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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사 사인검

모링가연구가 2008. 6. 22. 15:06










원래 사인검이란 인년, 인월, 인일, 인시 즉 12지의 인寅이 네 번 겹치는 해, 달, 날, 시에 삿된 귀신邪鬼를 물리칠 수 있도록 인寅이 뜻하는 호랑이의 기운을 불어넣어 만든 검이다. 사실 상商대까지만 하더라도 십이지란 씨앗이 싹이 터 자라고 수확하는 모습을 상형한 것이었으니 인寅이라 해서 호랑이의 기운이 들어갈 가능성은 없지만, 워낙 주술이니 하는 것이 그런 것이고 보면 크게 문제삼을 건 아니라 할 수 있다.

아무튼 그러한 이유로 복원품 사진에서 보다시피 칼 표면에 주문과 더불어 星晨을 새겨 넣었는데, 쓰는 법은 저 칼을 들어 사귀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면 - 설마 기사서임???? - 알아서 물러난다고 전하고 있다. 주로 왕족이나 총신에게 벽사와 호신의 징표로 내리곤 했었는데, 아마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상대하려 출정하던 신립에게 내린 어검도 바로 이 사인검이 아닌가 싶다. 수은갑과 사인검... 뭔가 그림이 된다.

이 밖에도 사인검 말고도 사진검이라는 것도 있었다. 인이 호랑이를 뜻하는 것이듯, 용을 뜻하는 진辰이 네 번 겹친 해, 달, 날, 시에 만든 검이다. 호랑이보다 용이 더 상하니 그야말로 최고의 벽사검이라 할 수 있는데, 역시나 최고의 벽사검인 만큼 이것은 오로지 왕만이 지닐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사진검에 대해서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왕이 자기 호신과 벽사를 위해 주술용 검을 만들어 소지한다는데 신료들이 이러쿵저러쿵한다는 것이야 말로 반역이나 다름없으니.

그런데, 이처럼 사인검과 사진검이 있으면 당연히 그 염가판도 있는 것이라, 각각 인자와 진자를 하나씩 뺀 삼인검과 삼진검, 이인검과 이진검이라 이름하는 것들도 있었다. 각각 인자, 혹은 진자가 들어간 날이나 그 달에 만든 것으로 당연히 사인검이나 사진검보다는 격이나 가치가 떨어진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창원군 이성이 삼진검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왕족에게 삼진검이 주어진 것으로 보이며, 삼인검은 사인검보다는 격이 낮은 다른 왕족이나 신하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보인다.

제조방법은 사인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 인자, 혹은 진자가 들어가는 시간, 즉 한 시진 - 두 시간 동안에 일단 외형을 완성해야 하므로 시간이 많이 걸리는 단조보다는 주로 쇠를 녹여 거푸집으로 형을 뜨는 주물로 만들었다. 단조를 하더라도 그렇게 먼저 형태를 잡고 나서 뒷처리로 약간의 단조를 가하는 정도일 뿐 역시 주는 단도였다. 그리고 그 쇠는 일반 쇠가 아니라 그 전에 미리 사인검이나 사진검을 만들기 위해 별도로 역을 지워 캐고 정련한 것으로 주술용 검에 맞게 정한 것을 썼다. 그리고 그렇게 완성된 검에 대해서는 다시 은을 입사해 상감을 하여 문양을 넣었다. 문양은 대개 주술적인 내용을 담은 문장과 이십팔수의 별자리 그림이었다. 말하자면 직접 형태를 만드는 데 두 시간이라는 거지, 쇠를 캐고 정련하고 하는 데만 한 달이고, 다시 완성해 후반작업을 하는 것까지 포함하면 매우 긴 시간과 많은 인력과 노력을 들여 공들여 제작한 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주조를 하자면 용융점이 낮은 쇠가 필요했다. 철로서 용융점이 낮은 것은 주철과 연철인데, 주철은 깨지기 쉽고 형태도 투박하니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아 주로 연철을 사용했다. 그러나 아다시피 연철은 가공하기는 쉬워도 워낙 무르고 약해 도구로서의 가치는 크게 떨어진다. 그래서 사인검의 경우는 형태는 검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아예 날조차 세우지 않고 장식용 - 부적과 같은 용도의 - 으로만 만들어지고 쓰였다. 말 그대로 보기 좋은 관상용이었던 셈이다.

아무튼 이러한 주술검이라는 것이 원래 그 목적이 왕실의 안위를 빌고 왕실의 인척과 총신들에게 인정의 증표로 내리는 것이다 보니, 이들 주술검의 주조는 조선 조정의 재정이 아닌 왕실의 재정 - 내수사 - 에서 그 비용을 댔고, 내수사의 내관이 감독을 맡아 주도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연히 왕실에서 모든 것을 관장하니 조선왕조실록을 보더라도 이들 주술검에 대한 내용은 그야말로 손으로 꼽을 정도다. 그나마도 쓸데없다며 반대하는 것이 전부이니 그야말로 왕실의, 왕실에 의한, 왕실을 위한 사업이었다 하겠다.

재미있는 것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이러한 사인검류의 주술용 도검을 제작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유학자 자신이 주술이나 미신 같은 것을 배척하는 입장이라 도교적인 요소가 강한 사인감을 좋게 볼 수 없었던 때문이다. 더구나 사인검을 주조하는데는 막대한 인력과 시간과 비용이 소모되고 있으니 검약을 중요시여기는 유학자로서 조선의 재정이 넉넉지 않은 상황에 미신따위에 그러한 공을 들리는 것을 낭비라 여길 수밖에 없었을 터이고 말이다.특히 중종연간에는 연산군이 사인검을 많이 만든 것도 있어 사인검 주조를 중지하라는 여론이 다른 때보다 많이 보이고 있다. 다만 왕실을 존중한다는 차원에서 중종 이후로는 크게 반대를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참고로 지금 남아있는 유물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은 보다시피 매우 독특하면서도 역시나 장식용이라 외형도 아름답다 보지 구한말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에 의해 수집용으로 집중적으로 매수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도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사인검류보다는 외국에 떠도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에 그 유물이 남아있지 않은 사진검의 경우는 일본 어느 부호나 귀족의 집안을 뒤져보면 분명 하나 이상은 나올 것이고. 이 역시 우리의 불행한 근현대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라 하겠다.


아래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사인검과 삼인검의 기록이다. 사진검은 앞서 말한대로 없다.

연산 40권, 7년 1501 신유 1월 30일(기묘)  
...世宗、成宗仁德之入人者深, 取民有制, 而費不虛枉; 節財嗇物, 而不至於濫。 故人皆休息, 馴致太平, 至于今邦域尊枕, 此殿下之所當法也, 而近年以來, 漸不如初, 內需司之勢甚重, 人之頑奴、健僕投屬於彼者日衆; 戶曹經費之物, 轉輸於彼者不絶。 賜與所用, 比舊猥多; 饋人之費, 倍於前日。 至如三寅劍者, 是何物也? 不過爲禳災之具, 朝官監掌其役, 而所役軍人, 無慮數百。 設爐冶於宮掖, 日夜鼓鑄, 此皆無益於國, 而有害於人。 伏願殿下, 深知此弊, 停不急之務, 省無用之費。... 
세종과 성종은 인덕(仁德)이 백성에게 스며든 것이 깊어서 백성에게서 받는 것이 법도가 있었고 소비에 쓸 데 없이 쓰지 않았으며 재정을 절약하고 물자를 아껴서 남용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모두 쉴 수 있었고 태평을 이룩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라가 편안하니, 전하는 마땅히 이를 본받아야 할 것인데도 근년 이래로 점점 처음보다 못합니다. 내수사의 세력이 매우 중대해져서 민가의 완악하고 건장한 종들이 내수사에 투속(投屬)하는 자가 날로 늘고, 호조(戶曹)에서 쓰는 물건이 내수사로 실어 들어가는 것이 끊어지지 않으며, 사여(賜與)에 소용되는 것이 옛날에 비해 훨씬 많고 사람을 대접하는 비용이 전일보다 배나 됩니다. 삼인검(三寅劍) 같은 것은 이 무슨 물건입니까. 재앙을 물리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데, 조관들이 그 역사(役事)를 감독하여 맡고, 일을 하는 군사가 무려 수백 명이나 되고, 대장간을 궁중에 설시해서 밤낮으로 쇠를 녹여 두드리니, 이것은 모두 나라에 이익이 없고 백성에게 해만 있는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이 폐단을 깊이 알아내어서 급하지 않은 일은 멈추게 하고 쓸 데 없는 비용을 줄이기를 바라옵니다....
【태백산사고본】 11책 40권 5장 A면 
【영인본】 13책 439면

아무튼 좋은 말이다. 원문은 이보다 몇 배는 더 긴데 구구절절 들으면 고개를 끄덕일만한 말들로 채워져 있다. 하기야 유학자는 유학자라... 아무튼 삼인검에 대한 비판이 나오는 가장 이른 시기의 기사다. 연산군의 사치와 왕실의 재정을 담당하는 내수사의 전횡을 비판하면서 기껏해야 재앙을 물리치는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많은 인력과 비용과 노력을 기울이니 나라에도 이익이 없고 백성들에게는 해가 되는 백해무익한 일을 중단해야 한다 주장하고 있다. 보고 있자면 괜히 연산군을 조선조 최악의 폭군이라 하는 게 아님을 알게 된다. 도대체가...

연산 61권, 12년 1506 병인 1월 12일(임진)
傳曰: “四寅劍二百造入。”
사인검(四寅劍) 2백 자루를 만들어 들이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7책 61권 4장 B면
【영인본】 14책 35면

연산 62권, 12년 1506 병인  5월 8일(정해)
囚市人, 督納四寅劍所造雜物。
시인(市人)을 가두고 사인검(四寅劍) 만드는 잡물(雜物)을 바치도록 독촉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7책 62권 10장 A면
【영인본】 14책 51면


워낙 감수성이 풍부한 인간이라서인지 연산군은 유독 주술이나 미신같은 것에 약했는데, 그래서인지 밤낮으로 궁궐 안에 대장간까지 차려두고 삼인검을 만드는 것으로 모자라, 이번에는 아예 사인검을 무려 2백 자루나 만들어 들이라 명령하고 있다. 시인이라 하면 시전에서 장사를 하는 상인일 터인데, 잡아가두고는 사인검을 만드는 재료를 갖다 바치라 하고 있으니 폭군이 괜히 폭군이 아닌 것이다. 결국 이로 인한 반발 때문인지 중종 연간 사인검 주조에 대한 반대기사가 가장 많이 보인다.

중종 66권, 24년 1529 기축 12월 17일(기묘) 
憲府啓前臺官事。 且: “四寅劍造作時, 必預爲山役, 聚私匠而後, 乃可爲也。 一朔山役, 民弊不?。 私匠一人一日之役, 雖不甚害, 搜括之弊, 亦豈少哉? 如此凶歲, 雖汲汲之事, 尙可停罷, 而以不急之事, 至於如此。 請停其役。” 命停四寅劍事, 餘不允。

헌부가 전 대간의 일을 아뢰고, 또 아뢰기를, “ 사인검(四寅劍)을 만들 때는 반드시 미리 산역(山役)을 하고 사장(私匠)을 모아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개월 간 산역을 하자면 민폐(民弊)가 적지 않을 것은 물론, 사장 1인이 1일씩 역사하는 것이 심한 폐해가 되지는 않는 것이지만 수괄(搜括)하는 폐단이 어찌 작겠습니까? 이런 흉년에는 급한 일도 정파(停罷)해야 하는데 이 같은 급하지 않은 일을 벌여서는 안됩니다. 역사(役事)를 정지시키소서.” 하니, 사인검에 대한 일은 정지하라고 명하고 나머지는 윤허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33책 66권 67장 B면 
【영인본】 17책 176면

사인검을 만드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기사다. 산역이란 사인검을 만드는 데 쓰이는 정련된 쇠를 만들기 위해 광석을 채취하는 것이고, 또 사장을 모은다는 것은 원래 따로 장인이 있거나 나라에 속한 장인들을 쓰는 것이 아니라 사인검을 만들려 할 때 민간의 장인을 모아 제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긴 12년마다 한 번씩 있는 일인데다, 왕실의 재정으로 왕실이 주관하여 하는 일이니 조정의 재산이나 사람을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산역에는 1개월, 사장은 한 사람이 하루를 역사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아무튼 흉년이 들어 나라가 어려운데 그로 인한 폐단이 적지 않으니 중지해야 한다는 사헌부의 간언은 지극히 조선답다 할 수 있겠다.


중종 98권, 37년 1542 임인 4월 18일(무진)

工匠則別無他役, 只於別造弓、四寅劍造成之事, 匠人數多矣。 如此凶年, 命停不難, 而別造弓, 則常時賞賜戌邊將士及守令, 故軍務之事, 不得已爲之, 四寅劍,【寅年寅月寅日寅時所造。】則非年年所鑄, 必於寅年爲之。 此祖宗朝故事也。 今年適寅年, 故命鑄之, 今則工役垂畢, 來月間當告訖云。 令若命停, 則後日更爲之時, 其弊尤甚, 故不爲停役也。 此意政院知之。” 
공장이는 다른 일은 별로 없고, 다만 별조궁(別造弓)과 사인검(四寅劍) 을 만드는 일이어서 공장이의 숫자가 많은 것이다. 지금 같은 흉년에 정지하라고 명하는 것은 곤란하지는 않으나, 별조궁은 여느 때에 변방의 장수와 수령에게 상사(賞賜)하는 것이므로 군무(軍務)의 일이기에 부득이해서 하는 것이다. 사인검은 해마다 주조(鑄造)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인년에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은 조종 때의 옛일이며, 올해가 마침 인년이므로 주조하라고 명하였다. 이제는 일이 거의 끝나서 다음달 중에는 끝날 것이라 한다. 그런데 이제 멈추라고 명한다면 뒷날 다시 만들 때에는 그 폐단이 더욱 심할 것이므로, 일을 멈추게 하지 않은 것이다. 이 뜻을 정원은 알라.”
【태백산사고본】 50책 98권 12장 A면
【영인본】 18책 571면
 
또 한 바탕 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있어 사인검이란 하등 쓸데없이 백성들의 노역에 재정을 잡아먹는 짓거리라 여러 차례 그에 반대하는 여론이 있었는데, 특히 연산군의 일도 있어 중종대에는 그것이 조금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왕실의 일이기에 전년에는 정지하기를 허락했지만 이번에는 어차피 만들어 오던 것이고 앞으로도 만들 것이기에 계속 일을 진행할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나오는 별조궁은 원래 변경으로 떠나는 장수에게 주는 것으로 장군검과 같은 의미라 할 수 있는데, 이 기사로 별조궁과 사인검을 왕실에서 함께 주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종 98권, 37년 1542 임인 4월 23일(계유) 

癸酉/諫院啓曰: “凡內間營造長之物, 必以宦官司?監掌, 故因緣憑藉, 多有猥濫之事。 今者四寅劍監造內官等所犯, 非徒發於訴者之言, 已騰於物論, 又現於摘奸, 罪狀昭著。 執法者, 所當窮推痛治。 況贓罪非輕, 若不取服而徑照, 則不但受罪者, 必有後辭, 曖昧者, 亦難自明。 一開其例, 後弊必多。 金宜壽等事, 憲府旣不論執, 又不取服, 而苟且徑照, 以啓後弊, 殊失勢法之意。 不可在職, 請遞。” 答曰: “憲府被論, 可遞也。”
【史臣曰: “當今憑公營私之弊極矣。 司?宦官奸濫之狀, 已播於公論, 自上蔽於私?, 累日留難, 終不允兪, 以至遞臺官。 奸細之徒, 宜乎濫矣。”】 
간원이 아뢰기를, “ 무릇 내간(內間)에서 영조(營造)하는 데에 필요한 물건은 반드시 사약(司?) 환관(宦官)이 감장(監掌)하므로, 이를 인연하고 빙자하여 외람된 짓을 많이 합니다. 이제 사인검(四寅劍)을 만드는 것을 감독하는 내관 등이 범한 것은, 고소한 자의 말에서 나왔을 뿐더러 이미 물의가 떠들썩하고, 또 적간(摘奸)에서 나타나 죄상이 뚜렷하니 법을 집행하는 자가 끝까지 추고하여 통렬히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장죄는 가벼운 것이 아닌데, 승복하는 공초를 받지 않고 곧장 조율하면, 죄를 받은 자가 반드시 뒷말이 있을 뿐더러 애매한 자도 자연 밝히기 어려울 것이니, 한 번 그 전례를 열면 뒤폐단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김의수(金宜壽) 등의 일은 헌부가 논집하지 않았고 승복하는 공초를 받지도 않았는데, 곧장 조율하여 뒤폐단을 열었으므로, 법을 집행하는 뜻을 아주 잃었습니다. 벼슬에 있을 수 없으니, 체직하소서.” 하니, 답하였다. “ 헌부는 논박받았으니 체직하도록 하라.” 
사신은 논한다. 지금 공무를 빙자하여 사리를 영위하는 폐단이 극심하거니와, 사약 환관의 간사하고 외람된 정상이 이미 공론에 퍼졌는데, 위에서 사사로이 친근한 자에게 마음이 가리워 여러 날 결정하지 않다가 끝내 윤허하지 않고 대관(臺官)을 체직하기에 이르렀으니, 간사한 무리가 외람된 짓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태백산사고본】 50책 98권 14장 B면 
【영인본】 18책 572면
 
사인검의 주조를 왕실의 내관이 감장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런데 사인검을 만드는 과정에서 여러가지로 잡음이 많았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돈이 있고 권력이 있으면 어찌 잡음이 없을 수 있겠는가만, 하여튼 세상 돌아가는 이치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모양이다. 그나마 조선의 경우는 내관들의 권한이 그리 크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조선의 내관이 명의 환관과 같았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차마 상상하기조차 두렵다. 

중종 98권, 37년 1542 임인 4월 27일(정축) 
四寅劍, 雖循例造作, 只爲禳災, 涉於左道, 實是無用之物。 當此飢歲, 多聚公私匠人, 累朔攻造, ?費實多, 甚非不作無益(害有益)〔有害〕之義。 請?命停役。 且其監造內官司?等, 其營私作弊之狀, 巳皆顯發, 飾辭不服, 所當窮詰。 況事係贓罪, 未及取服, 徑定其律, 必有後弊。 請加訊鞫, 取服後定罪。” 答曰: ... 四寅劍事, 自祖宗朝, 寅年打造, 舊例, 故厥初爲之, 如此險年, 聚工造作, 非汲汲事, 停之似當。 內官司?等公事, 取服然後, 定罪可也。”
헌부가 아뢰기를, 사인검(四寅劍)은 전례에 따라서 만든다고는 하나, 다만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것으로 좌도(左道)에 관계되니, 참으로 쓸 데 없는 물건입니다. 이 같은 흉년을 당하여 공사(公私)의 공장이를 많이 모아 여러 달 동안 다듬어 만들므로 참으로 낭비가 많으니, 무익한 것을 만들어 유익한 것을 해치지 않는다는 뜻에 매우 어그러집니다. 빨리 일을 멈추라고 명하소서. 또 만드는 것을 감독하는 내관(內官) 사약(司?) 등이 사리(私利)를 영위하여 폐단을 일으키는 정상이 이미 다 드러났는데도 말을 꾸미고 승복하지 않은 것은 끝까지 힐문해야 합니다. 더구나 장죄(贓罪)에 관계되는 일을 미처 승복하는 공초를 받지 않고 곧바로 그 율(律)을 정하면 반드시 뒤 폐단이 있을 것이니, 더 신문하여 승복을 받은 뒤에 죄를 정하소서.” 
하니, 답하였다. 
“...사인검의 일은, 당초에 조종 때부터 인년(寅年)에 만드는 것이 전례이므로 만들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흉년에 공장이를 모아서 만드는 것은 서두를 일이 아니니, 멈추는 것이 마땅하겠다. 내관 사약 등의 공사(公事)는 승복을 받은 뒤에 죄를 정하도록 하라.” 
【태백산사고본】 50책 98권 16장 A면
【영인본】 18책 573면
 

앞서 두 기사와 이어진다. 좌도라 함은 방술方術과 같은 뜻으로 정도를 뜻하는 우도를 벗어난 삿된 길, 삿된 이치라는 의미다. 요즘도 좌파라 하면 빨갱이라 무척 싫어하는데, 이때도 좌도라 하면 거의 빨갱이취급 - 이라기보다는 사이비 종교나 미신과 같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으로 경멸하는 의미로 불렀었다. 하긴 그게 그거던가? 아무튼 유교라는 게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무척이나 합리적이고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형이상이니 미신이니 공리공론이니 하는 걸 무척 싫어했었다. 하물며 귀신을 쫓는다 돈과 시간과 사람을 들여 칼을 주조하는 따위는 하등 쓸데없는 낭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더구나 사인검 주조를 감독하는 내관들의 폐단이 적지 않고 보면 마땅히 폐지해야 할 구습에 불과했다. 결국 중종도 견디지 못하고 사인검의 주조를 중단하고 있다. 훈구대신들에 눌려 있던 당시 중종의 처지를 보여준다 하겠다.

성종 90권, 9년 1478 무술 3월 11일(계유)) 
宗簿寺啓: “昌原君晟殺古邑之事跡顯然, 衆證明白, 勢難掩覆, 自云: ‘臣本不知古邑之稱名女, 前後又無殺女事。 家中只有三寅、三辰劍各一, 又無環刀。’ 雖反覆窮詰, 略不承服。 請上裁。... 
종부시(宗簿寺)에서 아뢰기를, “창원군(昌原君) 이성(李晟)이 고읍지(古邑之)를 죽인 것은 사적(事跡)이 현저하고 여러 사람의 증거가 명백하니, 사세가 덮어 가리울 수 없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신은 본래 고읍지(古邑之)라고 일컫는 여인을 알지 못하며, 전후(前後)에도 여인을 살해한 일이 없습니다. 집안에 다만 삼인검(三寅劍)과 삼진검(三辰劍)이 각각 한 자루씩 있을 뿐이고, 또 환도(環刀)는 없습니다.’ 합니다. 비록 되풀이하여 추궁해 따지었으나 조금도 승복(承服)하지 않습니다. 청컨대 성상께서 재단(裁斷)하소서.” ...
【태백산사고본】 14책 90권 5장 A면 
【영인본】 9책 566면

사인검은 아니지만 삼인검과 삼진검이 어떤 물건이었던가를 보여주는 기사라 하겠다. 왕족인 창원군 이성이 여인을 죽인 사건에 대한 기사인데, 흥미롭게도 창원군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근거로서 집안에 삼인검과 삼진검이 한 자루씩 있을 따름이라는 사실을 내세우고 있다. 그 말은 이들 삼인검과 삼진검이 살상능력이 전혀 없는 장식용 이상의 의미는 없었음을 보여준다. 또 하나 왕자인 창원군이 삼진검과 삼인검을 가지고 있음을 눈여겨 볼 만 하다. 아마도 이러한 왕자들에게 삼진검과 삼인검은 내려졌을 것이다.



예전에 이런저런 자료들을 구하면서 사인검등에 대한 사진도 잔뜩 구해다 시디로 구워놨는데, 그걸 다시 찾아 돌려 보니 시디 자체가 깨져 있었다. 결국 다시 인터넷을 뒤져 사진을 찾는데, 영 마땅한 사진이 눈에 뜨이지 않아 대충 올려보았다. 그동안 사진자료가 늘어나면 더 늘어났을 터이건만 오히려 예전보다 더 빈곤한 듯 보이니. 복원품 사진만큼은 어지간하면 쓰고 싶지 않았는데, 아무튼 덕분에 처음 생각한 것과는 달리 글 위주의 포스트가 되어 버렸다. 마음에 안 들더라도 이해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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