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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차도, 사람도 좀처럼 보이지 않고...
여러 버전의 '울고넘는 박달재'만이 길 위의 스피커에서 연이어 흘러나왔다.
박달과 금봉의 비극적인 사랑을 기린다는 이 곳에
왜 이런 음란하고 해괴망측한 조각들을 세워놓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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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뜩이나 한(恨) 서린 사랑인데, 조각이라도 유쾌해야 하겠지...
남성성과 여성성을 과장되게 표현함으로써, 처녀 총각귀신의 한을 위로 하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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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달 재
박달재의 원이름은 천등산과 지등산의 영마루라는 뜻을 지닌 이등령
이었으나 조선 중엽 경상도의 젊은 선비 박달과 이곳의 어여쁜 낭자 금봉
의 애닯은 사랑의 전설이 회자되면서 박달재로 불리우게 되었다.
장원의 부푼 꿈을 안고 한양으로 가던 박달은 고개 아래 촌가에 하룻밤
유하려다 길손을 맞이하는 금봉이의 순수하고 청초한 모습에 정신을 빼앗기고
금봉도 박달의 준수하고 늠늠한 모습에 잠을 못이루고 달밤을 거닐다가 역시
금봉을 그리면서 서성이던 박달을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몇 날을 머물며 금봉과 사랑을 속삭이던 박달은 과거에 급제한 후에 혼인을
하기로 언약하고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떠나고 그날부터 금봉은 박달의 장원
급제를 서낭신께 빌었으나 과거가 끝나고도 박달의 소식이 없자 크게 상심하여
고개를 오르내리며 박달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다가 한을 품고 삶을 거두고 말았다.
한양에 온 박달도 과거 준비는 잊은 채 금봉을 그리는 시만 읊다가 낙방을 한 후
금봉을 보기가 두려워 차일피일 미루다 금봉이 장례 사흘 후에 돌아와 금봉이 죽었
다는 말을 듣고 땅을 치며 목놓아 울다가 언듯 고개를 오르는 금봉의 환상을 보고
뒤쫓아 가서 와락 금봉을 끌어 안았으나 금봉의 모습은 사라지고 박달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후 사람들은 이등령을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다.
'갑돌이와 갑순이' '이수일과 심순애' 스토리의 원조일까?
아무튼 겉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38번 국도 충주에서 제천방향, 박달재 광장휴게소 바로 위에 대문같은 입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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