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히 죄송합니다.강화도 답사가 취소 되었어요. 답사인원이 조금 부족해서요 .강화도 답사는 모든 분이 가고싶어 하는 역사 박물관이었는데 답사일자를 잘못잡았나봐요 .
다음답사를 안내합니다.
5월 4일-5일 경주답사가 있습니다 .1박하면서 안압지의 야경과 상설공연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답사코스: 천마총- 첨성대--황룡사지--경주박물관-안압지 야경 (1박) - 문무대왕릉-감은사지-석굴암--불국사
불국사는 불경을 건축적으로 재현해놓은 불국토입니다
경내를 돌아보면서 건축물을 감상하면서 암호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듯이 살펴봅시다
불국사경내소개
석축위에 세워진 청운교를 올라서면 백운교 .33개(33천)의 계단을 오르면 신비스런 자하문 .
자하문을 지나면 자금색의 황홀한 기쁨으로 미소짓고 계시는 부처님이 계시죠. 그앞에 말없이 천년을 지켜온 석가탑.
그 이름만으로도 감개무량한데 .....
서양인들이 보고 오 이럴수가 원더풀을 외치는 그 멋들어진 석축.인공과 자연의 절묘한 조화로 석축자체가 국보입니다.
자연스런 그 모습을 다치지않으려고 일부러 공들여 다듬어놓은 대리석을 도려내다니..세상에나!!
극락전 쪽으로 감아도는 석축.꺽지않고 휘어감는 폼이 일품인데..
모서리하나에도 저런 정성을 쏟아내다니 "허투루"라는 말은 어디에도 존재하지않은 불국사 뜨락.
누군가 내앞에서 법화경을 음송하는 자가 있으면 내 죽어 신라삼층탑의 완성품 석가탑 .무영탑이라고도 불리우죠
부처가되어 그앞에 탑으로 우뚝서리라 서원하신 다보불께서 단정하니 무심한듯 서 있는 석가탑은 왜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앞에 우뚝.....아름다운 탑을지키는 돌사자 잘만들어진 더욱 "오 ! 멋져"하고 말할 까????
사자는 다어디가고 나만 좀 못나서.......
아미타불께서는 48가지 서원을....그 암호는 이 계단에 .......너무나 아름다운 광학부도 집을 잃고 한때 일본 요리집에서서 서 럽 게 서있었던 이 부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뽑내고 있어요
관음전의 미쓰 신라가???.... 난 천수천안이예요
궁궐에 회랑이 있듯이 교종사찰이기에 이곳에도 회랑이....
피사의 사탑은 계산을 잘못하여 시간이 흐를 수록 옆으로 서서히 기울어가는데 우리의 첨성대는 바닥을 잘다져
천년이 훨씬 지나도 넘어지지않고 잘도 버텼는데 한국동란때 탱크의 무게는 이기지 못했는지 사알짝 여섯시5분
24절기 12달 등등을 이 천문대는 표현도 잘해놨어요.
선덕여왕은 이곳에 9층탑을 만들어 9나라의 적을 물리치려하시고 백제사람아비지는 5층에 백제를 치라는 여왕의 뜻을 받들수가 없어 탑을 완성시킬수가 없고 ... 지금도 그자리에 버티고있는 초석위에 그시절 아비지는 깜박 졸고있는데 아비지가 살던 백제가 불속에서 활활타오르는 꿈을 꾸고......자장율사는 아비지의 뜻을 여왕께 전하였으니..........
백제인과 신라인의 무덤을만드는 방식은 어떻게 달랐을까?
송산리 고분군과 천마총의 방식은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석굴암
창건 당시에는 석불사(石佛寺)라고 했다. 〈삼국유사〉 권5 대성효이세부모조(大城孝二世父母條)에 의하면 751년(경덕왕 10) 재상 김대성이 발원하여 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불사를,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짓기 시작했으나 774년 김대성이 죽자 신라 왕실에서 완성했다고 한다. 따라서 석굴암은 김대성 개인이 창건했다기보다는 신라 왕실의 염원에 의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석굴암본존불 유희좌의 아름다운모습 11면 관음보살 보현보살 문수보살
위의 조각들은 동양최대 세계최대의 조각품들입니다
감은사지
감은사지 3층석탑
통일신라시대의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보물 제366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59년 12월 감은사지 서쪽 탑을 해체 수리할 때 3층 탑신의 사리공(舍利孔)에서 발견된 유물로, 청동제 사리기와 사리기를 넣었던 청동제 사리외각함(舍利外角函)을 말한다. 사리기(높이 20cm)는 기단·몸체·보개(寶蓋)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으나 현재 보개부분은 파손되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다. 정사각형의 기단에는 내부에 중대(中臺)를 세우고, 그 바깥 벽에는 1면에 2개씩 안상(眼象)을 투각하고, 그 사이의 공간에 신장상과 공양상을 따로 주조하여 1구씩 교대로 배치했다. 기단 위에는 주위로 난간이 둘러졌으며 가운데에 보탑(寶塔)을 안치하고 네 귀퉁이에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을 각각 배치하였다. 보탑은 좌우에 고리가 달린 복발형(覆鉢形)에 앙화(仰花)를 얹고, 그위에 이중의 연판받침과 불꽃무늬로 장식된 수정제의 둥근 보주가 놓여 있다. 보탑 안에 있는 수정제 사리병(높이 3.8cm)은 밑바닥까지 구멍이 뚫려 있고 그 밑에는 수정제의 원반(圓盤)이 받치고 있다. 이 사리기를 담았던 사리외각함(높이 31cm)은 상자형으로, 방추형의 뚜껑이 덮여 있고 아랫부분의 일부가 파손되었다. 사리함의 4면에는 사천왕상(높이 21.6cm)을 1구씩 타출(打出)기법으로 조각하여 붙였다. 사천왕의 좌우에는 짐승얼굴을 한 고리가 달려 있고 그 주위에 꽃무늬가 장식된 동판을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천왕상 중 2구는 일부가 파손되었지만 나머지 2구는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아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사천왕상은 간단한 원형의 두광(頭光)에 갑옷을 입었으며 한 손은 허리에 대고 다른 손에는 각기 보주·금강저·창·탑을 들고 있다. 상태가 온전한 두 상은 각각 소와 주유(侏儒:난쟁이)를 밟고 서 있다. 크기가 작은 상이지만 생동감이 넘치는 얼굴표정이나 당당하면서도 균형감있는 체구와 섬세한 갑옷의 장식표현 등은 당대(唐代) 불교조각의 영향을 받아 더욱 발전시킨 통일신라시대 사천왕상의 초기 조각양식을 보여준다. 특히 부릅뜬 눈과 수염이 달린 얼굴모습은 서역인을 연상시킬 만큼 이국적으로 당시의 국제적인 문화교류를 짐작케 해준다. 감은사의 건립연대를 682년으로 볼 때 현재 알려진 통일신라의 사천왕상으로는 가장 이른 예이며, 사리기 역시 당시 왕실발원의 공예품으로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대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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