謫中作 其二(적중작 기2)/유배지에서 짓다. - 김만중(金萬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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謫中作 其二(적중작 기2) / 유배지에서 짓다. 2
김만중(金萬重)
人間倚伏奔難推(인간의복분난추) 인간사 부침은 아득하여 짐작할 수 없나니
歌哭悲歡只一朞(가곡비환지일기) 노래 통곡, 슬픔과 기쁨은 단지 한 해 사이의 일이구나.
遙想北堂思子淚(요상북당사자루) 자식생각에 흘리실 어머니 눈물 멀리서 헤아려보니
半緣死別半生離(반연사별반생리) 반은 죽어서 한 이별 탓이오, 반은 생이별 탓이로구나.
요점 정리
지은이 : 김만중
시대 : 조선조 후기
갈래 : 칠언절구
성격 : 서사시,애통시, 배유지에서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
이해와 감상
귀양지에서 그리는 어머니 -金萬重-
모란마저 豊盛(풍성)하게 피었으니
온 天地는 화사한 꽃 나라가 되었구나.
이때가 또한 어린이날,
어버이날을 기리는 가정의 달이기도 하나,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것은 어머니날이어야 하리.
오늘은
멀리 귀양 가 있으면서 어머니를 그리던
조선 선비 한 사람의 피 맺힌 사연을 읽어보자.
丙子胡亂(병자호란)(1637),
조정은 청나라 침략군에 항복하고,
함락 직전의 강화도에서는
수많은 인파가 섬을 탈출하려고 바닷가로 몰려갔다.
그 와중에는 항복에 격분하여 자결한
진사 김익겸의 젊은 처 윤씨도 끼여 있었다.
소식이 끊긴 남편과 떨어져
생사의 갈림길에서 그녀가
끝내 삶을 선택한 것은 오직
다섯 살 난 아들과
만삭의 복중 태아 때문이었다.
가까스로 배에 오른 윤씨는
시야에서 멀어지는 강화도를 바라보며
한없는 서러움과
자식을 향한 결의로 온 몸을 떨었으리라.
오직 어머니의 손 하나에
운명을 걸고 있던 다섯 살 소년은
퇴각하는 배위에서 미련스레
세상을 향해 비집고 나오는
아우를 바라보아야 했으니
그 아우가 바로 훗날의 서포 김만중이었다.
가까스로 탈출한 윤씨 부인은
청나라 군을 피해 낮선 섬으로 흘러들어
젖먹이 만중과 철부지 아들 만기를
보살피며 생존의 몸부림을 쳤으리라.
한양의 친정으로 들어가 곁사리를 하면서
그녀는 빈곤한 형편 속에서도
관헌에게 책을 빌려다
손수 베껴 자식들에게 주었고,
짜고 있던 베틀 위의 비단을
서슴없이 잘라 책을 사다 자식들을 가르쳤다.
두 아들은 커서 서인 세력의 핵심이 되고,
파란 많은 환해(宦海)에 드니 피를 말리는
관 당쟁이 절정을 이루던 숙종 년간에
반복되는 집권과 유배 속에 세 모자는
노래와 통곡, 기쁨과 슬픔을 되풀이해야 했다.
서포는 조정에 있을 때나 유배지에 있으면서도
어머니를 위해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을 집필하여
외로운 어머니에게 위안을 드리기를 쉬지 않았다.
형 만기가 죽고 같은 해
서포는 유배를 떠나야 했으니
큰 아들의 죽음이라는 사별과
자신의 유배로 인한 생이별 속에서
괴로워 할 어머니를 그리며 이 시를 지었다.
어머니는 얼마 후 삶의 의미를 잃고 세상을 떠났으며,
몇 해 뒤에 서포 자신도 유배지 남해에서 뒤를 따랐다.
심화 자료
金萬重(김만중) 1637-1692
조선후기의 문신, 소설가.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시호는 문효(文孝)
서포 김만중은
조선조 예학(禮學)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 의 증손이요,
충렬공(忠烈公) 익겸(益謙)의
유복자로 1637년 태어났으며,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의 아우로
숙종의 초비(初妃)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숙부이다.
1665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하여,
정언(正言),지평(持平),수찬(修撰),교리(校理)를 거쳐
71년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 삼남(三南)의 진정(賑政)을 조사하였다.
이듬해
겸문학(兼文學),헌납(獻納)을 역임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 가 되었으나,
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작고하여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서인(西人)이 패하자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후 다시 등용되어
1679년 예조참의, 83년 공조판서,
이어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나
조지겸(趙持謙) 등의 탄핵으로 전직되었다.
1685년 홍문관 대제학이 되었고,
이듬해 지경연사(知經筵事) 로 있으면서
김수항(金壽恒)의 아들 창협(昌協)의 비위(非違) 까지
도맡아 처벌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상소했다가
선천(宣川)에 유배되었으나, 88년 방환(放還)되었다.
이듬해 박진규(朴鎭圭),이윤수(李允修) 등의
탄핵으로 다시 남해(南海)에 유배되어,
여기서 <구운몽 (九雲夢)> 을 집필하였다.
구운몽은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쓴 것이라고 하며,
전문을 한글로 집필하여 숙종때 소설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한편, 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국문학관을 피력하고 국자의식(國字意識)을 강조하여
허균과 조선후기 실학파 문학을 잇는 역할을 하였다.
1692년 남해의 적소(謫所)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1698년 그의 관직이 복구 되었고,
1706년에는 효행에 대해 정표(旌表)가 내려지기도 하였다.
대표작으로
<구운몽(九雲夢)>,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등이 있다.
*국문소설 ‘구운몽(九雲夢)’의 작가이자
조선 후기 이름 난 문신(文臣)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1637∼1692)은
경남 남해군 이동면 양오리 백연 마을 건너
노도(櫓島)에서 56세 일기로 생을 마쳤다.
그는 서울 태생인데다 생애 대부분을 서울에서 살았다.
그런 그가 한반도의 끝 남해바다에 외롭게 떠 있는
한 작은 무인도에서 숨을 거둔 이유는
정치범이라는 죄를 덮어 쓰고 이곳으로 유배되었기 때문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