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종 목 국보 제33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
시 대 신라
빛벌가야(지금의 창녕)를 신라 영토로 편입한 진흥왕이 이곳을 순수(두루 돌아다니며 순시함)하며 민심을 살핀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당시 빛벌가야는 신라가 서쪽으로 진출하는데 있어 마치 부채살의 꼭지와 같은 중요한 길목이었는데, 진흥왕 16년(555) 신라에 병합되어 하주로 바뀌었고, 565년에는 대야주(지금의 합천)와 합쳐져 비사벌군 또는 비자화군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비는 목마산성 기슭에 있던 것을 192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비각안에 모셔 둔 것으로, 자연석의 앞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비문을 새기고, 그 둘레에 선으로 윤곽을 돌려놓은 모습이다. 다른 순수비와 달리 ‘순수관경’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아 척경비(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 일컫고 있으나, 임금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수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2.술정리 동삼층석탑
종 목 국보 제34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남 창녕군 창녕읍 술정리 120
시 대 통일신라
탑이 세워져 있는 창녕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신라의 영역에 속해 있던 곳이며, 진흥왕 때부터 신라의 정치·군사상의 요지가 되었다. 탑은 2단의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통일신라 석탑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위로 올라가면서 적당한 비율로 줄어드는 몸돌로 인해 충분한 안정감과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세부적인 수법도 정교하여 불국사 삼층석탑(국보 제21호)과 비길만한 기품이 있으며, 삼국시대부터 신라 영역에 속해있던 창녕의 지역적인 특성으로 볼 때, 경주 중심의 탑 건립 경향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3.송현동 석불좌상
종 목 보물 제7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105-4
시 대 통일신라
큰 바위에 앞면을 돌출되게 조각한 마애불로 바위 자체를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로 이용하고 있다.
민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큼직한 머리(육계)가 있으며, 둥근 얼굴에는 살이 통통하게 올라 온화한 인상을 풍긴다. 어깨는 넓게 떡 벌어져 있고, 팔과 가슴은 넓고 풍만하지만 크기에 비해 어딘지 힘이 빠진 듯한 느낌이다. 왼쪽 어깨를 감싸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면서 입은 옷은 얇게 신체에 밀착되었는데, 형식적으로 처리된 계단식의 옷주름 때문에 사실성이 떨어진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끝이 땅을 향한 항마촉지인으로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를 지닌다.
대체로 이 석불은 얼굴이나 얇게 밀착된 옷 등에서 석굴암 본존불 계열의 양식을 이어받은 작품으로 보이지만, 석굴암 불상보다는 사실성이 줄어들고 힘이 빠져 통일신라 후기 불상의 양식을 보여준다.
4.관룡사 약사전
종 목 보물 제146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292 관룡사
시 대 조선시대
관룡사는 신라시대 8대 사찰 중 하나로 절의 역사에 관한 뚜렷한 기록은 없다. 임진왜란 때 약사전만 남기고 다른 건물들은 모두 불에 타버렸다고 한다.
약사전은 조선 전기의 건물로 추정하며, 건물 안에는 중생의 병을 고쳐 준다는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다. 규모는 앞면 1칸·옆면 1칸으로 매우 작은 불당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간결한 형태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이와 비슷한 구성을 가진 도갑사 해탈문(국보 제50호), 송광사 국사전(국보 제56호)과 좋은 비교가 된다. 옆면 지붕이 크기에 비해 길게 뻗어 나왔는데도 무게와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건물에 안정감을 주고 있다.
몇 안되는 조선 전기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로, 작은 규모에도 짜임새가 훌륭하여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5.창녕 석빙고
종 목 보물 제31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288
시 대 조선시대
창녕군 교육청 앞의 개울 건너편에 언덕처럼 보이는 것이 이 석빙고이다. 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해 두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로, 주로 강이나 개울 주변에 만들어진다. 서쪽으로 흐르는 개울과 직각이 되도록 남북으로 길게 위치하고 있으며, 입구를 남쪽으로 내어 얼음을 쉽게 옮길 수 있도록 하였다.
입구 안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밑바닥은 경사졌고 북쪽 구석에는 물이 빠지도록 배수구멍을 두었으며, 바닥은 네모나고 평평하다. 내부는 잘 다듬어진 돌을 쌓아 양옆에서 틀어올린 4개의 무지개모양 띠를 중간중간에 두었다. 각 띠사이는 긴 돌을 가로로 걸쳐놓아 천장을 마무리하였다. 또한 천장의 곳곳에는 환기구멍을 두어 바깥공기를 드나들게 하였다.
이 석빙고는 입구에 서 있는 비석의 기록을 통해 조선 영조 18년(1742) 당시 이곳의 현감이었던 신후서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을 알수 있다. 각 부 양식 또한 조선 후기의 모습이 잘 담겨져 있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6.영산 만년교
종 목 보물 제564호
지 정 일 1972.03.02
소 재 지 경남 창녕군 영산면 동리 455
시 대 시대미상
마을 실개천 위에 무지개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돌다리로, 실개천이 남산에서 흘러내린다 하여 ‘남천교’라고도 불리운다.
개천 양쪽의 자연 암반을 바닥돌로 삼고 그 위에 잘 다듬어진 화강암 석재를 층층이 쌓아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이루고 있다. 그 위로는 둥글둥글한 자연석을 쌓아 올리고 맨 위에 얇게 흙을 깔아 다리 위로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았다. 노면은 곡선을 그리며 양 끝을 길게 늘이고 있어 다리의 분위기를 한결 아늑하게 해준다.
조선 정조 4년(1780)에 처음 쌓은 것을 고종 29년(1892)에 다시 쌓아 놓은 것으로, 지금도 마을 사람들이 통행할 만큼 튼튼하여 홍수 등에도 전혀 피해가 없다고 한다.
7.술정리 서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520호
지 정 일 1970.06.24
소 재 지 경남 창녕군 창녕읍 술정리 309-1
시 대 통일신라
이 탑이 속해 있던 사찰의 이름은 전하지 않으며, 신라식 일반형 석탑으로 2단의 기단 위로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이다.
이 탑은 원래 술정리동삼층석탑(국보 제34호)과 함께 있었으나 그 위치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으며 같은 절터의 쌍탑이 아닌 별개의 탑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나 전체적인 조각수법으로 볼 때, 동삼층석탑보다 다소 떨어지며 조성시기도 훨씬 뒤지는 것으로 보인다.
8.화왕산성
종 목 사적 제6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산322
시 대 삼국시대
창녕 읍내의 동쪽 화왕산에 돌로 쌓은 산성이다.
처음 쌓은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시대 이전으로 보이며, 가야의 산성으로 생각된다. 험준한 북쪽의 바위산을 등지고 남쪽 봉우리 사이의 넓은 부분을 둘러싼 산성으로 둘레가 2,600m이다. 창녕은 낙동강 중류에 넓게 펼쳐진 곡창지대의 중심지이며 서부 경남 지방에 대한 교통·군사상의 요충지로, 이 산성이 당시 매우 중요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현재 동문·서문·연못이 남아있다.
조선 세종 때 성으로서의 기능을 잃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중요성이 인식되어, 곽재우가 의병 근거지로 왜병의 진출을 막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한두 차례 수리가 되어 지금까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창령을 보호하는 진산으로 기록된 사실과, 영산·현풍을 포용하는 성이라는 점에서 군사적인 의미가 매우 큰 요충지였다.
9.목마산성
종 목 사적 제6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산5-2
시 대 조선시대
창녕 동쪽에 있는 화왕산의 북쪽 봉우리로부터 서쪽으로 뻗은 야산의 골짜기를 에워싼 산성이다.
쌓은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신라 진흥왕이 대가야를 완전히 정복하고 이곳에 하주를 두었는데 그 때 이미 이 성이 존재한 것으로 보고 있다. 부근에는 가야 고분들이 많이 있어 연대추정의 자료가 되고 있다.
임진왜란(1592)과도 관계가 깊은 산성으로, 의병장 곽재우가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산성터를 수축하였다. 둘레 1,900m로 산성으로서는 규모가 매우 큰 편이고, 비교적 석축의 상태가 잘 남아있는 편이다. 삼국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산성의 형태이며, 성의 앞면이 계곡 입구를 향하여 있는 것으로 보아 수비를 위한 산성으로 보인다. 산성의 이름이 목마산성이기 때문에 혹시 후대에 말을 기르기 위한 목마장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부근의 화왕산성(사적 제64호)과는 규모에서는 거의 같으나 그 형식이 달라, 같은 지방에 있는 산성의 양식을 비교하기에 좋은 자료이다.
10.교동고분군
종 목 사적 제8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리129
시 대 삼국시대
창녕읍 동쪽 목마산 부근 송현리 구릉에서 북쪽 교리에 걸쳐 있는 가야 무덤들로, 1918년 일본사람들이 일부 발굴하여 보고서도 없고 유물도 잃어버렸다. 1993년에 동아대학교박물관에서 목마산 기슭 무덤 5기를 발굴조사하였다.
내부시설은 모두 앞트기식돌방무덤(횡구식석실묘)이다. 1호와 4호에는 추가하여 주검을 매장한 흔적이 있고 1호와 3호 무덤에서는 딸려묻기(순장)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유물은 여러 토기류와 금·은제 장신구, 무기류, 마구류 및 철제 농기구 등이 출토되었다.
무덤의 형태와 출토유물로 보아 5세기 전반에서 후반까지 만들어진 창녕지역 지배자의 무덤으로 보여지며,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보이고 있어 5세기경에 창녕지역이 신라 영역권에 포함되었음을 알려주는 유적이다.
11.송현동고분군
종 목 사적 제8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20-1
시 대 삼국시대
창녕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진한의 12개 나라 중 하나인 불사국으로, 비사벌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송현동 무덤들은 크게 2개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1지역은 목마산 기슭에서 서쪽으로 80여기의 무덤이 있던 큰 무덤들이었으나, 지금은 16기 정도만이 남아 있다. 2지역은 송현동석불이 있는 부근에 20여 기 정도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대부분이 논으로 변하여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무덤은 겨우 몇 기 정도이다.
근처의 교동무덤들과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무덤의 구조와 유물의 성격이 거의 같다고 여겨진다. 교동무덤과 함께 89·91호 무덤이 1918년에 발굴되어 많은 양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유물 중 일부는 행방을 알 수 없게 창녕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진한의 12개 나라 중 하나인 불사국으로, 비사벌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대부분의 무덤이 도굴되었고 주변이 논으로 변하였기 때문에 이 무덤의 성격을 확실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교동무덤과 같은 성격의 무덤이라고 한다면 5세기 전반에서 후반에 걸쳐 만들어진 무덤들이라고 할 수 있다.
12.창녕향교
종 목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12호
지 정 일 1983.08.12
소 재 지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리 442-1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창녕향교를 언제 세웠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효종(재위 1649∼1659) 때 다시 세웠다고 전한다. 1904년에 보수하고 1987년에 동재, 서재를 복원하였다.
건물은 출입문인 외삼문, 공부하는 곳인 명륜당과 동·서재, 사당인 대성전과 동·서무 등의 건물이 있으며, 앞에 명륜당이 있고 뒤에 대성전이 있는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49) 이후 제사만 지내고 있다.
다른 향교에 비해 많은 전적을 보관하고 있으며, 특히 이 지방 향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많이 제공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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