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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화향기 가득한 국립중앙박물관. |
ⓒ 이정근 |
한자 종주국 중국을 한자(漢字) 하나 가지고 흔들어 놓은 조선인, 판에 박은 듯한 왕희지 글씨에 식상해 있던 중국인들의 눈을 휘둥그러지게 한 장본인이 김정희다. 스승 박제가와 친분이 있던 당대의 청나라 거유 옹방강을 자신의 팬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분명 한류 스타임에 틀림없다.
추사체 창시자 김정희는 '원조 한류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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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사 김정희의 연습장. 불후의 명작들은 피나는 노력과 끊임없는 연습의 결과이다 |
ⓒ 이정근 |
추사의 글씨를 글씨로만 바라보면 추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놓친다. 그림 같은 글씨. 글씨 같은 그림. 추사의 글씨에는 회화가 있다. 한자(漢字)를 통달하고 상형문자를 석파한 자만이 거닐 수 있는 신선의 경지가 추사의 글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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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서완석루 |
ⓒ 이정근 |
그렇다고 전체를 위하여 한 글자를 희생시키지도 않았다. 오히려 한 글자 한 글자에 독창적인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여기에서 추사 김정희만이 구사할 수 있는 회화미가 나온다. 이것이 추사체의 독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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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장 내부 |
ⓒ 이정근 |
김정희 글씨가 대륙에 휘날리자 대국이랍시고 거만하기 짝이 없는 중국의 학자와 정치가들이 빳빳하던 목을 꺾었다. 오가는 사신을 통하여 너도나도 추사 김정희 글씨 받기를 간청했다. 그들의 손에 들어간 추사의 글씨는 가보로 모셔졌다.
김정희 파워, 전시회에서 실감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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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희 종가 벼루와 붓. 추사 김정희는 붓과 벼루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
ⓒ 이정근 |
글씨의 달인 추사 김정희가 세 글자를 쓰면서 세 번이나 다시 섰다니 그 프로 정신에 고개가 절로 수그러진다. 역시 대가를 웃도는 달인에 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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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그림 |
ⓒ 이정근 |
국보 180호로 지정되어 있는 세한도는 그의 나이 59세에 그린 작품이다. 1829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성균관 대사성과 이조참판을 역임하다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귀양가 있을 때, 그를 잊지 않고 찾아온 역관 이상적에게 그려준 그림이다.
황량한 들판에 이지러진 집 한 채. 허리가 굽었지만 푸름을 잃지 않은 노송. 곧게 뻗어 올라간 세 그루의 잣나무. 간결한 터치에 여백이 많지만 꽉 찬 느낌이다.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그림이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얘기가 듣고 싶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그림이다. 그림에서 말을 듣고 싶어하는 묘한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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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보 180호 세한도 |
ⓒ 이정근 |
세한도 옆에 김정희가 써놓은 발문(跋文)이다. '날이 차가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라는 구절은 논어 자한편(子罕篇)에서 따온 글귀라고 밝히며 은연중에 자신의 심중을 표출하고 있다. 송백과 같은 기상. 그것은 추사 김정희가 평생을 추구한 이상일지 모른다.
150년 전에도 댓글 문화가 있었다
조선시대 한류스타 추사 김정희는 21세기 인터넷시대 스타처럼 댓글에서도 원조다. 세한도에는 스스로 달아 놓은 댓글(발문)도 있지만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세한도와 함께 전시된 당대 학자들의 발문은 요즈음 식으로 해석하면 댓글이다. 발문을 읽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송백은 굳게 지키는 바가 있어 범속한 나무들과 어울리지 않고
바위 사이에 몸을 숨긴지 오래되어 부여잡고 당겨도 아무도 오르지 못하네
돌이켜 완당 노인을 생각해보면 비범한 기상으로 푸른 절벽에 올라
문하의 뛰어난 제자들과 도의와 문장을 닦았지
우옹 이상적이 북경 가는 날 완당이 정신의 뿌리를 그려주자
소중히 싸서 만 리를 달려가 북경의 명사들과 시를 지어 읊으니
글씨의 아름다움이 마치 아름다운 달을 보는 듯하다.
ㅡ갑인년 춘정월에 후학 김준학
꿩이 집을 안 짓는 것은 그 빼어남이 싫음이요
꾸밈이 없음은 소중한 것을 아는 바라
둥지가 천년이 되면 마침내 쓰임새를 얻고
지인(至人)은 번민 없이 높은 산을 우러러 봐
맑음과 흐림을 조화롭게 얻고 봉황을 화합하게 해
그 아래 거문고 타며 선왕(先王)의 도를 즐겨 군자의 도를 말했으니 더할 것이 없구나
ㅡ조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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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작시 수선화 |
ⓒ 이정근 |
북경에 사신이 오고 글과 술로 잔치가 열리자
나에게 보여주는 새한도 추운 숲 한 조각.
봄날 화려함을 뽐내는 복사꽃 배꽃은 어디 갔을까?
푸름이 동심(겨울날의 쓸쓸하고 처절한 마음)을 품고
꿋꿋이 서리와 눈에 굴하지 않네
번영과 쇠퇴를 다루지 말진저
서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먼저 이 시로 인사하노라
ㅡ오현 조무견
화려한 꾸밈은 윗사람의 즐거움을 모으지만 고졸한 모습은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네
바위틈에서 자신만의 모습을 지키고 있으면 무리의 따돌림을 당하지
김군(김정희)은 비범한 학자. 하늘 높이 우뚝 솟은 절벽
바름과 순함. 높음과 맑음. 하나의 기질로 통틀어 갖추었네
화창한 봄날 꽃이 필 때 어찌 모든 꽃이 함께하지 않았겠는가
바람과 서리가 한번 사납게 몰아치자 푸르름이 무리 중에 도드라지네
ㅡ풍계분(馮桂芬)
시들지 않은 푸름을 좋아하여 나무가 비범한 절조를 지키나니
자신의 신세를 먼 상상에 실어 세한도에 변치 않은 모습을 그렸네
해외(중국)에도 세월의 변화는 매한가지 성장하고 변화함에 대의를 우러러 보네
온갖 초목이 있어 꽃필 때는 아름다움을 다투지만 꽃필 때는 잠간 사이에 끝나고
오싹한 얼음과 눈 속에서 괴로움을 참고 스스로 지탱 하네
때를 만남에 늦음과 이름이 있으니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말고
서로 소나무와 잣나무를 사랑하며 백년을 기약해보세
ㅡ요복증(嬈福增)
전에 서유자에게 해외(조선)에서 온 완당이라는 이름을 들었네
가져온 비장의 책은 동영(조선)에서 빛나던 것
속된 귀가 잠시 소영을 듣는 듯.
을사년 초에 문을 활짝 열고 손님을 맞았는데
완당의 고제자(장요손)가 공물을 바치러 북경에 왔네
내가 완당의 친구임을 알고 가져온 그림을 펼쳐
동영(겨울에도 푸른 송백을 가리킴)을 보여주네
도도한 대해의 남쪽. 완당의 마음을 위로하노라
ㅡ장목(張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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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희가 사용했던 인장 |
ⓒ 이정근 |
이를 바탕으로 추사 김정희는 서예는 물론 시, 서화, 금석학의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는 타고난 천재성만이 아니다. 벼루 열 개를 구멍 내고 천 자루의 붓을 닳아 없앤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늘이 높고 푸르다. 추사(秋史)와 딱 어울리는 계절이다. 이 좋은 계절에 150년 전 한류 스타를 만나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무르익어가는 가을과 함께 김정희의 작품을 감상하며 고졸한 조형미를 느껴보는 것도 또 하나의 수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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