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서예 방

‘멱남서당’ (추사)

모링가연구가 2008. 9. 27. 07:13

 

▲ 추사가 1828년 4월 19일 온양의 아내 예안 이씨에게 보낸 한글 편지.
수많은 명작을 남긴 대서예가 추사 김정희(1786~1856)가 한글 편지도 썼다. 대부분 아내에게 쓴 편지다. 위대한 예술가이자 학자로 숭배되는 추사지만, 구어체의 현장감 있는 표현이 압권인 한글편지에서 떠오르는 것은 자잘한 욕심과 결점, 희로애락을 그대로 드러내는 솔직한 남자의 모습이다. 종손으로서 제사와 혼사 등 집안 대소사를 깐깐하게 챙기고, 음식 투정을 부리는가 하면 유배지에서의 애환을 그대로 드러낸다.

‘추사 한글 편지’ 전시(25일~6월 27일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는 40통(원본 32통 사본 8통)이 등장한다. 30대부터 50대까지 20년에 걸친 이 편지들의 발신지는 서울·대구·평양·제주 등 다양한다. 옛 한글 편지를 집중 연구해 온 건국대 김일근 명예교수의 ‘멱남서당’ 소장품이 대부분이다.

먼저 편지 속 30대 초반의 추사는 생기와 애교가 넘치는 남자. “서물(暑物·여름과일)이 한창때이오니 부디 참외 같은 것 많이 잡수시게”(1818년 6월 4일). “내행(內行)이 곧 올 것이라(당신이 오시시라) 생각되는데 어떻게 차려 오십니까. 어란 많이 얻어 가지고 오십시오. 웃어봅니다”(1818년 9월 26일). 평양 기생 죽향이와의 염문에 대해서는 딱 잡아뗀다. “나는 일양이오며(잘 있고) 집은 여도 잇고 잇사오니 임자만 하여도 다른 의심하실듯 하오나…다 거짓 말이오니 고지 듣지 마십시오”(1829년 11월 26일).

양자를 들이고는 ‘60이 돼서야 부모 소리를 들었다’고 기뻐하고 며느리에겐 무엇보다 제사를 잘 모셔야 한다고 강조하고 손자가 태어나자 이름을 지어 보내기도 한다.

추사는 먹는 것, 입는 것에 대해 매우 예민하고 까다로웠다. 당시에는 서울에서 제주까지 빠르면 두 달, 늦으면 일곱 달이나 걸렸던 것으로 편지에 나오는데도 부인에게 밑반찬 일체를 보내게 했다. 김치 보내라는 아우성에, 음식이 변질됐다고 불평하고, 소금을 넉넉히 친 김치를 보내면 ‘너무 짜다’고 잔소리다. “…인절미는 모두 썩어 버렸습니다… 외 쟝과(장아찌)는 괜찮고 무우 쟝과는 또 변미하였습니다. 젓 무는 조금 쉬었으나 먹을 수 있겠습니다”(1841년 4월 20일). “민어를 연하고 무롬한 것으로 가려서 사 보내게 하십시오. 나려온 것은 살이 셔여 먹을 길이 업습니다. 겨자는 맛난 것 있을 것이니 넉넉히 얻어 보내십시요”(1841년 6월 22일). 추사의 편지들은 한글이라 해도 고어투성이에 자유분방한 흘림체로 적혀 있기 때문에 서예박물관이 따로 해석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