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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 침투한 女간첩들의 역사

모링가연구가 2008. 5. 17. 19:44


남한에 침투한 女간첩들의 역사

운의 여간첩 김수임

마타하리가 세계적인 여간첩의 「원조」라면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간첩 원조는 김수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한 인텔리 김수임은 어린 시절 가난했던 만큼 커서는 귀족적인 생활을 동경했다. 그녀의 꿈은 미군 헌병사령관 페어드대령과 동거생활을 시작하면서 현실화됐다. 동시에 그녀는 거물급 공산주의자 이강국(李康國)의 애인이기도 했다.

김수임은 46년 9월 도피중이던 이강국을 숨겨주다가 자기 전용차로 월북시켰고, 같은 해 12월에는 이강국의 연락원을 통해 다수의 군사기밀을 북측에 전달했다. 48년 12월에는 남로당 군사부 프락치 총책인 이중업(李重業)을 육군형무소에서 탈출시켜 월북시키기도 했다.

수사당국은 김수임의 간첩활동을 확인했음에도 체포하기를 주저했다. 그녀가 미군 헌병사령관의 애인이기 때문이었다. 서울시경 수뇌부는 이승만대통령에게서 『무슨 소리야? 공산당이라면 유엔군 사령관의 부인이라도 잡아들여야지』라는 역정을 듣고서야 김수임을 체포하러 나섰다.

수사관들이 옥인동 김수임의 집을 덮쳤을 때 과연 그녀의 호통은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수임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함부로 들어오느냐!』 『내 말 한 마디면 목이 두세 개라도 모자란다는 거 몰라?』 하며 위세를 부렸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1950년 6월15일 육군본부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여간첩 김수임과 동거했던 페어드대령 역시 곧 본국으로 소환돼 군법회의에서 7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김수임을 파탄에 빠뜨린 이강국 역시 53년 8월 북한에서 대대적인 남로당 숙청이 벌어질 때 「미제 고용간첩」이라는 죄명으로 처형됐다(이상 김수임 관련 부분은 이옥주 편저 『한국근세여성사화 下』(규문각, 1985)참조).


「여간첩」과 「여자」

마타하리와 김수임, 이들 두 전설적인 여간첩의 스토리에서는 몇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마타하리는 첫사랑에 실패한 뒤 화려한 사교계에서 뭇 사내를 유혹하며 「어설픈」 스파이생활을 시작했고, 김수임 역시 화려한 생활을 동경해 미군 헌병사령관의 애인이 됐지만 이강국이라는 첫사랑을 끝내 잊지 못했다. 둘 다 미모의 여성으로서 성적 매력을 최대한 활용했다는 점도 같다. 마타하리는 그동안 영화와 소설의 소재로 많이 등장했고, 김수임의 경우에도 지난 봄 국내 연극무대에 올려졌다.

그러나 마타하리와 김수임의 스토리는 극적 흥미유발을 위해서 후세에 상당 부분 윤색된 측면이 짙은 것으로 보인다. 현실 첩보세계에서는 이보다 훨씬 냉혹한 논리가 적용되며, 마타하리나 김수임처럼 후세에 예술작품의 소재로 활용될 요소를 고루 갖춘 경우를 찾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면 휴전 이래 남북 첩보전쟁에 등장했던 북한 여간첩의 면면들은 어떤 모습일까.

북한이 남파한 여간첩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로는 단연 김현희가 첫 손에 꼽힌다. 87년 11월29일 부녀간으로 위장한 공범 김승일(金勝一)과 함께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향하는 KAL기를 미얀마 영해 상공에서 폭파시킨 바로 그 여인이다. 너무 잘 알려져 새삼 소개할 필요조차 없는 김현희의 경우, 그 천인공노할 범죄사실에도 불구하고 다소곳한 여성스러움으로 일반에게 묘한 신비감을 갖게 했다. 그녀는 자서전을 써서 거액을 벌기도 했다.


「총리급」 여간첩 이선실

잘 알려진대로 남파 여간첩 중 최고위급 인물이 이선실(李善實)이다. 92년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으로 실체가 밝혀진 이선실은 80년 3월 경부터 90년 10월까지 10년 이상을 서울, 전주, 안양 등지에서 숨어지내면서 남파 공작원 10여명을 수하에 거느리고 대남공작을 총지휘해온 인물. 권력서열 22위로서 사회단체 담당비서 김중린(金仲麟.23위), 대남사업담당 비서 겸 조평통 부위원장 윤기복(尹基福.24위), 부총리 김달현(金達玄.32위) 등보다도 앞서는 「총리급」 여간첩이다.

제주도 출신으로 이선화, 이옥녀 등의 가명을 사용해온 이선실은 80년 이전에도 66년과 73년 두 차례에 걸쳐 남파됐었고, 78년에는 조총련 모국방문단의 일원으로 입국하기도 한 베테랑 공작원이었다. 80년 신순녀라는 이름으로 입국한 뒤로는 재야운동권 일각에서 『일제 때 독립운동을 했고, 제주 4·3사태 희생자의 유족이며, 아들이 통혁당 사건에 연루돼 실종된 할머니』 『평생 홀로 지내며 삯바느질과 식당 경영으로 모은 재산을 민주화운동에 쓰는 노인네』로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이선실은 90년 10월17일 강화도 해안에 대기중이던 반잠수정을 타고 북한으로 귀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 김일성 생일연회, 인민군 창건기념일, 각종 주요 행사의 주석단 멤버로 참석한 것이 파악됐다.


「70년대의 전설」 정경희

북한 여간첩 역사에서 80년대가 이선실의 시대였다면, 70년대에 북한에서 이선실에 버금가는 명성과 지위를 누린 인물로 정경희(鄭敬姬)가 있다. 경북 출신으로 51년 월북한 정경희는 67~73년간 노동당 비서국 연락부 공작원을 거쳐 75년 대남공작을 지휘하는 연락부장 자리에 오르고, 80년에는 당 중앙위원, 정치국 후보위원으로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수차례 남파돼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경희에 대한 기록은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간첩활동 때 체포된 적이 없어서 그에 대한 기록은 찾기가 어렵고, 지금은 대부분 은퇴한 그 시절 정보기관 관계자들의 기억도 상당 부분 퇴색돼버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경희에 대한 단편적인 에피소드는 북한의 공작원 양성기관인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출신인 귀순자 A모씨가 소개했다.

『김정일대학 출신자들은 연락부장까지 지낸 정경희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한 마디로 전설적인 여성 공작원이다. 남파됐을 때 할머니로 위장하기 위해서 생이빨을 모조리 뽑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김정일대학 부학장을 지낸 신도현이란 사람이 개성연락소 전투원이었을 때 남파돼 부상으로 만신창이가 된 정경희를 데려왔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래서 김일성이 직접 정경희에게 영웅훈장을 달아줬다고 한다』


고첩망 총지휘, 채수정

70년대 초반의 또 한 사람 거물급 여간첩으로 채수정(蔡洙貞)이 있다. 71년과 73년, 74년 세 차례 남파돼 대전을 중심으로 암약했던 채수정은 노동당 창건 20주년 기념훈장과 국기훈장 1급을 받은 인물. 채수정이 검거될 당시 「동아일보」(74년 5월6일자)는 『여간첩 등 7개 망(網) 30명 검거』라는 제하의 머리기사로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최석원(崔錫元) 치안국장은 6일 서울 대전 전주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암약해온 고정간첩 7개 망 29명과 이들을 지휘하기 위해 남파된 북괴의 거물 여간첩 채수정 등 30명을 일망타진하고 이들이 갖고 있던 권총, 무전기, 인마살상용 독약, 위조 주민등록증 등 1백여점을 압수했다고 발표했다. 최치안국장은 「이번에 검거된 간첩단의 특징은 이미 남파되어 암약중인 7개 고정간첩망을 점검, 독찰하기 위해 위장하기 쉬운 거물 여간첩을 내려보낸 데 있다」고 밝혔다. 이들 중에는 대학교수, 중고등학교 교사, 공화당원, 공무원, 회사원 등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가 포함되어 있다…』

위에 소개한 인물들은 북한이 지금까지 남파한 여간첩들 중에서도 최고 거물급들이다. 그러나 남북 첩보전쟁의 뒤안길을 살펴보면,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온갖 다양한 형태로 암약했던 여간첩들이 상당수에 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거의 역사 속에 묻혀버린 그들 중 몇 가지 사례만 열거해보자(이하 사례들은 국민방첩연구소 刊. 『북괴 대남스파이전선』(1979)에서 참조).


부부·식모·접대부·마담간첩…

▲여간첩 유양필(柳良畢) 사건 : 유양필은 공작기간, 활동범위, 공작금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신출귀몰한 수법을 구사했던 여간첩이었다. 남로당원이었던 남편이 6·25전쟁 당시 사망하자 월북한 유양필은 52년에 침투, 61년 8월 검거될 때까지 서울에 회사, 음식점을 차리고 온양과 당진에는 도자기공장, 대구에선 「경북 피학살자 유족회」 등을 조직해 국회의원에서부터 술집 호스티스에 이르기까지 20여명을 포섭했다. 그녀가 사용한 공작금은 당시로선 엄청난 거액인 20만달러에 달했고, 자신이 포섭한 고정간첩 이만희와 동거하면서 함께 활동했다. 검거 당시 45세의 여인답지 않게 단발머리에 색동저고리, 연분홍 치마를 입고 위장해 정계 모 인사의 집에 숨어 있다가 체포됐다.

▲여간첩 유위화(柳渭夏) 사건 : 1972년 4월11일 일망 타진된 무장간첩단 32명의 주범으로 체포 당시 59세. 서울과 부산, 대구 및 영남지역을 무대로 부산과 대구에 무전시설까지 차려놓고 13년간 암약했다. 체포 전까지 4차례 남파돼 대학교수, 공무원에서 중소상인 노동자 등을 포섭대상으로 삼았고, 심지어 자신의 아들과 친동생, 외사촌 동생까지 간첩단의 일원으로 끌어들였다.

▲위장 부부간첩 박광찬(朴光贊. 체포 당시 45세)·문정숙(文貞淑. 체포 당시 43세) 사건 : 두 사람 모두 6·25 때 부역하다가 패주하는 북한군을 따라 월북, 중앙당에 소환돼 부부조 간첩으로 약 1년 5개월간 밀봉교육을 받고 70년 5월 남파됐다. 여간첩 문정숙은 71년 3월30일 체포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조장 박(朴)과는 사랑으로 결합된 것이 아니라 혁명을 위해 희생하라는 당의 강요에 어쩔 수 없이 자녀까지 있는 그와 결합해 억지 부부가 됐다』고 진술했다.

▲식모 간첩 장옥순(張玉順) 사건 : 해병대 사령부에 근무하는 형부 M중령과 언니를 포섭해 합법 토대를 구축하고 정계 요인이나 군 장성집 식모로 침투해 활동했다. 6·25 때 서울의 대학생으로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다 북한군에 강제 동원돼 월북했다가 남파, 23일만인 66년 9월3일 형부 M중령의 신고로 검거됐다. 검거 당시 31세. 50~60년대에 식모로 위장한 여간첩 사례는 이밖에도 안옥란(安玉蘭.31), 박정애(朴正愛.24), 권순분(權順粉.31) 신복례(申福禮.37) 등 여러 사례가 있다.

▲접대부 간첩 주화선(朱花仙) 사건 : 서울 E대학 재학 중 9·28 때 납북됐다가 남파됐다. 서울에 침투하는 즉시 요정 접대부로 취업하고 적당한 시기에 요정을 인수, 경영하면서 안전 거점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정계 경제계 언론계 인사 및 군부 검찰 경찰의 간부들을 자연스럽게 접촉해 기밀을 탐지하는 임무. 64년 5월11일 검거. 검거 당시 31세. 접대부로 위장한 사례는 이 밖에도 53년 10월 검거된 여간첩 오정림(吳貞林) 등 여럿 있다.

기록에 의하면, 70년대까지 남파된 여간첩들이 위장한 신분은 이 외에도 극히 다양하다. 북한의 「여전사」들은 점쟁이, 무당, 행상, 기생, 펨프, 다방 종업원·마담에서부터 간호원, 미용사, 유학생 등 온갖 분야에 침투해 있었던 것이다.


북한의 대남공작·간첩양성기관

그러면 북한에서 여간첩은 어떻게 양성되는가. 이를 위해서는 북한에서 대남공작을 담당하는 기관들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근 출간된 『다큐멘터리 김정일』의 저자인 한반도정책연구원 손광주 선임연구위원에 의하면 노동당 비서국 소속의 사회문화부(구 연락부), 대외정보조사부, 작전부, 통일전선부 등 4개 부서가 대남담당 비서의 통제하에 대남사업 실무를 담당하는 부서들이다. 이중 고정간첩을 남파하는 부서는 사회문화부와 대외정보조사부이다.

간단히 말해서 사회문화부는 공작원 밀봉교육·남파, 남한내 지하당 구축공작을 맡고, 대외정보조사부는 해외 간첩공작, 국제·대남 테러공작을 전담하는 부서다. 예를 들어 87년 KAL 858기 폭파사건이나 최은희·신상옥 납치사건이 대외정보조사부가 수행한 작전이다. 앞머리에 소개된 「울산 부부간첩」은 사회문화부 소속으로 알려졌고, 김현희는 대외정보조사부 소속이었다.

작전부는 공작원들에 대한 기본교육훈련, 침투 공작원 호송·안내·복귀, 대남 테러공작 및 요인납치, 대남침투 루트 개척 등을 주 임무로 한다. 북한에서는 작전부에서 길러내는 무장간첩을 「전투원」이라고 부르는데, 남파 공작원 파견기지인 육상연락소 2개(개성 사리원), 해상연락소 4개(청진 원산 남포 해주)를 운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통일전선부는 해외에 있는 조총련, 범민련, 미국·캐나다 등의 친북조직을 통해 대남사업을 하는데, 노출된 행동을 한다는 점에서 다른 3개 부서와 다르다. 따라서 통일전선부를 제외한 3개 부서가 대남사업의 핵심부서들인 셈이다. 이들 3개 부서는 「비합법활동」 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인민무력부 총참모부 직속기관으로서 정찰국도 무장공비 양성·남파, 요인암살·파괴·납치 등 게릴라활동, 대남 군사정보 수집 등 대남공작을 수행하고 있다. 일례로 83년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파사건이 정찰국 소속의 특수공작원에 의해 수행됐다.

97년 11월 현재 대남사업 담당 비서는 김용순이 맡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김정일이 모든 대남사업 부문을 직접 통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무 책임자들로는 사회문화부장에 이창선, 작전부장에 오극렬, 대외정보조사부장에 권희경이 포진해 있다.

남녀 공작원 양성은 작전부 소속의 김정일정치군사대학과 사회문화부 소속의 봉화정치대학에서 담당한다(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과거 686훈련소, 금강학원, 금성정치군사대학, 김일성정치군사대학 등으로 불리다가 92년 현재 명칭으로 정착됐다). 이선실 정경희 김현희 등 대남사업 종사자 대부분이 이 곳 출신들이다. 말 그대로 오랜 관록과 경험, 지식을 자랑하는 북한 최고의 스파이학교인 것이다.

선발대상은 입교 2년 전부터 각 시도에 나가 있는 중앙당 간부와 요원들이 대상학생을 물색, 철저한 뒷조사와 관찰을 거쳐 결정된다. 여기서 일단 뽑히면 학교, 군, 시도, 중앙당 등 4단계에 걸쳐 신체검사를 치르고 최종적으로 중앙당 과장과 담화를 거쳐서 최종 선발된다. 말 그대로 사상과 신체조건 등 모든 면에서 북한 최고의 엘리트들을 선발하는 것이다.

입교생의 70% 정도가 평양외국어대학이나 각 도에 하나씩 있는 외국어학원생들로 알려져 있다. 김현희도 평양외국어대학 일어과 2년 재학 중 선발돼 이 곳에서 7년8개월간 밀봉교육을 받았다. 여성의 경우 미모가 중요한 선발 조건이 된다고 한다.


여간첩 양성실태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본교와 분교가 있는데, 여성은 분교에 배치된다. 본교는 전투원을 양성하는 곳이고 분교는 지하 공작원, 즉 전투원보다는 군사훈련의 필요가 많지 않은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곳이다.

분교에서는 조원 이외에는 상대방 얼굴을 볼 수 없도록 모자 앞에 망사천을 씌우고 교육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적지에서 임무수행 중 서로 얼굴을 알면 다같이 위험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고정간첩을 양성하는 봉화정치대학의 입학대상자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 5년을 졸업한 전투원 출신이나 비밀리에 선발된 요원들이다. 커리큘럼은 지하당 건설이론, 정보학, 지형학, 적국활동 심리학, 외국어, 남한 및 국제정세, 비합법활동 전술, 수영, 잠수, 운전, 열쇠기술 등이고 여성은 기초화장법에서부터 남성 회유기법, ***기교 등도 배운다고 한다. 학제는 과정에 따라 1년 내지 3년이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출신의 귀순자 A씨는 이 학교의 교육과정을 한 마디로 「인간성 말살교육」이라고 규정했다. 일례로 동료들끼리 벌이는 격술훈련에서는 상대를 완전히 제압할 때까지 죽도록 싸우게 하고, 심지어 인근 마을의 민간인들을 상대로 살인연습까지 한다는 것. 기본 훈련과정은 여자도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게 A씨의 말이다.

『일례로 매일 10리 이상, 매월 한 차례 1백리 이상(4시간 이내), 분기별로 1백50리(5시간 이내), 연말에 2백리(8시간 이내)를 뛰는 행군훈련이 있다. 그냥 맨몸으로 뛰는 게 아니라 남자는 25~30kg짜리, 여자는 15~20kg짜리 모래배낭을 지고 뛴다. 혹한기에도 10리만 이렇게 뛰면 온 몸이 땀에 젖는데, 여자들의 경우 젖은 머리가 얼어붙고 성에가 앉아 흡사 귀신같은 몰골이 된다. 밤중에 이런 모습을 본 주민이 기절한 적도 많다고 들었다』

수강과목 중에는 「자폭론」이란 것도 있다. 『적의 손에 붙잡히면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자폭해야 진정한 공산주의자다』라는 김일성 교시에 따라 80년대 이후 모든 학생들은 자폭론을 필수과목으로 암기해야 한다는 것. 「자폭론」은 96년 9월 동해안 잠수함사건 때 전투원 11명이 자폭함으로써 교육효과를 여실히 입증했다.

북한 입장에서 여성 공작원, 즉 여간첩은 대남 첩보공작의 필요불가결한 존재일 수 있다. 남자들이 대신할 수 없는 여자만의 영역과 특징을 활용해 첩보공작의 질적 수준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북한당국은 여간첩 양성에 몰두하면서 남한사회 곳곳에 그들을 심어놓는 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토록 철저하게 만들어진 여간첩의 철가면 뒤에는 지금 한반도에 살고 있는 가녀린 「여성」의 슬픈 얼굴이 있다. 7년 8개월 동안 냉혹한 여전사로 키워졌던 KAL기 폭파범 김현희는 단 7일만에 굳게 닫혔던 마음의 빗장을 열고 참회의 눈물을 쏟았다. 그 후 그녀의 삶은 그녀의 자서전 제목으로 사용된 한 마디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로 집약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