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유물방

국보118호--금동미륵반가상 [金銅彌勒半跏像

모링가연구가 2008. 6. 23. 08:48

금동미륵반가상 []

 

종   목   국보   118호
명   칭   금동미륵반가상
  (金銅彌勒半跏像)
분   류   금동불
수   량   1구
지정일   1964.03.30
소재지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
시   대   삼국시대
소유자   이건희
관리자   호암미술관


1944년 평양시 평천리에서 공사를 하던 중 출토된 작은 보살상으로 높이 17.5㎝이다. 전면에 녹이 많이 슬었고 오랫동안 흙속에서 침식된 흔적이 뚜렷하며, 불에 탄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삼국시대에 유행하던 반가상은 오직 백제와 신라에서만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있었는데, 이 보살상으로 새롭게 고구려의 예를 확인할 수 있어 주목된다.

머리에는 산 모양의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으며 고개를 약간 숙여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다. 얼굴은 네모난 형으로 눈을 반쯤 감고 있고,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번져난다. 상체에는 옷을 입고 있지 않아서 잘록한 허리가 그대로 드러나며, 하체에는 치마를 걸치고 있다. 치마에는 무릎 위쪽으로 선으로 새긴 주름의 형태만 간략히 묘사하다가 대좌(臺座)를 덮으면서 자연스럽게 늘어져 여러 겹의 수직 주름을 형성하고 있다. 연꽃무늬 대좌 위에 왼발을 내려 놓고 오른발은 왼쪽 무릎 위에 얹은 채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다. 오른쪽 팔꿈치를 오른쪽 무릎에 대고 있는데 팔과 손이 떨어져 나가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전체적으로 얼굴이 큰 편이나 가냘픈 몸매와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생각에 잠긴 보살의 모습을 특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만든 연대는 6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며, 출토지가 확실한 고구려의 반가사유상으로 주목되는 작품이다.

문화재명   금동미륵반가상(金銅彌勒半跏像)

1944년 평양(平壤) 평천리(平川里) 유적지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불상이다. 삼국기(三國期)에 유행한 반가상(半跏像)이 오직 백제(百濟)와 신라(新羅)에서만 그 유례(遺例)를 볼 수 있었는데, 이 불상으로 새로이 고구려(高句麗)의 유례를 첨가하게 된 것이다.

왼발을 받치기 위하여 약간 앞으로 내면 원형에 가까운
연화좌(蓮華座) 중앙의 원통형 좌대(座臺) 위에 왼발을 내려 놓고 반가(半跏)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오른손은 그 무릎 위에 얹고 왼손이 발목을 잡고 있으며, 오른손은 팔꿈치를 오른쪽 무릎에 얹어 놓았으나, 팔과 손이 떨어져 나가 원형을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손으로 턱을 괸 사유(思惟)의 모습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윗몸은 나신(裸身)으로 허리가 가늘고, 허리 이하의 상의(裳衣)는 얇은데 왼쪽 다리에서 고선(孤線)을 그리며 흘러내렸다. 오른쪽 다리 밑으로는 2단의 습(褶)을 그리면서
대좌를 덮었는데, 좌우로는 비대(비帶)가 길게 늘어져 있다.

머리에는 간단한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약간 앞으로 수그린 얼굴은 장방형이며, 두 눈은 반쯤 뜨고 코와 입술은 작은 편인데 미소는 뚜렷하지 않다. 두 귀는 길게 늘어지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며, 장엄구는 팔찌가 있을 뿐이다.

뒷머리부분에는 굵직한 꼭지가 달려 있는데,
광배(光背)가 달려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

전면(全面)에 녹이 나 있는데, 일찍이 불에 탔던 흔적이 있고, 오래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침식(浸蝕)이 심하나 곳곳에 아직도 도금(鍍金)이 남아 있다.

일부의 손상은 있으나 고구려(高句麗) 반가상(半跏像)으로는 초유(初有)의 것이며, 근엄(謹嚴)한 얼굴이나 청수(淸秀)한 몸집의 표현 등은 한국(韓國) 반가상 고찰에 한 좌표가 되는 귀중한 유례이다..........문화재청 참조

 

 

1964년 3월 30일 국보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17.5cm이며 경기도 용인시 포곡면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944년 평양시 평천리에서 공사를 하던 중 출토된 작은 보살상이다.

둥근 연화좌() 중앙의 원통형 좌대 위에 반가상을 하였다. 팔과 손이 없어져 원형을 알 수 없으나, 손으로 턱을 받친 사유상()이었을 것이다. 상체는 나신()으로 허리는 가늘다. 허리 밑의 상의()는 얇고 반원을 그리며 흘러내려 왼쪽 다리 밑으로 2단의 습벽(襞  :주름)을 지으면서 대좌를 덮었고, 좌우로는 비대(  )가 길게 늘어졌다. 머리에는 간단한 3산관()을 썼고 약간 앞으로 수그린 얼굴은 갸름한 편이며 양쪽 눈은 반쯤 감았다. 코와 입술은 작은 편으로 엷은 미소를 띠었다. 두 귀는 길게 늘어졌고,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장엄구()는 팔찌가 있을 뿐이다. 뒷머리 부분에는 굵은 꼭지가 달렸는데 광배()가 있던 자리로 짐작된다.

전면이 거의 녹슬었으며 일찍이 불에 탔던 흔적이 있고, 오랫동안 흙속에 있었던 탓으로 침식이 심하나 아직도 도금이 남아 있다. 만든 연대는 6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며, 출토지가 확실한 고구려의 반가사유상으로 근엄한 얼굴이 뛰어나다. 각 부분의 표현들은 한국 반가상 고찰에 있어 표본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