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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 담사

모링가연구가 2008. 6. 24. 14:37

대단히 죄송합니다.강화도 답사가 취소 되었어요. 답사인원이 조금 부족해서요 .강화도 답사는 모든 분이 가고싶어 하는 역사 박물관이었는데 답사일자를 잘못잡았나봐요 .

다음답사를 안내합니다.

5월 4일-5일 경주답사가 있습니다 .1박하면서 안압지의 야경과 상설공연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답사코스:  천마총- 첨성대--황룡사지--경주박물관-안압지 야경 (1박) - 문무대왕릉-감은사지-석굴암--불국사

불국사는 불경을 건축적으로 재현해놓은 불국토입니다

경내를 돌아보면서  건축물을 감상하면서 암호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듯이 살펴봅시다

 불국사경내소개
석축위에 세워진 청운교를 올라서면 백운교 .33개(33천)의 계단을 오르면 신비스런 자하문 .

자하문을 지나면 자금색의 황홀한 기쁨으로 미소짓고 계시는 부처님이 계시죠. 그앞에 말없이 천년을 지켜온 석가탑.

그 이름만으로도 감개무량한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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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들이 보고 오 이럴수가  원더풀을 외치는 그 멋들어진 석축.인공과 자연의 절묘한 조화로 석축자체가 국보입니다.

자연스런 그 모습을 다치지않으려고 일부러 공들여 다듬어놓은 대리석을 도려내다니..세상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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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전 쪽으로 감아도는 석축.꺽지않고 휘어감는 폼이 일품인데..

모서리하나에도 저런 정성을 쏟아내다니 "허투루"라는 말은 어디에도 존재하지않은 불국사 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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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앞에서 법화경을 음송하는 자가 있으면 내 죽어             신라삼층탑의 완성품 석가탑 .무영탑이라고도 불리우죠

부처가되어 그앞에 탑으로 우뚝서리라 서원하신 다보불께서         단정하니 무심한듯 서 있는 석가탑은 왜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앞에 우뚝.....아름다운 탑을지키는 돌사자 잘만들어진             더욱  "오 ! 멋져"하고 말할 까????

사자는 다어디가고 나만 좀 못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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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불께서는 48가지 서원을....그 암호는 이 계단에 .......너무나 아름다운 광학부도 집을 잃고 한때 일본 요리집에서서                                                                                 서 럽 게 서있었던 이 부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뽑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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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전의 미쓰 신라가???.... 난 천수천안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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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에 회랑이 있듯이 교종사찰이기에 이곳에도 회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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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의 사탑은 계산을 잘못하여 시간이 흐를 수록 옆으로 서서히 기울어가는데 우리의 첨성대는 바닥을 잘다져

천년이 훨씬 지나도 넘어지지않고 잘도 버텼는데 한국동란때 탱크의 무게는 이기지 못했는지 사알짝 여섯시5분

24절기 12달 등등을 이 천문대는 표현도 잘해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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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은 이곳에 9층탑을 만들어 9나라의 적을 물리치려하시고 백제사람아비지는 5층에 백제를 치라는 여왕의 뜻을 받들수가 없어 탑을 완성시킬수가 없고 ... 지금도 그자리에 버티고있는 초석위에 그시절 아비지는 깜박 졸고있는데 아비지가 살던 백제가 불속에서 활활타오르는 꿈을 꾸고......자장율사는 아비지의 뜻을 여왕께 전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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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인과 신라인의 무덤을만드는 방식은 어떻게 달랐을까?

송산리 고분군과 천마총의 방식은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석굴암

창건 당시에는 석불사(石佛寺)라고 했다. 〈삼국유사〉 권5 대성효이세부모조(大城孝二世父母條)에 의하면 751년(경덕왕 10) 재상 김대성이 발원하여 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불사를,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짓기 시작했으나 774년 김대성이 죽자 신라 왕실에서 완성했다고 한다. 따라서 석굴암은 김대성 개인이 창건했다기보다는 신라 왕실의 염원에 의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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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본존불                              유희좌의 아름다운모습             11면 관음보살     보현보살           문수보살

위의 조각들은 동양최대 세계최대의 조각품들입니다

감은사지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동해안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

사적 제31호. 〈삼국유사〉에 문무왕(文武王)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역사를 시작했으나 중도에 죽자 그의 아들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해 682년(신문왕 2) 완성했으며, 금당의 기단 아래에 동향한 구멍을 두어 이곳으로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이 들어와 서리도록 했고, 또 유서에 따라 골(骨)을 매장한 곳이 절의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大王岩)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절의 이름은 본래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진국사(鎭國寺)였으나 신문왕이 부왕의 호국충정에 감사해 감은사(感恩寺)로 고쳐 불렀다. 1960년과 1979~80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이탑식가람(二塔式伽藍)배치로 남북보다 동서 회랑의 길이가 길며, 양 탑의 중앙부 뒷면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금당터가 확인되었다. 또한 금당의 바닥구조가 H자형의 받침석과 보를 돌다리처럼 만들고 그위에 직사각형의 석재유구(石材遺構)를 동서방향으로 깔아 마치 우물마루 모양으로 된 것은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 매우 흥미롭다. 원래 앞면 8칸, 옆면 4칸이었던 북쪽 강당은 후대에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고쳐 지은 것도 밝혀졌다.
감은사지동서3층석탑
감은사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3층석탑 2기. 국보 제112호. 높이 13.4m. 동서로 건립된 두 탑의 규모와 형식은 동일하며, 현존하는 석탑 중 거탑(巨塔)에 속한다. 기단은 상하 이중으로 되어 있고 지대석·중석·갑석은 12장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층기단에는 3개, 상층기단에는 2개의 탱주(撑柱)를 세웠다. 탑신부의 1층은 우주(隅柱)와 면석(面石)을 다른 돌로, 2층은 각 면을 하나의 돌로, 3층은 전체를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옥개석은 비교적 넓고, 낙수면 부분과 받침부분이 각각 4장의 돌로 되어 있으며, 상륜은 없어졌고 그것을 끼웠던 3.5m의 철간만이 남아 있다. 상하기단과 탑신부에 우주와 탱주를 표현한 것, 낙수면이 경사를 이룬 것 등에서 목조건축양식이 보이며, 층단을 이루고 있는 받침에서는 전조탑파양식(塼造塔婆樣式)의 흔적이 보인다. 고선사지 3층석탑과함께 통일신라 초기 3층석탑을 대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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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 3층석탑

 통일신라시대의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보물 제366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59년 12월 감은사지 서쪽 탑을 해체 수리할 때 3층 탑신의 사리공(舍利孔)에서 발견된 유물로, 청동제 사리기와 사리기를 넣었던 청동제 사리외각함(舍利外角函)을 말한다. 사리기(높이 20cm)는 기단·몸체·보개(寶蓋)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으나 현재 보개부분은 파손되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다. 정사각형의 기단에는 내부에 중대(中臺)를 세우고, 그 바깥 벽에는 1면에 2개씩 안상(眼象)을 투각하고, 그 사이의 공간에 신장상과 공양상을 따로 주조하여 1구씩 교대로 배치했다. 기단 위에는 주위로 난간이 둘러졌으며 가운데에 보탑(寶塔)을 안치하고 네 귀퉁이에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을 각각 배치하였다. 보탑은 좌우에 고리가 달린 복발형(覆鉢形)에 앙화(仰花)를 얹고, 그위에 이중의 연판받침과 불꽃무늬로 장식된 수정제의 둥근 보주가 놓여 있다. 보탑 안에 있는 수정제 사리병(높이 3.8cm)은 밑바닥까지 구멍이 뚫려 있고 그 밑에는 수정제의 원반(圓盤)이 받치고 있다. 이 사리기를 담았던 사리외각함(높이 31cm)은 상자형으로, 방추형의 뚜껑이 덮여 있고 아랫부분의 일부가 파손되었다. 사리함의 4면에는 사천왕상(높이 21.6cm)을 1구씩 타출(打出)기법으로 조각하여 붙였다. 사천왕의 좌우에는 짐승얼굴을 한 고리가 달려 있고 그 주위에 꽃무늬가 장식된 동판을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천왕상 중 2구는 일부가 파손되었지만 나머지 2구는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아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사천왕상은 간단한 원형의 두광(頭光)에 갑옷을 입었으며 한 손은 허리에 대고 다른 손에는 각기 보주·금강저·창·탑을 들고 있다. 상태가 온전한 두 상은 각각 소와 주유(侏儒:난쟁이)를 밟고 서 있다. 크기가 작은 상이지만 생동감이 넘치는 얼굴표정이나 당당하면서도 균형감있는 체구와 섬세한 갑옷의 장식표현 등은 당대(唐代) 불교조각의 영향을 받아 더욱 발전시킨 통일신라시대 사천왕상의 초기 조각양식을 보여준다. 특히 부릅뜬 눈과 수염이 달린 얼굴모습은 서역인을 연상시킬 만큼 이국적으로 당시의 국제적인 문화교류를 짐작케 해준다. 감은사의 건립연대를 682년으로 볼 때 현재 알려진 통일신라의 사천왕상으로는 가장 이른 예이며, 사리기 역시 당시 왕실발원의 공예품으로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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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은사 삼층석탑내의 유물 사리함                               사리장엄구

 대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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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릉
/문무대왕릉, 사적 제158호, 경북 ...
사적 제158호.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자신이 죽으면 불교식으로 화장한 뒤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681년 문무왕이 죽자 유언에 따라 화장한 유골을 동해의 큰 바위에 장사지내고, 그 바위를 대왕암(大王巖)이라고 불렀다. 바위는 둘레가 200m쯤 되는 천연 암초인데 사방으로 바닷물이 드나들 수 있는 물길을 터놓아 언제나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이 물길은 인공을 가한 흔적이 있고, 안쪽 가운데에 길이 3.7m, 높이 1.45m, 너비 2.6m의 큰 돌이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어 이 돌 밑에 문무왕의 유골을 묻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다 수면은 이 돌을 약간 덮을 정도이다. 한편 바위의 안쪽 가운데에서 사방으로 물길을 낸 것은 부처 사리(舍利)를 보관하는 탑의 형식을 적용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682년(신문왕 2) 양북면 용당리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어 불력(佛力)에 의해 왜구를 막으려 했는데, 〈삼국유사〉에는 감은사의 금당 아래를 깎아 동해로 구멍을 내어 해룡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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