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모음방

신경숙의 리진

모링가연구가 2008. 11. 1. 04:50

신경숙의 리진

 

 신경숙의 리진은, 아주 오랜만에 읽게 된 소설이다.

작년 여름에 사서, 일년이 넘도록 "장기 조각 읽기" 하고 있다.

아침, 저녁...일어나거나 잠들기 전, 늘 조금씩 손에 닿는 몇 페이지를 랜덤으로 읽는 방식.

내게 이 책은, 리진이라는 한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알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신경숙이라는 작가의 훌률한 문체를 음미하는 도구다.

 

리진이라는, 사진 한장 남지 않은 그러나 분명히 실존했던 한 여인에 관한 소재는 매우 독특하다.

조선시대와 불란서, 무희와 외교관, 동양과 서양이라는

아주 독특한 대조감을 신경숙이라는 작가가 특유의 문체로 잘 써내려 간 작품.

한 문장 한 문장, 작가가 얼마나 공들여 써 내려갔는지 선명히 느낄 수 있다.

구성은 물론, 문장의 문체 하나 그리고 맞춤법까지 공들여 눈여겨 본다.

읽는다기 보다는, 익힌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독서법.

신경숙의 리진은, 내겐 익히고 닦아 배우고 싶은 그런 책이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한 남자와

조선에서 태어난 한 여자가

백 년 전, 이렇게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여자는, 남자를 위하여 춤을 추었고

남자는, 여자를 새로운 세계로 데려가 주었습니다.

 

" 초록과 황색 남색이 뒤섞인 무복을 입은 여덟 명의 무희가 좌우로 나뉘어 무대에 등장했다.

나아갔다가 물러설 때마다 머리에 쓴 화관이 흔들렸다. 다시 박 소리에 무희들은 각각 네 명으로 나뉘어 바깥쪽과 안쪽으로 사뿐히 돌았다. 다시 박 소리에 각각 다른 방향을 향해 서있던 무희들이 손을 모으고 함께 북쪽을 향하여 섰다.

박 소리가 멈추자, 무희들의 입에서 사(詞)가 흘러나왔다.

 

만떨기 꽃이 먼저 피어 대궐 붉게 비추니

붉은 꽃 노란 꽃은 시샘하듯 더 영롱하네

새로 만든 옥피리가 청평악을 울리니

향기로운 꽃잎 위로 나비들이 날갯짓하네 "

 

- 신경숙의 리진, 2장 춤추는 여인 145쪽 중에서 -  

 

 콜랭이라는 프랑스 남자에게, 그 날 리진이라는 조선 여인의 모습은

꽃, 꽃일 뿐이었겠지.....그런 상상을 하게 한다.

 

멀리 있어도 향기를 내뿜게 된다는 무당의 예언대로

리진은, 프랑스 남자 콜랭의 사랑을 얻어

"조선"이라는 시대에, "해외"를 경험하는 여인이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파상 등의 문인들과 교우하고,

운명처럼 홍종우라는 연적의 괴롭힘에 시달리게 된다.

 

" 나는 당신의 나라에서, '소인'이 아니라 '나'로 살았으며 행복했습니다. 에펠탑을 잊어도 루브르 박물관을 잊어도 나는 파리 대로변의 활기차고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잊지 못할 겁니다. 뱅상이 꿈을 이뤄가는 모습을 보는 것, 수다스런 잔는가 사랑을 이루는 것을 보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플라사르 부인의 호의와 모파상 씨의 좌절과 냉소를 동시에 겪으며 나는 당신의 나라를 비소로 볼 수 있었습니다.

<중략>

나를 당신에게서 내려놓으세요, 사랑하는 지 아닌지 이젠 알 수 없어졌다는 당신의 말을 나는 이해합니다. 오해하지 않습니다. 서운해하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나를 버릴 수는 없다, 고 했던 당신의 갈등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는 처음부터 그랬는걸요.

<중략>

길린, 리진을 내려놓고 모쪼록 자유로우세요. 그래야 나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당신을 만나지 못해도 이따금 당신의 후두염이 염려되겠지요. 당신도 나를 만나지 못해도 이따금 내 머리를 빗기고 싶겠지요. 이것으로 우리는 충분하다 여깁니다.

 

- 신경숙의 리진, 4장 편지 2 - 나를 잊으세요 중에서 -  

 

 극도의 봉건적 삶을 살았던 여인이

 이런 Cool한 편지를 프랑스 남자에게 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21세기에도 쓰기 어려운 사랑의 편지가 아닐까. 

꽃처럼 피었다가, 금빛 독을 물고 숨져 간 리진의 이야기는

신경숙의 정교한 문체로 잔잔하게 기록되어 있다.

 

리진....책을 읽으며 수만번 상상해 본 아름다운 조선의 여인을

콜랭....책을 읽으며 수만번 상상해 본 이 유미적이고 우유뷰단한 프랑스 남자를

상상해 보며 그린 그림이다.

신경숙의 리진을 읽고 내가 그려본 독후감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