運路皆絶 人心震恐)"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어찌 뜻하였으랴. 거사를 앞두고 갑자기 종량이 나서 숨을 거둠으로서 낙양을 함락시키려던 큰뜻을 이루지 못하고 49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했다.(發疽卒 時年四十九)
당나라을 정복하려던 큰 뜻은 접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가 물려준 기반은 아직도 튼튼하여 그 아들 李納과 손자 李師古, 李師道 형제가 '平盧淄靑節度使'직을 世襲하면서 한때는 국호를 '齊'라하고 백관을 거느려 스스로 왕이 되기도 했었다.(僞稱帝王 建置百官)
당나라 황제 獻宗은 제나라를 인정하지 않고 절도사의 승습만을 묵인하면서 회유하였지만 이사도는 황제의 명에 따르지 않고 당나라에 항거하는 蔡나라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채가 헌종에게 토벌되었고 이사도에게는 반란을 일으키지못하도록 인질을 보내라고 했지만 그는 이에 복종하지 않았다.
헌종은 이사도를 토벌하려고 신라에 원군을 요청했고 이를 거부할 수 없었던 신라에서는 순천군장군 김웅원으로 하여금 甲兵 3만을 거느리고 가서 돕게하였다. 또 하나의 羅唐연합군이 편성된 셈이었고 이에 패하여 765년부터 819년까지 55년을 통치해 온 이정기왕국은 그 막을 내렸다.
그러했으니 신라를 계승한 것으로 자처했던 고려나 그 후의 조선왕조가 이정기왕국을 고구려유민이 세운 나라로 보려하지 않았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당나라의 사서는 그들을 "고구려의 흉악한 무리들에 붙어서 오래도록 나쁜 풍속으로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이는 뒤집어 말하면 '용맹하고 과감했던 고구려유민들이 주도하면서 오래도록 고구려의 전통과 풍속을 지켜 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포로로 잡혀 갔던 유민들이 고구려가 패망한지 100년 가까이 지난 시기에 거대한 당나라의 영토 안에 신라보다도 큰 사실상의 왕국을 세우고 55년을 통치했다는 사실이 민족의 자부심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한다. 우리 모두 함께 길이 기억하여야 할 李正己장군, 그래서 나는 숨은 역사인물을 찾아내어 재조명하는 'TV 한국사전'을 좋아한다.
2007년 7월 3일 觀 齋 朴 完 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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